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눈먼 달,지는 꽃 (18)
여자가 뽐내듯이 웃는다.
받아들여야 마땅한 제안을 했다는 표정이다.
잠시 갈등에 빠졌다.
지금 후작은 분명히 무력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안이라지만 사실은 협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겠지.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멍한 후작과,여자와,작은 인간들이
꼬물거리는, 갑자기 길게 펼쳐진 병풍을 바라본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말대로.
나는 정말 현혹되지 않은 것일까?
의심스러웠다.
이미 함정에 빠트려 놓고 선택을 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동료.
아니라면 이대로 결계에 가두고.
‘언제까지?’
알 수 없다.
애초에 등불들의 정체도 알아내지 못했다.
마을의 다른 인간들은 물론.
해안에서부터 함께했던 안내원의 정체조차 알지 못했다.
‘역시……
눈앞의 요괴와 협력하는 게 쉽고 빠른 길이 아닐까?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잘했……
홉족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안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칼날은 계산한 곳에 정확하게 떨어진다.
- 투둑! 투두둑!
‘보인다.’
다른 모든 건 사라졌어도.
녀석을 칭칭 감고 있는 실들만은 몹시 두껍고 겹겹이었기에 여전히 감각할 수 있다.
다리에,가슴에,팔에,두 눈에, 입에,귀에,입에 몇 겹으로 감긴 투명한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뭘로 만들어져 있을까.
잘려진 거미줄이 소리도 그림자도 없이 흩어진다.
“…다고 칭찬해 주려고 했더니. 왜 후회할 선택을 하고 그러세요?”
후작을 묶은 거미줄은 아직 반도 자르지 못했지만.
여자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 스륵!
실이 당겨지고,축 늘어진 상태의 레안드로는 그대로 여자의 옆으로
끌려간다.
여자가 씩 웃었다.
후회할 선택이라.
어차피 계속 후회하며 걸어왔다.
후회할 선택을 하며 몇 번씩이나 생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게 맞다.
‘모르니까.’
알 수 없는 건 지금 내 상황만이 아니다.
눈앞의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
가지고 있는 능력과 배경.
맺고 있는 관계는 물론이고.
뭘 아끼는지.
뭘 잃어버렸을 때 분노하는지.
화날 때 어떤 표정이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이미 몇 번씩 관찰해 온 상대.
성격도 재능도 파악하고 있다.
계산은 어렵지 않다.
후작이 위험한 녀석이라고 해도, 이미 아는 위험을 감당하는 편이 더 낫다.
'먼저 배신하고 싶지도 않고……
물론.
그런 감상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다.
여기서는 싸워 봐야 한다.
처음으로 보는 본토의 요괴.
15레벨 탐지를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하다.
인간을 화폭에 가둘 만큼 술법의 끝을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녀석에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한 다른 요괴들에게〈밀려난〉 녀석이다.
‘이 여자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동방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지.’
죽을 때 죽더라도.
해본다.
‘검염……
최대 출력.
- 과■과과과과과!
만들어 낸 파괴의 정수.
인위적인 검기에 죽음의 기사의 업화를 담는다.
마치 주위의 모든 공기가 기름이 된 것처럼 불꽃이 폭발했다.
술법도.
결국은 감추는 힘에 불과하다.
과부하가 걸려서 더 이상 존재를 숨기지 못하는지 허공에 겹겹으로 드러난 실들이 타올랐다.
- 과광! 쿠과과과과!
기둥이 무너지고 바깥의 복도와 방 전체가 무너졌다.
형태를 갖춘 것이 무너질 때마다 불꽃은 한층 더 강하게 치솟았다.
천장과 벽이 흔들려서 내려앉고 집 전체가 숨을 거두며 모래처럼 무너 졌다.
“어휴……
손에 후작을 쥔 여자가 한숨을 쉬며 훌쩍 물러났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집 전체가 붕괴했지만 붕괴한 잔해는 여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무너진 집 뒤로 마치 벽을 세우듯 인간들이 길게 둘러싸고 있었다.
초현실적인 장면.
그러나 꿈틀대는 잔해들도,
- 끄드드득!
샛노랗게 변하며 몸이 이리저리 변형되기 시작하는 인간들도.
칼날처럼 또렷하고 선명하다.
‘저자들은……
인간들은 순식간에 변해 갔다.
머리가 반죽처럼 길게 늘어나며 사마귀 형태가 되기도 했고,사지가 붙은 뒤 부풀어 오르면서 거대한 달걀 형태로 변하기도 했다.
목이 쭉 길어지고 팔은 내려오며 손발에 갈퀴와 발톱이 달린 직립
도마뱀으로 변한 인간도 있었다.
미유와 놀아 주던 아이들은 얇은 날개가 돋아나고 머리에 더듬이가 생긴 나비 형태로 변했다.
우리를 방에 재워 주고 밥을 주던 털투성이 남자는 활활 불타고 있는 바닥으로 걸어가 그대로 엎드렸다.
그의 온몸에서 두꺼운 갑각질이 돋아나며 삐죽삐죽하던 머리털이 세 갈래로 뭉쳐 그대로 새까만 뿔로 변했다.
아이들이 변한 나비는 팔락거려도 대체로 그 자리에 머물 뿐이었지만 거대한 풍뎅이가 갑각질의 날개를 한 번 크게 펄럭이자 주위의 불이
순식간에 좌우로 밀려났다.
고작 주위를 한 번 둘러볼 정도로 짧은 시간에.
모든 변화가 끝나 있었다.
백을 훌쩍 넘어서는 각양각색의 요괴들이 나를 둘러쌌다.
‘…어딨지?’
부담스러운 살의를 느끼며 후작을 찾았다.
멀리 떨어진 나무 위.
녀석은 아직 축 늘어진 채 여자의 손끝에서 나온 실에 감겨 있었다.
머리만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고, 그나마 목부터 발끝까지는 병풍에 둘둘 말린 상태였다.
최면에 빠진 듯한 눈빛이다.
“젠장……
그래도 조금은.
어쩌면 조금은 기대를 가졌는데.
그런 자신이 우스워졌다.
위기에 강한 놈 아니었나.
‘나랑 싸울 때는 그랬는데.’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야말로 터무니없는 힘을 내는 후작을 항상 목격해 왔다.
어쩌면.
연기를 하고 있었을 거라고.
당하는 척하며 상황을 주도하고 뭔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꼴을 보니 완전히 맛이 가 버린 듯하다.
‘진짜 베어 버릴 걸 그랬나.’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저런 한심한 꼴이라니.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마음을 깨끗하게 버렸다.
이제는.
온전히 내가 해결해야 한다.
후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여자와 나 사이의 공간을 가만히 응시한다.
‘과연 밀어낼 수 있을까?’
공격력의 극대화.
내가 통제 가능한 영역을 모조리 검기화한다고 해도 그게 상대에게 어느 정도까지 통할지 알 수 없다.
애초에.
어디까지가 이 녀석의 영역이라는 이야기인가?
무너진 방?
불타 버린 집?
이 마을?
인간들은 요괴로 변했다.
그렇다면 살던 집 자체는 어떨까?
평범한 집이 맞기는 할까?
아니면 이 산골?
어쩌면 이 섬 전체는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부수고 얼마나 싸워야 할지 모른다.
- 쿠구궁……!
집중해서 저 녀석을 공격할까?
아니면 일단 방어 태세를 취할까?
머릿속에 복잡한 계산이 오갔지만 나는 곧 생각을 접었다.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어디까지 상대의 말대로 ‘그려진’ 영역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무대’를 전부.
부숴 버린다.
엠버의 해안가에서 빙의된 공작을 살해했던 것처럼.
〈덮어씌우고.〉
〈안에서도 터트려 버려.〉
결국,구분할 수 없다면 모조리 태워 버리면 된다.
‘인벤토리- 최대화.’
허공을 향해 정신을 집중한다.
다만.
이번에는 겨냥하는 대상이 몹시 넓으므로.
〈상상의 폭은 구체적이고 좁을수록 더 강하고 효과적이지.〉
까마귀의 말을 다시 새긴다.
‘확실히……
익숙한 것은 검의 형태.
하늘에서,손끝에서,땅에서 칼이 뻗으며 모든 게 부서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내리꽂고,베어내고,찌르는 칼은 점점 더 거대해진다.
오직 나에게만 느껴지는 형태지만 그렇기에 한층 더 또렷하다.
공격하는 것은 적이 아니다.
대지. 허공. 하늘.
결계가 쳐져 있다면.
이곳이 거미줄이면,거미줄이 매인 나뭇가지를 뜯어 버린다.
‘덧칠’되어 있는 화폭을 찢어 버린다.
점점 거대해져 가는 파괴의 영역에 ‘타깃’이나 ‘목표’ 따위는 없다.
힘을 통제하지 않기에.
실은 형태조차 명확하지 않다.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지.
앞으로 뾰족한지.
검신이 구부러져 있는지.
확실한 것은,그저-
거대한 충격과 파괴.
- 파삭.
- 파사삭.
요괴들이 뿜어내는 살기도.
불꽃도,무너져 내린 집의 잔해도, 바닥에 핀 풀잎도 소멸되어 간다.
- 쿠구구구구구구!
하늘이 찢어지고.
눈앞의 땅이 무너져 가라앉는다. 지워지면서 내가 딛고 선 장소를 텅 비워 버린다.
아래는 새카만 어둠.
물론 땅 따위 딛고 있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니……!”
무너져 내린 땅은.
애초에 내 영역으로 침식했기에.
허공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건,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하다.
그 어떤 나락이 까맣게 입을 벌려도 나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거 참……
여자의 얼굴이 구겨진다.
저 아래로 무너져 내린 땅이 다시 솟아오르며 입을 벌린다.
살아 있는 것처럼 뚜렷한 악의를 가진 땅이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덮쳐 온다.
- 콰쾅!
내영역을 깨물면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땅을 보자 웃음이 터진다.
저런 건,명백하게.
‘어긋나지.’
세계의 상도에 어긋난다.
현실에 충돌하며.
물리 법칙과 반대되고.
〈이미 구축된 질서〉와 명백하게 괴리되어 있다.
그런 것이라면 세계의 〈조정〉을 피할 수 없다.
‘껍질은 벗겨냈어.’
법칙에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일수록 술법은 단단히 유지된다.
힘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면.
상대를.
세계를 납득시켜라.
아이작이 말한 결계의 기본이다.
여자가 만든 마을이라면 몰라도, 이런 건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힘의 싸움이고.
술법이 아니라.
순수한 힘의 대결이라면.
'자신 있지.’
- 콰과과광!
보이지 않는 물리력이 덮쳐오는 땅을 부숴 버렸다.
나를 씹을 이빨을,감아올 혀를, 소화할 내장을 아예 거대한 허무로 만들어 버린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괴의 칼은 부서진 땅을 넘어.
여자를 향해 찔러들어 간다.
“크아아아아!”
공격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거대화한 수십의 요괴가 나에게 달려든다.
쏘아지는 화살과 같은 속도.
여자와 요괴들 간에 신경이라도 이어진 모양새다.
하지만.
‘신경이고 뭐고……
그대로 구워 버린다.
‘검뢰.’
- 파지지지지직!
검기로 형성된 수백 가닥의 번개가 바닥에서부터 솟아 적들을 찢는다.
아무리 빨리 날아도.
아무리 요령껏 날아도 비행으로 번개를 따돌릴 수는 없다.
날지 못하는 요괴들이야 구태여 언급할 것도 없다.
스친 것들도 몸이 찢어지고.
몸에 직격한 것들은 형태도 없이 분쇄된다.
하지만.
“으아아앗! 이거 너무 무섭네요… 생각보다 훨씬 강하잖아.”
튕겨져나간 요괴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작게 부서진 흙덩이로 변해 있었다.
“하하하……
“이것도… 가짜였나?”
“저야 내기에 져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데 처박혔어도, 저를 따르는 아이들을 이런 섬 따위에 데리고 올 리가 없잖아요. 귀여운 고양이 하나만 데리고 오면 충분하지.”
간격은 50미터.
내가 증발시켜 비린 공간 바깥에서 여자가 말을 잇는다.
“아 참,정말 내가 싫다면 이렇게 협박해야 하나……
여자는 두껍고 새카맣게 각질화된 손가락으로 후작의 목을 감쌌다.
“소중한 동료가 죽는다고요?”
손가락 끝에 뾰족하게 솟은 침이 후작의 뒷목을 1센티 간격을 두고 간질거리듯 겨냥했다.
442호후 눈먼 달,지는 꽃 (19)
저 녀석이 정말 인질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소중한 동료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죽여 버려도 마음은 전혀 아프지 않다.
‘찌르든가.’
하지만 저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아깝기는 하다.
“그건……!”
“내 말 들을 거야?”
뾰족한 침이 후작의 목에 가까이 다가간다.
“정확히 5초 주겠어. 그사이에 대답하지 않으면 이 아이의 체액을 전부 빨아먹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간격을 두던 침이 계속 점점 가까워졌다.
“3초 남았어.”
구할 수 있을까?
‘무리다.’
너무 멀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그대로 찌르겠지.
‘이제 혼자 다녀야 하는 건가.’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최소한 저것보다는 더 활약하기를 기대했는데.
