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주머니 속의 칼 (11)
“입구에서요? 여기에서 그 거리를 느끼신다구요?”
카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 우우웅.
새까만 모래 알갱이들이 일제히 진동했다.
〈긍정. 인간의 기척이 확인됩니다.
역시 놀라운 탐지 능력까지 가지고 계시는군요.〉
“너도 알고 있었나?”
〈본 모래정령은 입구 근처에 몸의 일부를 뿌려 놓았습니다. 본 정령의 탐지 범위는 귀하의 32.7%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인간들,우리 기척을 찾아서 쫓아온 건 아니겠지.”
“흔적을 밟아 왔을 거예요. 중간에 미행을 한번 제대로 따돌린 이상,
흔적을 밟아 을 만한 녀석들이라면 그걸 도운 트로핀 여단뿐입니다.”
당연하게도.
달려오면서 흔적을 지울 여유는 없었다.
“처음부터 계속해서 쫓아왔거나, 그게 아니면 트로핀 여단 녀석들이 순찰 초소라도 이 근방에 뒀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루이가 머리를 짚는다.
상황이 한층 더 곤란해졌다.
모래정령이 봉우리를 폭파한다면 들어온 트로핀 여단들까지 휩쓸려 다 죽게 되며.
일이 더 커질 게 뻔하다.
그때 였다.
“사실 폭파하기 싫죠?”
카린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사람들 들어와서 더 싫으실 텐데. 지금 빨리 열어 준다면 저희한테만 열어 주는 거지만,이분이 억지로 뚫으면 뒤에 있는 트로핀 여단까지 들어오게 되어 버리네요? 그렇다고, 크렉소르의 후계자와,트로핀 여단 단원들까지 잔뜩 죽이며 봉우리를 폭파하는 건 싫잖아요?”
모래정령은 침묵했다.
‘싫다고?’
저 말은 논리나 이성보다 직감과 추측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상대의 감정에 대한 직감.
그 짧은 순간.
카린 크렉소르는 모래정령이 가진 도덕을 파고들었다.
생각해 보면 모래정령은 기묘하다.
분명히 입구 근처에 몸의 일부를 뿌려 놨다고 했다.
우리가 오는 걸 모래정령은 이미 입구에서 인식한 것이다.
그럼에도,지금까지.
내가 바로 이곳으로 다가와서.
모래를 직접 파고들기 전까지는 어떤 공격도 가하지 않았다.
정령은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서, 다시 나가기를.
이곳을 찾지 못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기척은 빠르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냥 치워 버리면……
〈진입을 허락하겠습니다.〉
밀어붙여서 치울까 싶었을 때.
모래정령은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검은 알갱이들이 그림자처럼 스륵 깊은 곳에 스며들어가 이곳저곳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 쿠구구구궁!
진동이 밖으로 왈칵 끓어 넘쳤다. 꾹꾹 눌려 있던 공간이 펼쳐진다.
〈입구를 개방했습니다.〉
거대한 원형의 입구가 나타났다.
나는 앞장서 내려갔다.
실제 입구로 들어가자 20미터에 가까운 두께가 보인다.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뚫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을 거다.
“잘했어. 네 덕분이다.”
카린에게 말했다.
“네? 아… 하핫… 아니에요.”
그녀가 당황하며 살짝 웃는다.
순간적으로 볼이 살짝 상기되는 모습이 보인다.
시나리오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면 어찐지 이런 대화조차 거북해져서 괜히 뒤를 흘끗 바라봤다.
자아를 각성한 기계정령.
이런 걸 간단히 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실험 감시자라고 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들어가십시오.〉
- 쿠구구구구궁!
우리가 끝까지 들어가자 브람의 전투데이터를 복사한 정령은 다시 문을 닫는다.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문이 닫힌 뒤에 밖에서 울려 퍼진 소리를 카린은 듣지 못했다.
‘이런 광산이.’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두껍고 거대한 입구를 쉽게 움직이다니.
자유연합이라면 철인 이외에는 어중간한 기술력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엠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정작 제국과 싸운다면 마법사와 검주들에 밀리는 입장.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계륵.
‘하지만.,
오히려 그 엠버메어가 개전 이후 6개월 만에 멸망하고.
엠버메어를 6개월 만에 멸망시킨 제국을 상대로.
연합은 9년을 버틴다.
‘뭔가 있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스-제-라이와 연합 의회 사이의 거래를 알았고 몇 번이고 암살을 목격했으며.
