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주머니 속의 칼 (10)
- 파직.
가볍게 불꽃을 피워 올렸다.
동굴에 셋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이쪽입니다.”
루이가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입구도 많고 꼬일 대로 꼬여 있는 동굴이다.
조금만 잘못 선택했다간 바깥으로 나가 버릴 것 같았는데.
루이의 인도를 따라가자 동굴은 점점 더 넓어지기만 했다.
확실히 중앙으로 향해 가고 있는 기분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찾지?”
나야 꽤나 넓은 범위를 탐지할 수 있었지만.
루이는 그렇지 않을 텐데 나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예전에 박쥐 동굴에서 수련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녀석들의 습성을
조금 알게 됐죠.”
“박쥐 동굴? 뭐 하러?”
“그냥,아무도 없는 동굴보다는 박쥐들이랑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거나, 수련에 장애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도 아니고. 같이 있다는 게 좋아서라고?
시선이 엉켜들었다.
얼굴에 문득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냉정한 성격 아니었나.
박쥐까지 귀여워하는 인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루이가 말을 돌렸다.
“안쪽으로 갈수록 뜨거워지네요. 동굴은 보통 계속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고요. 점점 더 층이 두꺼워집니다.”
“사막이나 해변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모래는 이미 빗물에 녹은 상태로 흘러들기 마련인데, 처음 보는 현상입니다.”
모래가 금세 발목까지 차올랐다.
“박쥐들은 이 근처는 안 오네요. 흔적도 없습니다.”
안쪽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잠깐!”
“예?”
“멈춰라.”
이미 무릎까지 차오르는 깊이가 되었는데.
앞쪽에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깊은 모래 구덩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 깊은 곳에.
그냥 모래인 줄 알 정도로 가만히
파묻혀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쪽을 감지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정령인가?’
하지만 아무래도 주술이나 마법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일찍 감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잠깐. 너희는 여기 있어 봐라.”
혼자 앞으로 다가갔다.
‘반경 3미터.’
모래에 손을 대고 둥그렇게 주욱 밀어냈다.
모래는 옆과 밑으로 저항감 없이 밀려났다.
계속 모래가 보였다.
아래로 5미터.
10미터.
15미터.
모래로 모래를 밀어낸다.
단순히 밀어낸다면 바깥으로 밀려 을라오게 될 것이므로.
대부분을 비벼서 소멸시킨다.
20미터까지 쑥 밀어냈을 때였다.
- 파삭!
그곳에 있던 모래는 소멸되지 않고 영역에 엉겨 달라붙었다.
정체를 파악하려는 듯 이리저리 표면을 더듬으며 움직인다.
분명히 의식을 가진 녀석이다.
- 파바바바바박!
내 영역에 꿈틀거리는 모래들이 몹시 빠르게 마찰을 일으킨다.
모래의 형상을 했지만 움직임은 번개가 타닥타닥 튀는 것만큼이나 빠르다.
알갱이들이 서로 비벼대는 힘으로 공기가 빠르게 뜨거워진다.
영역에 붙어 진동까지 일으키고, 홀쭉한 모양을 만들어 빨아들이는 시도도 해 보고.
모래를 거대한 채찍으로 만들어서 후려쳐도 보고,칼날로 만들어서 찔러도 본다.
‘날카롭군.’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데.
웬만한 강철 정도는 쉽게 자를 수 있을 것 같다.
- 좌르르륵!
하지만 씨알이 먹힐 리가 없다.
혼자 계속해서 발광하는 모래를 가볍게 상대했다.
‘이건… 이렇게……
우연이지만.
은신처의 모래로 인형들을 만들어 움직이면서 수련했던 게 큰 효과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힘으로 밀어붙이면 당연히
이기기는 했겠지만.
‘너무한가.’
내가 가진 무력 이상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느낌마저 든다.
- 파삭.
공작의 모래인형을 터트린 것처럼 가볍게 녀석을 터트리고.
녀석이 자기 몸을 수복하기 전에 내가 터진 곳을 다른 모래로 채워 넣어 버린다.
- 좌르륵.
‘재밌는데.’
5개월 동안 지겹게 했던 짓이라
익숙하다.
- 퍼석!
- 좌르륵!
- 퍼석! 좌르륵…….
몇 번을 반복했을까.
“…두려운 분이시군요.”
어느새 옆에 다가온 호위가 질린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응? 루이? 저분은 어떤 걸 하고 계시는 거야?”
카린은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반짝였고,호위는 위축된 기색으로 낮게 속삭였다.
“…모르는 편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루이만 믿으니까.”
카린이 호위에게 머리를 기댄다.
호위가 입술을 살짝 깨문다.
어쩐지 결연한 기색.
나를 옆에 두고.
자기를 믿는다는 말을 무척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 좌르륵.
