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눈먼 달,지는 꽃 (26)
무심코 인벤토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뭔가 할 때마다 옆에서 따라 하는 후작이 거슬려서 싸울 때도 쓰지 않던 능력이지만 초롱너울의 재촉이 워낙 다급했다.
- 파앗!
허공에 전개한 인벤토리를 계단처럼 밟고 연속해서 뛰어오른다.
2차,3차…….
초롱너울의 급박한 목소리가 집중 력을 증폭시킨 것 같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움직였다.
그림자의 속도는 계속해서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지만.
- 광!
내가 더 빠르다.
세로로,그리고 또 가로로.
허공에 투명한 디딤대를 만들어
박찰 때마다 가속이 붙는다.
뒤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 쌔애행!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등 뒤에서 결코 자연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는 바람이 나를 강하게 떠밀었다.
‘뭐야?’
앞으로 튀어 나가는 동시에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칼을 막 내려놓은 레안드로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말은 없었지만 분명하다.
웃음의 의미도.
도움의 의미도.
방금 내 움직임으로 뭔가 얻은 게 있다는 이야기다.
‘…젠장.’
“뭐 하는 거야! 빨리!”
불꽃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수습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쏟아지는 바람과 함께 돌진해서, 왕꽃게의 검은 그림자와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 순간.
- 화르르!
몸에서 기다렸다는 듯 녹색 불꽃이 튀어나오더니 반으로 갈라졌다.
“좋아!”
마치 불꽃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아가리가 되듯이 그림자를 삼켰다.
- 콰직!
날카로운 이빨이 그림자를 끌고 가는 무언가를 깨물어 끊었다.
그림자가 삼켜지는 순간.
암녹색 불꽃의 크기가 예전보다 크게 부풀어 올랐다.
불꽃이 약간 더 어둡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허물어지려던 경계심이 다시 위로 올라온다.
“너 좋고 나 좋은 일.”
그래서일까.
초롱너울의 목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린다.
목소리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지만, 초롱너울의 말투에서 묘한 포만감이 느껴진다.
“뭘 먹은 거냐?”
커진 불꽃이 고개를 저었다.
“먹진 않았어. 담았을 뿐이야.”
“무슨 차이인데?”
“어떻게 그런 무식한 말을 하니! 인격도 혼도 하나로 섞여 버리는 〈식사〉와〈보관〉을 같다고 생각해? 애초에 못 먹게 포장이 되어 있어. 너,홉수 계열의 능력이 있지?”
“네가 어떻게 그걸……
초롱너울을 만난 뒤로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능력인데.
애초에 옆에서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 몸을 부수고 계속 시도했잖아. 상대를 잡아먹으면서 강해지는 건 동방에서는 혼한 일이다. 기본적인 방법이지.”
“•••그런가.”
정수 흡수를 전해 준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도 애초에 동방에서 건너왔으니까.
모종의 기대감이 든다.
동방을 깊이 파헤치다 보면.
어느 순간 정체한〈정수 홉수〉의
권능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도 뭔가를 얻어갈 수 있겠지.
초롱너울이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왕꽃게 정도의 녀석은 이대로 죽어서, 혼이 자연스럽게 흩어지고,남은 힘은 너에게 모두 빼앗겼을 거야. 나처럼 따로 영체를 독립시킬 역량이 없지. 하지만 놈의 혼과 힘이, 지금 네가 본 것처럼 속박되어 있어.”
“자신의 원한도 아니다. 스스로의 의사가 아니라 타자의 의사에 따라 편안히 쉬지 못해. 힘을 묶어 두기
위한 속박으로 혼이 기능하는 거지. 아주 악질적이야.”
‘의외인데.’
다른 요괴들을 이렇게 생각해 주는 성격인지는 전혀 몰랐다.
녀석이 새롭게 보였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나를 섬으로 쫓은 녀석들이겠지. 내가 없는 사이 이런 짓을 하다니. 아니,애초에 이런 짓을 하기 위해 쫓아낸 걸 테야.”
초롱너울 정도의 요괴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요괴의 혼을 묶었다.
그 정도의 강자들이라면.
나도 곧 칼을 맞대야 할 가능성이 높다.
초롱너울과 ‘야옹이’를 달고 왔고, 인간 검주까지 함께다.
내 편의를 봐줄 거라는 건 지나친 낙관이다.
그러나.
두려움 대신 기대감이 차오른다.
