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트로이카 (17)
남자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최초의 목적지는 그라스미어.
제국 남부의 무기고 역할을 하는 도시인 데다.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缺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다.
지정학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극히 중요한 도시.
남부의 무기창武器倉에 해당하는 그곳을 지키기 위해,황실은 일부러
제국군 남부 제3 특작 기병연대를 근처에 주둔시키고 있다.
지금도 기병연대 라인버그 남작.
아니,황실의 충실한 애벌레가. 전투태세검열을 진행하고 있는 곳.
그에 비하면 에라스트는 의미가 훨씬 떨어진다.
비옥한 토지 덕분에 밀 생산량은 제법이지만.
경작하는 토지 면적 자체가 작아 무시할 만한 정도였다.
‘황실 비역의 지침만 아니었다면… 유령이 이런 곳에 머무를 일은 전혀 없었겠지.’
그런데도.
유령 서열 6위.
하인즈 루엘.
그는 그라스미어로 바로 통하는 도로에서 벗어나,에라스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깐은 괜찮겠지……
어느새 보슬보슬 비가 내린다.
멀리 보이는 에라스트 성벽 위로 3월의 봄비가 흩날린다.
훌날리는 봄비가 투명한 꽃잎처럼 느껴졌다.
꽃잎이 이마에.
볼에 닿았다가 곧 홀러내린다.
하인즈는 품에 손을 넣었다.
준비했던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까슬까슬한 감각이 가슴에 닿는다.
- 사르륵.
서서히 공기가 식어 가지만.
가면 아래 얼굴에 닿은 빗방울은 어째서인지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인즈는 도로에서 도시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가면 속의 하인즈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늘과 햇볕 어디에 있어도 그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상인들이 통과할 때 가볍게 성문 사이를 지나갔다.
‘에라스트……
대로변의 건물에 기대어 사람들을 바라봤다.
두 번째로 방문하는 도시.
시아가 관리하는 곳이다.
서열 2위의 그녀로서는 썩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가끔 이런 데 머물면 머리가 깔끔해질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시골.
아니.
이제 평화롭지도 않겠지.
‘평화롭지 않아야 하는데… 으음?’
안개처럼 내렸던 봄비가 그치고, 투명한 빗방울 대신 문득 위화감이 살갗 위로 흘렀다.
이 도시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모두의 표정이 밝고.
목소리는 부드러우며.
사람이 많았다.
‘이상하군.’
하인즈는 고문을 즐기지 않지만, 경험은 풍부하다.
이상을 꿈꾸던 풋풋한 인간이 몸에서 피와 눈물을 빼앗기고, 파헤쳐진 피부가 헐며,조금씩 절단된 신체의 마디마디가 썩어 들어가서,모든 걸 체념하는 고기 인형이 되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아왔다.
관찰한 경험도.
직접 그 과정을 집도한 경험도 적지 않으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 결코 얕지 않았다.
상대의 표정을 보면 묻지 않고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지나다니는 에라스트의 시민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럴 리 없는 상황에서.
‘영주가 애벌레로 바뀌었을 텐데.’
바로 그 시아에 의한 일이다.
유령에 임시로 파견된,애벌레를 제작하는 아쥬라의 부탑주들보다도 상위 서열에 있는 바로 그 여자가 맡은 일이다.
유령 서열 2위.
위에 있는 건 공작 각하뿐.
만에 하나도 실수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에라스트는 애벌레로 바뀐 영주의 폭정에 고통스러워해야 정상.
삶이 비극이어야 할 자들의 눈에 희망과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거리에 있는 젊은 남자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더 많다.
‘병사들을 징집하라고 했을 텐데. 전부 끌려가야 했던 거 아닌가.’
지금은 특히 그렇다.
그라스미어에서 라인버그 남작에게 군대가 검열을 받고 있을 시간.
애초에.
그 검열을 2차로 감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가 남부까지 내려온 게 아니었던가.
물론 그건 적당한 핑계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긴 하지만.
역시 기괴하다.
머릿속에 얼룩처럼 묻은 위화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시아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유령으로서의 직감.
로랑스 공작의 왼팔로서의 직감이 날카롭게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에라스트……
여기서 덮을까.
파볼까.
덮는다면…….
오히려 시아에 대한 실례겠지.
하인즈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손깍지를 꼈다.
‘파헤쳐 주지.’
- 스륵.
가면을 쓴 채 성 안으로 들어간 그는 미묘한 광경을 발견했다.
‘뭐지?’
조그마한 회의실.
누군가 미동도 않고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본 것은 업무 태도 때문이다.
잠시 몸을 푸는 일조차 않은 채 기계적으로 눈과 손을 움직여 가며 빼곡한 숫자를 체크하고 있었다.
‘대단한 녀석이군.’
감시하는 이 하나 없는데 저렇게 성실한 태도라니.
