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82화 (382/458)

465화 눈먼 달,지는 꽃 (42)

도깨비들 외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보물창고에 두 눈을 부릅뜬 어둠이 들어찬다.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그림자들이 가득 흐른다.

회화 조각이 떠오르고 금은보화와 공예품들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몸은 쓰러졌어도 탐욕은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무한히 증폭되는 것 같았다.

그림자들의 외침들이 끓어오르며

창고 안에 홀러넘친다.

〈망할 도깨비들,이건 원래 내가 백 년 동안 아끼던 보물이었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리를 지르는 요괴도 있고.

〈푸흐흐,고작 그딴 걸 백 년이나 집착하고 살았느냐.〉

그런 보물을 보관하자는 의견을 가볍게 비웃는 대요도 있으며.

〈호홋! 이 귀한 게 여기 있다니! 뺏어! 이건 반드시 가져가야 해!〉

대요들마저 모두 동의하면서 당장 챙기자고 하는 물건도 있었다.

‘흐음.’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만, 황실 비역에서 잔뜩 챙겼던 탓에 인벤토리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모든 걸 다 집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사가 필요하다.

일단 돈으로 환산되는 금은 따위는 당연히 제외였지만 걸러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이건……

문화와 시간이 한 작품에 담겨져 있는 유물들은 그 가치의 우열을 직선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발견하고 짧게 침묵하거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걸작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요괴들이 아무 관심도 주지 않는 구석의 켜켜이 먼지 쌓인 유물로 문득 시선이 향했다.

‘왠지 신경 쓰이는군.’

허리를 뒤틀고 있는 신이 새겨진 검은 향로.

하얀 후드를 걸친 향로 위의 신은 담담한 눈길로 발 아래의 구름을 바라보며 앞으로 내민 오른손에서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이건… 신인가?”

초롱너울이 고개를 저었다.

“오호,이런 건 저도 모르겠군요.”

“너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섬김받고 믿어지는 신이라면 분명히 제가 알고 있을 텐데……

‘상상의 산물인가.’

그렇다고 치기에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새긴 것 같은 무거운 존재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쩐지 익숙해 보인다.

‘챙겨야겠군.’

나는 향로를 집었다.

그 외에도 도깨비 창고에 가득 찬 보물들을 보자 ‘섬’이나 자유연합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정말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1차로 모방된 것조차 아니다.

최소한 두 번 이상의 단계를 거쳐 열화된 물건들.

그림에 그려진 것 정도만 보고서 엉성한 상상에 의거해 만든 듯한

모방품들이다.

이곳의 유물들을 보자 경매장에서 모방품들이 성황리에 터무니없는 가격에 거래되던 모습이 질 나쁜 농담처럼 느껴졌다.

〈정말 좋은 건 이놈들이 다 갖고 있었네!>

〈전부 흠쳐 간 거지!〉

〈싫은 녀석들이야.〉

‘시끄럽군……

애슈턴의 책 같은 필수품을 제외한다면.

황실 비역의 물건 가운데 몇 개를

빼서 넣을 만한 것들도 있었다.

“이건 뭐야? 허리띠인가?”

너비는 폭이 15cm 정도.

길이 3미터 정도의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띠들이 한 군데에 모여 나란히 걸려 있었다.

불타 버린 꽃.

밤하늘에 빼곡한 별.

떠도는 나비.

금으로 된 화살.

떨어지는 눈송이 따위의 장식을 입체감을 주어 자수 놓거나 염색한 기다란 천이었다.

“두르는 순간 착용자의 몸에 감겨

그날의 기분에 어울리는 형태로 변하는 옷입니다. 하나의 문양을

선택하면 그것으로만,두 종류를 선택하면 서로 조합해서,그리고

세 종류를 선택하면 역시 세 문양이

서로 어울려서 만들어지지요.”

“ O 으” —■"斤.

“그 외에는 옷일 뿐입니다만.”

별다른 기능은 없고.

필요도 없겠지만.

누군가 이 아이템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드레스를 입고 기뻐하던 누군가가 어 렴 풋하게 떠 올랐다가

흩어진다.