‘…그게 여기 온 목적이니까.’
외부의 존재에 맞서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대륙의 요괴들은 내가 거쳐야 할 관문.
열쇠가 아니라도 동방에 올 가치는 있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그러면……
다른 요괴들에 대해 좀 더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암녹색 불꽃에서 집게발 형태의 시커먼 그림자가 솟아났다.
- 과직!
놀랍게도 집게발의 그림자는 남은 거대한 얼음 한 조각을 가루처럼 으스러트렸다.
흑화한 왕꽃게의 격렬한 움직임에
거의 부서졌다고 해도 수 미터가 넘는 단단한 얼음.
- 과직! 과지직!
불꽃에서부터 하나 더 솟아나서 두 개가 된 검은 집게발은 바다를 계속해서 유린했다.
거대한 얼음들이 작은 그림자에 장난처럼 으스러지며 배가 지나갈 통로가 만들어졌다.
마치 실제로 앞에 왕꽃게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무슨……
놀라운 풍경에 감탄하는 사이에, 집게가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다시 불꽃 속으로 사라진다.
초롱너울이 말을 이었다.
“힘이 포장되어 보존되는 만큼, 담아 놓을 수만 있다면 필요할 때 이렇게 원래 모습으로 꺼내어 사용할 수도 있지.”
“그런 일이… 되는 거냐?”
“당연히 나만 되는 거지. 암호를 풀 수는 없어도,어차피 마력으로 만들어진 암호인 만큼,그 마력을 치워 버리면 되는 거야.”
무척 놀랍기는 하다.
저게 된다면.
정수 홉수 이상이다.
힘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을 넘어.
요괴들을〈보존〉하며 있는 그대로 사역할 수 있다는 뜻.
욕심이 나는 힘이다.
하지만.
가능의 차원을 떠나서.
‘이거야말로 영혼 속박 아닌가?’
다른 쪽에 매였던 힘이.
지금은 초롱너울에게 먹혀서 사용될 뿐이다.
영혼을 묶는 게 악질이라면서.
상당히 전형적인 성격이다.
그리고.
“결국 네가 강해진다는 얘기군. 너 좋고 나 좋은 일이라더니.”
인간의 형상을 갖춘 불꽃이 무슨 이야길 하느냐는 듯 어깨를 크게 으쏙했다.
“동료가 강해지면 유리한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게다가 나는 지금 네게 매여 있어야 하는 몸이라고. 나나 너나,그게 그거잖아.”
반박할 의지를 잃어갈 때쯤.
“방금 그건 뭐였지?”
어느새 다가온 후작이 끼어든다
방금의 집게발 난동을 무시하고 지나가긴 힘들었겠지.
“그게……
“인간! 뒤에서 바람으로 미는 거 아주 좋았어. 방금은 요괴의 위령 같은 거야.”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초롱너울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뱉었다.
후작의 인상이 한층 날카로워진다.
믿고 있는 걸까.
“일단 가자. 이제 곧 상륙이니까. 그런데 네 유령들은 어디까지 같이
끌고 올 생각이야?”
불꽃이 응응거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말을 돌리는 것 같지만.
지금 시점에 나올 수밖에 없는 고민이긴 하다.
유령들이 반드시 배에 묶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륙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데려가야 할까.
회의적이다.
동방은 처음이다.
안내자를 자처하는 초롱너울조차
3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완벽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따르는 이들을 굳이 위험에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
저 넓은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돌아가라.”
[베테랑 선장 ‘범고래’ 멜리사가 의문을 표합니다.]
“안 돼.”
여러 선장이 반발하던 도중.
- 끼이이익…….
배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 죄로 사슬에 감겨,마스트에 수십 년을 못 박혀 있던 선장.
라스도롬의 배가 천천히 빙 돌아 기함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다면… 기다리겠다……
상태창이 아니다.
육성으로 울려 퍼진다.
- 철컥… 철컥..
온몸에 감긴 사슬을 움직이면서 라스도롬이 말하고 있었다.
“기다린다고?”
“너는… 우리의 위대한 인도자……. 상륙이… 위험하다면… 네 탐험이 완전히 끝낼 때까지… 우리 모두가 기다리겠다… 함께… 가자.”
[‘강철 주먹’ 에이몬이 동의합니다.]
[‘독수리’ 옥스워스가 동의합니다.]
[‘생선 장수’ 알더가 동의합니다.]