후작이 숨만 크게 쉬어도 날끝에 찔려 피가 맺힐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 좌악!
후작을 둘둘 감싸고 있던 병풍이 폭발하듯 갈기갈기 찢어졌다.
‘뭐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흐릿하던 레안드로의 눈에 강렬한 빛이 들어온다.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던 칼이 크게 휘둘러졌다.
흩날리는 병풍의 잔해를 쓸어내며 바람이 불었다.
새카맣고 거대하게 변한 여자의 손가락이 날카로운 침과 함께 반으로 잘려 나갔다.
끼어들까 말까 고민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설마.
기회를 보고 있었던 건가?
‘놀라게 하네.’
잘려 나간 다리에서 초록색 피가 뚝뚝 떨어졌다.
1미터가 넘게 거대화된 손가락을 넘어서 어깨까지 베어져 나갔다.
“이게……?”
여자는 깜짝 놀라 경계하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도 나름대로 기민한 대응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칼바람은 여자의 옆에서, 뒤에서,위에서, 아래에서 불었다.
‘바람?,
공격은 바람을 가르지 않았다.
여자를 할퀴는 건 바람 그 자체.
허공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바람은 투명한 날개를 넓게 펼치고 여자의 그림자까지 갉아먹는다.
바람 전체가,검기였다.
- 서걱!
바람은 허공에서 단아한 의복을 찢고 새하얀 살을 찢어댄다.
여자의 본체가 드러났다.
투명한 실을 뿜어내는 갑각질의 팔다리가 녹색 피로 물들며 바닥에 흩날렸다.
“지금이다.”
눈을 뜬 후작이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뭘 원하는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녀석이 가둔 적을.
친다.
‘검뢰.’
윤곽도 없는 번개가 파괴력만을 극대화한 거대한 뇌검이 되어 적을 향해 폭사했다.
천지를 울리는 뇌명雷鳴도 없다.
눈부시게 요란한 색채도 없으나, 지금껏 사방으로 터져 나간 번개를 모두 응집한 것 같은 일격.
바람에 갇혀 찢기던 요괴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오히려 뭉친 힘이 요괴에게 모두 소모된 이후에야,천둥소리와 함께 가루 사이로 무수한 자줏빛 뇌기가 사방을 유린.
새카맣게 보이는 균열로 흐르는 번개들이 무대의 장막을 걷는다.
단촐한 민가들이.
오밀조밀 세워져 있던 토템들이 사라졌다.
‘덧칠’된 부분이 홀러내리며 진짜 모습이 나타났다.
불길하게 바랜 부적.
까맣게 말라죽은 나무.
회색 해골로 가득한 황폐한 땅이 드러난다.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당장이라도 바싹 말라서 산산이 부스러질 것 같은 돌무더기들.
그 사이사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들만 피어 있다.
‘조화……?’
생기도 없었고 돌무더기 사이에 규칙적으로 꽂힌 걸로 보아 진법의 일부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 드러났다면.
‘끝난 건가.’
붕괴한 결계.
걷힌 눈가림.
여자의 본체는 분명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데… 왜 없지?’
초록색 빛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강해지면서 정수 홉수가 가능한 녀석들이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적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리가 없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후작과 시선을 마주쳤다.
어쨌거나.
“어떻게 된 거지?”
더 강렬한 의문이 눈앞에 있다.
“설명해 봐.”
갑자기 병풍을 찢고 칼을 휘둘러, 아니 바람을 휘둘러 요괴를 찢은 레안드로가 피식 웃었다.
“활약은 잘 봤다. 마물 주제에… 그래도 신의는 있는 녀석이더군.”
감동이라도 한 건가.
물론 녀석을 상대로 신의 따위를 발휘한 적은 없다.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레안드로의 마음이지만.
“•••네놈,전부 연기였던 거냐?”
누가 봐도 후작은 훌려 있었다.
눈도 몸도 풀어진 상태로 여자의 손아귀에 현혹되어 있었다.
녀석을 알 만큼 아는 나조차 무척 초조하고 걱정될 정도였으니까.
‘그게 연기라고?’
아예 배우로 전직하든가.
왜 대상조 같은 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슨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죽은 요괴가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살짝 들 정도다.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위화감이 덮쳐 와서, 내가 지배하는 검의 간격을 살갗에 닿는 거리로 압축시켰올 뿐이다. 위협이 닿으면 몸이 깨어나도록. 인식은 계속해서 살아 있었지만.”
‘세 걸음의 간격… 그런 건가.’
후작에게서 흡수했지만 소화하지 못한 패시브 스킬이 떠오른다.
몇 번을 흡수했는데.
아직 이 녀석의 밑천조차 전부 다 털지 못하다니.
후작이 생각보다 더 괴물이라는
판단이 머릿속에 확고해진다.
게다가 한충 더 불길한 것.
“방금… 그 바람은 뭐였지?”
“하하핫……
레안드로는 어울리지 않게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아까부터 자꾸 웃어대는 게 몹시 불길하다.
“알아봤을 텐데? 바람에 검기를
실어 봤다.”
저건 겸손이다.
‘실은’ 정도가 아니라.
바람이 검기로 변했다.
“널 계속 보니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지. 아무래도 내 적성에는 바람이 맞더군.”
그런 것도 적성이 있단 말인가?
한정된 영역이었고.
잠깐 동안이었지만.
분명 바람이 검기가 되어 여자를 갈기갈기 찢었다.
“모두 네 덕분이다.”
“내 덕분……?”
“그런 엄청난 용량의 힘을 갖고도 응용이 부족한 모습을 계속 봤다. 그게 오히려 상상을 자극했지.”
“속 터진다는 기분을 알고 있나?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었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죽이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으니.”
녀석의 말투에서 상당한 호의가 느껴졌지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니,내 쪽에서 먼저 죽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 팟!
그 말을 끝으로 후작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민가들이 모여 있던 방향이었다.
'미유인가.’
딱히 미유를 해칠 이유는 없으니 무사히 돌아올 확률이 높다.
계속 주위를 살폈다.
‘초통너울……
엄청난 요괴다.
이 정도 상대면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적이다.
아무리 내가 몇 번의 회귀를 거쳐 강해졌다고 한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리가 없다.
저번에 크게 홉수하긴 했다지만, 레안드로나 기스-제-라이만 봐도 얼마나 환하게 빛났던가.
‘잘 찾아보자.’
‘이렇게 흔적도 안 남을 리 없어.’
‘죽인 건 확실한데.’
당황하던 여자의 얼굴과 검뢰에 걸리던 감각을 생각하면 분명하다.
- 파삭! 파사삭!
혹시나 싶어서 근처에 널려 있는 돌무더기들을 부숴 갔다.
절반 정도의 돌무더기를 가루로 만들었을 때.
- 반짝!
암녹색으로 빛나는 불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솟아나 내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응?”
좀 많이 이상하긴 해도.
어쨌건 초록색 계열이다.
‘혹시 정수일지도 모르지.’
동방의 요괴니까 스타일이 조금 다르더라도 양해할 의사는 있다.
손을 가져다 댔다.
‘정수 흡수.’
‘•••흡수.’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손을 가져다 대자 암녹색 불꽃이 오히려 나를 비웃는 것처럼 주위를 빙빙 돌았다.
‘열기가… 없어.’
그렇다고 아주 차갑지도 않다.
으스스한 느낌도 주지 않는다.
허공보다 아주 조금 더 따스해서, 그곳에 뭔가 있다는 확신만 주는 딱 그 정도다.
다시 한번 해볼까?
암녹색 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수……
“만질 거면 몸이 있을 때 만지지 그랬어?”
“뭐?”
- 달그락!
“모양이라도 탱탱하게 만들어 줘?
질감은 없지만… 데워 줄까?”
떠다니는 불이 웅웅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불꽃은 피하지도 않았고, 칼은 불을 그대로 통과했다.
분명히 칼의 간격 안에 있었는데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불꽃은 놀리는 것처럼 내 주위를 빙빙 돌다가 나를 마구 통과하며 다녔다.
“크크크크……
불꽃이 발 없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선연한 혹과 백,붉음으로 그려졌던 여인은 외관은 그대로였으나 아예 반투명해졌고,색이 훨씬 옅어져 있었다.
손발도 뚜렷한 형체 없이 연기처럼 허공에 혼들거렸다.
“초롱… 너울?”
내 몸을 통과하는 불꽃를 손으로 잡아채 보려 했지만 역시 허무하게 바람만 가를 뿐이었다.
불꽃이 있는 곳을 얼려도 봤지만, 불꽃은 우수수 떨어지는 얼음 사이를 비웃듯이 움직였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된 거지?”
“나 정도의 대요大妖라면 육체를 잃어도 혼은 그대로 남지! 일생에 쌓아 올린 업은 육신이 아니라 혼에 저장하는 거야.”
불꽃이 말을 이었다.
“공포와 믿음만 얻는다면 육화는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게 되거든. 특히 나 같은 계열이라면 말이지. 이 몸은 원래 정신적인 존재라서.”
“솔직히 내 말을 들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 죽여 줘서 고마워!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이곳을 성실하게 지키는 게 계약이었는데, 이제 해방이야.”
불꽃은 싱긋 웃었다.
“그물 뒤에… 힘을 매달아 놓는 개념인가? 너도 계속 몸을 바꿔서 살아갈 수 있는 거냐?”
끊임없이 몸을 바꿔 가며 놀았다는 아이작의 말을 떠을렸다.
이 녀석도 비슷한 건지 모른다.
그러나 불꽃이 갑작스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물… 뒤… 그래. 아주 적절한
표현이야. 과연… 주술에도 조예가 깊었구나.”
“하지만 몸을 계속 바꾼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 그런 식이라면 힘의 소모가 지나치게 심해진다고. 그릇에 물을 계속 옮겨 담으면……
불꽃이 갑자기 고민에 빠질 때.
- 히히힝!
커다란 말 울음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검기화된 바람이 여자의 형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후작의 공격은 지금까지와 달리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으앗! 연기파 배우잖아. 저리 가!” 그대로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홀러 지나갔다.
“사이하군.”
후작이 인상을 찡그린다.
“콕쿡… 옆에서 얼쩡거리지 마. 나는 외모가 뛰어난 비실력파를 선호한다고. 연기만 잘하고 못생긴 너 같은 녀석은 최악이야.”
- 달그락!
못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후작의 표정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레안드로가 칼을 낮게 들었다.
‘아니,이거 위험한데.’
여자는 계속 내 몸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
“소용없어. 안 돼. 그만해.”
살기를 뿜는 후작을 보고 빠르게 경고했다.
아까부터 불꽃은 내 주위만 빙빙 돌면서 내 몸으로 들락날락했다.
이런 식이면 공격에 애꿎은 내가 휘말리게 된다.
“물리력이 안 통해.”
“그러면 사소한 원한은 서로 잊고 함께 친구가 되는 거지?”
“친구라니… 무슨 헛소리냐.”
“어차피 동방 가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잖아? 여기까지 온 걸 봐서 뭐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 텐데, 그거 내가 오래전에 숨겨 놨거든? 너희끼리 찾을 수 있겠어?”
자신 없다.
후작도 조용히 입을 닫고 있다.
설령 언젠가 찾을 수 있다고 해도 효율에서 비교가 안 될 거다.
“어쩌면 내가 치료해 준 고양이가 물고 어딘가로 숨었을지도 모르지. 그 아이가 너희보다 힘이야 약할지 몰라도 섬 지리는 굉장히 잘 알아. 숨바꼭질 시작하면 무척 괴로울걸? 헤엄쳐서 섬 밖으로 도망갔을지도 모르고.”
“어쩔래?”
443호후 눈먼 달,지는 꽃 (20)
고양이라면.
〈당신들이 베어 버린 아이를 제가 치료하느라 늦었어요.>
〈이 산으로 어떤 요괴도 들어오지 못하게 수호신이 지켜 주고 있죠.〉
초롱너울과 안내원의 말이 각각 떠오른다.
뭘 말하는 건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공격한 거대한 요괴다.
‘앞발만 고양이를 닮았지만.’
나와 레안드로의 공격을 받고도 성공적으로 도망친 녀석.
혹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한 번에 수십 미터를 도약하던 거대한 몸이 떠오른다.
그런 녀석이 뭔가 물고 숨었다면 간단히 따라잡기는 어렵다.
여자의 말대로 섬 밖에 나갔다면 한층 더 끔찍한 상황이다.
헤엄을 치는 재주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지도에 표시된 장소까지 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후작의 능력으로도 별다른 물건은 찾지 못했다.
눈앞의 여자가 술수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리력이 통하지 않으니 어차피 공격할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별다른 선택지는…….
‘혹시 그게 통하지 않을까?’
불현듯 뭔가 떠오른다.
빠르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손을 넣고,
[힘의 램프]
[세계 부정 최초 구매자의 특전! 영기나 마기를 머금고 있는 물건을 부순 다음 빨아들이는 램프입니다. 일정량 흡수 이후〈혼의 램프〉로 진화가 가능해집니다.]
[현재 용량: 1,250/5,000]
아이템 하나를 잡아들었다.
‘될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템이었다.
바알의 조각상에 그 수하의 힘을 빼앗았던 램프.
하지만 아무리 허공에 휘둘러 봐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뭘 부숴야 하나.’
