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트로이카 (23)
“나도 몇 번 써먹어 본 결계라서 좋은 결과는 예상했는데,솔직히… 이 정도까지 될 줄은……
감탄의 눈초리가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는다.
“이건 보람이 있다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 버리네. 죽은 녀석이 가지고 있는 힘을 훨씬 초월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
“옛 친구가… 나를 도와줬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이작의 파편이 남은 인벤토리는 딱 봐도 지독한 무리를 거듭했다.
물건을 수납하는 인밴토리로서의 기능은 그대로 남아 있고.
운용은 훨씬 직관적으로 변한 데다 파괴력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지만.
‘영자가… 사라졌어.’
묘한 공백을 느낄 수 있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밴토리에 스며들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사라지자 어딘가 새하얗게 허전한 감각이 느껴지고.
‘혹시……
아이작을 영영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깃들었다.
가라앉은 내 태도에 네크로멘서의 시선이 묘하게 빛났지만,자세하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에라스트 쪽을 흘끗 바라다본다.
“혹시… 됐어?”
밑도 끝도 없는 질문.
“됐냐니?”
“나름 굉장한 녀석을 물리쳤잖아. 저번에 군대 사열을 성공했을 때도 통치 레벨이 올랐다면서. 이번에는
뭐 들어온 거 없어?”
대놓고 기대에 찬 눈빛.
하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시나리오.’
초조함에 직접 상태창을 띄웠다.
一 띠링!
[S급 시나리오,‘레이 루비아’가 진행 중입니다!]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현재 통치 도시 - 그라스미어,
유블람,에라스트]
[통치(眞) Lv.9]
‘안 변했어.’
혹시나 싶어 확인하지 않은 세부 상태창을 빠르게 열었다.
[군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검주 퇴치(전설급 업적)
[목격자 가운데 통치하는 도시의 거주민이 없습니다.]
[평판 상승이 극히 제한됩니다.]
이곳에는 네크로멘서오}, 그녀가 이끄는 군단과,관문에서 지켜보는 시아 정도밖에 없다.
‘이들로는 곤란하다는 건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앞으로 오는 녀석들도 마찬가지겠는데?”
그녀의 말투에서 묘하게 힘 빠진 기색이 느껴진다.
그럴 만한 상황이다.
인간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후작을 살해하면 통치 레벨의 변동은 미미한 수준.
그렇다고 주민들 앞에서 이름 높은 레안드로 공을 죽이면?
끔찍한 역효과가 일어나겠지.
‘답이 없나……
가만히 침묵했다.
네크로멘서가 위로하려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하핫… 심각해질 필요는 없어. 한 번에 끝내는 건 과한 욕심이지. 실패해도 네가 이 정도까지 왔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렇긴 해도,마지막을 준비하긴 해야겠는걸.”
네크로멘서는 반쯤 타 버린 후작을 살짝 안아 들었다.
시체를 챙기는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기스-제-라이.
그녀가 최후를 말한다.
‘레나,루비아,기스-제-라이……
그녀들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쏟아부었다.
레드 플레이크와 유령 내사과장마저 섭외했다.
무엇보다 큰 장애물.
로랑스 공작의 실종이라는 기이한 도움마저 있는 상황.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지금이 아니라면.
이번 생이 아니라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까.
애써 희망을 가져 본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시시각각으로 밧줄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지만.
남은 시간 동안 레벨 10이 달성될 가능성도 있다.
내 속을 읽은 듯 기스-제-라이가 말을 꺼냈다.
“너는 영주와 통치에 전념해 봐. 행정관들에게 마력을 나눠 줘야지.
나는 여기서 상황을 보겠어.”
* * *
사홀이 지난 밤.
- 스스수"•…!
곤히 자고 있는 루비아의 곁에서 반투명한 빛을 소환했다.
검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허공에 떠서 낯설게 빛나고 있었다.
‘영자’가 자신을 희생해 만들어 준
스킬이었지만, 상상력의 부족인지 아직 굳이 검 형태로밖에 만들 수 없었다.
- 고오오오오…….
허공에 떠 있는 검이 거대해져서 방 반대편을 가득 채웠다.
‘크기가 살짝 더 늘었군.’
레나가 매일같이 수도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었다.
초조한 와중에 수련을 거듭하며,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무형검만이 위안이었다.
그때.
“흐억!”
창문으로 들어온 시아가 숨 멎는 소리를 냈다.
“대단하군……. 이게 전부 검기의 위력이라니……
시아는 자신의 레이피어를 내려다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 같은 건 몇이 와도 상대도 안 되겠어. 인질이라도 잡지 않으면 해볼 구석이 없겠는걸.”