‘대기하는 정도야,뭐.’
아니.
오히려 다행이다.
초롱너울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상 ‘야옹이’를 다시 타고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유령선단이 나를 기다려 준다면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다.
“그렇다면 저희는……
넥스몬드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슬슬 해안 정도만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저희 힘으로 방금 나타났던 것 같은 이곳의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인데,그렇다고
고객분들의 힘을 번번이 빌리는 건 곤란하니까요.”
합당한 보호의 대가를 드릴 수도 있는 것도 아니라며 넥스몬드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길드 내부에서 입지를 더 올린 다음,전투기계들과 함께 방문해야겠습니 다.”
“상인들이 그런 것도 있나……?”
“앰버와 계약을 맺고 대여 중인 기계가 몇 대 있습니다.”
엠버와의 계약이라니.
루비아를 호위하던 세큐리티 볼이 떠올랐다.
‘타이탄급 장비라고 했던가.’
같은 건 아니라도 비슷한 병기가 상인 연합에 있을지도.
이 녀석들도 알면 알수록 대단한 녀석들이다.
자유 연합과 제국,엠버를 누비며 장사하는 자들이니 좋은 것만 모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지.”
대화가 진행되는 걸 듣는 후작은 아까부터 묘한 표정이다.
넥스몬드 선단이 지금 돌아간다면 돌아갈 때 녀석은 꼼짝없이 미유와 함께 유령선에 탑승해야 한다.
아니면 초롱너울과 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해서 ‘야옹이’의 널따란 등 위에 타거나.
어느 걸 레안드로가.
혹은 미유가 더 싫어할지는 전혀 모르겠다.
별로 큰 관심사는 아니다.
-좌악……!
유령선단에게 근처에 대기하라고 말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해안이 보였다.
근처에 뜬 배는 한 척도 없었고, 항구는 물론 건물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높은 언덕들과 해안 절벽.
그 위를 높이 떠다니는 박꽃처럼 새하얀 구름들만 보였다.
‘죽음의 땅… 인가.’
아이작의 말이 떠오른다.
아직 별다른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활발히 움직이는 동물도 없지만, 풍경은 아름답다.
조금 눈에 띄는 점이라면.
“까맣군.”
레안드로의 말대로.
눈앞에 펼쳐진 해안은 암막처럼 온통 새카댔다.
까만 모래가 꽤 깊은 곳에서부터 깔려 있는지 앞바다도 모조리 검게 젖어 있었다.
바닥만 보면 물이나 모래 속에서 악령의 손이라도 튀어나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하늘이 워낙 희고 푸르른 탓인지 풍경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
선원들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눈을 깜빡이며 감탄했다.
어쨌거나.
동방에 도착한 것이다.
- 히히힝!
초롱너울이 왕꽃게의 검은 그림자를 먹은 다음부터 줄곧 불편한 기색을 비치던 후작이 가장 먼저 기함에서 뛰어내렸다.
백사장에 발을 디디기도 전 이미 해안의 조망을 마친 미유는 후작을 태우고 오른쪽 높은 모래언덕으로 을라갔다.
그 뒤로 천천히 나와 ‘야옹이’가
모래 위에 발을 디렸다.
“조용하군.”
“아아……
해안까지만 오기로 한 넥스몬드가 조심스럽게 배에서 내렸다.
감격에 벅찬 얼굴로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새카만 모래를 두 손 가득 퍼 올려 살폈다.
뱃사람답게 미신을 믿으면 불길한 모래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더L 그런 류의 신념은 취급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래를 손가락으로 비벼서 손등에 발라도 보고.
쿵쿵거리며 냄새도 맡아 본 그가 눈을 반짝거렸다.
“냄새가… 냄새가 다릅니다!”
“냄새?”
“모래에서 진한 유황 냄새가 납니다. 이 근처에 커다란 화산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앞바다부터 계속해서 검은 모래였던 걸 봐서 바다 아래 화산일 지 도 모르겠습니 다만… …
그는 후작을 따라 높은 언덕 위에 오르더니 사방을 둘러봤다.
처음에는 맨눈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다른 선원들이 배에서 내릴 때 즈음에는 망원경을 꺼내어
천천히 사방을 한 곳씩 주의 깊게 살폈다.
지도라도 그리는 것 같은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반나절 정도 해안에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모래를 비롯해 바위, 풀,나무,조개까지.
