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62화 (362/458)

421화 권리 위에 잠자는 자 (18)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뛰어들고 싶었지만.

기스-제-라이의 충고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참았다.

브람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날 때, 의체가 언덕 위에 표연히 섰을 때, 둘러싸여 난자당할 때.

마음이 칼로 그이는 것 같았지만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망원경으로 계속 주시하고만 있었다.

내가 살리고 싶은 건.

그리고,아마도 살릴 수 있는 건. 레나 하나 정도가 한계일 테니.

충분히 떨어진 위치 덕에 해안의 싸움과 무관했다.

몸을 들어 올릴 정도의 강한 폭음이 울려오기 전까지는.

‘저게,기스-제-라이가 말한……

최후의 한 수가 드러날 때까지, 절대 몸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를 후려치는 소리가 터져 나갔다. 땅이라는 게 어쩌면 터질 운명의 폭죽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폭발이었다.

해안이 조각나며 높이 비산하고, 망원경으로 계속 바라보던 레나도 함께 위쪽으로 날아갔다.

터져 나오는 폭발에 의해 모든 게 전부 하얗게 끓어올랐고,포탄에도 끄떡없던 인간들의 몸이 하얀 빛에 덮여 빠르게 증발했다.

갑옷도,피부도, 근육도,골격도, 거무튀튀한 혼백까지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한순간에 사라졌다.

폭발에 이어 쏟아지는 은빛 폭포를 보고 기스-제-라이가 보여 준 비밀 지도가 떠올렸다.

루-륨을 추출하는 해저 발전소.

‘안 돼……!’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진작 해안에 뛰어들었겠지.

원망스럽다.

발전소 따위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레나가,거기에 있으니까.

버티는 걸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폭발이다.

‘안 돼.’

“레나!”

살 수 있을까?

계속해서 공작이 보호하는 모습은 봐 왔지만,정말 저런 폭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 팟!

해안을 향해 도약했다.

인간의 몸이 터져 나가면 피분수를 뿜어 붉은 안개가 끼어야 하지만, 그조차 증발했는지 해안엔 오로지 홀러내리는 공백과 흩날리는 검은 재뿐이었다.

그리고.

재가 내리는 뒤쪽으로.

단둘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세계에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희미한 존재감이었다.

“레나……!”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루-름 뒤로 공작과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살아 있다.

하지만 어딘가 안개처럼 희미했다.

부서져 버린 방어막 뒤.

두 사람은 신기루처럼 반투명한 상태가 되어 서 있었다.

여름 햇살을 받은 얇은 풀잎처럼 옅은 초록으로 드러나 있었다.

땅에서 쏟아지는 은빛 액체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회색빛 재도 그들의 몸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곳에 있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위상位相에 있었다.

‘이건……!’

머릿속에서 기시감이 당겨졌다.

수녀가 보여 준 투과의 권능.

후작의 공격을 그대로 통과시켰던 힘이었다.

저런 것까지 할 수 있는 건가?

‘유산의 권능까지……

대체 못 하는 게 뭐란 말인가?

아까는 그냥 힘으로 막아 냈는데, 이번에는 아예 물질을 투과시키고 있었다.

폭발도 저렇게 무효화했겠지.

공작은 천천히 이 세계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색을 되찾고 테두리가 또렷해진 놈이 나를 바라봤다.

산 정상에 서 있던 그 남자.

언뜻 스쳤지만 잊을 수 없던 눈빛 그대로였다.

그 옆에 선 레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가기 직전.

반투명한 상태에서 조금씩 현실의 위상으로 돌아온 레나가 나를 보고 외쳤다.

“기스-제-라이 님은 어디 가고 너 따위가 온 거냐!”

‘뭐라고?’

서늘하다.

문득 정신이 든다.

저 반응은, 편지 안의 반응.

레나는 연기를 하고 있다.

소녀 공작도 뭐도 아닌,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강자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왜 왔냐는 책망을 저렇게 돌려서 표현하고 있다.

목소리에서, 미묘하게 고통스러운 혼들림이 보인다.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외침.

지금이라도 도망가라는 필사적인 어조가 느껴진다.

몇 번이고 죽음을 함께해 왔어야 알 수 있는 미묘함일까.

공작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흐음, 비역에서 나왔다는 거랑 비슷한 녀석이로군……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한다.