- 광! 과광!
돌덩이를 부숴 봐도 홉수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도깨비불 앞에 가만히 램프를 대고 있어 봐도 역시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는다.
“호오… 힘을 홉수하는 도구잖아?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무척 훌륭한 물건이려나. 하지만 나를… 감히 나를 흡수하려면 이 정도 도구로는 완전히 무리네요. 하하핫……
불꽃의 깔깔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완만한 곡선이 아름답기는 하네. 둥글고 넓게 퍼지는 하강이 좋아. 난 항상 이렇게 경계가 애매한 게 좋다니까? 현실도 환상도… 후후.”
“협력하겠다.”
어차피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동료를 죽이라고 강요하는 상황도 아니다.
‘싸울 이유가 없지.’
여기서 더 뻗대 봐야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실패할 경우 넥스몬드와의 약속까지 어그러진다.
그에게 진짜 동방을 보여 주겠다는 장담이 이곳까지의 뱃삯이다.
“너희 둘 모두 약속하는 거지요? 나랑 사이좋게 지내기다?”
후작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울리지 않게 얌전히 있는 녀석이
뭔가 수상했다.
그 음흉한 속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꿍꿍이가 있을 거다.
바다에서 나를 관찰했던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다가,감이 잡힐 때 무슨 짓이던 하려고 들 거다.
물론 계속해서 시선을 보내 봐도 속을 털어놓지 않고 짐짓 딴청을 부리고 있다.
“어디로 가면 되나?”
후작은 내 시선을 외면하고 오히려 불꽃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그래 봤자 불꽃은 계속 내 주위만 돌고 있지만.
“따라와.”
불꽃이 내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훌쩍 앞장서지 않고 나를 재촉한다.
“움직이라니까?”
일정 거리 이상은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 같다.
“…으음.”
3미터 정도가 떨어진 채로 녀석을 계속 따라갔다.
여자의 주술이 풀려서일까.
그사이 섬의 풍경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거목들로 빼곡하던 숲은 높이 솟은 토템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마르고 앙상했다.
제대로 잎이 붙어 있는 녀석들은 하나도 없었고,나무껍질은 갈라짐을 넘어서 이미 다 스스로 떨어지고 벗겨져 있었다.
다른 사냥터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비늘로 덮이고 손발에 갈퀴가 있던 녀석들이 출현하던 계곡에는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붉은 글씨만 바위 곳곳 깊이 새겨져 있었다.
거대한 민달팽이들이 나오는 늪은 길이 10센티도 안 되는 달팽이들이 밖으로 나와 주위에서 시체를 먹고
있었고.
거대 사마귀들이 출현하던 동굴은 주먹보다 살짝 큰 정도의 녀석들이 여기저기 죽어 자빠진 채였다.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였지만, 부적이 감긴 나무못들이 여기저기 박힌 땅 자체가 여기저기 뒤틀리고 기울어져 있었기에 위태롭게 금이 가거나 무너진 건물도 있었다.
‘덧칠… 했던 건가.’
엄청난 규모의 결계다.
땅의 기운을 모조리 뽑아 주술에 사용한 모양이었다.
“으어! 으어어어!”
“이,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던 건물, 사냥터 입구에 높이 솟아오른 5층 누각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인파를 안내하던 〈선발대들〉의 안내원들이 작은 흙 인형으로 변해 바닥에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체… 바,방금까지만 해도!”
“살려 줘!”
“장난치지 말라고! 뭐, 뭐야!”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새삼 섬 전체에 걸친 주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3년 동안 계속했다고 해도……
그래 봤자.
고작 3년이다.
그동안 섬 전체를 자신의 결계로, 공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처음부터 인형들을 통해서 우리를 감시하고, 힘을 시험한 뒤 똑바로 자신에게 데리고 온 거다.
애초에 동방으로 향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이 섬에 왔다면 비숫한 경로를 밟았겠지.
그녀는 자신의 육체을 파괴해 줄 상대를 진심으로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계약이길래.’
그 정도로 싫었으면 그냥 어기면 되는 거 않을까?
계약의 상대들에게 별로 호감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약속대로 지켜지지 않는 삶을 살아온 탓인지,계약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묘하게 느껴진다.
눈앞의 한 개체만 이토록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만약 동방의 요괴들이 모두 이렇게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어이! 거기 너!”
후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너희들 두 명 말이야!”
몇몇 인간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들 맞네. 전용 안내원까지 붙어서 깊은 곳까지 간 것 같은데 뭘 좀 아는 게 있어?”
“콕큭콕……
어느새 내 몸으로 들어간 불꽃이 갑옷 안쪽에서 짙은 웃음을 홀린다.
“야!”
“이것들이… 막아 봐!”
몇몇 인간이 마치 심문할 권리가 있다는 것처럼 길을 막아서지만, 레안드로는 가로막는 자들을 그냥 무시하고 앞으로 걷는다.
“허… 나 참……
기를 뿜어내지도 않았고.
스킬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바로 뒤에 붙어 있으니까 그런 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벽이 질서 정연하게 갈라진다.
“이 건방진 새끼들이……!”
입으로는 험하게 욕을 하면서도 몸은 순순히 길을 터주고 있다.
‘편하네.’
나도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인상이 안 좋은 건지.
분위기가 살벌한 건지 모르겠다. 덩치가 후작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녀석도 고분고분히 길을 비킨다.
“아 그런데,저 사람들……
뭔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지만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마을에서 멀어져서 해안가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슬슬,너희가 괴롭힌 고양이를 타고 갈 건데 말이야.”
“뭐? 그 녀석을……? 반드시 그래야
되는 건가?”
“당연하지! 꼭 함께 가야 해!”
고양이가 동방으로 향하는 열쇠를 물고 숨었다고 했지.
그런 의미인 걸까.
“바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안에 짠! 나타나게 할까? 재밌는 구경거리가 될 거야.”
“…그만둬라.”
시선을 끄는 건 피해야 한다.
이미 섬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는 없다.
여기서 더 일을 크게 만들면 전혀
좋을 게 없다.
‘그런 거대 괴수 위에 탄다니……
절대로 소문이 날 거다.
혹시 레안드로를 알아보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어 놨는데.’
그럼 아주 곤란해진다.
공작이 쫓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조용히… 조용히 가자.”
“그치만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불꽃이 주위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웅웅거린다.
괴수가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일단 저곳으로 가지.”
연기를 내며 솟는 뜨거운 샘물 뒤 화려한 종이등을 매단 기와지붕을 가리켰다.
넥스몬드가 있는 곳.
상인 연합의 동방 지부다.
안으로 들어갈 것도 없었다.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아십니까?”
넥스몬드는 당황한 얼굴로 밖에 나와 있었다.
빠른 상황 대처를 위해서인지, 이미 선원들과 짐도 모두 꾸린 것 같았다.
“이 사태와 관련이 있으신……
뭔가 눈치를 챈 걸까.
선장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진다.
“출항까지 걸리는 시간은?”
후작이 물었다.
“저희야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준비된 상태입니다.”
넥스몬드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떠나자.”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일단 띄워 봐,넥스몬드 선장님.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내 몸 안에 겹쳐 있다가 앞으로
튀어나온 불꽃이 웅웅거렸다.
상황을 파악한 선장의 눈이 크게 부릅떠 졌지만.
놀랍게도 나름대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저 말을… 들으면… 됩니까?”
인공 심장을 쓰는 녀석쯤 되면, 말하는 불꽃이 앞에 있어도 대화가 가능한 모양이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들이 바쁘게 출항 준비를 할 때 아까 봤던 무리가 다가왔다.
“너희들! 사람을 무시하고 어디를 그렇게 가나 했더니!”
아까 레안드로에게 순순히 길을 비켜 줬던 것 같은데.
기에 눌린 게 자존심 상했나.
아니면 얻으려는 게 있는 걸까.
꽤 끈질긴 녀석들이다.
뭘 상의했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제법 결심이 굳건해 보인다.
- 히힝? 히히힝?
이마 가운데 일부러 핏대를 세운
놈들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웠는지, 미유가 주둥이를 돌려 킥킥댄다.
“뭐냐?”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저 건방진 말은 또 뭐야……!”
“아니,진정하고.”
그 뒤로 못 보던 얼굴이 새롭게 나타났다.
한가닥 하는 녀석인 것 같다.
물론 그래 봐야 챈들러보다 좀 더 강한 정도다.
이제 저 정도 수준의 상대는 조금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측정하는 의미가 없으니
거리감이 크다고 할까.
“지금 동방에 사냥감이 전부 다 사라진 것 같은데. 건물들도 크게 부서졌고……. 그런데 우리를 내려 준 선단은 한참 뒤에나 오기로 해서. 혹시 합승할 수 있을까? 서쪽으로 다시 돌아갈 거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서쪽으로 어차피 갈 거 아닌가? 뱃삯이라면 잔뜩 베푸마! 너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지불……!”
남자가 안주머니에 넣어 둔 지갑을 꺼낸다.
“거절한다.”
획 손을 저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자식이……!”
“에이,아쉽네.”
갑옷 안에 숨어 있는 불꽃이 작게 응얼거린다.
“먹이는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 전부 데려가지 그래? 우리 야옹이 배고프다구.”
머리가 어지럽다.
“먹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꺼……
“뭐… 야?”
“그냥 가라.”
[공포 Lv.l을 발동합니다.]
“흐… 흐이이...
뭔가 얻어내려고 몰려온 인간들이 바닥에 털썩털썩 주저앉는다.
‘이 정도면 거의 자선 활동이네.’
인간을 대체 몇을 살린 건가.
초롱너울의 말대로 저들을 잔뜩 싣고 가서 괴수의 먹이로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혼자 가면 그렇지.’
지금은 넥스몬드의 선단과 함께 움직인다.
인간 선원들 앞에서 저 녀석들을 괴수의 입에 털어 넣는다면 항해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출항하겠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고 넥스몬드 선단이 슬쩍 출발했다.
북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탄 배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를 헤쳐 간다.
동방의 레플리카인 〈섬> 근방도 근해는 역시 평화로웠다.
딱히 파도랄 것도 없이 다섯 척이
세모꼴로 나아갔다.
넥스몬드 선단이 어디로 가는지 섬에서는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여기서 동쪽.”
도깨비불이 선장에게 방향 전환을 지시했을 때였다.
U * 99
“느낌이 오나 봐?”
아래쪽이 었다.
“인간들에게 야옹이가 출현해도 놀라지 말라고 해 둬.”
“선장,몸길이 100미터를 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곧 수면 위로 솟아오를 거다.”
넥스몬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적… 입니까?”
“내 애완동물인데?”
“동방으로의 안내자다. 대비할 건 없다.”
- 댕! 댕! 댕!
넥스몬드가 기함 갑판에 매달린 경보종을 크게 울렸다.
“100미터 이상의 괴수 출현 예정! 전 선원은 심적 충격에 대비할 것! 전원 차분히 심호홉을 하며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라!”
거대한 기척이 점점 빠르게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사슴이랑… 여우… 사자도 조금? 거기에 고양이를 합친 녀석인데.’
해양 생물이라고는 섞이지 않은 모습인데 어떻게 깊은 물속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 부르르르……
바다 밑에서 거대한 공기방울이 을라오기 시작했다.
뽀르르 요동치며 넓은 수면 위로 터져 오르는 공기방울은 마치 물이
끓는 것 같았다.
- 과아아아아!
수백 미터나 떨어진 곳이었고, 덩치를 고려하면 나름대로 굉장히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수면이 몹시 출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푸른 물 위로 날카로운 두 개의 뿔이 솟았다.
거의 배 한 척만 한 크기의 거대한 머리통이 나타났다.
더없이 역동적인 광경이었지만,
비현실적인 광경으로 느껴지는지 선원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입을 벌리고 괴수를 바라보는 분위기는 오히려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괴수는 천천히 전신을 드러냈다.
나름대로 네다리를 움직여 제법 열심히 헤엄을 치는 것 같았다.
“주인… 어디로… 갈까요……
다시 한번.
천둥 같은 목소리가 수면 위에서 울려 퍼진다.
“동쪽으로 20분 정도! 멈추라고 할 때 멈춰!”
“네……r
- 광! 쾅!
가벼운 폭음이 울려 퍼진다.
그나마 녀석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부드럽게 수영하는 거겠지.
“따라가면 돼.”
“아니… 그런데.”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도망쳤던 괴수의 출현도.
그 녀석이 불꽃의 말을 듣는 것도 전부 다 좋다.
하지만.
“어째서… 네가 저 녀석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거지?”
초록색 불꽃이 갑옷 밖에 나와서 빙긋 웃었다.
“응? 내가 길을 알거든.”
이게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저 녀석과…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면서!”
불꽃이 무슨 소리를 하나는 듯이 형상을 찡그렸다.
“귀여우니까,당연하잖아?”
444호무 눈먼 달,지는 꽃 (21)
‘속은 건가.’
초롱너울은 동방으로 향하는 열쇠를 거대한 ‘고양이’가 물어간 것처럼 말했다.
우리를 안달 나게 했지만.
결국 항로가 있고.
그 항로를 그녀가 안다.
그것뿐이다.
결국 그녀가 길을 가르쳐 주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죽일 수도 없고.’