- 우우웅!
잠든 루비아를 턱으로 가리키는 그녀를 향해 무형검이 울부짖었다.
무심코 힘을 준 모양이었다.
“아아,무섭다고. 농담이야. 이런 농담 싫어하나?”
“밤중에 무슨 일이냐.”
그녀의 기척을 느낄 때부터 몹시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시아 으스노르.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을 병적으로 싫어하긴 하지만,현실주의자이고. 실리주의자다.
별다른 일도 없이 한밤중에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라고. 방금 레나에게 경고가 왔거든.”
불길한 예감은 순식간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된다.
“경고라고?”
“후작과 같이 온 그 과다 성장한 말 새끼. 그게 푸른 사자 기사단에 뛰어들어서 난리를 쳤다네. 혼자 돌아온 애마를 보고 사자 기사단 전체가 즉시 출격한단다. 젠장……
시아가 짧게 혀를 찼다.
“그때 따라잡아• 죽였어야 했나 몰라.”
의미 없는 후회다.
미유를 놓아주지 않고 죽였다면
후작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일단 놔준 이상.
뭘 탔어도 도망치는 미유를 따라 잡지는 못했겠지.
‘페르세우스에 탑숭한 수녀라도 오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지도의 분석은 끝도 없이 길어졌다.
분석에 페르세우스가 필요하다는 전갈과 함께 수녀와 조우한 지도 오랜 시간이 흐른 상태다.
그렇긴 해도.
‘좀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저쪽 귀에 들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환한 달 너머로 새빨간 피 구름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레벨 10을 코앞에 두고서 이렇게 되다니.
후작 한 명은 어떻게 해냈다.
하지만 황실이 본격적으로 전력을 투입하기 시작하면 역시 무리다.
푸른 사자 기사단까지 전멸시키면 숨겨진 힘들이 움직이지 않을 리가 만무하고.
비역에 있는 녀석들이 출동해서, 사방에서 술수를 부리기 시작하면 감당할 방법이 없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격무에 지쳐 곤히 잠든 루비아의 얼굴이 보인다.
이번에도 세계선을 고정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잘되는 줄 알았는데……
통치 레벨을 계속 을리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10은 되지 않는다. 남은 시간 바쁘게 움직이려 했지만 이제 그것마저도 끝이다.
‘사홀.’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다.
수도에서 에라스트까지 닿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계속 바뀌지
않던 레벨이 사흘 안에 오른다는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게다가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면, 남부의 주민들은 자신을 통치하고 있었던 게 인외의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데드 군단이 땅에서 솟아나고, 그들이 황실 기사단과 맞선다면.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끝이지.’
루비아가 그동안 얼마나 탁월한 통치를 해 왔건 상관없다.
마물의 무리를 이끄는.
모두를 기만한 희대의 마녀.
신뢰가 두터울수록 무너졌을 때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닫는다.
루비아를 향해 엉켜들 인간들의 악의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통치 레벨의 상승은커녕 그동안 쌓아왔던 게 모두 무너질 위기.
一 티잉.
시아의 손톱이 레이피어 검신을 튕기며 침묵을 깼다.
“그럼 난 슬슬 준비할게.”
“뭘… 준비한다는 거지?”
“튀어야지.”
“뭐?”
큰 소리가 튀어나을 뻔했다.
“엠버로 도망가야 할 거 아니야. 이쪽은 처음부터 그런 약속이었어. 최고급 은신처를 보장했다고.”
“기스-제-라이도 부하들 정리한 다음 내일 올 거야.”
그녀까지?
하지만 네크로멘서의 결정도 금세 납득된다.
군사 평판이 오르지 않는 이상, 농성의 의미는 조금도 없다.
인간들에게 보이는 것도 불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무용.
버티는 의미는…….
극히 적다.
“영주님도 얼른 설득해 보라구. 놓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엠버로 도망친다니.
이번에도…….
‘실패했다.’
나는 실패했다.
어떻게 노력했건 상관없다.
결과만이 말해 주고 있다.
실패다.
이미 가득한 실패에 다시 한 획이 더해진다.
‘여기까지 강해졌는데……: 다시 한 번 도피 생활의 지속.
숨어서 유예를 살아가다가.
세계는 무너지고 미래는 종이처럼 구겨지겠지.
전쟁이 일어나고,마왕이 내려와 용사가 나타나면.
선택지는 점점 좁고,좁아지다가. 다시,루비아를 잃고.
기스-제-라이도 잃고. 레나도 잃고.
