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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5화 (1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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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Reg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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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찌어찌 해서 장을 볼 수 있었다.

대형할인마트에서 깐깐히 골랐던 나인데, 지금은 아무 생각없이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반찬거리를 꾸역꾸역 장바구니에 넣은 채 집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6시 40분 쯤 되고 있으면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시간을 끌고 있었다. 누나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 내가 걷는 속도를 확 줄여버린 채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듯이 걷고 있다.

"…조금은 풀렸을까"

나의 앞에서 창피함과 상관없이 끝없이 흐느꼈던 누나였다. 이제는 울 거 다 울어버려서

조금은 속 시원해지지 않았을까했다.

그러면서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흐르면, 나와 누나의 관계는 이제 서로 '없는 존재'로 인식 할 것이다.

하긴 그런 말을 누나 앞에서 지껄였으니 관계회복이 될 리가 없지..

한 지붕 아래 살아도, 말 한마디 없었던 우리. 이제는 평생동안, 아니 내가 떠나는 순간 까지 우리는 서로 스쳐지나가도 아무 말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그 미소'는..누나는..'거짓'의 것이 아닌 '없는' 것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나도 없는 존재로 되었으니 이런 답답한 집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장을 봐오고 집에 들어온 나는 아직도 누나가 울고 있던 그 자리, 그 곳에서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누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인형'이었다. 예쁘장하지만 말하지 않는 영혼이 없는 인형.

나는 애써 무시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조용히 부엌에서 장 봐온것들을 꺼내고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보통 만드는 저녁식사는 수제 스파게티라든가 갈비찜 등 조금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택해서 저녁을 만들었는데, 오늘은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들로 했다.

어차피 나는 내가 먹을 것 따로 만들어서 내 방에서 먹었기 때문에 나는 식탁에 수저와 반찬을 놓은 뒤에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나는 식욕도 없어서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유난히 오늘따라 잠을 자고 싶다.

악몽이라도 뭐라도 꾸든 좋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감아서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오늘 일어난 일들을.. 모두 잊고 내일이 오기를 바랬다.

"으아!!!"

잠을 잘 수 없다는 고통에 몸부림 친다. 이렇게 새벽까지 아침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럴 때의 시간의 초침은 너무나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진다.

째깍째깍 하고 1초 2초 3초를 세다보면 언젠가 새벽이 되고 아침이 오겠지..하고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할 것이 없어서 언제 들었는지 모르는 책상에 있던 cd플레이어를 가져와서 이어폰을 꽂고 나지막이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cd플레이어 속에서 슬픈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올 때마다, 나의 감정도 덩달아 슬퍼진다.

아니, 더욱 더 슬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슬픈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 선율의 흐름에 따라서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대로 잊고 싶다. 학교도 부모님도 친구도 할머니도 가족도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

모든 것을 잊어버려서 나는 진짜로 인간의 모양을 한 '하얀 백지장'이 되어서 팔랑팔랑 바람을 따라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겠지.

그 때 돌아다니며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공허함 뿐이겠지.

외로웠다. 나의 곁에는 아무도 없어 마냥 슬피 울기만 했다.

힘들어.외로워.나를 봐줘.나를 지켜줘. 이런 고통속에서..나를 구해줘.

내가 마음 속으로 외쳤던 수 많은 메시지들. 그 메시지들을 공허함에 모두 맡긴다면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피아노 선율이 나긋나긋하게 흐르다가 요동치고 있다.

그 격앙의 선율에 감정이 격앙되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

그 격정의 피아노선율이 끝나고 다시 천천히 강물에 물결 흐르듯이 음악이 조용해진다.

그렇게 나는 피아노선율에 몸을 맡긴 채 이 끝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삐르르릉..삐르르르릉..

자명종이 울리는 6시. 내가 다시 거실로 나가야 하는 시간.

나는 방문을 열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한 뒤에, 거실로 나가보니 누나가 주방에 있었다.

안녕이라고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서 마시고 있었다.

"잘…잣어?"

"…"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나가 10년동안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무시했다.

"아침은…내가 할 테니까 의자에 앉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왜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지? 나는 누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을 했다.

나 때문에 눈물을 흘렸음에도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말을 해주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통통통..

도마 위에서 채소들이 썰리고 있는 소리. 그런데 역시..요리는 못했다.

겨우 계란프라이정도 밖에 못하면서 요리를 하겠다고? 후…

참다 못한 나는 누나를 강제로 의자에 앉히고 새로이 채소를 썰었다.

"아침 밥. 알아서 먹을 테니까."

나는 결국 말 한마디를 하고야 만다.

대충 요리를 만들고 식탁에 얹어놓은 뒤, 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려는 준비를 했다.

"밥‥안 먹을거야?"

"…"

누나의 걱정되는 말에도 나는 무시해버리고 현관문을 나섰다.

학교 안에서 나는 불면증으로 인한 부족했던 잠을 보충했다.

이제는 학교선생들도 깨우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구석 진 자리에서 계속 엎어져 잘 수 있었다.

점심시간. 역시 저녁 때부터 굶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다.

매점에서 빵 하나 사먹을까..

모두 다 점심먹으러 식당으로 가고있는데 나는 매점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매점에서는 맛 없는 점심 때문에 빵 먹는게 낫다! 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그 새끼 아니야? '그 사건'때에.."

"왜 머리카락을 가리고 았는거야? 기분나쁘게.."

"저 놈, 우리학교 박지현의 동생이잖아."

"진짜..? 왜 이렇게 누나랑 동생이랑 천지차이냐."

"그러니까.."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나를 보고 험담을 들여놓는 것은 여전하다.

그래도 나는 내색하지않고 700원짜리 카스테라 하나를 사서 걸어가면서 한 입씩 베어 먹고 있었다.

교실에 돌아오는 데 모두 웅성웅성. 왜 또 사람들 모여있는거야 이거.

"어 떴다 떴어."

"어이 박정우."

이 놈의 종교집단 또 오셨네.

"왜 쉬는 시간에 안오고 점심시간에 오냐?"

"너 볼려고 온 것이 아냐. 옆을 봐. 옆."

옆..?

"…"

급작스럽게 교실에 찾아온 지현누나. 뭣하러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누나와 이제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정우"

"…"

"여기…도시락. 네가 만든 거지만 너 밥 안먹었을까봐 가지고 왔어."

쓸모없게 왜 가지고 온거야.

"칫..부럽다..동생이라서 챙겨주는 건가."

"나도 동생이었으면~"

제발 동생역할 좀 해주라. 내가 부탁할게.

"감히 여신의 도시락을 받다니!! 척결!!"

"척결!"

"척결!"

어느 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이런 광신도적 종교집단의 척결소리에 교실이 울리고 있었다.

"필요없어."

나는 또 한마디 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래도..너..밥 먹지 않았으니까.."

"필요없다니까!"

내가 성질을 내야 알겠냐고.

"감히…여신의 도시락을 거부하고 성질을 내?"

"내가 먹겠습니다!"

"저도요!"

이봐이봐. 내가 만든거야. 이놈들아.

"…알겠어 미안‥실례할게."

누나가 교실에 나가자마자 나를 흘겨보고는 우르르 누나를 따라나서는 종교집단과 구경꾼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보지못하엿다.

고개숙이고 떠나던 누나의 눈에는 어느샌가 고인 눈물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누나의 안에는 어느 샌가 자리 잡은 알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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