‘기분을 맞춰 줘야 한다는 건가.’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봤자 도리어 약속에서 해방됐다고 기뻐하기만 하는 상대니까.
‘젠장,캐빈 애슈턴은… 이런 걸 힌트라고.’
아니.
사실 생각해 보면 반대다.
대요괴 초통너울.
그녀의 존재는 힌트 정도가 아닌 동방행 그 자체.
기이할 만큼 적극적으로 동방으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
어떻게든 안내해 주고 싶은 의지로 불타고 있다.
게다가 따라가기만 하면 거대한 이정표까지 딸려 있다.
이만큼 편하고 확실한 안내자가 있기는 할까?
‘저 녀석의 육신을 부숴야 한다는 조건은 있지만.’
작은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애슈턴이 의도한 조건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 정도 힘 없이 동방행은 역시 무리라는 거겠지.
지금 이 상황도.
초롱너울의 힘과 성격도.
거대한 고양이도 모두 애슈턴의 계획 아래 있는 게 느껴진다.
‘•••설계.’
애초에 기스-제-라이가 애슈턴을 만난 것도 동방이고.
초롱너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자연스럽다.
‘계속 이래도 되는 걸까.
애슈턴은 나를 조종하고.
나는 조종당하며 점점 강해지고,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아니,목표가 생기는 수준이다.
캐빈 애슈턴과 엮일 때마다,계속 그때그때 할 수밖에 없는 선택들이 생겨난다.
‘인형……
꼭두각시 인형이 조종사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면서도 .
그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하는 조종자는 얼마나 압도적인가.
‘그래도 해가 된 적은 없으니까.’
해가 되기는커녕.
성장의 발판인 정수 홉수를 내게 심어 준 기스-제-라이와의 인연도 애초에 캐빈 애슈턴의 안배였다.
다른 레드 플레이크는 물론.
에라스트에 관련된 이벤트들까지.
중요한 곳에서 애슈턴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시나리오 자체가……
애슈턴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진 사이,배는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 좌악!
다섯 척의 배가 거대한 ‘고양이’를 따라간다.
항해는 아주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길이 100미터의 ‘고양이’는 가벼운 파도 정도는 앞에서 간단히 몸으로 갈라낸다.
‘거의 길을 뚫어 주는 수준인데.’
하지만 그 요괴가 아니더라도.
동방으로 향하는 바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평온했다.
최소한 ‘섬’으로 왔을 때처럼 바다 정령들이 라도 출현한다든지 .
모든 걸 심연으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장벽 따위를 예상했다.
‘너무 평온한데?’
오히려 제국 근처가 여기보다 더 항해가 어렵지 않을까.
여기는 정말 위험하겠구나 싶은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아야 하는 해역이 맞나?
“솔직히 아무나 올 것 같은데.”
이 정도라면 ‘고양이’가 아니라도 충분히 항해가 가능한 수준.
후작이 짧게 어이없다는 눈길을 던지고 고개를 획 돌려 버린다.
“그게……
넥스몬드가 말을 꺼냈다.
“항로를 개척한다는 게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섬〉을 넘어 동쪽으로 가면 수십 권의 잔혹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해류와 풍향이 난해합니다. 섬 동쪽 전체가 아예 이상해역이라고 해야겠죠.”
“고작 몇십 미터 차이로 해류가 확 갈려서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람도 낮,계절,온도,밤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요.”
“으음……
“아무 힌트도 없이 지뢰밭을 걸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지뢰의 위치와 유형이 계속 변하는
지뢰밭을 말이지요……
선장이 설명을 이었다.
애초에 ‘섬’으로 향하는 길을 개척한 인간인 만큼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동방으로 가려다 되돌아오거나, 아예 바다 한가운데서 해류와 풍향의 미로에 갇혀 죽어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요. 지금까지 그렇게 사라진 배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고립된 바다에서 굶어 죽었다는 말인가?”
아사 多E.
몹시 끔찍한 죽음이다.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만.
창칼에 찔려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들었다.
넥스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굶어 죽었다기보다,말라 죽었다고 해야겠지요. 물이 없어서 죽는 게 먼저니까요.”
“바다 위에서 말라 죽었다고 한들 어차피 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저희로서도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한동안 조용하던 불꽃이 다리에서 옆구리 쪽을 타고 올라오며 웃음을
흘렸다.
“후후… 지금까지는 아예 가는 길 자체가 없었지. 풍향이나 해류는 말할 것도 없고,아예 풍향을 반대로 느끼도록〈설계〉된 해역조차 있어. 영체도 제대로 건널 수 없을 만큼 결계화된 해역도 있고.”
“영체… 도 말입니까?”
넥스몬드가 깜짝 놀라 불꽃에게 물었다.
새삼 느끼지만 넥스몬드 선장은 지금까지 겪은 경험의 질이 몹시 비범한 것 같다.
아니면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몹시 뛰어나거나.
“그래.”
불꽃이 넥스몬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했지? 바다 위에서 말라 죽은 인간 많을 거라고. 개네,굳이 고통이나 원한으로 배에 머무르지 않더라도… 결계에 의해 바다 위에 묶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정말 끔찍한 일이군요.”
선장이 말했다.
거의 섬 하나를 결계화한 요괴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할 정도라면.
확실히 그동안 동방은 갈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 같다.
기스-제-라이조차 건너가지 못한 사실도 납득이 간다.
‘그런데……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바닷길이 뚫린 후에는 대륙에서 동방으로 가는 걸 초롱너울이 막고 있었다.
연합 인간들의 동방에 대한 관심을 작은〈섬〉으로 적당히 충족시키며 항로를 막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결계는 깨지고.
위장은 드러났고.
제국과 자유 연합 곳곳에 소문을
낼 인간들만 잔뜩 남았다.
무엇보다.
‘이 배가… 문제인데.’
탑승한 기함 좌우로 두 척씩 붙어 항해하는 배를 바라봤다.
넥스몬드가 이 항로를 알게 된다.
지금도 녀석은 꼼꼼하게 항로를 기록 중이다.
만약 넥스몬드의 항로가 완성되고, 여럿에게 알려진다면.
공작이 추적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주 곤란하지.’
동방으로 가는 목적은 분명하다.
공작을 피해서 강해지고 유산을 찾으려는 거다.
진짜 동방의 존재가.
그곳과 이어지는 항로의 존재가 새롭게 알려진다면,공작의 시선은 어떤 식으로든 오히려 동방을 향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야 동방으로 가는 의미가 크게 퇴색되어 버린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불꽃에게 물었다.
“초롱너울,항로가 뚫리고 네가 사라진 이상,이제 인간들이 동방에 관심을 가질 텐데 정말 괜찮은가?
제국에는 네 생각 이상의 강자도 많다. 그 녀석들이 이제 네 고향을 위협할지도 몰라.”
면면을 알지 못하는 마탑주들과 검주들,신관들이나 연합의 강자는 제외하더라도.
무엇보다 빙의된 공작이 있다.
황실 비역에서 본 것 같은 수상한 녀석들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불꽃은 내 주위를 돌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고향에서 몇 번이고 같은 주장을 들었지. 하지만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지? 동방을 정복할 녀석이 있다면 팔이 몇 개든 들어
환영해야 하는 거다.”
“•••환영하다니?”
“강자가 적이라면 즐거운 일이다. 그와 싸워 이기는 것만 생각하면 되니까! 강함을 숭상하는 요괴로서 강자를 피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더 강한 전투,더 멋진 전투에의 갈증. 자신의 몸이 찢겨져 나가고, 혼이 소멸될 때까지 싸우는 것이 바로 요괴의 본성이다. 강자에게 찢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냐! 찢기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좋다! 고향 전체라도 좋다! 나를 이곳에 보낸 것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비겁자다. 하나,비겁자들과의 계약
이라도 계약이기에 나는 끝까지 지켰다.”
옆에서 듣고 있는 후작은 무언가 탄복했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설마 공감하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부분에서 통하는 녀석들이다.
초롱너울이야 육신이 죽어도 혼이 남기에 할 수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후작은 뭘 믿고 공감하는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저런 거에 감명을 받으니까 매번 일찍 죽지.’
옥처럼 부서지는 걸 좋아한다면 오래 살기 어렵다.
저 녀석들과 이야기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합리적인 상대가 필요하다.
“…선장.”
갑판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넥스몬드에게 말을 걸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동방에 도착해서,항로를 끝까지 완성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처음에 미리 물어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팔아먹을 건가? 아니면 모두와
공유할 생각인가?”
“그 반대입니다.”
선장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정보가 널리 알려질수록 저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누구보다도 이 정보를 적극적으로 지킬 겁니다.”
“재산이 줄어든다고?”
“황금 열매가 맺히는 나무 위치를 소문내고 다니면 제가 딸 열매가 있 을까요? 영원히 저만 알아야죠.”
“…섬이 망가졌어. 우리와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먼저 이곳을 떠났고. 추적이 두렵지 않나?”
그 말을 들은 넥스몬드가 한층 더 짙은 웃음을 짓는다.
“저 말고도 다들 연달아 그 볼 것 없는 섬을 떠났을 겁니다. 출항 뒤 선단이 동쪽으로 방향을 돌린 건 아무도 보지 못했고, 제 이야기가 나온다면 본토의 친구들이 알아서 자극적인 소문을 흩트려 주겠죠. 넥스몬드라는 개인에게 쏠린 주의는 말초적인 소문의 홍수에 휘말려서 아주 빨리 사라질 겁니다.”
상인 연합이라면 충분히 그런 걸 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상인으로서의 그의 주의에
납득하지 않더라도.
〈자유의 영사〉넥스몬드는 제국에 반대한다.
권력의 정점이며.
앞으로 제국 내의 입지가 훨씬 더 강해질 일밖에 남지 않은 공작에게 협조할 리는 없다.
‘세뇌 같은 위험은 있지만……
여기서 선장을 베는 건 불가하다.
넥스몬드 선장에게 진짜 동방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로 인해, 분명히,작게나마,편의를 보았다.
그걸 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 선장을 벤다면.
‘아주 위험해지지.’
일어나지 않은 문제를 걱정해서 확실한 문제를 일으키는 꼴이다.
후작이라는 문제를.
녀석이 그 꼴을 두고 볼까?
역시 마물이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고 할 거다.
내가 이겨도 좋을 건 전혀 없다.
여벌의 목숨이 하나 사라진다.
‘선장은 끝까지 같이 간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갈 때였다.
“나한테는.”
레안드로가 갑자기 내 쪽을 향해 돌아선다.
“안 물어보나?”
“뭘?”
“항로 유출이 불안하고 초조한 모양인데,내가 돌아간 뒤에 그걸 퍼트릴 수도 있겠지.”
“뭐야?”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하긴 이 녀석도 분명……
친구는 없다.
하지만 인맥은 있다.
‘푸른 사자 기사단.’
후작을 위해 사흘 밤낮을 수도에서 에라스트까지 말을 달린 녀석들.
심지어 복제된 후작을 알아보고 다짜고짜 공격을 가한 녀석들까지 있었다.
‘아주 끈끈하지.’
그들에게 정보를 풀어 버린다면.
‘넥스몬드와는 달라.’
마를 보면 베어 버린다.
그것이 그들의 신조.
정보의 독점으로 인한 이윤 따윈 생각하지 않고 당장 동방 토벌대를 결성하겠지.
하지만.
어쩐지 후작을 보면 안심이 된다. 단명할 거라는 안심이.
‘네가 과연 살아서 돌아갈까?’ 오래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충성스러운 부하.
거기에 대상조라는 지위도 있는 제국에서도 항상 번번이 비참하게 살해당했는데.
요괴들로 가득한 동방에서 멀쩡히 살아남아 돌아갈 리 없다.
‘객사할 거야. 굳이 내가 기원하지 않아도 분명히 동방에서 죽겠지……
그때 였다.
“전방에 안개가 끼어 있습니다!”
“저 괴수가 다가가도 전혀 걷히질 않습니다!”
파수꾼의 보고를 들은 넥스몬드가 황급히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대로 진입해도 됩니까?”
o ”
불꽃이 대답했다.
“그렇다는… 데?”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초롱너울의 말을 전해주며 전방 전체를 덮은 안개에 정신을 집중했다.
[탐지 Lv.15.]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심안心眼 적용…….]
[명경지수明鏡止水 적용…….1
그러자.
- 끼이익.
- 끼익…….
아주 높은 곳에서 휘청이는 붉은 마스트의 소리가 들려왔다.
445호후 눈먼 달,지는 꽃 (22)
“어라,벌써 들어왔네? 영혼들이 묶이는 해역이 바로 여기야.”
불꽃이 일렁거렸다.
괜찮다더니.
그게 무슨 소린가.
“뭐라고……?”
- 끼이이이익…….
음산한 소리가 질문을 덮는다.
걷히지 않는 안개를 타고 울리는 소리였다.
마치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겨 붙듯 끈적한 안개에서 퍼지는 그 소리만으로도.
베테랑 선원들의 얼굴에서 핏기를 가시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대놓고 동요하는 자는 없었지만 태연해 보이는 자도 드물었다.
“응,하지만 나는 생문을 아니까.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야.”
- 좌악!
‘고양이’가 잠잠한 안개의 해역를 헤치고 파도를 만들었다.