예전처럼,언제나와 같이.
혼자서 회귀할 내일이 그려진다.
멍하니 혼들리고, 혼들리다가.
곤히 잠든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의 그녀를 버릴 수는 없다.
물론 함께해야 한다.
하지만.
'루비아가 떠난다고 할까?’
매일 옆에서 지켜보았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세 도시를 밤낮으로 생각하면서
더없이 몰입해 통치해 왔다.
식사도 잠도 잊고 혼을 태우듯이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까지 영주위에 진심을 다한 상태에서 시민을 버리고 떠날지가 걱정이었는데.
“알겠… 어요.”
조용히 루비아가 눈을 뜬다.
실패가 마음에 가득해서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칼날을 뱉는 것 같은 단호함으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 도망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내려온다는 기사단과 더는 싸우지
말아 주세요.”
루비아가 저런 목소리로 말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녀의 세계선을 고정시킬 기회를 눈앞에 두고 떠난다는 게 죽는 것 이상으로 괴로웠다.
“그런 녀석들은 내가 충분히……! 며칠이라도 시간을 벌 수는 있다.”
하지만 루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 최고의 기사단을 몰살하면 보복이 주민들에게 끼칠 거예요. 그건 안 돼요. 적어도… 제가 여기 영주로 있는 동안은요.”
“하지만 저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제약을 줄 수도 없으니… 저는……. 이제 영주를 그만두려고 해요.”
“하루 동안 도시들과 이별을 준비할 거예요. 그 정도 시간은 제게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다.”
“충분해. 기스-제-라이도 지하로 자신의 군단을 이끌려면 준비할 게 많다고 했거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 주겠다는 그녀의 마음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하루가 지났다.
루비아는 마지막으로 영주로서의 시간을 보냈다.
군단을 재정비한 기스-제-라이도 그라스미어에 도착.
푸른 사자 기사단 도착까지 이틀.
새로운 아침이 밝았을 때.
영주 루비아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라스미어의 광장에서, 그녀는 단상 위에 혼자 섰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할 이야기가 있다는 소식에 다른 두 도시에서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상업이 활발해지며 예전보다 훨씬 확장시킨 광장이지만,무려 수천을 헤아리는 인파는 광장을 무척 좁게 보이게 만들었다.
모두가 하루 일손을 놓고 달려온 이들이다.
-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지?
- 결혼 발표라도 하시려나?
- 에이,누가 감히 우리 영주님을!
- 그래도 아이를 낳으면 영주님 같은 훌륭한 아이가 여럿 생기지 않겠나? 좋은 배필을 찾으셨으면 좋겠어.
군중의 대다수가 전혀 엉뚱한 상상 들을 하는 중이다.
‘걱정이군……
루비아는 뭘 하려는 건지 마지막 순간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가장 검소한 차림으로,시종도 한 명 거느리지 않고 단상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영주다웠다.
통치자로서 모든 순간을 몰입해서 살았기에 가만히 있어도 매혹적인 권위와 힘이 홀러나왔다.
치장도 의전도 필요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증명.
그런 그녀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옹성대던 군중이 마치 기적처럼 조용해진다.
“지금껏 함께해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스-제-라이가 군중 속에 섞여서 시전하는 음성전달의 마법은,조금 응성거리는 군중의 귓바퀴에도 또렷 하게 목소리를 꽂아 넣는다.
“부족하고,두려울 때도 많았지만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생각하면서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저의 힘이었고,이정표였으며, 한 분 한 분이 살아 있는 제국
자체인 자랑스러운 분들입니다.”
영주는 단상에서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작은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기적 같은 통치를 보여 준 영주는 봄바람처럼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고개를 숙인 적은 처음이었다.
어떤 영주가.
어떤 백작가의 귀족이 평민들을 상대로 머리를 숙인다는 말인가.
군중 중에는 구호소의 거지도, 지방의 광장을 전전하는 곡예사도, 생계를 위한 백정이나 나무꾼도, 난쟁이도,매춘부도,밀렵꾼도,광장
구석 통 속에서 나체로 볕을 쬐는 나체주의자도,모유를 파는 여성도, 천대받는 떠돌이 점쟁이도 있었다.
레이 루비아는 그들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도.”
술렁임이 멎고.
영주가 말을 잇는다.
“저는,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여러분을 기만해 왔습니다.”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술렁임이 군중 사이에 퍼져 가고, 희미하게 불안한 기류가 감지된다.
“지금 뭘 하려는……!”
군중 사이에 숨어서 지켜보다가, 당황하는 내 손목을 기스-제-라이가 잡아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