“기스-제-라이라는 네크로멘서는

저런 걸 제작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뭔가 납득한 듯 얼굴이 풀렸다.

같은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분명하다.

황실 비역에서 등장했던 존재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같은 무리.

북받치는 혐오감에 주먹을 쥔다.

아이작과 나냐우를 이 세계에서

뽑아낸 자들이다.

과거를,혼적을, 역사를.

그 영향력을.

아예 이 세계에서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게 만든 자들.

두렵지만.

비교할 수 없이 분노가 크다.

‘오길 잘했어.’

한칼도 먹이지 않고 도망간다면 아이작을 볼 낯이 없고.

레나가 눈앞에 인질로 잡혀 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더라면.

모두 도망가고 숨었더라면.

그녀는 살해당했을까.

레나까지도 잃을 수는 없었다.

불타서 새하얀 재가 된 인간들이 해안으로 떨어지고,공작은 소리도 없이 그 아래를 걸어온다.

레나는 묶여 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묶여 속절없이 공작의 걸음을 따라을 뿐이다.

‘연기를……

문득 장단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을 데려오면서 기스-제-라이 님을 부르다니! 설마 모든 호의를 짓밟고 그분을 배신한 것이냐?”

비록 도망치라는 편지를 무시하고 이 자리에 왔지만.

말을 알아들어서 좋다는 걸까.

멀리 떨어진 레나가 작게 웃는다. 나만 알아보라는 듯 미묘하고 작은 웃음이다.

죽음 직전의 2인극.

처음으로 만났던 생에서,그녀가 모험가를 데려오고 내가 경험치를 위해 죽였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웃음에 의지해서 다시 외쳤다.

“그분을 뵈려면 나를 쓰러트려라! 전력을 다해야 할 거다!”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이 원한과 증오는 절대로 묵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좀……

새까만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공작이 비웃었다.

“어색한데?”

섬쩟함이 다리를 덮쳤다.

달려오다 흠칫 놀라 무릎을 꺾고 그 자리에 멈출 뻔했다.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해골이 말을 하니 어색한 점이 눈에 띄는군. 감정값이 뒤틀렸어.

직접 보니 색다른데.”

그런 의미였나.

아무래도 기만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여유로운 녀석을 보며 생각한다.

저 녀석은…….

해안이 조각나는 해저 발전소의 폭발에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방어하기 어려운 공격이라고 보면 그대로 물질 투과의 권능을 써서 홀려 버릴 거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상상해라.’

아이작이 남긴 말들이 떠오른다.

〈한쪽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중력,우연,마찰력을 떠을려라.〉

〈가장 뾰족한 것,가장 날카로운 것,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치명적인, 신을 죽이는 창을 상상해라.〉

〈네 공간을 상상할 권리는 오로지 너에게만 있다. 고유할수록 위력도 강해지지…….>

〈‘모든 창을 막는다’를 개념해라.〉

〈상상의 폭은 구체적이고 좁을수록 더 강하고 효과적이지.〉

2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여전히,공작은 팔짱을 낀 채로 흩날리는 재의 비 아래 여유로이 서 있다.

뭘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걸까.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비웃는 표정까지 짓는다.

하지만.

‘할 수 있다.’

비웃어라.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아이작이 테두리를 인도하던 때의 감각이 올라온다.

아이작과 나나우를 그대로 잃어버린 죄책감이,처음부터 영역의 사용을

깨닫고 차근차근 배웠던 고마움이, ‘바깥’의 존재들에게는,동굴에서 서큐버스님의 죽음을 지켜볼 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수치심이, 도움만 받던 레나가 때문에 포로로 잡혀 버린 지금의 괴로움이.

온전히 의식으로 그리는 심상心象을.

세계에 강요하는 개념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49.17%…….]

지나친 집중 때문인지 잠깐 동안

세계가 울렁거렸다.

아니,이게 옳다.

울렁거리게 만들어야.

세계가 내게 휘둘려야 한다.

‘다른 위상으로 도피해서 피하면.’

‘추적해서 소멸시킨다.’

‘피해는 천 배.’

‘방어할 방법은,없다.’

그렇게 상상하며.

