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32화 (3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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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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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이후, 나는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기분 잡치면 공부하기 당연히 하기 싫어지는 것이 당연지사였지만 무엇보다 나는 싫어하는 사람한테서 알 수 없는 소리만 들었으니까 더 기분이 상해버린 것이었다.

안되겠다. 잠깐 쉬자.

결국 자기변명만 늘어놓으며 나는 공부하고 있던 것을 때려치우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버리면서 손을 이마위에 얹어 놓았다. 정시하..그녀는 1년 전에 나의 '연인'이었다. 그것이 정말로 '연인관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헤어진 이후 그러니까 '그 때' 이후, 나는 모든 것에 마음을 닫았다. 정말로 힘든 시기였다. 가족에게도 학교에게도 모두 외면을 받았던(지금도 외면을 받고 있지만 이 때만큼은 아니었다.)시련의 시간.

하아..과거 따위는 잊자라고 생각해도 잊을 수 없다는 게 정말로 짜증나기만 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데 어째서 이러한 일은 지워지지도 않고 오히려 생생하게 남기만 하는 것인지..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지현누나가 방에서 계속 공부하다가 잠깐 쉬려고 거실로 나온 것 같았다.

"뭐해?"

"집중이 안되서. 공부하고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어?"

또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누나. 일단 일이 있긴 하다만은 누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괜한 걱정을 주지는 말자.

"아니..아무것도 아니야.."

"…조금 지친 것 같아. 많이 힘들어?"

"감기를 빼고는 괜찮으니까…신경 쓰지 않아도 돼."

"감기…아직도 다 낫지 않았어?"

아차. 실수.

"아니아니..많이 나아졌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떨어지진 않아서 그래.."

거짓말이다. 나는 요새 학교가기가 버거울만큼 고열이었다. 지금은 억지로 새벽까지 공부하고 시험 잘 보기 위해서 나는 머리가 자주 띵해지더라도 참고 해열제를 복용하며 다니고 있었다. 체력운동을 해서 망정이었지, 운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걸렸다가는 고열로 쓰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서서히 나도 버티기는 힘들지만..그래도..참아야지..

괜히..오늘 와이셔츠차림으로 돌아다녔나..낮에 갑자기 더워져서..에휴..내 잘못이지..

"쉬엄쉬엄 하면서 공부해…공부하는 것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 누나야말로 공부 열심히 해"

"응…그럼 나는 다시 공부하러 갈게…"

"공부하는 데 새벽 밤 새지 말고 조금이라도 잠은 자두고…"

"응…"

누나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다시..조금 더 힘내볼까..? 아직 시험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시험 이튿날도 무사히 끝났다. 서서히 나의 피로도는 극심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시험 못볼지나 몰라..? 일단 오늘은 조금 자두어야겠다. 계속 달리기위해서는 잠깐의 숨고르기도 필요하니까..현관문을 열고 나는 바로 이불을 소파에 갖고왔다. 그리고 냉동실에 있던 얼음을 꺼내서 비닐봉지에 묶어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소파에 누우며 이불을 덮은 뒤에 나의 이마에 스스로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잠을 자려고 하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고열에 자꾸만 두통이 밀려왔다. 콜록콜록하는 기침소리가 더욱 더 거세졌다. 누군가 간호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꿈꾸지도 못하는 것이지..

'너는..뻔뻔하게 누군가와 학교를 등교하는 가치가 없잖아?'

정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랬지..나에게는 '가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시하가 했던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고 나는 그 옳은 말에 화가 났다.

이성적으로는 알고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고는 느끼면서 정작 자신은 이해할 수는,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으로부터 그녀를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일단은 그러한 말에 연연해하지말고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자. 누나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재우며, 외로이있는 이 넓은 집에 있는 소파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시각을 보면 어둑어둑해지는 시간. 본능적으로 밤이 되면 악몽을 꿔서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있어서 밤이 되려고 하기전에 일어나는 것 같았다.

지현누나도 민정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자습실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나하고 판단하고 나는 거실에 불을 켜고 부엌에 있는 식탁에서 내일 볼 시험과목 교재를 꺼내서 갖고와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공부를 시작했다. 잠을 너무 많이 잤어..어떻게라도 새벽 안에는 정리해야 되겠지..

잠을 잤음에도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두통은 공부를 하는 데 아주 크나큰 방해요소였지만 나는 그럼에도 공부를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어째 세상이 뱅글뱅글 돈다. 왜 이러지..? 피곤한건가..? 잠을 분명히 잤는데..왜 이렇게 피곤하지..?  왜 손에 힘이 안들어가고 뱅글뱅글 세상이 돌면서 눈꺼풀이 저절로 감겨지는 걸까..?

시험...잘 봐야되는데...공부...해야 되는데...

쿵.

나는 결국 의자에서 떨어져 부엌 바닥에 부딪히면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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