선원들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동방의 모든 걸 수집하고 있었다.
근처 바다에서 대기하는 유령선의 선원들까지 부를까 싶었을 때.
“만월이다.”
인간의 형상을 취한 초롱너울이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켰다.
환하게 뜬 둥근 달은 혹사장 위에 서늘하게 푸른 빛을 뿌렸다.
“수평선 위에 보름달이 뜨면 배를 타기 좋지만… 여기서는 슬슬 다시 돌아가는 게 좋지.”
“특히,인간들은 말이야.”
만월에서 내려온 서늘한 달빛이, 흑사장 위에 선 선원들의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노린 것처럼 정확하게.
새카만 모래 위에 선 수백 명의 인간이 희부옇게 돋보였다.
“으아앗! 선장님! 선장님! 저희들 피부가… 피부가 이상합니다!”
분명하게.
살이 차가운 달빛에 타들어 가는 현상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초롱너울이 말을 이었다.
”만월을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달빛을 받으면… 낙인이 찍힐 거야. 요괴들이 어디서든 너희를 느끼지. 사는 게 아주 피곤할 텐데?”
무아지경으로 수집하던 선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전원, 모든 행동을 즉시 멈추고 원위치! 탑승한다!”
넥스몬드가 지시를 내린다.
아무리 탐험의 욕구가 강렬해도.
죽기 싫으면 일단 물러가는 쪽이 현명하다.
어쨌거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덕분에 동방에의 항로를 알아내다니… 돌아오시면 반드시 다시 길드에서 저를 찾아 주시겠습니까?”
황망한 와중에도 선장은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는다.
위험 요소가 정리되면 알려 달라는 발칙한 요청일 수도 있다.
달을 정리할 수는 없는데.
어쨌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한 시간 안에 넥스몬드의 선단은 동방을 떠나고.
- 치이이익.
호신강기로도 달빛을 막을 수는 없는 건지.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그의 쇄골 위에는.
처음 보는 푸른 낙인이 빛을 내며 가지런히 찍혀 있었다.
반원에 비뚤어진 각도로 겹쳐진 두 개의 삼각형.
후작의 눈꼬리가 살짝 비틀리고,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눈동자에 스쳐 간다.
불꽃이 작게 웃음을 홀렸다.
“이제부터 온갖 잡놈들이 꼬이기 시작할 거다.”
초롱너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 파르르.
높은 언덕 위에 심어진 나무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450호후 눈먼 달,지는 꽃 (27)
당장 싸움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달빛이 후작에게 낙인을 박자마자 벌써 튀어나오다니.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렇게 빠르게 반응하는 걸 보면 대단히 강한 요괴일 확률이 높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후각과 기동력을 가진 녀석이겠지.
“뭔……
초롱너울도 어이가 없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낙인이 생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다니.
흔한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해안의 나무들은 동시에 혼들리지 않고 한 그루 한 그루씩 작게 흔들렸다.
“으응?”
다시 보니.
그림자는 ‘나타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건 나무와 나무 사이로 잽싸게 움직이며 오히려 우리와 반대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저거……
작고 약해 보인다.
싸울 준비를 하던 후작이 뭔가를 느낀 듯 살짝 표정이 굳어졌고.
“히힝!”
검은 모래 위를 박차고 나가려던 미유를 제지했다.
- 화르르!
커다란 눈 모양으로 변한 다음, 나무 사이를 들여다본 초롱너울이 크게 소리쳤다.
“야! 거기 너! ”
그 순간 작게 움직이던 그림자가 빠르게 멀어졌다.
불꽃이 외쳤다.
“갖바람쥐! 도망치면 죽는다!”
그 순간 나무 위의 작은 그림자가 멈췄다.
“일로 와!”
“빨리 안 오냐?”
- 툭.
작은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힘없이 떨어졌고.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다람쥐?”
크기는 늑대와 비슷한 정도인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데다 화려한 신발을 신고 등 뒤에는 멋들어진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커다란 다람쥐는 고개를 수그리고 몹시 우울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걸어왔다.
그사이 초롱너울은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초롱너울을 보는 다람쥐의 눈빛은
무척 슬퍼 보였다.
“넌 뭐가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불만 있어? 오랜만에 나를 봤으면 반가워해야 할 거 아니야?”
“초롱너울 님… 이신 겁니까?”
“그래. 나라니까. 몇 번 봤으면서 왜 어색한 척을 하고 그래?”