카린 크렉소르와 아이작과 함께 한때 전장을 휘저었고.
수많은 철인을 베고 강화병을 상대해 봤지만.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몇 번의 생에 걸쳐서 상인 연합과 거래하고.
넥스몬드에게 다섯 장의 카드를 받아 냈지만.
자유연합의 어둠에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다.
- 저벅.
수련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미리 도와주려고 한 카린이지만.
“어머,밝은데요?”
그녀와의 동행이 나를 자유연합의 흑막으로 데려가는 느낌이었다.
내부는 기분 나쁠 만큼 스산하게 밝았다.
“오십 년 전에 봉인됐다고 말하지 않았나?”
“맞아요. 틀림없이 그렇죠.”
분명 조명은 환하게 켜져 있는데 내부는 몹시 스산했다.
차라리 어둠이 낫다고 생각될 만큼 생기 없는 빛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떻게 전력이 유지되는 걸까요?”
야광주 같은 게 아니다.
크고 둥근 전등이 광산 입구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一 저벅.
기계의 잔해.
녹물마저 조명에 말라 버린 잔해를 걸으며 카린이 중얼거렸다.
광산이 닫힌 건 오십 년 전인데, 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 매달렸다.
광장 전체를 비추는 빛은 하나가 아니 었다.
빨강 노랑 초록 보라색 전구들이 전선에 매달려 지그재그로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색색의 조명은 우리가 지날 때마다 우리를 인식하고 움직였다.
카린과 루이가 한참 신기한 듯이 그걸 하나하나 살필 때.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20미터의 철벽을 두고 있었기에 나에게만 들리는 대화였다.
[뭐야? 설마 여기를 지나간 거야?]
[전투의 흔적도 없는데?]
[설마 그냥 보내 줬다고? 막으려면
그것들까지 제대로 막든가!]
[어이가 없네.]
〈본 정령의 전투력으로 그들을 막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뭐야? 기계 주제에 감히 주인을 몰라봐?]
[게다가 침입자가 있잖아!]
[너는 트로핀 여단의…….]
〈물러나십시오.〉
- 쾅!
[끄아아악!]
[커헉! 크흡…….1
[뭐가 이렇게 세?]
〈반항 없는 대기를 권고합니다. 본 정령은 불살不殺코드를 임의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며,자유로운 해제가 가능함을 알려 드립니다.〉
[안 되겠어. 우리는 못 뚫는다.]
[본부에 당장 보고하러 가지.]
〈크렉소르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가 광산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보고는 불가능하며,현 시간부로 동굴 입구를 봉쇄하겠습니다.〉
[이 미친 기계가…….]
[맛 간 해결사의 데이터 따위는 박아 넣는 게 아니었어.]
[안에 들어간 것들은 어쩌지?]
[어차피 죽기는 할 텐데.]
밖에서 쫓아온 인간들은 문지기에 완전히 제압당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시간을 끌어 줄 것 같다.
‘다행인가.’
브람의 데이터를 이식받은 녀석이 꽤 협조적으로 나와 준 덕분이다.
고::〒.
“저기……
루이가 불안한 기색으로 한쪽을 바라봤다.
들어간 뒤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육중한 철문.
그곳을 보자 카린도 가슴을 잡고 미간을 찡그렸다.
“뭘까.”
두께 20미터의 철문 내측은.
기괴한 자국으로 가득했다.
수십 번 뭉개고 덧칠한 날카롭고 기다란 자국들.
뭔지는 알아보기 힘든 모양이고, 크기였지만 거미줄에 휘감겨 붙은 잠자리를 보는 것 같은 오싹함이 모두를 사로잡았다.
몹시 기괴하고 난폭한 자국.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던 카린과 루이의 눈빛이 흔들렸을 정도다.
“괜찮…겠죠?”
“물론.”
괜찮다.
‘나는 괜찮지.’
어차피 지금 와서 모래정령에게 문을 부수고 나갈 것도 아니었고.
뭐가 튀어나오든 감당하고 진행할 자신이 있었다.
일이 꼬여서 카린이나 루이까지 지켜 주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도 내 한 몸 빼고 튈 수야 충분히 있다.
심지어 제3좌의 바싸고에게서조차 도망가지 않았나.
‘심지어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강하니까.’