넥스몬드 선단에게는 유리하게,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배들은 오히려 밀려나는 방향의 파도.
하지만 기이하게도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배들에게는 파도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작은 파도에는 물론이고, 십여 미터조차 더듬기 힘든 안개 속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서로의 진로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으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다가오고 있다.
- 끼익… 끼익...
바람 한 점 없는 잠잠한 바다인데, 사방에서 나타난 낡은 돛들이 혼자 펄럭거리며 마스트가 움직인다.
“유령……
“유령… 선입니다……!”
가까이서 보이는 것은 하나.
하지만.
다가오는 걸로 짐작되는 녀석들만 십여 척을 헤아리고.
안개의 전체 범위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이 해역 전체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유령선이 있을까.
- 쉬이이이이익……!
바람 대신 안개에 돛이 밀리고.
잠잠한 해류 대신에 안개가 배를 밀어낸다.
그리고 배와 배 사이를 안개가 묶은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포위인가.’
유령선으로 만들어진 장벽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안개와 섞여 스멀거리는 것 같은 장벽이었다.
“야옹아,저거 다 뚫어 버리……!”
“초롱너울. 잠시만.”
거대한 요괴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그녀를 제지했다.
“응? 왜? 저거 우리 야옹이한테 부수고 지나가라고 하면 되는데? 앞발 한 방에 배 한 척씩은 가볍게 부술 수 있다고.”
저 요괴의 앞발에 파훼의 술법까지 걸어 놨다고 했던가.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여길 뚫으면?”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진법의 생문生門이 열리는 거지. 쫓아오다가 재네도 따라 나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게 신경 쓰이면 다 부수면 되잖아? 조금 귀찮기야 하겠지만.”
“그 파편이… 제국으로 홀러갈 가능성은?”
“갈 수도 있지. 상관없잖아?”
아니,나는 상관이 있는데.
혹시라도 그게 공작이 건너오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망령을 심문한다거나 하는 것마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꼭 다 부수고 가야 할까? 이것들 하나하나를?
똑바로 돌진해 오는 유령선들을 살펴봤다.
‘전부 여기 묶여서 죽어 버렸군••…
가장 가까이 온 유령선의 내부가 느껴진다.
분명히 인위적일 정도로 해류도
바람도 없는 해역.
멈춰선 배 위에서 하루하루 굶고 목말라 죽은 인간들.
당연하게도.
- 달그락…….
그들은 새하얀 뼈가 되어 갑판을 걸어다니고 있다.
그리고 안개가 그 뼈대를 조금씩 감싸고 있었다.
흩어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배뿐만 아니라 그 위의 해골들까지 감싸는 안개.
‘이게… 결계의 실체인가.’
“봐라. 말라죽은 선원들의 원념이 느껴지지 않니? 그게 결계에 섞여 안개가 점점 더 짙고 강해진단다. 선순환의 고리야.”
‘악순환이겠지만.’
초롱너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넥스몬드를 향해 물었다.
“선장,저 실종된 선박들 말인데, 대충 몇 년이나 됐다고 생각하지?”
“동방으로 향하다가 실종된 팀 중 가장 최근이 벌써 20년 전입니다. 가는 족족 소식이 끊기다 보니까, 이제는 다들 엄두도 내질 않죠.”
- 달그락…….
반복되는 소리.
짙은 안개에 싸여 달그락거리는 저 해골들이 신경 쓰인다.
20 년.
지금 이곳을 망령이 되어 헤매는 녀석들 중에 가장 적게 헤맨 자도 20년이다.
특별히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유령선 위의 저 해골들은 모험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복제품인 섬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동쪽에 진짜가,빛나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진짜〈선발대들〉은 그렇게 여기서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배가 부서지면,저자들의 넋은 어떻게 되는 거지?”
초롱너울이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저 깊은 바다로 가라앉겠지. 뼈에 묶여서 말이야. 이건 육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진법이니까. 영원히 바다에 갇……
나는 초롱너울의 말을 잘랐다.
“네 애완동물에게 나를 태우라고
전해라.”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를 태운 채 유령선에 얌전히 접근하라고 해.”
“너,설마……
“선장,포격 같은 건 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넥스몬드가 곁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섬〉을 넘어서.
〈동방〉에 갈 생각을 할 정도라면, 넥스몬드 선장처럼 뱃사람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다.
목적이 모험심이던 금은보화였던 상관없다.
항해 능력도.
용기도 그렇다.
나름대로 바다의 걸물들이다.
저들을 이대로 부수고 가기에는, 심해 속에 영원히 넋이 매여 있게 하기에는 아깝다.
- 팟!
나는 배에서 뛰어 ‘고양이’의 등에 을라탔다.
‘크다……
아예 몸 위에 을라가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덩치가 좀 많이 크다.
아무리 후작과 내 합공에 당해서 헐레벌떡 도망갔던 녀석이라 해도 정말 크기만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야옹아,얌전히 있어.”
초롱너울의 말을 잘 들은 요괴는 내가 머리까지 밟으며 걸어갈 때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이제 이십 미터 앞으로 다가온 유령선을 바라본다.
안개에 휩싸인 채 달그락거리는 해골들이 가엾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진짜 동방으로 가기로 결심한 건 그들의 선택이다.
아주 초창기의 항해를 제외한다면 위험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려져 있을 터였다.
바다의 베테랑들이 기량과 운을 믿고 한 선택인데 동정할 게 뭐가 있을까.
‘그래도……
역시 버리고 가기는 아깝다.
처음으로 가까이 오는 유령선에 뛰어들었다.
- 달그락! 달그락!
이십 미터를 뛰어 발소리도 없이 가볍게 착지하는 모습에 놀란 듯 해골 선원들이 홈칫했다.
“하하……
떨어지지 않고 나를 감싸고 도는 불꽃이 웃었다.
“뭐야,너 혼자 처리해서 시선을 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다.”
베테랑 선원이었을 해골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말라 죽은,굶주려 죽은 자들이
칼을 빼들고 갑판 위의 침입자를 향해 포위망을 좁힌다.
압박은 물론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며 녀석들이 이쪽의 눈치를 본다.
다짜고짜 휘둘러야 될 칼이 나를 겨누며 떨린다.
제대로 된 무력시위조차 못 하는 모양새다.
별다른 스킬을 쓴 것도 아닌데.
‘…생각대로군.’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꿇어라.”
- 쿵! 쿠쿵! 쿵!
나지막한 한마디에 주위를 둘러싼 수십 명의 망자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허공에 떠오른 상태창을 훑었다.
[직업: 죽음의 기사(Lv.12)가 적용 됩니다.]
[카리스마가 적용됩니다.]
[베테랑 갑판장 ‘하극상’ 커클리는 언데드의 궁극에 닿은 당신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동경과 끌림,위압을 동시에 느낍니다.]
[지배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지배력 충돌: 없음.]
[베테랑 갑판장 ‘하극상’ 커클리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베테랑 파수꾼 ‘눈 밝은’ 라솔을 복종시켰습니다.]
[베테랑 키잡이 ‘들쭉날쭉’ 오아이를 복종시켰습니다.]
[베테랑 돌격대장 ‘상어’ 사가르를 복종시켰습니다.]
[제 이름을 잊은 갑판원 해골을 복종시켰습니다.]
[갑판원 해골을 복종시켰습니다.]
[갑판원 해골을…….]
[기관원 해골을…….]
[베테랑 기관장 해골을…….]
[베테랑 조리장 해골을…….]
[경험치가 9,531 올라갔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죽음의 기사 Lv.l3(new!)]
‘이거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장사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통솔 스킬의 경험치가 대단히 크게 올랐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통솔 Lv.2 —* Lv.3]
- 유효 범위: 500명(new!)
뭔가 잔뜩 올라간 것 같다.
“뭐 하는 짓……. 우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계획이.
오히려 예상보다도 잘 먹힌다.
조금 의외인 건 이들이 하나같이 지배되지 않는 상태라는 점이다.
유령선의 선장과 지배력 싸움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베테랑 선원 해골이…….]
[베테랑 선원 해골이…….]
복종을 맹세한 수십 명의 망자를 이끌고 마스트로 걸어갔다.
一 끼기긱…….
유령선단의 기함旗艦인 이곳에서 남아 있는 기척은 단 하나.
붉은 마스트 옆.
마스트에 매달린 해골이 있었고, 그는 다른 해골들과 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 선장이 없나 했더니……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다.
키잡이도,갑판장도,돌격대장도, 파수꾼도 상태창에 이름이 떴다.
그러나 복종시킨 녀석들 가운데 선장은 없었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선장이 지배력을 행사
하지 않는다.
‘선상반란,인가……
마지막 해골은 온몸이 붉게 녹슨 쇠사슬로 마스트에 감겨 있었다.
마치 시체가 되어서도 아무것도 듣고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저주조차 내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 선장은 번데기처럼 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게다가 밖으로 드러난 손과 발은 물론이고 어깨,종아리,발목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쇠못이 단단하게 박힌 채였다.
수십 개의 못이 몸에 박힌 해골은
움직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목마름과 굶주림에 미친 선원들은 희생양이 필요해졌다.
자신을 냉정하게 마주할 수 없는 자들은 죄를 깔끔히 몰아줄 상대가 필요하다. 인간은 정의를 원하고 정의는 언제나 누군가 매달림으로서 실현된다.
게다가 선원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미신적이다.
혹시 감히 저주받은 동쪽으로의 항해를 결정한 선장을 처형한다면, 바람이 불고 해류가 생겨날 수도 있을 거라는 망상은.
며칠 동안 굶주리고 목이 마르면 충분히 가눙해진다.
물론,아직도 여기서 떠돌고 있는 유령선의 모습이 그 추측이 틀린 걸 여지없이 증명하지만.
나는 선장 앞으로 다가갔다.
- 서걱!
해풍에 녹이 슬고 엉켜서 제대로 풀어지지도 않을, 복잡하게 뒤엉킨 쇠사슬을 단번에 끊어냈다.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사슬이 갑판에 떨어지리라 예상했지만.
‘호오?’
쇠사슬은 다른 주위보다 한층 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은은한 보랏빛까지 띠는 쇠사슬을 보고 다른 선원들이 홈칫하며 뒤로 물러난다.
“힘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결박하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뭐야,죄책감 같은 거야?”
불꽃이 웅웅거린다.
나는 배를 지배하지 못하는 선장을, 반란에 당했으면서도 선원들에게 제대로 된 저주조차 내리지 않은
가엾을 선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뼈의 군주 Lv.3을 사용합니다.]
오랫동안 못이 박혀 있고.
쇠사슬에 감겨 마스트에 매달려 있던 탓인지 뼈의 상태가 모조리 엉망이다.
- 우둑! 우두둑! 뚜두두둑!
시간은 한참이 걸렸다.
[교정 완료!]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약간 을라갑니다.]
[민첩이 12 상승했습니다.]
[체력이 8 상승했습니다.]
[베테랑 선장 '주시자’ 라스도롬의 호감도가 15 상승합니다!]
- 끼리릭.
선장이 비틀거린다.
뼈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녹슨 마스트에서 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다시 네가 선장이다.”
[베테랑 선장 ‘주시자’ 라스도롬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잃어버린 스킬을 회복합니다.]
[스킬: 항해 지휘]
[스킬: 감독]
[스킬: 정박]
[새로운 스킬을 각성합니다.]
[돌아온 자의 기백 Lv.l(rare플러스)]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선장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자는 몹시 드물 것입니다. 선장의 통솔력이 을라갑니다. 항해 환경에서 받는 페널티가 소폭 감소합니다.
‘성공적이군.’
선장뿐만 아니다.
다른 선원들도 느껴지는 스랫으로 보아 생전에 상당히 이름을 날린 뱃사람 같았다.
상인보다는 해적에 좀 더 가까운 무리 같기는 하지만.
‘역시 안 버리길 잘했어.’
一 끼이이익…….
유령선 한 척이.
‘주시자’ 라스도롬의 지휘에 따라 천천히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넥스몬드의 선단과 같은 방향으로.
“이야… 인상<적<기이:?”
초롱너울이 내 앞에서 커다란 원 두 개를 그려 보였다.
“다음 배로 가자.”
아직 근처에만 열 척의 유령선이 떠다니고 있었다.
446하 눈먼 달,지는 꽃 (23)
- 달그락!
[베테랑 갑판장이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통솔 경험치가 을라갑니다.]
‘얘네는 말도 안 했는데.’
배에 을라타기만 했는데 허겁지겁 달려와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쳐서 일으켜 줬다.
“으음.”
여섯 번째 유령선까지 휘하에 넣고 생각한다.
‘라스로롬의 배가 유령선 가운데 무척 강한 축이었군.’
옛 기억을 떠을렸다.
F플러스 랭크라고는 해도.
한 던전의 우두머리인 납골당의 우두머리마저 나를 보고 훌쩍 뛰어와 충성을 맹세했다.
그와 비교하면 라스도롬의 배에 탑승한 선원들은 말단 갑판원 하나 하나까지 나름대로 기개를 보였다.
그들 전부가.
최소한 F플러스 랭크 보스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유령선단의 기함 역할을 했겠지만.’
- 팟!
일곱 번째 유령선.