방금 전 반투명하던 공작의 모습을 상상하며 오직 그것을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일격—擊

흩날리는 재를 투과해서 공격이 날아간다.

팔짱을 끼고 있는 공작은,태연한 표정으로一

- 스스숙.

몸을 다시 반투명하게 만들어서

모든 위험으로부터,

- 과앙!

피하지 못했다.

아무리 상상의 영역이라고 해도.

천 배의 피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열 배는 되었을까.

바뀌는 몸을 무형검이 ‘벤다’.

시종일관 권태롭고,모든 것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반투명한 연초록으로 변한 공작의 왼팔이 잘렸다.

“이게 무슨……!”

- 투둑.

팔뚝을 잘랐기에,

더 이상 팔짱을 유지할 수 없어 의미 없는 고깃덩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움푹 옆구리를 베고.

허벅지를 베고,

‘성공이다……r

기우뚱한 전신을 갈기갈기 찢으려 할 때였다.

시간이 느려졌다.

공작의 눈이 노랗게 빛나며 그가

순간을 길게 나눠 쓰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재가 키 높이에서 아래로 향하는 1초砂를.초

공작은 다섯 배로,열 배로.

서른 배로 나눠 쓰기 시작했다.

재灰,눈높이에서 뛰어내린다.

‘이런……

쫓아도 벨 수 없었다.

한 번에 끝을 내야 했다.

재灰,어깨높이에서 하늘거리고.

‘타격은 입었군.’

한 팔 없이.

옆구리를 베이고.

허벅지까지 깊숙이 베인 공작이 비틀거린다.

하지만,빠르다.

얼마든지 접근해서 나를 벨 수 있다.

레나까지도.

녀석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재灰,허리에서 춤춘다.

‘죽인다.’

재가 아래로 떨어지기 전,

한 번에 끝을 내야 한다.

먹히는 공격을.

'내가 아이작이라면……

생각하자.

수천 발의 포탄이 공작을 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재灰,무릎을 간지럽히고.

‘말도 되지 않는 모습이었어.’

‘이미 피해져 있는 것처럼……

‘거꾸로?’

‘그렇다면……

재灰,가볍게 발목을 쓸어 갈 때.

〈처음부터 아예 공격에 적중당한 상태를 그리면 되잖아.〉

그런 게 가능한지 어떤지를 떠나, 아이작이 낮게 속삭였다.

〈덮어씌우고.〉

〈안에서도 터트려 버려.〉

가리고 싶은 수치,범람한 탓에 의미를 잃은 자학,퇴화하는 윤리, 기억하기도 힘든 고통,음울했던 무력無거,게으른 손으로도 차마 쓸 수 없는 변명,잔해가 쌓여서 그 자체가 건물처럼 보이는 후회, 결국 상실과 실패로 끝나는 것이

내가 사는 삶이지만,

‘여기서는……

재는 바닥에 닿지 못했다.

- 좌악!

아주 작은 한 방울의 공간이.

터져 나갔다.

붉은 안개가 끼었다.

공작의 몸 안에서 소환된 검기가 그의 몸을 부수며 반경 1미터까지 소멸시켰다.

무형검은 안으로 들어갔고.

비틀거리며 달려오던 육체는 이미 터져 있다.

공작을.

아니,아이작과 나냐우를 추출한 ‘바깥’의 존재를 죽였다.

한 번도 하지 못하던 공격.

경험을 떠나,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공격을 성공시켰다.

여기서는,

“•••이긴 건가.”

레나를 바라봤다.

앞에 그녀가 잡혀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상상하지 않았겠지.

몰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빙그르르 도는 해안 위에서 길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희미한 빛 속에 재들이 떠돌고.

그 너머에 레나가 있었다.

잃은 것을 떠올리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진다.

‘다행인가……

울렁거림이 조금씩 잦아든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던 위화감이 신경 쓰인다.

나는 이렇게 앞으로 걸어가는데.

'레나는 왜……?’

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긴 항해로 어지러워졌나? 물어보려는 순간.

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도망가요!”

무언가,너무 늦었다는 표정.

‘도망… 가라고?’

불길함이 전신을 엄습한다. 공작은 죽었는데?

“빨리… 빨리요!”

- 끄드드득…….

핏물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인간이었던 질척한 즙이 꾸물꾸물 다시 뭉쳐지고 있다.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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