“네……. 반갑습니다.”
분위기가 약간 풀어지려는 순간.
- 스릉.
후작이 칼을 빼들었다.
“이게,내게 새겨진 각인에 끌린 마물인가?”
“흐익……!”
서늘한 살기가 눈앞에 밀려들자 다람쥐는 기겁하며 숨도 못 쉬고 바닥에 쓰러졌다.
“야! 좀! 칼 집어넣어!”
“날 먹으러 온 마물일 텐데.”
“정말이지,말도 안 되는 소리네! 바로 도망가려고 한 거 못 봤어? 이렇게 귀여운데 대체 무슨 누명을 씌우는 거야. 재 좀 막아 줄래?”
불꽃이 나를 바라봤다.
늑대만 한 크기의 다람쥐는 후작과 나와 불꽃과 ‘야옹이’를 살피면서 연신 눈을 굴렸다.
칼을 빼들었던 후작이나 거대한 야옹이보다 불꽃을 바라볼 때 가장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저,용서해 주세요!”
바닥에서 다시 일어난 다람쥐가 불꽃을 향해 외쳤다.
“왜? 잘못할 거야?”
“아니요,그건 아니지만……
“묻는 거만 잘 대답해 주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걸.”
“흐윽……
다람쥐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악명이 얼마나 높길래.’
저 정도의 두려움이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꼴을 당하리라는 확신이 있는 거 같다.
〈선발대들〉처럼 그림 속에 가둬 놓는 짓이라거나.
그녀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줄 수 있는 고통은 굉장히 다양해지겠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후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런 해안에 다람쥐라……. 무척 기이한데.”
평범한 다람쥐로는 안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의문이다.
초롱너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물 싫어하잖아? 항상 숲에 있었고. 정말 재 먹으러 온 거야?”
다람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숲에… 숲에 먹을 게 없습니다. 나무에 열매들이 열리질 않고 있어요!”
“뭐? 언제부터 그랬어?”
“나무들에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히지 않은 지 벌써 2년 반 정도 됐어요. 사실 그전부터 겨울나무
열매들이 시들하기는 했지만요……. 그러다 봄이 되자 남동쪽에 있는 숲에서부터 열매들이 맺히질 않더니, 지금은 열매가 맺히지 않는 범위가 점점 넓어졌어요.”
“그래서 해안까지 안 돌면 먹고살 수가 없다는 거야?”
“맞아요! 그나마 열리는 열매들도 다 이렇다니까요?”
다람쥐는 열매가 듬성듬성 맺힌 가지를 내밀었다.
까맣게 쪼그라든 열매들을 보고 불꽃이 말했다.
“어머나. 이거 개벽나무 열매지? 딸 때부터 이랬어?”
“네……. 그나마 이 정도면 상태가 좋은 편이에요.”
다람쥐가 설명을 이었다.
대략 삼 년 전부터 시작된 현상.
땅에 피는 꽃도.
나무에 피는 꽃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다.
낙화落花.
자연스럽게.
수정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으로, 열매는 달려도 정상적인 모양을 하지 못하고 숫자도 크게 줄어든다.
“땅의 기운을 빨아낸 건가.”
내가 끼어들었다.
초롱너울도〈섬〉에서 땅의 기운을 빨아들여서 주술에 이용했었다.
부적이 감긴 나무못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다람쥐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달까요……
눈앞의 무리 중에서는 내가 제일 편한지 나를 볼 때 그나마 표정이 풀어진다.
“정확히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땅의 기운을 빨아들인다고 하기에는 인간이 먹는 곡식은 그대로 멀쩡히 자라나고 있는걸요.”
설명을 들은 초통너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문제인데,미리별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미리 별?”
낯선 이름에 의문을 표했다.
“이 땅의 주신主神이야.”
초롱너울의 대답에 후작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곳에 신이 있나?”
얼굴에 분명한 불쾌감이 스친다. 이방의 신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 설마 그레이시엄처럼 이교도 타령
따위를 하는 건 아니겠지.
꽉 막힌 녀석이니 가능성은 있다.
생각해 보면 후작의 신앙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적도 없고.
‘예메라가 딱인데.’
고통,비명,참회.
그런 게 잘 어울린다.
불의 여신 비르폰도 좋고.
일리엔의 유물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 걸 봐서 또 어떨지.
그런데 저따위 성격에 신에게는 정말 고개를 숙일까?