[‘분노의 질주’ 크로포드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날렵하게 생긴 배의 선장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 달그락!
이제 휘하에 넣은 유령선의 수가 열 척을 넘어선다.
[‘정직한 사기꾼’ 리드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상선이었는지.
짐칸을 최대치로 개조한 유령선의
선장이 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 달그락! 달그락!
[‘정직한 사기꾼’ 리드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 과직!
그가 갑판을 뜯었다.
‘화려하군.’
순금에 크고 새파란 비취를 박아 멋을 낸 왕관이 보인다.
세월에도 빛바래지 않은 순금과 비취가 서로를 비추어 돋보인다.
그 외에도 미스릴에 초록 보석이 조화롭게 박혀 있는 왕의 티아라, 기이하게도 보석을 깬 파편을 옷에 박아 넣은 파티복도 보인다.
“됐어. 넣어 둬라.”
어차피 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비역에서 가져온 물건들에 비해 딱히 유용해 보이지도 않는다.
[‘정직한 사기꾼’ 리드가 당신의 청림한 태도에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리드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리드는 자신의 컬렉션이 언제든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황스러운 상태창을 흘끗 넘긴다.
그 밑으로 떠오르는 게 중요하다.
[통솔 경험치가 을라갔습니다.]
[통솔 Lv.3]
- 유효 범위: 121/500
‘아직 괜찮네.’
여유가 있다.
물론 강자들을 뜻대로 움직이려면 통솔 수치를 꽤나 많이 써야 하고, 모든 유령선의 선원을 휘하로 넣는 방식은 곤란하다.
하지만 유령 선원들을 굴복시켜서 경험치를 얻고.
선장만 통솔 스킬의 영향력 아래 넣는 방식이라면 유령선단 전체를 휘하에 둘 수 있다.
간단한 이야기다.
평범한 바다의 싸움처럼 선장의 목을 칠 필요도 없고.
계략을 짤 필요도 없다.
“꿇어라.”
- 털썩!
말 한 마디면 끝이다.
전설적인 유령선의 선장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에게 복종한다.
간혹 조금 버티는 녀석이 나와도 조금만 압박을 가하거나.
- 우두둑!
뼈의 군주 스킬로 전신을 한번 교정해 주면 호감도가 오르면서
충성을 맹세한다.
[‘절름발이’ 브라이트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뒤틀린’ 야오 레이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오히려 버티는 녀석들은 그만큼 강자라는 뜻이기에 기꺼워진다.
‘주시자’ 라스도롬이 매달렸던 붉은 마스트 끝을 태양이 천천히 지나서, 서쪽 바다로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 入、
스무 척의 배는 마치 마법처럼 간격을 조정하며 넥스몬드 선단의 양옆으로 늘어섰다.
“저럴 수가……
각각 양옆으로 열 척씩 늘어선 유령선들올 보고 선원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왜 그러지?”
“서로 다른 깃발… 다른 선단인데… 스무 척의 배가…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던 넥스몬드가 짚어 나가듯
주위를 돌아보며 신음했다.
비록 통솔 스킬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선장들에게 이러쿵저러쿵 명령을 내릴 것까지도 없었다.
유령선들은 파도와 거리를 완벽히 계산해서 자연스레 ‘야옹이’를 피해 선단에 합류했다.
그것만으로도 장엄한 광경이지만 뱃사람의 눈에는 새롭게 보이는 게 있는 모양이다.
“다섯 척이라도 저렇게 뱃머리를 맞추는 건 백 팀 중에서 한 팀이나 될까요……. 그런데 서로 다른 팀들이 저렇게 뱃머리를 맞추다니……
감탄하던 넥스몬드가 문득 자신의 배 안을 살폈다.
선원들의 안색이 조금 파리하게 변해 있었다.
선원도 배도 안개에 싸인 스무 척의 배가 양옆에 달라붙었기에.
얼핏 보면 넥스몬드 선단 양쪽으로 으스스한 안개 덩어리 그 자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공포와 거부감이 슬슬 선원들의 무릎까지 기어오를 무렵.
기함이.
다른 네 척의 배보다 아주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갑판 선미에 선 넥스몬드는 침도 삼키지 않고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선장을 향했다.
“바닷사람들이여!”
바람 한 점 없지만, 진청색 코트가 박력으로 펄럭이는 것 같았다.
선장은 유령선을 가리켰다.
“보아라! 저기 걸린 깃발들을!”
자욱한 안개가 없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마스트 끝에 걸린 깃발만을 향하고 있었다.
“왼쪽 두 번째다!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는 살보토르 함대의 깃발이
저곳에 있다!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유적들을 뒤지고 다니고,바다의 빈 공간을 보면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다는 함대다! 연합 북부 해안 개척의 공신이 저기 있다!”
“오른쪽 세 번째다! ‘실버 투스’ 힐마의 깃발이 휘날린다! 힐마가 누구인가? 서쪽 바다의 악몽이던 바다괴물의 이빨을 뽑아낸 여자가 아닌가!”
선원들의 마음에 안개가 걷히고 넥스몬드의 목소리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옆이다! 우측 네 번째를 보아라……
“왼쪽 두 번째를……
딱 적당한 길이로 연설한 선장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신자의 함대!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믿지 않고 언제나 바다의 최전선을 개척하려 했던 자들의 함대다! 공포에 맞서! 무지와 몽매에 맞서! 어둠에 맞서! 언제나 먼저 길잡이가 되려 했던 자들의 함대다! 그리고……
선장의 높이 든 손이 천천히 앞을 가리킨다.
“그 함대를! 지금 바로 그대들이 이끌고 있다!”
네 척의 배에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뛰고 있군.’
“나 넥스몬드와 그대들이 전설의 함대를 이끌고 있다! 역사에 남은 개척자들조차 가지 못한 그 길을! 지금 나와 그대들이 이끌고 있다!”
선장이 앞으로 뻗은 손가락들은 하나하나가 자신의 배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공포와 불안 대신 잔잔한 고양감이 바다 위에 번져 갔다.
“오컴 호의 선원들이여! 좌측에서 연합 의원까지 처형한 이름 높은
해적선 ‘단검의 상어’를 이끌어라. 그 상어는 오직 그대들에게 운명을 의탁하고 있으니. 밤하늘에서 가장 먼저 별자리를 찾는 게 그대들임을 나는 항상 기억하고 있다.”
“안타레스 호의 선원들이여! 저번 항해에서 한 번의 수리도 필요 없도록 완벽히 배를 관리한 그대들의 솜씨는 바다의 악마도 범접하지 못할……
네 척 배의 이름이 하나하나 불렸다.
그러던 선장은 이제 아예 선원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잔잔하게 퍼지던 고양감이 안개의 바다 위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기억하라!”
“이름이 불린 바로 그대들이!”
“그 누구도 지나지 못한 해역을 처음으로 뚫으며!”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함성이 울려 퍼진다.
언데드,유령,마물, 으스스한 안개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선원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전설과 역사, 명예, 위업,최초, 신화라는 단어들만이 남았다.
‘제법이군.’
타고난 지휘관이다.
상인 연합 내에서도 견고한 입지.
항구 도시의 빈민 소년에서 바다의 거상이 된 남자다.
〈자유의 영사〉라는 직위는 딱지 치기로 얻은 게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야겠어.’
다음 생에도 계속 이 인간과 손을 잡을 것을 다짐했다.
“야,분위기 죄다 얼어붙기 전에 잘 띄우네. 그래도……
초록 불꽃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응응거렸다.
“슬쩍 거리 좀 멀어지라고 하지? 인간들 추울 거야. 그런데 나 정말 다정하지 않니? 이런 것까지 전부
걱정해서 챙겨 주고.”
“그러지……
초롱너울의 말을 따랐다.
유령선은 무섭기만 한 게 아니다. 실제로 으슬으슬하다.
인간들이 타고 있는 배는 물론, 주위 환경보다도 분명히 온도가 낮다.
‘좀 띄우자.’
가볍게 손짓만 했다.
그럼에도 스무 척의 배가 전부 다 즉시 알아들었는지.
딱 좋을 정도로 거리를 띄운다.
다시 봐도 대단한 녀석들이다.
- 팟!
야옹이의 머리 위에 있다가 옮겨 넥스몬드의 기함에 올라탔다.
후작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나를 바라본다.
기함의 마스트 아래 있던 녀석의 시선이 느껴지자 홈칫해서 걸음을 멈췄다.
혹시 위기가 아닐까.
유령선을 잔뜩 동료로 늘렸다.
연설이 먹힌 넥스몬드의 선원들은 모르겠지만.
제국 대상조인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편안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한 손은 허리에 얹고, 다른 손은 어깨를 잡고 살짝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하고 사는지 우두득 소리는 나지 않는다.
‘아니,그게 아니라.’
“안 공격하는 거냐?”
나는 무심코 녀석에게 물었다.
“벤다고 해도.”
살짝 입을 연 후작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어차피 이곳에 묶인 마귀로서 남는다기에.”
미묘하다.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언제부터 레안드로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나.
마를 보면 무조건 베어 버리는 게 신조였던 것 같은데.
마음속에 변화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얌전하니 된 거겠지.’
- 좌악!
그렇게.
결계의 해역을 ‘야옹이’의 인도에 따라서 벗어난 순간.
스스스슥.
해골 선원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그들의 삐에 스며들었다.
선박을 감싸고 있던 안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수리… 되고 있어?’
스무 척의 유령선.
거기서 동시에 일어나는 변화를 자세히 관찰할 겨를도 없이.
[베테랑 선장 '주시자’ 라스도롬의 호감도가 15 올라갔습니다.]
[‘네 개의 눈’ 야오의 호감도가 11 올라갔습니다.]
[‘범고래’ 멜리사의 호감도가 28 올라갔습니다.]
[‘무자비한’ 바돌로의 호감도가 15 올랐습니다.]
[유령선 〈리바이어던〉 파수장의 호감도가 7 올라갔습니다.]
[유령선〈교활한 이빨〉갑판원의 호감도가 3 올라갔습니다.]
[베테랑 갑판원의 호감도가…….]
안개가 걷힌 자리에.
푸른 상태창의 폭풍이 밤바다를 뒤덮었다.
[베테랑 선장 ‘주시자’ 라스도롬의
상태가〈신뢰〉로 변화합니다.]
[베테랑 선장 ‘범고래’ 멜리사의 상태가〈신뢰〉로 변화합니다.]
[베테랑 파수장 ‘새의 눈’ 힐다의 상태가〈신뢰〉로 변화합니다.]
띠링,띠링,띠링… 하는 소리는 연속적으로 울리며 서로가 서로를 묻어 버렸다.
상태창 메시지도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글자가 뭉개질 정도로 서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통솔자로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통솔 Lv.3 — Lv.4]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1
[죽음의 기사 Lv.l6(new!)]
[카리스마: 만개滿開.]
[종족: 해골을 상대로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합니다.]
[‘죽음의 기사’ 랭크 이하의 모든 언데드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자기를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의 자의식이 있더라도 쉽게 억누르고 당신을 섬기게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언데드로 만든 리치의 경우에도 모두 적용됩니다.]
[특전: 언데드 사령관]
[당신을 섬기는 언데드가 1.2배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종족에 관계없이 영구적인 C플러스의 카리스마를 획득합니다.]
‘이게… 뭐야?’
으스스한 한기와 원념을 내뿜고 있던 선박들.
온도 자체가 올라간 것 같았다.
게다가 안개가 스며들면서.
[유령선〈집행관〉이 강화됩니다.]
[유령선〈경멸〉이 강화됩니다.]
[유령선〈리바이어던〉이…….]
선박도.
[베테랑 선장 ‘범고래’ 멜리사의 민첩이 3 을라갔습니다.]
[베테랑 선장 ‘범고래’ 멜리사의
체력이 2 올라갔습니다.]
선원들도.
‘강해… 졌어?’
[유령선 〈경멸〉의 모든 선원은 항해가 끝난 뒤에도 당신을 위해 10년간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유령선〈매달린 남자〉의 모든…….]
[유령선〈행운〉의…….]
겨우 상태창을 한차례 훑었다.
“하하하하핫……
초록색 불꽃이 주위를 빙빙 돌며 웃음을 터트린다.
“아주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상태창이 뜨지는 않겠지만.
초롱너울은 뭔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몰라? 어떻게 된 일이긴! 이런 광범위하고 죽여주는 위령慰靈은 제법 오랜만인걸.”
“위… 령?”
447호후 눈먼 달,지는 꽃 (24)
“그렇지.”
불꽃이 내 앞에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마치 누군가 깃펜을 잡고 종이에 그린 것처럼 깔끔한 동그라미다.
초롱너울은 영체만 가지고 움직이는 상황에도 무척 익숙해 보인다.
“너도 봤잖아? 저들은 오랫동안 이곳에 갇혀 있던 인간들이었어. 이 해역을 벗어나서 동쪽으로 가고 싶어 했고,동쪽으로 가지 못해서
고통스럽게 말라 죽었는걸. 너는 원한에 가까운 그들의 오랜 염원을 단번에 풀어 준 거야.”
물론 그런 걸 계산하고 생각한 건 전혀 아니다.
경험치를 좀 더 많이 얻는 길을 선택하고.