어느새 모래더미는 덤빌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하다.
‘어라?’
다시 보니 색도 달라졌다.
격렬하게 마찰을 일으키다 보니, 입혀진 색이 벗겨진 듯했다.
드러난 건.
빛을 모조리 흡수해 버릴 것 같은 새까만 입자들의 덩어리.
〈위장 파악됨. 저지 불가. 스캔 불가. 무력 파악 불가. 전투 시물레이션 도출 불가. 승률 0%. ‘벼랑끝 전술’을
실행합니다.〉
“ o 으7”
새까만 알갱이 하나하나가 진동하며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굴의 모래정령’은 현재 자율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불안정 지역 수호 임무를 실행 중입니다. 정중히 퇴거를 요청합니다. 강제로 진입하실 경우 봉우리 전체를 폭파하겠습니다.〉
이 봉우리를 강제로 폭파한다니.
화약의 흔적 같은 건 없었는데?
정체도 파악되지 않는 녀석인 만큼 충분히 역량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뻣뻣이 굳어 버린 건 협박 때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마왕의 권속인가 싶었던 모래정령에게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브람?”
엠버메어의 단독의장.
공중통제관,국방장관,재무부장을 포함해 각종 직위를 맡고 있는.
태엽의 남자.
그와 같은 목소리다.
“너…. 브람… 아닌가?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지?”
“본 정령은 제작 당시 C6H5라는 코드로 명명되었고,현재는 동굴의 모래정령으로 자신을 지칭합니다. 브람이라는 이름은 본 정령의 것이 아닙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녹음된 듯한 똑같은 목소리인데.
물론.
충격에서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눈앞의 존재가 브람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명백한 브람의 흔적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린,크렉소르 가문과 엠버가 수호 계약 같은 걸 맺었나?”
“엠버메어요?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연합 안에서만 해결사를 구하는 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트로핀 여단이 명백한 예시다.
그리고.
트로핀 여단의 뿌리는 엠버.
단독의장의 목소리가 이 기계에서
들리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다.
‘50년 전이니까.’
의장이 되기 전의 브람이 무언가 엮였을지도.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뒤에 있던 카린이 앞으로 나섰다.
안색이 창백해져 저게 뭔 줄 알고 그러시냐고 말리는 호위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크렉소르 가문의 예비 후계자 카린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약지에 낀 가문의 인장을 내보였다.
그리고 안쪽 주머니에서 비슷하게
생긴 세 개의 인장을 더 꺼내 손에 을려놓고 내밀었다.
다른 자를 죽이고 얻은 인장인지, 경쟁을 포기시키고 물려받은 건지, 운으로 주운 건지는 모른다.
〈물품 분석 중.〉
〈모두 진품으로 확인됨.〉
〈안면 56포인트 분석. 혈류량 분석. 박동 분석. 음색 분석. 호흡 분석. 발화가 진실로 확인됨.〉
순간 모래가 초록색으로 변했다.
〈확인되셨습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크렉소르의 후계자님. 하지만 이곳은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퇴거하시기를 권합니다. 이 구역은 본 정령의 책임하에 누구도 진입하실 수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크렉소르 가문에 당신 같은 존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어요. 트로핀 여단에서 나오셨다면 크렉소르의 후계자에게 길을 비켜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안 됩니다. 이 광산은 인간들의 욕심이 폭주해 만들어진 통제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본 정령은 계속 이곳을 지킬 겁니다.>
〈반복합니다.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제 앞의 부하를 퇴거해 주십시오. 퇴거하지 않으면 폭파하겠습니다.〉
몇 번을 들어도 틀림없다.
브람의 목소리.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브람이 이런 기계를 남겨 놓는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정말 브람의 기계라면.’
곰곰이 생각했다.
봉우리를 폭파하겠다는 게 절대 허풍은 아닐 거다.
‘그럴 능력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정말 실행할 확률도 높다.
제국이 엠버메어가 일군 기술을 빼앗는 것은 거절한다면서.
땅 위의,바다 아래의 시설까지 자기가 통제하던 엠버를 송두리째 날려 버리던 브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그 녀석은.
‘분명히 파괴마의 기질이 있지.’
봉우리를 폭파한다면 어떨까?
크렉소르 가문 내부뿐만 아니라.
그 외부의.
제국의 시선까지 끌 수도 있다.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아뇨,이분은 부하가 아니에요! 친한 동료이기는 해도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분이에요. 지금 이곳을 파헤치자고 한 분도 이 분이고요. 전 오히려 따라가는 입장인걸요.”
〈스캔 중.〉
〈일부 발화 왜곡. 주관적 단어 사용 발견됨. 지나치게 안정적인 호흡.