도망도 최악의 경우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적을 제압할 자신은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이 광산을 담당하는 트로핀 여단 녀석들이 쩔쩔매는 모래정령조차 가볍게 밀어붙이지 않았는가?
“왜,두렵나?”
“아니요!”
카린이 외쳤다.
“50년 전에 봉인된 전설의 광산을 탐험하게 되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손까지 떨리는걸요.”
훌륭한 연기력이다.
목소리는 씩씩함을 넘어서 거의 태연하게 들리는데.
통제할 수 없는 몸은 좀 다르다.
손이 아니라 입술도 좀 떨리는데.
“저분은 믿으셔도 될 겁니다.”
곧 둘은 차분한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한 명은.
제법 애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 저벅.
입구 근처.
광장을 걷던 일행의 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광부들이 오래 머무른 걸까.
곳곳에 조그만 생활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얕은 먼지로만 채워진 나무잔.
식기가 올려진 탁자.
짝이 맞지 않는 부츠.
결이 해진 마스크.
깨진 전등이 달린 고글.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들.
광부들의 숙소로 쓰였을 천막.
“50년 전에 모두 나간 거겠죠?”
카린이 천막 안을 흘끗 들춰 보며 말했다.
그 말이 묘한 늬앙스를 풍긴다.
닫힌 광산이다.
당연히.
인간은 없는 편이 자연스럽다.
주위에 기계의 잔해가 워낙 많이 널려 있는 탓일까.
사람들이 머물렀을 천막 주위에도.
굴러다니는 뻣조각 하나 없는 게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지만.
“그럴 겁니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부터 조금씩 빨라지던 카린의 심장 박동과.
피부에서 근육 쪽으로 빠져나가는 카린의 피와.
조금씩 쭈뻣쭈뻣 서기 시작하는 카린의 머리카락 외에는.
“좋아요,가죠!”
발랄한 목소리.
‘으음.’
연기력은 좋은 것 같지만.
딱히 녀석의 공포까지 신경 써 줄 이유는 없다.
‘별로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계속 더 깊이 들어갔다.
가팔라지는 각도의 경사로가 계속 나타난다.
구불구불 돌아가기도 하고 곧바로 내려가기도 했지만,빠른 속도로 지하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는 게 모두에게 체감될 정도였다.
“여깁니다! 광맥이……!”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던 호위의 음성이 높아졌다.
“미스릴?!”
카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곧장 호위에게 달려가 벽에 손을 더듬는다.
“아름답네요……
은은한 빛의 금속이 암벽 사이로 그 자태를 번쩍이고 있었다.
어떤 새도 추락시킬 폭우가 미쳐 쏟아내리는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가르며 치는 번개처럼.
돌 속에서 미스릴의 맥이 뛰었다.
“그런데.”
빛에 심취해 한동안 벽에 손을 댔던 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벽이 너무 거칠어요. 며칠 전에 곡괭이나 망치로 마구 두드린 것 같은걸요.”
카린이 손가락을 비볐다.
작은 미스릴 알갱이들이 허공으로 비산하지만.
몇 알 되지도 않는다.
“50년이나 묵힌 곳인데 매장량이
이 정도인 건 말이 안 되고요.”
“다른 곳도 비슷합니다.”
루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 콰득. 콰드득.
경사로를 무언가 기어올라 오고 있었다.
마침 앞을 보고 있던 카린은.
“끄히아아아가아악!”
‘아니,갑자기 이런 소리를 내나.’
지금까지의 연기가 송두리째 모두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소리를 내며 내게 달라붙었다.
경사로를 기어올라 오는 건.
잘린 팔이었다.
- 콰득. 콰드득.
잘린 팔은 제 손가락으로 암반을
움켜쥐고 바닥에 꽂아 넣으며 계속 빠르게 을라왔다.
- 콰드득! 콰드득!
뒤지지 않겠다는 듯이 아래에서 다른 팔들이 계속 기어올라 온다.
- 쿵! 쿵! 털썩!
잘린 다리가 경사로를 뛰어오다 뒤로 떨어졌고.
- 콰르릉. 과르릉.
머리도 팔다리도 없는 몸뚱아리가 굴러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피를 홀리지도.
썩어 있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철인……?”
근육과 혈관이 아니라 고강도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는 그것은, 모양으로,재질로,크기로 보아도, 명백히 분해된 철인의 일부였다.
인간보다 네 배는 거대하고.
수백 배는 더 강한 팔들이 갈가리 찢긴 채 기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