〈그건 쓸모 없어!〉

〈차라리 보통 천이 나을 거라구. 목을 조르는 데도 쓸 수가 없어!〉

〈살에 닿으면 저절로 옷의 형태로 변하니까 끈으로도 쓸 수가 없고! 발에도 안 걸리고! 그따위 옷을 입으면 장난도 칠 수가 없어!>

〈해치고 죽일 수 있는 물건들을 고르자!〉

‘닥쳐라.’

왠지 챙겨할 것 같은 기분이다.

시끄러운 그림자들을 윽박질러서 억지로 조용히 시키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긴 천들까지 챙겨 넣을 때는 이미 보물창고의 중간을 훌적 넘었지만 여전히 벌레 모형은 보이지 않았다.

강력한 대요들과 초롱너울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몇 개의 아이템까지 넣고 창고의 끝에 도달했을 때.

‘없는 건가?’

빠진 것 없이 샅샅이 뒤졌음에도 벌레는 마지막까지 보이지 않는다.

〈없어… 없어…….>

〈네가 찾는 건… 우리가 찾는 건 여기에 없다…….>

〈탐욕한 주제에 무능한 도깨비… 멍청한 도깨비들… 원하는 것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다니…….>

〈화풀이로 모두 끔찍하게 죽이자! 도깨비들을 모두 죽이자!>

당황스러웠다.

“여기 없다면 어쩌지?”

“그건……

초롱너울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였다.

창고의 끝자락에 놓인 두꺼운 책 한 권이 시야에 들어온다.

‘뭐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던 묘한 존재감의 서적이다.

홀린 듯 다가섰다.

〈기체통서 氣體通序〉

‘동방어로 쓰여진 녀석인가.’

그리고.

제목 아래에.

마치 보는 이를 놀리는 것 같은

삐뜰빼뜰한 글씨체의 대륙어로, 〈캐빈 애슈턴〉이라는 이름이 옆에 적혀 있었다.

곧장 책을 들었다.

무게감이 묘하다.

첫장을 펼치자.

“어머나.”

초롱너울이 감탄사를 흘렸다.

〈눈은 색의 거울이요,귀는 소리를 통하는…….>

〈…모든 사람의 눈을 거울로 삼고 모든 사람의 귀를 내 귀로 삼아서

통하면…….>

책은 첫장부터 온전히 읽을 수 없었다.

표지를 넘기자 가운데의 뻥 뚫린 공간에 주먹만 한 크기의 금빛 벌레 모형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끼긱.

손을 대고 진동을 느꼈다.

세밀하고 차가운 느낌.

-끼긱. 끽. 끼기기긱. 끼기긱

불규칙적인 진동이 울려 퍼진다.

‘진품이군.’

가장 안쪽에 고이 함 안에 담겨 있는 모습을 봐서 그냥 처박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 깊이라면 거의 창고가 처음 생길 때 넣어 둔 물건이군요. 이천 년은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1만 배’라는 유산은 최소한 2천 년은 이전에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서쪽에서 제국이라는 게 생겨나기 한참 전의 아득한 시기.

건국 시기와 달리 그때의 역사는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보물창고를 완전히 파헤치다시피 한 상태에서 손에 넣은 황금빛 벌레를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것 때문에 동방에 온 거다.

목적은 달성이다.

“원하시는 물건을 찾으신 것 같아 무척 다행입니다. 이제 위쪽으로 안내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머릿속에 깊이 스며드는 목소리를 다시 억누른다.

‘•••슬슬 어지럽군.’

그래도 버텨 본다.

보물창고를 보고 나자 이 녀석이 보여 주는 건 모두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의 안내를 따라서 계속해서 계단을 을라갔다.

계단의 맨 위에 도달하자 광장에 가까운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 넓은 공간 전체를 사용하면서

바닥에 서로 맞물려 새겨 넣어진 문양들은 달의 위상 변화를 세세히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달빛의 제단입니다. 사기 치는 건 아니로군요. 정상적인 양도 절차를 준비해 놨으니까요.”

“양도 절차?”

“네,도깨비 녀석들은 우두머리를 결정할 때 달에서도 알아차리도록 이 제단 위에서 양도를 행합니다. 처음에는 우두머리의 자격을 최종 검증하는 절차였지만,어차피 달이 반응하지 않는 지금은 그냥 은총을 기원하는 의식에 불과하지요.”

“그런가.”