의문이다.
저 불쾌한 표정은,어쩌면.
‘신 자체를 싫어할지도.’
“그래. 200년 전 즈음 동면에서 돌아온 꽃의 신이지.”
초롱너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설명했다.
이 땅의 정 중앙에 가온누리라는 끝없이 넓은 들판이 있다.
3월부터 10월까지 서로 다른 꽃이 만발하는 꽃의 천국.
어떤 곳은 색색의 일곱 빛깔 꽃이, 어떤 곳은 새하얀 안개꽃이.
수십만 평에 달하는 너른 대지가
몽환적인 보랏빛 카펫으로 뒤덮인 장소도 있으며.
언제나 수백 종류의 꽃이 그윽한 각자의 향기를 뿜어내는 곳.
오랫동안 잠들었던 꽃의 신.
미리 별.
그녀는 200년 전 돌아와 황폐했던 가온누리를 다시 되살렸다.
미리별은 꽃을 사랑하는 존재들의 신앙을 받고 살며.
특히 자신의 의지로 일 년 내내 꽃을 재배하며 미리별만을 섬기는 ‘자유로운 백성’들의 섬김을 받는다.
“그런 녀석이 있다니……
동방에 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아이작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
‘죽어 버린 세계라고 했는데.’
위험하고 황폐한 곳.
아이작의 활동기에 〈꽃의 신>이 잠든 상태였다면 맞아 떨어진다.
‘어차피 당시에는 너무 바쁜 탓에 동방을 깊이 살펴보지도 않았다고 했으니까.’
초통너울이 설명을 이었다.
“중앙의 가온누리뿐만이 아니야. 땅 전체가 미리별의 영향을 받아. 그녀가 동면에 들면 꽃 대부분은 시들어 죽고,꽃뿐만 아니라 ‘수정’에
관련된 것들도 힘을 잃어버리지.”
“그 신은 누구의 편이지?”
후작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인간인가? 아니면 요괴인가?”
좀 유치한 질문 같은데.
확실히 궁금하기는 하다.
초롱너울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꽃을 아끼는 건 인간도 요괴도 마찬가지야.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전부 그녀에게 ‘신앙’으로 받아들여 지니까……. 미리별은 요괴와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걸 좋아해.”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의문이었다.
인간과 마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도시 같은 건 마계의 전갈 녀석이 만든〈가장 만족하는 환상〉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한 명에게 덧씌우지는 환상 감옥. 현실에서는.
어느 한쪽이 강할 수밖에 없고.
강한 쪽은,반드시一
“조화라고? 이 땅은 철저히 요괴가 득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내 질문에 불꽃이 대답했다.
“그렇지. 그래서 대체로 미리별은 인간을 도와줄 때가 많아. 요괴가
인간을 잡아먹을 때도 적정량만 먹으라고 하고,잡아먹으면 됐지 쓸데없는 고문은 자제하라며 막는 편이지. 인간들이 자주 먹는 과일 따위는 주신의 권능으로 신경 써서 번성시키기도 하고.”
후작의 표정이 한층 더 미묘하게 비틀어진다.
“그래서,그 잘난 꽃의 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데?”
대략적인 설명을 끝낸 초롱너울이 다람쥐에게 캐물었다.
“그게… 미리별 님이 계시는 가온 누리에는… 최근 거대한 결계가
세워졌습니다.”
“〈자유로운 백성〉들을 제외하면, 꽃의 땅은 원래 출입이 까다롭기는 했잖아?”
“그 정도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거대한 결계의 벽이 세워졌습니다. 아예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게요. 완전히 차단입니다.”
“저도 그래서… 열매를 구하기가 힘들었지만,가장 풍요로운 땅인 가온누리에는 아예 들어가지 보지도 못했지요.”
“다른 건? 계속 말해 봐.”
“그리고,가온누리 밖에서 요괴에게 짓밟히는 인간을 도와주던 ‘자유로운 백성’들도 가온누리로 불러들이고 있어요.”
“미리별이 그런 멍청한 짓을 해?”
“맞아요!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곡식들은 그대로 두면서… ‘꽃’과 ‘수정’에 연관된 것부터 힘을 빨아 들이는걸요. 미리별 님의 영향력이 분명히 줄어들 텐데 말이죠!”
“힘이 빨려드는 방향은… 당연히 남동쪽이 겠지?”
“자칭 귀왕鬼王,금빛 도깨비들이
있는 쪽 말이야.”
