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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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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무엇인가를 적는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다. 하교를 한 후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 다가오는 시험에 대비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새벽에 짬짬이 하고 있었지만,이래가지고는 성적유지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저러니 여러 사건들을 겪다보니까 나를 기다리고(?)있는 히로인들을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절로 일어났다.
하지만 중간고사가 끝나면 문화제다. 이 때 3일이라는 여유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밀린 게임들을 모두 공략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참자는 식으로 버티고 있었다.
미연시 공략할 때와 같은 엄청난 집중력과 기력을 사용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과서와 문제집에 레이저라도 쏘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책을 넘기는 왼손과 노트에 엄청난 속도로 글씨가 써져내려가는 오른손. 기계와 다름없다.
항상 그렇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모두 기계가 된다. 쳇바퀴가 굴러가는 듯이 지루한 일상생활의 반복과 입시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함.
좋은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그 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미래도 보장받지 못하는 강박감..입시와 취업. 고통의 연쇄이다. 우리나라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아니 젊은사람들이라면 모두 겪고있는 고통.. 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교욱환경이 개선되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있지만, 정작 고쳐지지않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상자'가 아닌 '부모님'이나 '어른들'과 같은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다. 아무리 '대상자'인 우리가 개선되어야 된다고 외치더라도 그것은 뜬 구름 잡는 소리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하아..그런 푸념을 늘어놓아도 오히려 시간손해다..당장의 시험에 집중하자. 그러한 잡생각따윈 버려야 된다.
첫째 날에 치는 시험은 일본어와 한국지리였다. 미연시를 통해서 왠만한 일본어는 통달했다. 후커라든가 아랄트렌스 같은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직접 바로바로 히로인들의 대사를 번역을 하는 경지의 오른 나다. 일단 일본어는 패스.
한국지리는 암기과목. 이틀 전이나 내일 부터 조금씩 암기하면 될 것같고..둘째 날은 수학. 수학은 벼락치기따윈 통하지 않아서 개학식 때부터 조금씩 해두었다. 이것도 패스.
셋째 날은..기억 안난다..내일 다시 시험시간표 보면 되겠지.일단 영어나 수학이라도 정리해 둬야겠다. 나머진 과목은 암기과목이고 뭐..국어는 조금씩 해두어야 되나?
일단 시험공부에 대한 계획은 철저하게(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주 대충)계획을 해놓았다. 학교 안에서 불량아로 낙인 찍힌 나라서 시험은 잘 보아야 그래도 아주 조금은 좋게 봐줄 수 있을 거 아닌가? 안그러면 바로 꼬투리잡아서 퇴학시킬 게 뻔하니까..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공부 잘한다. 지현누나는 전교권을 맴도는 성적이고..민정이도 성적이 우수하다 들었고..서현누나는 유학파니 말 다했지.그런 공부 잘하는 가족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도 잘해야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미래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되든 좋았다. 집도 부자인데다가 평생 놀고먹고도 남는 돈인데 이 돈으로 평화롭게 땅 사서 농사나 짓지 뭐..하는 그런 나조차도 느끼고 있는 무책임한 생각들은 수도 없이 생각해보았으나 그래도 해야는 되겠지..공부..라는 것이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바였다.
시험이 코 앞에 다가왔다. 자명종이 울릴 때까지..계속 해야되겠지..
삐르르르릉..삐르르릉...
벌써 새벽 6시를 알리는 자명종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험기간 D-3인가.. 분명히 수업시간에도 자습일 것 같아서 가방에 공부 할 것들을 주섬주섬 넣어놓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나왔다. 일단 목마르니까 물 부터 마시고.
쏴아쏴아...
졸립다. 정작 새벽때는 하나도 졸리지 않는데.. 샤워부스에서 나오는 물줄기로 얼굴을 씻으며 정신을 차리자고 뺨을 짝하고 쳐본다.
머리를 감으려고 가린 앞머리를 걷어올리고 나니까 회색의 눈동자와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가진 또 다른 '나'가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나는 머리를 다시 내렸다. 옛날 어렸을 적의 나와 전혀 다른 어둡고 초췌한 모습. 이 다크서클과 불면증의 원인인 이 회색의 눈동자는 언제 사라질까..하고 생각해도 절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떨어질 것 같지가 않다.
계속 평생동안 이 눈을 짊어지고 살아야된다는 생각에 다시 눈 앞이 캄캄하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안에 있는 '알'과 '검은 동물들'을 안 보려고 해도 계속 봐야한다.
하아..한숨 밖에 안나온다. 그런 생각에 바로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속이 메스껍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나도 '적응'이라는 것이 된 모양이다.
거울을 지켜보면 나의 등과 몸에 새겨진 수 많은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칼로 찌른 자국이라든가 구타로 인한 피멍들..나의 과거를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기억의 조각...매일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거울을 통해 보는 상처들..전쟁을 통해서 얻는 '영광의 상처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적어도 명예로워 할 수 있으니까..하지만 이에 반해 나의 상처들은 '초라하고 당장에라도 지우고 싶은 상처들. 아픈 상처들.'이었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과 몸을 닦고 화장실을 나와보니 지현누나가 이제야 일어난 듯 화장실로 들어가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어제 아침부터 같이 등교했는데 그 때 부터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었지..서로 바쁘니까..
"안녕."
이번에 내가 인사를 해봤다.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인사.
"응."
그녀는 살짝 미소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정도면 같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화해는 하였지만 적어도 그 상처들로 인한 후유증은 아직 남아있었으니까..차차 풀다보면 되겠지..엉킨 실을 풀어내는 데 조급하게 풀어내지 않듯이..나와 그녀와의 관계도 그렇게 풀려졌으면 했다.
몸도 머리도 모두 말리고 나서 교복을 입고 이젠 날씨가 따뜻해져서 목도리가 필요없겠다는 생각에 목도리를 두고 가려고 했지만 감기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목도리를 둘러매고 등교를 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선다. 계단을 내려가고, 아직 새싹이 돋지 않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4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조금은 추운 길을 걸으며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사람들의 안에 있는 언젠가 껍질을 깨고 나올 '알'들을 지켜보고 있다.
나의 '일상'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게 흘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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