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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Reg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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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민정이가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 돌아왔다. 돌아왔어. 배고파."
"너는 나한테 보자마자 배고파하는 소리 밖에 안나오냐?"
"그래도 배고픈 걸 어떡해. 바보 오타쿠."
"어이어이..왜 이런 상황에서 오타쿠가 나오는거야?"
"오타쿠인걸. 그것도 불면증에 걸린 오타쿠."
"에휴…"
"밥 해놔~ 오타쿠~바보 오타쿠~ 불면증 오타쿠~"
이런 것이 장난이었다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 녀석은 아주 진심이 듬뿍 담긴 말을 했다.
하기야 위에 있는 오빠가 이런 꼴이니 제대로 나를 대우해줄 수 있겠느냐만은.
지현누나처럼 나를 무시하면서 되었는데 이 동생이라는 놈은 대화를 걸어도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가지 않고 오히려 나를 조소하고 있다.
이런 오빠를 둔 것이 너무 자신에게 있어서 굴욕이라는 듯.
어렸을 때에는 그래도 심하진 않았는데 사춘기가 되고나니까 지현누나보다 더 이렇다.
뭐..됐어.. 어차피 이런 생활을 계속 유지해왔으니까 특별한 일이 아니지.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식사를 차리고 난 뒤에, 나는 내가 먹을 것들을 쟁반에 담아두고 내 방으로 갔다.
동생놈이 나랑 같이 먹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 데다가 빨리 미연시나 하라고 내쫓기 때문에 나는 컴퓨터 책상 앞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역시. 내가 만들었어도 맛있어.질리지 않아.
반면에 이 놈의 식구들은 축복받은 유전자인데도 불구하고 요리를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지현누나도 민정이도 서현누나도 모두 요리를 했다하면 항상 요리가 제대로 된 요리인지 독약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지현누나는 어느 정도 못한다고 쳐도 민정이는 뭐..얘기하지 않겠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들면서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클릭.
가히 '폐인'의 걸맞는 컨트롤. 아직 발컨의 경지에는 오르진 못했지만.
화면 상에서 나오는 미소녀들. 역시나~ 이번 게임은 그림체가 너무 맘에 든단 말이야.
스토리는 좀 병맛이더라도 그림체가 너무 맘에 들어서 괜찮게 플레이.
슬슬 신작 미연시가 나올 때 되었는데 뭐가 나오는지 볼까나..일단 서브히로인 공략 좀 하고..
메인히로인 공략은 아직 무리. 아침까지는 시간이 많아. 차근차근 플레이를 한다.
"오타쿠 오빠."
한창 즐겁게 하고 있을 때 찬물을 끼얹어주시는 민정. 이 녀석도 방문을 열 때에는 분명히.. '배고파'였던가 '청소해.'라던가 '빨래해.' 셋 중 하나지.
"무슨 일이냐?"
"오빠 혹시 지현언니랑 무슨 일 있어?"
엉? 지현누나랑 무슨 일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뭔 말이야."
나는 발뺌을 한다. 확실히 일이 있지. 그것도 아주 큰 일. 대사건이라고 불릴만큼.
"아직 언니 들어오지 않았어.보통 늦어도 이렇게 늦게까지 돌어오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그래서 나보러 어쩌라고?"
들어오든지 말든지 뭔 상관이야 이제는 나에게는 '없는'사람 인데.
"아니 요새 지현언니 이상하단 말야. 잠잘 때에도 '미안해… 미안해…'라고 말하고
특히나 맨날 아침에 보면 맨날 눈물자국이 있어.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 일 없다고 아무 말 해주지 않고 그래서 오빠 뭐 아는 거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미안하다…? 맨날 눈물자국이 있다? 푸하하..아주 웃기는 사람이야 지현누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 밖에 안나온다. 그렇게 나를 몰아세워놓고서 이제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거야? 그렇게 미안해 했으면 애초에 하질 말았든가.
나는 차갑게 웃었다. 아주 차갑게.
"하긴..언니랑 별로 대화도 안하는 오타쿠가 뭘 알겠느냐만은. 즐겁게 미연시하고 있는데 실례했어."
방문을 닫았다. 이 녀석 문을 안 닫았어. 귀찮게스리.
나는 한동안 계속 히로인 공략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모니터 오른쪽 맨아래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0시 23분이었다.
거실에 있던 불은 아직 켜져있었다. 보통 모두 집 안에 있으면 지현누나가 꺼두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 싶었다.
민정이는자고 있겠다. 일단 운동 좀 해볼까.
사실 너무 추워져서 밖에 안나가고 있을 뿐이었지, 나는 평소에 불면증과 새벽까지 미연시 공략을 했기 때문에 체력이 약해질까봐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미연시 히로인 공략을 하려면 체력은 필수요소였다.
게다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놀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몸을 단련해서 조금이라도 강해지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운동을 조금 안 하더니 몸이 찌뿌둥해. 거실 안에서라도 해야지.
집 안에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이런 운동 하기전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새벽운동을 시작했다.
땀이 꽤나 많이 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운동을 하다보니 어느 덧 새벽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현누나는.
가출한 건가? 그러기에는 오늘 학교를 나왔는데. 내 알 바 아니야. 신경끄자.
열쇠가 열리는 소리.
현관문이 끼익하고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집에 들어왔다.
지현누나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씁쓸히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학교에서 우연히 본 나에게 보여주었던 너무나 어두운 미소.
집에 들어온 그녀는 너무나 힘들어보였다. 자신의 몸 하나 조차도 가누지 못할 만큼
한번 툭 건드리면 쓰러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몸이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나에게 약한 꼴 보여주기는 싫었는지 버티면서 천천히 나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내가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걷다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왜 학교에서 보지 못하였을까. 그 때도 나의 곁을 스쳐지나갔는데..
그녀를 무시했던 결과가 이런 것이었을까.
어째서…왜 이렇게 되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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