그 순간 조금 더 내키는 방향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위령만큼 섬세한 작업도 드문데, 이렇게 무신경하게 엄청나고 확실한 위령을 해버리다니……. 크크크큭… 정말 재밌는 구경을 다 하잖아?”
초롱너울은 일이 잘 풀렸다면서 설명을 이었다.
진혼鏡魂. 위령慰雲.
방황하는 혼을 가라앉히고.
단단히 맺힌 원한을 달래 먼지로 흩어트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평범한 진혼과 위령은 작업이 끝나는 것과 함께 혼령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나는 설명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왜 계속 따라오지?”
묶여 있던 원한은 이미 사라졌다. 초롱너울이 큭큭거렀다.
“그거야,이들은 아직 동쪽으로의
항해에 강한 집념을 가졌으니까. 너에 대한 호의는 말할 필요도 없지. 최소한 동쪽에 갈 때까지 선단이 계속 유지될 거야.”
“ O 으.”
•— n •
“새로운 의지가 생긴 거지.”
놀라웠다.
설명한 상황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허공에 떠오르는 상태창이 대체로 나타내 주고 있다.
대단한 것은.
‘…그런 걸 정확하게 알아내다니.’
상태창 따위 없이도.
상황을 곧바로 진단한 초롱너울의 능력이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이런 요괴를 동방에서 밀어내고 레플리카에 묶어 놓은 건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란 말인가.
“그런데 너… 혹시.”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 주위를 못 벗어나는 거냐?”
줄곧 그랬다.
정수인 줄 알았던 암녹색 불꽃.
여자의 몸을 파괴하자 튀어나온 암녹색 불꽃은 처음부터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아예 몸을 들락날락하며 깔깔대고.
겹쳐 있고.
길을 안내할 때조차도 내 앞에서 일정 거리 이상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이제 알았어?”
불꽃이 오랜만에 여자의 형체를 취하고 큭큭거렸다.
“영체만 있는 상태에서는 근처에 맴돌 마魔의 육신이 필요하거든. 나처럼 강한 영체라면 너처럼 강한 녀석이 필요하지.”
“그러면……
“나는 영원히 네 옆에 계속 붙어
있을 거라는 이야기야.”
농담이겠지.
끔찍한 소리다.
“떼어 낼 방법은?”
“그게 할 소리냐? 가루도 안 남게 내 몸을 부숴 놨으면 책임져야지! 기가 막혀!”
찔리는 걸까.
후작이 슬쩍 한 걸음 멀어진다.
암녹색 불꽃이 뾰루퉁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뭘 떼어낼 생각을 해? 동방에 대해 뭐라도 아는 게 있어? 그냥 내가 하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모시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바보 같은 놈!”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다.
애슈턴의 지도에 따르면.
눈앞의 초롱너울은 동방에 있는 ‘열쇠’에 대한 힌트 자체다.
동방으로 건너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진짜 열쇠를 찾는 것도 이 녀석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말 인도해 줄까?’
그녀의 말대로 나는 동방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게 없다.
함정을 파고 있어도 알아보는 건 불가능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긴 한데.’
초롱너울의 영체를 감당할 요괴가 드물긴 하겠지.
무엇보다도 녀석은 캐빈 애슈턴이 안배한 존재.
인형사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감각이 찜찜하더라도.
그의 인도를 따라서 손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나는 인밴토리에서 황금빛 벌레 모형을 꺼내며 물었다.
“이렇게 생긴 물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나? 일곱 개가 모여서 열쇠 역할을 하는 거다.”
“그런 거… 모르겠는데?”
불꽃은 고개를 갸웃했다.
“떠오르는 것도 없고?”
침묵 뒤에 다시 고개를 젓는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내 몸에서 못 떨어진다는 것까지 고백했다.
굳이 이걸 숨길 필요는 없겠지.
‘당황스럽군.’
애슈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의심스러워진다.
어쨌거나.
에라스트에서 나온 지도는 분명히 초롱너울올 가리켰고.
그녀가 나를 안내한다.
‘동방으로 가면 뭐라도 나오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바다를 항해했다.
불안을 잠식시키는 것처럼 순풍이 계속 돛을 달렸다.
몇 주가 지났다.
순조롭게 여러 해역을 통과하고 영롱한 햇살이 바다 위에 반짝반짝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경고!]
[현 지역은 스캐닝이 완료되지 않은 공간입니다.]
[오류 발생 가능성이 높습니다.]
[퇴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승인된 관리자가 아니면 여기서 더 이상 진행하지 마십시오.]
[경고합니다.]
[현 지역은 안정화 시물레이션이 시행되지 않은 공간입니다.]
[데이터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퇴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현 지역은…….]
‘이게 뭐야?’
마치 경계선처럼.
허공에 떠오르는 푸른 메시지들을 선단이 가볍게 지나친다.
주위를 빠르게 둘러봤다.
역시.
이상함을 느낀 건 나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초롱너울도 후작도 넥스몬드도, 상태창으로 떠오른 메시지는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스캐닝……? 복원……?’
뜻이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이다.
‘어쨌건 위험하다는 거겠지.’
잊고 있던 긴장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다.
이 정도에 물러설 거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항해다.
오히려 특수한 지역이라면.
비역에서 봤던 존재들이나 공작의 힘이 닿지 못하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밤처럼 새까맣고 자그마한 희망 없이는 어차피 한 걸음조차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상태창이 사라질 즈음.
“저기……
파수꾼이 앞을 가리켰다.
바다 한가운데에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바위섬이 보인다.
간격은 30미터 정도.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저런 게 솟아났다는 사실이 선원들의 눈에는 자연의 신비처럼 보이겠지만.
‘요괴로군.’
- 좌아아아악!
높이 5미터 정도의 바위섬이 훌쩍 융기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바위섬이 처음에 수면으로 드러났던 높이의 세 배 가까이나 올라가고.
그 뒤를 이어 타원형의 넓적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곳을 지키는 바다의 신, 묵혈신갑해신… 감히 어디를 지나려 하는 것이냐.”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응응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게?”
쭈욱 위를 올려다본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과연 그러했다.
‘묵혈… 뭐?’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름 따윈 필요 없을 거 같다.
저건 그냥 게다.
“저… 저렇게 큰 게라니……!”
선원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무섭긴 할 텐데.
공포에 질린 눈으로도 게는 게다.
- 좌악! 좌악!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퍼지고.
단번에 배를 두 척씩 동강 낼 것 같은 집게발이 위에서 흔들리지만.
‘어쨌거나… 게지.’
앞에서 선단을 인도하던 ‘야옹이’가 거대한 파도를 몸으로 막아 내고.
갑자기 나타난 상대를 향해 길고 날카로운 뿔을 겨눴다.
같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탓인지, 은근히 저 뿔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인간 선원들이 꼴깍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베테랑 파수장 ‘새의 눈’ 힐다가 경이로운 생명체를 발견했습니다.]
[경험치가 올라갑니다.]
[파수 능력이 향상됩니다.]
[힐다의 호감도가 8 올라갑니다.]
[베테랑 선장 ‘범고래’ 멜리사가 호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모험에 몹시 즐거워합니다.]
[항해 경험치가 올라갑니다.]
[베테랑 선장 ‘주시자’ 라스도롬이….]
커다란 게와의 조우가 인상적인지 상태창도 떠오르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왕꽃게야.”
또렷한 목소리가 파도를 뚫었다.
‘주술……?’
아니다.
특별한 술법은 없었지만.
이름 자체에서 힘이 느껴진다.
‘묘한데.’
“뭐야……?”
까마득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웅웅거렸다.
거대한 음파가 진동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음성은 실제로 떨리고 있었다.
“지… 지금 이 금위신갑해신에게 뭐라고 지껄였느냐?”
화를 내는 척했지만 그 목소리에 짙게 담긴 건 두려움과 경계였다.
‘아까는 묵혈… 뭐라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자기 이름이 아닌 모양이다.
- 파앗!
불꽃이 허공에 떠올랐다.
“왕꽃게야, 이름을 정하면 제대로 기억을 하든지. 너가 정해 놓고도 헷갈리고 있니? 700년 동안 썼던 이름을 기껏 그러려고 버린 거야? 남들만 아니라 너도 헷갈리잖아.”
허공에 떠오른 불꽃.
초롱너울의 크기는 갑자기 나타난 검붉은 거대 바위섬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진동을 뚫고 똑바로 전해지고 있었고.
특히 상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미묘한 힘이 느껴졌다.
‘진명眞命 같은 건가……?’
〈자신의 진명을 개방하면 기량이 늘어날 수 있지만,반대로 진명을 상대에게 파악당하면 곤란하다.〉
〈의미 있게 쓰인 이름은 그 자체가 자신의 모방… 유사… 상징이다.〉
〈감염의 매개이며 실질적 접촉이 단절되더라도 호명 그 자체만으로 본체를 과녁에 집어넣게 되지.〉
아이작이 설명해 줬던 이야기다.
바위섬은 뒤로 물러나서 급하게
한층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뭐… 뭐냐? 가… 감히! 어디서 그런 걸 들은 것이냐!”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누구한테 뭘 듣겠니,왕꽃게야. 반을림해도 칠백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나한테 꼬박꼬박 반말하고 싶니? 집게를 한 100년 동안 실로 묶어 줄까?”
“초… 초… 초… 초롱… 너울?”
“이야. 존칭도 생략하네.”
게가 덜덜 몸을 떨었다.
파도가 사방으로 번져 갔다.
“크흐흠!”
하지만 바위섬은 몸을 곧추세우고
집게발을 휘저었다.
“하… 하지만! 네… 가 왜 여기를 오는 것이냐! 섬을 지키기로 한 게 계약이었지! 지금 파발만 보내면 너, 너를 잡아먹으러 윗바람산의 천둥지기들이 몰려올 거다!”
“왕꽃게야,시끄럽다. 못 본 사이 어쩌면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졌니? 계약은 육신이 파괴될 때까지였어. 지금 내가 육을 가진 거로 보이니? 너무 물속에 오래 처박혀 살아서 시력이 퇴화한 거니,전통적으로 머리가 부족한 거니?”
“이이……!”
왕꽃게가 두 발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야옹이와 초롱너울을 슬쩍 한 번씩 살펴보고 집게발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너는 몰라도… 어쨌건 인간들은 들어올 수 없다! 모두 내가 여기서 잡아먹겠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그리고 인간들이 들어을 수 없다는 규정은 누가 정했니? 그런 거 없었는데? 그냥 네가 배가 고픈 거잖아.”
“이것까지 방해할 생각이냐!?”
왕꽃게가 집게발을 혼들며 짜중을 내기 시작했다.
식사만큼은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양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야 상관없지. 너희끼리 알아서 해결하렴.”
불꽃이 웅웅거렸다.
가까이 서 있던 갑판장이 내 쪽을 바라봤다.
“저… 어떡합니까?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하시는데……
오래 항해하면서 그럭저럭 친해진 녀석이었다.
“아마,해결할 ‘인간’이 저기 있는 것 같은데?”
혼자 팔짱을 낀 채 마스트 아래에 기대 서 있는 후작을 가리켰다.
쓸데없이 폼을 잡고 있다.
레안드로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결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후작이 불꽃을 향해 물었다.
“저거 말인데. 혹시 섬에 있던… 해안 몬스터들의 모델인가?”
“바로 알았어? 눈치 빠른 녀석은 이래서 싫다니까. 아하하하!”
레플리카에서 봤던 시커떻고 털 난 대게들이 떠오른다.
- 풍!
초롱너울이 화살표로 변해 후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유령선 한 척이라도 빌려주는 게 낫지 않… 어? ”
그 순간이었다.
- 팟!
후작은 기함의 갑판에서 바다로 힘차게 뛰어내렸다.
“어어?”
선원들은 입을 벌리고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제국 대상조의 자살을 지켜봤다.
하지만.
- 파앙! 파앙!
후작은 다시 위로 솟아올랐다.
다시,그리고 다시.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바다를 달리고 있었다.
‘바람……!’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파앙! 파앙!
실제로 물 위를 땅처럼 자연스레 걷는 건 아니었다.
그가 운용하는〈바람〉.
압축된〈바람〉이 발밑에서 터지며 그를 밀어낼 뿐.
- 파앙!
위로.
앞으로.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후작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 좌아악!
흩뿌려지는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비쳐 반짝였다. 그건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 같았다.
“아……
심장이 기계로 이루어진 남자.
넥스몬드마저 나지막이 감탄사를 보내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빨리 응용하다니.’
연습한 것도 본 적 없는데.
설마 즉홍적으로 해낸 건가.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스무 척의 유령 선단이 지켜보는 싸움이다.
뒤로 빠지면 제독으로서의 모양이 서지 않는다.
- 사가가각!
후작이 건너간 바다를. 나는 그대로 얼려 버렸다.
448하 눈먼 달,지는 꽃 (25)
- 쩌정!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물은 낮은 빙점水點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꽁꽁 얼어붙었다.
물의 규칙을 어지럽히는 염분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격렬하게 출렁이던 파도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던 물방울이 그 모습 그대로 멈췄다.
순식간에 바다 위에 서리가 끼고, 얼음 결이 만들어지고,두꺼워지고, 수 미터가 넘는 두께로 단단하게 결정화되는 과정이 고작해야 몇 초 사이에 이루어졌다.