어째서일까.

처음 보는 낯선 제단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곳입니다.”

도깨비왕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디 서야 할지 느껴졌다.

홀린 제단의 문양을 달의 주기에 맞춰 밟아 나가는 순간이었다.

[통치 레벨이 생성되었습니다.]

[현재 통치 영지 - 도깨비성]

[통치 Lv.l]

[통치 레벨은 영지의 발전과 주위의 신망에 따라 결정됩니다.]

[당신이 지배하는 영지는〈달〉의 주요한 관심사입니다.]

[당신이 지배하는 영지를〈달〉이 주시합니다.]

[통치 레벨에 무관하게〈베트라스의 차가운 달〉이 활성화됩니다.]

-다섯 가지 달의 비밀이 당신을 향해 미소 짓습니다.

-인력: 달의 인력이 당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인력이 극에 달하면 당신의 뜻에 따라 지진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궤도: 달은 때로 더욱 커지고, 때로 밝아지고,때로 어둠 속으로 잠겨 버립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언제나 호의적입니다.

상태창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달과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 달이 짙은 초록으로 빛나며 나를 향해 빛을 쬐었다.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그 달빛의 직사는 광선처럼 느껴졌다.

쏘아진 초록색 빛이 온몸에 이어 나와 연결된 그림자들에까지 모두

퍼져 나간다.

달과 연결되었다는 걸 느낀 순간 다섯 요괴들을 한 자리에서 먹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양감과 일체감이 일어났다.

나를 채우고,그림자들을 채우고, 제단과 그 아래 계단에서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도깨비들까지 모두 채워 버린 초록색 달빛은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있을 만큼 짙고 환하고 아름다웠다.

“아아……

폭사되는 달빛을 보며 도깨비들이 몸을 떨었다.

예언자라는 존재를 직접 접하지

못한 도깨비들은 우두머리의 말에 복종하기는 했지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거대한 그림자 군단이 나타나서 격차를 체감하고 엎드렸지만 결국 수용과 굴종일 뿐이다.

그러나 달의 제단에 선 뒤 일어난 변화를 보고 도깨비들은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당겨… 진다?’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에서 폭우로 범람하는 강.

강물은 이 땅 위를 흐르지만.

저 흐름에는 분명히 달의 지분이

존재한다.

그 권리를 느끼고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면....

- 화아아아아아악!

강물이 초록색 달을 따라 하늘로 수십 미터나 솟아오른다.

잡아끌 듯 길게 솟아오른 강물은 마치 달의 궤적을 그린 것 같다.

“아아." 아아아아아!”

감탄이 경악이 된다.

누가 이런 힘을 보였는가.

단순히 자신의 권능이 아니다.

어떻게 보아도 도깨비들이 섬기는 달과의 감응 그 자체.

이제 더 이상의 그 어떤 증거도 필요 없었다.

도깨비들의 환호는 진심으로 높아져 있었다.

-크오오오오오!

-만세! 만세!

-달이다! 달이 응답하신다!

一우어어어! 요괴왕 전하 만세!

고작해야 쉰 마리 정도에 불과한 도깨비들이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감복해서 내지르는 괴성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 특전이… 여기서 될 줄이야.’

달빛이 내 감각마저 각성시켰다. 초록색 달빛을 받은 세상은 예전과 같은 듯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이게… 달이 보는 세상인가?’

“후후후… 후후후

어째서인지.

심지어 도깨비의 우두머리보다도 초롱너울이 더욱 즐거운 것 같은 표정이다.

감격하고 있는 길달을 바라봤다.

“이제 더 할 말은 없겠지?”

딱히 입을 벙긋거리지 않는 걸로 보아 더 이상 들어야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슬슬 한계다.

녀석을 상대로 대화는 물론이고.

계속해서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여유조차 없다.

〈먹어……!>

〈왜 먹지 않는 거야……!>

〈저 녀석만 그림자가 되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어…….>

〈이제… 먹어....>

〈죽여… 죽여 줘…….>

〈분명히 강해질 거야.〉

〈끌어들여…….>

〈도깨비 녀석들의 몸이 뜯기는 걸

보고 싶어!〉

〈뜯어 먹자. 발라 먹자. 골수까지

전부 빨아먹자.〉

“일단,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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