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92화 (392/458)

476화 눈먼 달,지는 꽃 (53)

- 스륵.

다가오는 남자가 왼손에 쥔 칼을 휘두른다.

꽃은 더 이상 피우지 못하지만.

검은 그림자들을 흡수하며 착실히 한 걸음씩 다가온다.

그러나.

〈후후후…….>

5천의 그림자가 남았을 무렵부터.

한 번의 휘두름으로 간단히 녹아 내리던 요괴의 그림자들은 더 이상 곧바로 흡수당하지 않았다.

그건 서리처럼 남자가 휘두르는 칼 위를 뒤덮었다.

표면에서 차갑게 굳어가고 때로 소용돌이치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남자가 이해하는 요妖가 금이 가며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고.

휘두르는 칼은 올곧고,단호하고, 막힘없었지만.

어쩌면 그 자체가 문제였다.

칼이 흡수하려는 검은 그림자들은 욕망으로,유희로,죄로,권태로, 부조리로,우연으로 수백 년에서 천 년을 살아왔기에.

오히려,

그 칼이 비틀거리지 않았기에.

어긋나지 않았기에.

뒤틀린 그림자들은 남자의 검에 흡수당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그는.

요괴의 마음을 모른다.

〈끝이 보이는구나.>

〈약하다.〉

〈아니야,엄청 강하잖아!〉

〈강한 게 문제라니까.〉

〈크크크큼…….>

〈썩 귀엽잖아?〉

남자의 걸음이.

왼팔이 느려지고 있었다.

소리도 방향도 없던 공격은 이제 나에게 닿지 않았다.

남자의 요妖가.

- 파삭.

왼팔의 철검이 허물어진다.

3년.

남자는 부스스한 머리를 반백으로 세어 버리며,가죽밖에 남지 않도록 겨울 나뭇가지처럼 시들고 마르며, 순환을 생각했다.

온몸의 신경에 번개처럼 꽂히는 욕망을 마주했다.

요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결국 하나의 내면.

남자가 깊이 느끼고 이해한 것은 직관적인 식욕이다.

그건 명확한 문제였다.

먹어야 하는 인간은 먹지 않으며 오히려 식욕을 자극함으로서 그는 굶주림을 이해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식욕에 매몰된 그림자들을 흡수했다.

그들의 욕망에 패배하지 않았고, 증오하지도 않았다.

요괴의 절반은 그러했다.

목마름도 비슷했다.

남자는 갈증을 이해했다.

온몸의 신경을 더듬어 을라오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싶은 갈증을 절실하게 이해했다.

동굴에서 빗물로 혀를 자극하며 남자는 미칠 것 같은 갈증을 계속 마주했다.

그건 목마른 인간이 계속 소금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결국 피를 마셔야 살 수밖에 없던 요괴들을.

마시지 않으면 갈증으로 자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어서.

흡혈에 도착했던 그림자들을 쉽게 흡수했다.

하지만,거기까지였다.

요妖라는 것은.

그저 굶주림이나 갈증.

가학심 따위가 아니며.

그 불가해가 핵심이고.

사실 핵심 따위는 어디에도 없고, 유희이거나,유희가 아니기도 한, 원래부터 공포와 파멸은 있었고, 믿음도,올바름도,악의도,애정도, 어떤 목적도 순간의 먼지와 같아,

아무도 아닌 자가 피우는 꽃이고, 그래서 탐닉하거나,탐닉하지 않는, 그런 것에.

결국 닿을 수 없어서.

- 투두둑!

요기를 홉수하던 오른팔이.

이제 오히려 그림자들에게 다시금 침식 당한다.

검은 혈관이 돋아나고.

一 퍼억!

허물어진 칼을 쥐고 있던 남자의 왼팔이 피를 흘린다.

검은 그림자 속에서 팔은 터지고, 그림자들에 덮쳐져 두 눈은 멀고, 결국은 걸음마저 느려진다.

남자의 ‘근원’은.

어떤 열매 따위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피기 위해서 피는 꽃.

질 때 지지 않고 나무까지 덮어 말라죽게 만드는 꽃.

요妖와 깊이 어울릴 수 없었기에.

결국,흡수는 오만이었다.

- 서걱.

오만의 대가로 왼팔을 다시 잃고.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고.

두 눈을 잃은 남자는 이제 실로 자신이 가장 익숙한 본령에 한층 더 각성하고,충실하여.

모든 그림자를 베며 다가온다.

세 걸음의 간격.

‘저건……

원래부터 지배하던 검의 간격이.

- 사각.

달빛을 베고.

어깨까지 폭파시켰던 그림자들도 더 이상 투과하지 못하며 베이고 있었다.

눈으로 보일 정도로 선명한 영역.

나를 베었던 자신의 영역을.

남자는 이제 방어에 사용하면서 이쪽으로 차분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워진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를 벌린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덮쳐온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더 위험할 것 같은데.’

마치,거리가 아니라.

시간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 파삭.

모닥불이 꺼지듯 검은 그림자들이 사그라든다.

스물,서른,마흔.

〈타격이 너무 커!〉

〈아이고,너무 많이 죽었어!>

〈개미떼 같은 것들뿐이지만.>

〈강한 녀석들도 사라졌다고!>

〈이봐,난 도망갈래! 당장 놓아줘! 벌레에라도 빙의해서 살아가겠어!>

〈멍청한 자식. 여기서 풀려나면 너는 그냥 없어지는 거야.〉

- 파삭. 파사삭.