얼음은 레안드로의 뒤를 곧바로 쫓았다.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순식간에 바다를 얼리는 것.
동시에 일어나는 두 종류의 믿기 어려운 광경을 선원들은 신음마저 흘리지 못하고 바라봤다.
- 과광!
나는 단단히 얼어붙은 바다 위를 달려갔다.
우둘투둘한 결이 살아 있는 채로 그대로 얼어붙은 바다는 한 번씩 발을 디딜 때마다 표면이 새하얗게 부서지며 잔금이 생겼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인벤토리로 부담 없이 허공을 밟고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후작이 그것마저도 따라 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레안드로가 보인 재능을
고려해 봤을 때.
이건 무척 구체적인 근거를 가진 합리적인 불안이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필요 없는 상황에서 굳이 밑천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뭐냐?”
빠르게 앞서가던 레안드로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이건 의외인데.’
성과라고 해야 할까.
바닷물의 밀도에 맞춰서 압축시킨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다가 얼어붙어 균형을 잃고 순간 삐끗한 것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라고!”
- 과광!
레안드로는 잠깐 나를 노려보더니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한층 강하게 발을 디뎠다.
얼음이 단단하다고 확신했는지, 그 위를 부서질 듯이 박차고 아주 높이 뛰어오른다.
잠깐 휘청거린 게 보기 좋았는데.
내가 가려고 만든 길이 녀석에게 추진력만 크게 더해 준 것 같다.
“원래 저런 루트가 아니었는데, 바뀐 상황을 바로 이용하네?”
초롱너울이 중얼거린다.
동감이다.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아무리 봐도 재수 없는 녀석.
뒤를 칠지 아주 조금 고민했지만, 녀석은 이미 몇 번의 도약만으로 왕꽃게의 바로 앞에 몸을 띄우고 있었다.
'바람……!’
- 콰과과과광!
그가 칼끝에서부터 몰아온 바람이 폭력적으로 전방을 휩쓸었다.
분명히 동방으로 향하는 선박에 탑승할 때까지만 해도 저런 능력은 없었는데.
‘내 스킬……
아니.
나한테 저런 스킬은 없지만.
지켜보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감이 잡힐지도 모른다.
- 쿠궁! 쿠궁! 쿠궁!
- 콰콰콰콰콰콰J
휘몰아치는 바람은 아래로 강하게 꽂히는 왕꽃게의 거대한 집게발을 튕겨내고,몸통을 한차례 긁은 뒤 되돌아오며 왕꽃게의 눈 부분까지 노렸다.
두꺼운 갑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왕꽃게의 눈이 화들짝 놀라며 껍질 안으로 들어갔다.
“캬아아아!”
허공에 잔뜩 헛발질만 한 데다가 약점인 눈까지 베일 뻔한 요괴가
비명을 질렀다.
대단한 녀석이다.
그사이에 다루는 바람의 범위가 한층 넓어지기라도 한 걸까.
투명한 검기의 바람이 왕꽃게의 몸통 거의 전부를 두드리고 있다.
'언제 수련을 한 거야?’
몇 달 동안.
갑판에 서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를 탔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명상만으로 저 정도를 이끌어 내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넓은 범위의
바람을 검기화.
넓은 공간 자체를 난도질한다.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인밴토리의 응용인 만큼.
반드시 후작을 죽이지 않더라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애초에.
이미 가진 힘의 응용이라면.
죽인 다음 정수 흡수로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진지하게 연구해 봐야겠군.’
광역 공격이라면 저만한 기술도 드물 거라고 생각된다.
단순한 패턴이었지만 꽃게가 아예 바다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 이상, 피할 방법은 없었다.
‘바다 아래로……
물론.
도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다.
공격이 마무리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가까이 뛰어들었다.
‘검빙.’
- 서거격!
무엇보다 파괴적인 냉기가 바다에
엉겨 붙었다.
왕꽃게를 중심으로 수십 미터의 빙하가 생겨났다.
‘너무 과했나.’
다리 하나 꼼짝할 수 없게 빙하에 갇혀 버린 녀석은 도망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 쿠과과과과!
후작은 타깃까지 함께 얼어 버린 바다 위에서 자세를 잡았다.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쥔 칼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직경 1미터 정도의 얼음이 파이며 반짝이는 가루가 휘날렸다.
왕꽃게는 막아 보려고 이미 반쯤 부서진 집게발을 교차했지만 바람은 집게발을 지나 몸통을 유린했다. 갑각이 다시 갈라진다.
폭력이란 건 대체로 일방적이고, 식사가 목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
눈앞의 요괴도 인간에게 가하는 일방적인 폭력을 예상했을 거다.
다만 방향이 반대였을 뿐이다.
바다에서 싸운다는 유리함은 몸의 절반이 봉인된 채 얻어맞기만 하는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
‘쉬운데.’
몸만 컸지 초롱너울의 ‘야옹이’를 상대할 때보다도 간단했다.
강철보다 강한 갑각은 군데군데 깨져 나가고 마구 휘두르던 집게도 너덜너덜해졌다.
후작은 여유롭게 집게발을 피하며 바람의 사용법을 익히기라도 하듯 느긋하게 공격을 날려 댔다.
“크아아아!”
그런데도 오른쪽 집게발은 이미 거의 다 절단된 상태였다.
녀석은 내게도 후작에게도 집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계속 대미지만 누적되고 있다.
벌린 입으로 거품과 괴성을 내며 반항했지만,어차피 힘이 다한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슬슬 끝낼까 싶을 때였다.
44크르르르.”
갑자기 어두운 섬광이 왕꽃게의 불룩 솟아오른 가슴팍 쪽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묘한 현상에 뒤로 훌쩍 물러섰다.
느닷없이 솟아오른 검은 연기는 몸통은 물론이고 양쪽 집게발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어둠처럼 새카만 연기는 깨져 나간 갑각 위를 수복하듯이 덮더니 아예 요괴의 전신에 흐린 막을 덧씌우기 시작했다.
회복된 것뿐만 아니라.
왕꽃게의 거대한 몸이 한층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얼씨구?”
몸 밖으로 튀어나온 초롱너울이 커다란 눈 모양이 되어 움직이며 상황을 살폈다.
왕꽃게에게서 솟아난 검은 연기는 널리 퍼질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점점 더 짙어졌다.
연기 자체가 무언가를 잡아먹으며 증식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 저게 대체……
선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연기는 왕꽃게의 몸 전체에 뾰족뾰족한 가시를 만들어 냈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척 봐도 아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제대로 통제하기는커녕 인식하지도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크으으으으아아아!!!”
마치 안에 있는 연기가 왕꽃게의 내부를 먹어치우는 것처럼 부서진
갑각 안쪽으로 드러난 하얀 게살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집게살… 정말 맛있었을 텐데. 인간들이 아쉬워하겠네.”
초롱너울이 슬쩍 농담을 던졌지만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곳까지 항해하던 어느 때보다도 그녀가 상황을 심각하게 여긴다는 걸.
- 파사삭!
그때까지 꿈쩍하지 않고 왕꽃게를 붙잡은 빙하가 검은 연기에 닿자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쩌적!
검은 기운이 둘러싼 녀석의 다른 다리들이 관절을 움직였다.
으득 으드드득!
굽혔다 펴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광꽝 얼어붙었던 바다가 부서졌다.
그 버둥거림에 바다가 깨져 나가며 무수한 얼음조각들이 흩뿌려진다.
왕꽃게를 중심으로 얼음 폭풍이
회오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얼음칼날의 폭풍이 사방을 덮쳤다.
다이아몬드 더스트처럼 비산하지만 하나 하나의 속도는 석궁 살보다 빠르고 크기는 1미터에 육박하는 치명적인 파편들.
‘검염.’
- 화르르!
눈사태처럼 덮쳐오는 얼음 폭풍을 불꽃의 장막으로 차단.
녹인다.
물은 불을 누르지만.
동급에서의 이야기.
검기 자체가 타오르는 불이라면 얼음 같은 건 곧바로 흐물거리며 녹아내린다.
‘저놈……
그 와중에 후작은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왕꽃게를 향해서 접근하고 있었다.
최소한으로 몸을 보호할 정도로만 호신강기를 두르고 폭풍을 뚫으며 똑바로 걸어갔다.
얼음 폭풍 속에서 멈춰 선 그가 뒤로 칼을 당겼다.
휘몰아치는 새하얀 폭풍 속에서도 칼날이 청백색으로 빛나는 모습이 선명했다.
빛나는 칼날을 두른 회오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회오리에 빨려들어간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은 그 즉시 증발해서 사라졌기에 바람의 크기와 모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자체로도 터무니없이 강력한 풍압,이미 음속을 훌쩍 초월해서 회오리치는 바람은,거대한 검기의 덩어리였다.
- 파사삭!
실시간으로 조각조각 깨져 나가는 얼음 위에서, 레안드로는 곡예하듯 두 다리를 버티고,한 손을 다시 손잡이에 얹는다.
칼을 타고 도는 검기의 회오리가 계속해서 점점 더 빠르고 길어지다, 끝이 날카롭게 다듬어진다.
‘…랜스?’
폭은 3미터를 넘고.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한다는 걸 제외하면.
회오리는 기사들의 전형적인 창을 훌륭히 복제하고 있었다.
- 과직!
후작의 두 발이 불안정한 얼음을 밟고 높이 뛰어오르고.
- 파각!
휘몰아치는 얼음 폭풍 그 자체를 다시 밟고 뛰어오른다.
“이야……
녀석에게 감탄해 주고 싶지 않지만, 이건 묘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공중 부양이 가능한 마법사라도 오히려 저런 행동은 불가능하다.
비행 자체만으로 세계의 관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
맑은 하늘에서 해도 마력 소모가 극심해진다.
얼음 폭풍을 극복하면서 그 위로 다시 떠오르는 일 같은 건,상황을 통제해 놓고 안정된 비행을 하는 탑주급 마법사들에게도.
오히려 그들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런데,저걸 밟고 가다니……
재능의 레벨이 아니다.
터져 나오는 얼음 파편을 순간순간
포착해서 앞으로 뛰어오르는 귀기.
예측할 수 없는〈분산〉에 목숨을 맡기고 찰나에 집중하는 광기.
‘어쩌면 나보다도……
인벤토리를 허공에 전개한 다음 밟는다면 따라갈 수야 있겠지만, 순간에 몸을 맡기며 흐름을 타는 저런 속도감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물며 바람과 다리의 힘만으로 얼음폭풍 속을 연달아 도약하는 건 말장난이라고 생각했겠지.
눈앞에서 후작이 그걸 해내는 걸 보고 있지 않았다면.
휘몰아치는 무수한 얼음 조각들을
디딤돌로 삼아 뛰어오른 후에 다시 3차,4차 도약.
시야는 없고.
방해받지 않겠다는 듯이 후작은 오히려 눈을 감고 있다.
하지만 시야가 없이도,‘바람’이 상대의 크기와 위치를 말해 준다.
모든 걸 새하얗게 만들며 요괴가 만들어 나가는 얼음폭풍이, 파괴의 파장이, 오히려 간격을 선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애쓸 필요도 없다.
조준은 간단하다.
레안드로의 입은 희미한 미소마저
만들고 있었다. 바람에 익숙해지는 감각은 서늘하고 치명적인 쾌감을 동반했다.
- 과과과과과광……!
휩쓸고, 휘몰아치는 것이 아닌.
날카로운 한 자루의 창이 정확히 요괴를 꿰뚫는다.
본능적으로 회전까지 건 바람의 랜스는 검은 기운이 덮인 왕꽃게의 몸을 꿰뚫었다.
몸통 직경 수 미터가 텅 비어 버린 왕꽃게는 그 구멍으로 검게 물든
살과 내장을 쏟아냈다.
얼음 폭풍이 서서히 멎었다.
머지않아.
미세하게 떨리던 아래쪽 다리들의 몸부림까지 멈췄다.
왕꽃게의 잔해는 아무것도 깔아 뭉개지 못하고 부서진 얼음 위에 쓰러졌다.
굳이 나갈 필요도 없었다.
잠시 관망하는 사이에 레안드로가 상대를 처리해 버린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냈다.
‘정수 흡수다.’
새카만 연기가 뿜어져 나을 때의 왕꽃게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충분히 정수 흡수가 가능할 만큼 강한 상대다.
이번에야말로 가능하겠지.
부서진 얼음 사이를 다시 얼리며 빠르게 왕꽃게의 주변으로 접근할 무렵이었다.
- 푸쉬익!
가슴 한가운데 뼝 뚫린 구멍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며 솟아올랐다.
길게 늘어진 시커먼 그림자였다.
‘정수 홉수.’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一 피리릭!
가까이 있던 후작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지만,청백색 검기가
치고 지나간 뒤에도 그림자는 다시 합쳐졌다.
애초에 검기는 허공을 지났을 뿐 실체조차 없는 것 같았다.
- 푸쉬익……!
시커먼 그림자가 잠시 허공에서 꿈틀대다가.
뭔가에 매인 것처럼 북동쪽으로 끌려가려고 할 때였다.
“잡아!”
초롱너울이 다급히 외쳤다.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절박한 목소리였다.
“빨리! 빨리! 근처로 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