차분한 음높이. 자연스러운 ‘연기’일 가능성이 측정됨.>
〈신뢰을 72.4%.>
‘깐깐한 놈.’
그나저나,카린도 대단하다.
옆에 서 있는 호위의 반응을 보면, 둘이서 절대 저런 걸 일상적으로 보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 접하는 기괴한 존재 앞에서 자연스레 저런 ‘연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모래정령씨,여기는 저희 가문의 광산이잖아요.”
〈소유권은 인정합니다.>
“이곳의 위험을 두고 볼 수 없어 수호하기로 결심하신 거죠? 트로핀 여단도,크렉소르도. 누구의 출입도 엄격하게 막으시면서요.”
허공의 모래 알갱이들이 끄덕이듯 작게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 광산의 감시를 위해 만들어진 본 정령은 자체적 학습을
통해 각성한 뒤 이곳의 위험성을 깨달았습니다. 트로핀과 크렉소르가 벌인 짓의 잔해는 통제되지 않은 채 광산 내부에 남아 있습니다.>
“정령씨의 책임감은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저는 궁금한 게 있어요. 지금까지 여길 발견한 크렉소르의 후계자가 있었나요?”
〈부정. 귀하의 능력은 독보적으로
뛰어납니다.>
“역시 그렇겠죠? 혹시 있었더라도 모래정령씨가 봉우리를 폭파해야 할 만큼 강한 동료와 함께 온 분은 확실히 없었겠죠?”
〈본 모래정령은 신화로 내려오는 ‘해결사B’의 8년 7개월 치 전투데이터 백업을 트로핀 여단이 구매해 제작한 번외급 개체입니다.〉
〈변환학습을 활용한 전술지능을 보유하고 있으며,연합 내부에서도
한자릿수에 꼽히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금 전 말씀하신 확률은 0.00034% 이하로 판단됩니다.〉
해결사B는 브람이겠지.
‘브람의 데이터를 구매하고 개발한 인조 정령이라니.’
전투데이터뿐만 아니라 성격도 일정 부분 닮아 버린 모양이다.
“근데 저분… 에게 밀리신 거죠?”
<…….>
정령은 말이 없었다.
서로의 존재에 당황한 건 오히려 모래정령 쪽으로 보인다.
판단이 빠른 건지,간이 큰 건지.
물론 저 녀석이 눈앞에서 인간 수백 명을 찢고 몸의 수분을 모조리 흡수해 미라로 만들면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지만.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카린이 말을 이었다.
“제가 괜히 찾아온 게 아니에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그렇게 강한 정령씨를 밀어붙일 만한 분을 동료로 데리고,정당한 크렉소르의 후계자가 문제를 해결하러 광산에
찾아온 거예요. 이럴 일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그냥 가 버리면요?”
“여긴 모두가 잊었어요. 가문에서 완전히 버려져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무려 50년이었어요. 외롭지 않으세요? 언제까지 자아를 유지하면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크렉소르 가문이나.
경쟁하는 후계자들은 광산 내부의 미스릴에 눈이 머는 게 맞고.
카린 자신도 거기에 홀려 있었다.
하지만.
아예 논점을 틀어 버린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의 시선으로 상황을 이야기한다.
카린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입장을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존재인.
기계정령의 마음을 들여다봐 주고 있었다.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긴 하지만.
‘…수완이 대단하긴 하군.’
외로움.
수호.
정의.
기다림 끝에 바로잡는 기회.
생각해 보면 묘한 정령이다.
실험을 감시하도록 만들어진 인공 정령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스스로가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5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킬 정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브람을… 닮은 건가.’
트로핀 여단은 전투데이터만 쓰고 싶었겠지만.
거기에 엉뚱한 게 묻어왔을지도 모른다.
‘기묘한 상황이군.’
트로핀 여단에서 만들었으면서, 그들의 출입까지 막고 있다니.
확실히 대단한 전투력이긴 하다.
하지만.
스티글리츠,페르산,샤루니안 같은 트로핀의 간부들을 생각해 보면.
광산 안에 꼭 필요한 게 있으면 아예 못 뚫을 수준까지는 아니다.
거대한 폭파가 일어난다고 해도.
녀석들의 조직력과 네트워크라면 그럭저럭 묻을 수 있지 않을까?
‘뭔가 있어.’
크렉소르도.
트로핀 여단도.
이곳을 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카린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잘 처리할 거예요. 이곳을 폭파한다고 협박하셨는데,솔직히 그건 별로 협박이 안 되지 않아요? 온갖 자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나 다 와 볼 텐데요? 그때를 감당할 수 있으세요? 저희를 믿어 보세요.”
모래가,흔들린다.
그때 였다.
“잠깐.”
나는 손을 들었다.
“동굴 안에 누군가 진입했다.”
수십 개의 입구에서.
일제히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