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23화 (23/318)

0023 / 0318 ----------------------------------------------

Part 2. Regret

==================================================

앨범 첫페이지에 누군가가 적은 글이 있었다.

'이 사진앨범을 항상 보지는 않겠지만 우연히 그것을 보았을 때

그 추억을 되새기며 행복해하는 지현이와 서현이와 민정이가 되기를..'

아마 부모님이 이 사진앨범을 사면서 적어놓은 듯 싶었다.

이제는 없는 부모님, 조금은 아련한 느낌이 밀려왔다.

첫 페이지에 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오직 3자매를 위해서 적은 글인듯 싶었다.

겨우 이런 것에 남자아이라서 관심없겠지 하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민정이에 대해서까지 얘기를 했는데..

나라는 존재는 부모님에게는 '이방인'이자 '버려진 장난감'인 듯 싶었다.

나도..어머니의 배안에서 자라고 태어났는 데도..

마치 태어나지 않았으면하고 바란 듯 싶었다. 부모님이라는 사람들은.

괜찮아. 나는 항상 이래왔잖아? 그러니까..슬퍼 할 필요없어..

나에게 '사랑'은 꿈꾸지도 못하는 것이잖아? 그러니까.. 울지 말자..

내가 '눈'이 변하기도 전에 3자매에게 보여준 태도와 극명히 달랐던 부모님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였는데도..

그리고 '눈'을 얻고나서, 부모님은 더 차가워졌다. 지현누나와 민정이와 마찬가지로..

서현누나만은 그나마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었지만..

그리고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살핌'도 없이 죽어버렸다. 내가 어렸을 때에..

단지 평생먹고 살 만한 돈과 큰 집을 남기고..

그랬던 탓이었을까, 나는 부모님의 장례식때에도 모두가 울고있는데 나 하나만은 울지 않았다.

이런 부모님, 잘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 수록 그래도 '부모님'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아련해진다.

비록 그들은 나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주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나는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한 줄의 글 다음 페이지에선  어린 서현누나와 아기인 지현누나가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서현누나가 쥐고있는 장난감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사진.

아래를 보니 스스로 일어서서 걷는 사진.

그 옆에는 서현누나와 조금은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찍은 사진.

서현누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지현누나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부모님과 함께 찍었던 사진.

어렸을 적, 계곡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이제는 어린 민정이와 함께 찍은 사진.

서현누나가 떠날 때,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중학교때의 성숙해진 모습의 사진.

이 앨범이 지현누나의 변천사를 담은 듯 싶었다. 여태까지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재조명해보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러간 사진들과 민정이와 찍은 사진.

부모님이 죽기 전에 민정이와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중학교 졸업식과 고등학교 입학식 때의 사진. 학교 축제 때의 모습.

크리스마스 이브 때 친구와 선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도

'나'의 모습은 없다.

10년 동안의 시간을 보면서 조금은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나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나였다. 그런 것을 바라는 내가 잘못이었다.

아직 채우지 못한 페이지들이 많이 있었다. 사진들이 꽤나 많이 있었는 데도 말이다.

그래도 냉정해진 이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행복하게 보내어서 다행이었다. 이 10년의 시간.

'나'라는 존재가 없던 시간.

페이지를 넘겨본다. 이제 더 이상 사진을 볼 수 없지만 이 두꺼운 책의 끝을 보고싶었다.

한 3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너무도 두꺼워서 꽤나 오래 넘기기만 했다.

이제는 끝이 보이는 구나..하고 조금은 빠르게 넘겨보았다.

빠르게 넘기다보니 사진이 있다..? 그것도 맨 뒤에..?

무언가를 숨기려고 한 듯한 사진들. 뭔가의 비밀이라거나..?

"…"

뒤에 있는 페이지를 볼 때마다 나의 모습이 있었다. 어 있다 있어. 내 사진.

조금은 실망했었는데.. 그래도 내 사진이 있긴 있었구나.. 그것도 맨 뒤에.

잊으려고 하는 추억이었겠지..

나에 대한 기억을 잊으려고..차라리 나의 사진, 불태웠으면 나았을 걸..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오직 나의 모습만이 있었다. 내 사진들 속에는.

내가 원래의 눈이었을 때의 어렸을 적 모습도..

회색의 눈과 다크서클을 가리려고 머리를 기른 모습도..

오직 '혼자서'찍힌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이지를 넘겼을 때,맨 끝에는 단 한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지현누나가 단 둘이서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