다람쥐는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이름을 듣는 듯 오들오들 떨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초롱너울은 짚이는 곳이 또렷하게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을 섬으로 쫓아낸 상대인가?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네가 말했다고 안 그럴 테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애초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그 녀석 들의 귀문밖에 없으니까. 더 말해 줄 거 없니?”
“정말 없어요! 다 말씀드렸는데요. 정말이에요!”
“그래? 너 믿을까?”
“그럼요! 믿어 주세요! 믿으세요! 저는 정직한 다람쥐예요!”
“하지만 못 놓아주겠는걸.”
- 화르르!
허공에 시커먼 집게발 그림자가 솟아났다.
집게발은 다람쥐를 잡아 허공에 드높이 들어 올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정말로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다고요! 시키면 정찰 노릇이라도……!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제발 시키지 말아 주세요!”
“으응.”
시커먼 집게발은 다람쥐를 거대한 야옹이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핫,살려 주려고 이러는 거야.”
“네? 무슨 소리예요……!”
그때 였다.
“느꼈나?”
불편한 기색으로 집게발을 보던 후작이 초롱너울에게 불쑥 물었다.
“당연하지.”
불꽃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영역에도 걸려들고 있었다.
‘지하.’
지행술地行術.
지하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술법.
에라스트에 숨어 있던 유령 간부가 사용하던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 발아래 느껴지는 건 그때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자연스러운데.’
“아는 녀석이겠지? 이름이 뭐냐?”
슬쩍 불꽃에게 물었지만.
“몰라. 낯선 녀석이야.”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했다.
작은 다람쥐 요괴의 이름도 알면서 지금 느껴지는 강한 요괴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가?
‘진명을 아는 게 제압이 도움되는 느낌이었는데.’
그 순간.
초롱너울이 크게 소리쳤다.
“뭐냐,이 처음 보는 땅귀신은! 내가 모를 턱이 없는데,3년 새에 새로 생긴 놈이냐?”
- 쑤욱!
다람쥐를 내려놓고 더 거대해진 집게발 그림자가 그대로 모래밭에 깊이 박혔다. 시커먼 모래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이쿠,안 빠지네? 도와줘!”
‘검뢰.’
- 과앙!
모래 깊이 숨은 녀석의 방향으로
칼을 박고 뇌검을 날렸다.
- 파지지직!
모래밭 전체를 구워 버리는 자줏빛 뇌기가 번져 나가고.
“@%(%@(@[email protected]!”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말 그대로의 ‘흙뭉치’가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흙덩어리는 머리가 달린 커다란 몸통과 팔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반투명한 검은 안개 같은 게 몸의 분리된 부분을 휩싸며 함께 헐떡이고
있었다.
- 과앙!
그 상태로도 흙덩어리는 눈앞의 후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안개가 흙덩어리를 아래에서 튕기듯 받쳐 줬다.
흙덩이의 입이 쩍 벌어지는 순간 언제부턴가 빼어져 있던 레안드로의 칼은 새벽 바다만큼 푸른 섬광을 뿜어내며 흙덩어리의 오른쪽 머리 위에서부터 왼쪽 시커먼 안개까지 한 번에 베어냈다.
흙덩이가 퍽 하고 폭발했다.
“이건 확실히……
땅귀신의 잔해 위에서 레안드로가 쇄골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날 먹으려고 했군.”
나는 흙덩이의 잔해를 바라봤다.
강한 상대였다.
힘을 크게 쓰지는 않았지만.
검뢰는 검뢰.
아무리 땅속에서 맞았다고 해도 한번을 버티고 레안드로를 향해 돌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수 홉수.’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도 안 되나?’
아예 초록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 파앗!
검은 그림자가 위로 솟아올랐고, 기다렸다는 듯 그쪽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초록색 불꽃에 그대로
집어삼켜졌다.
그림자에 묶인 줄은 이미 초록색 불꽃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집게에 잘려 나간 뒤였다.
U | 99
- 화르르!
한층 더 부풀어 오른 초롱너울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말했잖아, 이 녀석들 힘은 전부 〈묶여> 있다고.”
“흡수하고 싶으면,이 힘과 혼들을
〈묶은〉녀석을 베어야 해.”
“그런가……
“우리 공통의 적이지. 잘해 보자고.” 초롱너울을 보는 후작의 표정이 점점 단단히 굳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