검은 불이.

그림자들이 다시 꺼져간다.

죽은 망령은 어디로 가는가.

망령들 스스로도.

그들을 부리는 나도.

베는 남자도 알지 못하지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숫자만은 꾸준히 줄어서.

3천.

그림자가 바람숲에서 처음 이들을

흡수했을 때만큼 줄어들고.

一 파삭!

영역을 자르고 들어오는 공격이 옆구리를 자르고,바닥으로 뼈를 떨어트린다.

쇄골까지 들어온 공격이 깊숙이 어깨를 자르고.

다리를 자른다.

‘이렇게 간단히……

상처도.

잘려나간 부위도.

무너진 곳은 그림자들을 뭉쳐서 곧바로 채워 버린다.

흘러넘치는 망령은 나 자신.

재생이라고 할 것도 없는 찰나의 대체 였지만.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왜……?’

그림자들을 베고.

영역을 뚫을 수 있으면서도.

어째서 치명적인 공격은 들어오지 않는 것인가.

팔을,어깨를,다리를,옆구리를 자를 수 있을 정도라면.

망설이지 않고 나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위화감을 깨닫는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

죽이려는 검이 아니다.

그때 였다.

남자의 입술이 움직인다.

‘끊어… 내라?’

아니,어쩌면.

계속 말을 걸고 있었는데.

이제야 남자를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뭘 끊어 내라는 거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나는……

- 스륵.

남자는 베고,베고.

다시 베어낸다.

신성도 요성도 사용하지 못한 채 인간으로서 모든 걸 감당할 수밖에 없어서 제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가면서도.

내 영역을 계속 베어 왔다.

분명히,그는.

뭔가를 알려 주려고 하고 있었다.

〈땅을 뒤집어! 저 녀석을 산 채로 파묻어 버리라고!〉

〈달의 힘을 더 강하게 쓰자!〉

〈저 녀석의 몸이 무너지고 있어!>

〈마지막 일격을!〉

〈죽여! 죽여! 죽여!〉

〈이미 내장이 썩어 가고 있다구. 밀어붙이면 승리야!〉

〈거의 끝났어.〉

그 순간.

一 서걱.

남자는 강하게 무언가를 ‘베었’고.

그 순간 그림자들의 외침이 잠시 조용해진다.

무수히 머릿속에 울리던.

〈나〉의 그 괴기한 외침들을.

‘방금… 베어 버린 건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림자로 재생된 손이 떨렸다.

- 서걱. 서걱. 서걱.

몸을 베어오는 소리가 정적 속에 연속적으로 울려 퍼진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면.

내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면.

왜 나는 그럴 수 없는가.

아니,가능하다.

정신이 또렷해진다.

‘이미 한 적이 있어.’

그림자들로 인해.

시끄럽게 울리는 외침들에 휘말려

집중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억이 떠오른다.

이미 해안가에서.

공작을 베었다.

〈레나〉를 사라지게 만든 존재를.

세계를 왜곡하고.

몸을 신기루처럼 만들어서 공격을 무효화한 상대를 베어냈다.

공작은 시간마저 통제했다.

1초를 열 배로,스무,마흔 배로 나눠 쓰던 공작의 팔을,옆구리를, 허벅지를 베어냈다.

‘그때를……

다시 몰려드는 요괴들의 외침이 더 이상 머리에 울리지 않는다.

‘해보자.’

처음부터 깨달았어야 했다.

이미 한 번 느꼈던 감각이고.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지배이며.

이미 한 번 그렸던 심상

- 서걱.

다가오는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의 ‘세 걸음’을 베어냈다.

위쪽을 치고 지나간 공격에 그의 하얀 머리칼이 흩날렸다.

불꽃에 한차례 그슬린 머리칼은 얇고,얇아서,허공에 흩날리면서 이리저리 스러져 버린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

요괴들의 외침을 차단한다.

‘느껴져.’

이 차단도.

처음부터 할 수 있었다.

그냥,이 시끄러움에.

비웃어 버릴 수 있는 소음에.

의존하고.

휩쓸려 버린 것뿐이다.

[네 공간을 상상할 권리는 오로지 너에게만 있다. 고유할수록 위력도 강해지지…….]

몇 번이나 떠을리는 이야기.

결국 그림자들은 내 안에 있고,

가장 온전한 고유의 영역이며.

그 권리는 나에게 있다.

<…….>

소음은 더 이상 닿지 않고.

- 서걱.

벤다.

다가오는 남자의 영역을 날카롭게 베어내지만.

옷자락만 잘려 나풀거린다.

‘잘 안 되는군.’

공작을 어떻게 죽였더라?

처음부터 아예 공격에 적중당한 상태를 그렸다.

덮어씌우고.

상대의 체내에,작은,한 방울의 공간을 그린 다음…….

터트린다.

‘이긴다.’

강한 승리의 확신이 들었다.

그때.

인간의 몸에 가해진 충격 탓으로, 죽음과의 경계가 손으로 비빌 수도 없을 만큼 얇아진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삭 올리며 웃곤.

입술을 움직였다.

녀석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기에 분명히 읽기 쉬울 터인데.

그런데도,

‘이제…서야?’

남자의 말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 쿠콰콰콰쾅!

시야가 새까맣게,

사라졌으니까.

소리마저 부숴 버리는 충격이 머리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막을 수도.

밀어낼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설마 처음부터……

의식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