황실에서 일하게 하고 싶을 만한 인재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서 살피자 금세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차갑다.
저렇게 많은 문서를 처리하려면 머리에 잔뜩 열이 받아야 할 텐데, 자리에 앉은 남자는 기이할 정도로 차가웠다.
바로 옆까지 다가가니 금세 알 수 있었다.
‘이야……
하인즈 루엘의 양쪽 입꼬리가 모두 길게 찢어졌다.
이것으로.
그는 시아 으스노르와,아마…….
확실히 더 얽히게 될 거라는 직감이 머리카락을 쭈뻣쭈뻣 곤두세운다.
하인즈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확신을 위해서.
박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반걸음 앞으로 갔다.
一 서걱.
업무에 몰두 중인 녀석의 목 뒤를 얇은 장검로 찔렀다.
칼날이 성대를 차단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끄극……
‘뭐야,피도 안 나오는군.’
허리에 찬 단검으로 다시 앞에서 심장을 찔렀다.
인간을 찌르면 샘물처럼 선혈이 솟구치던 부위인데도.
들어가는 감각도.
출혈량도 전혀 다르다.
‘죽은 지 오래됐네.’
“끄… 끄극……
아직 움직이려는 행정관을 유령 하인즈 루엘은 고개를 기울여 흘끗 훑어봤다.
“고통은 없지? 그런데 그냥 도움 요청하려는 거지?”
하인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좀비는 고문도 먹히지 않는다.
- 서걱!
조용히 잘린 좀비의 목이 회의실 바닥에 떨어졌다. 피는 흐르지도 튀지도 않았고, 목 없는 행정관의 몸이 숫자가 빼곡한 서류 앞으로 쓰러졌다.
‘o으,
하인즈는 세심하게 좀비의 시신을 더듬었다.
‘•••첸들러 크시론?’
구겨진 시체의 직인이 주머니에서 나온다.
그 외에도 챈들러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물건이 다섯.
‘챈들러 가문의 녀석인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하인즈는 도장을 챙기고 시체의 목과 몸을 대충 한쪽 구석 상자에 던져 넣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이 모든 게 시아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삼십 미터 뒤에… 또 하나.’ 같은 식으로 움직이는 기척. 관찰을 끝낸 뒤.
- 털썩.
‘팬들러 이엘.’
다시 살해하고.
증거품을 손에 넣는다.
一 서걱.
‘첸들러 제너.’
- 푸슛!
‘첸들러 벨레……
“큭큭큭……
네 번째 좀비를 ‘살해’했을 때.
칼을 잡은 손이 떨릴 정도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광소가 뱃속 깊이서 터져 나온다.
'재밌어……
고문 따위를 할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기쁨이 온몸으로 흐른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유희인가.
그녀는 분명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을 대했다.
여기에 시아가 얽혀 있다면.
도대체 얼마나.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 것인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짜릿짜릿한
감각이 오는 것 같았다.
싸늘한 고양감이 전신에 퍼진다.
‘어,살아 있는 녀석이네.’
일을 마치고 다락방으로 돌아가는 시녀가 보인다.
애초에 성에 시녀의 숫자가 너무 적은 게 의아했지만,관리자들이 모두 시체라면 수발을 들 인력은 당연히 전혀 필요 없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귀하겠군. 살살 다뤄 볼까.’
시녀의 입을 뒤에서 막고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시녀의 눈빛이 문득 결연해진다.
뒤에서 잡은 손을 이빨로 깨물려 애썼지만,터무니없는 악력 때문에 철로 된 기계에 고정당한 것처럼 입에서 침만 줄줄 흐를 뿐이었다.
숨도 못 쉬게 잡고 있던 하인즈는
굳이 질식시키는 것을 즐기지 않고 곧바로 자백제를 시녀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가 추구하는 쾌감도 아니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선 너무나 사소한 쾌감이기도 했다.
약 기운이 돌며,잔뜩 결기를 품던 시녀의 눈동자가 허무하게 풀렸다.
하인즈도 손을 풀었다.
초점이 사라진 시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행정관들. 잿빛 머리칼의 여자. 그리고 새로 부임한 영주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라.”
알약 하나에 무너진 시녀는 살짝 입을 벌린 채 순종적인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 영주님… 루비아 영주님은
너무 좋아요. 영주님은 아주아주
좋은 분이에요
자백제를 삼키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부터 이야기하게 된다.
잠깐의 장광설은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인즈는 축 처진 시녀의 몸을 꼬꾸라지지 않게 양손으로 받치며 이야기를 들었다.
“영주님… 여기 계실 때부터도…
마성廣性은 어쩔 수 없이 드문드문 바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직접 만나야겠군.’
“영주는 어디 있지?”
“어제는 에라스트에 오셨다가… 아침에 그라스미어로… 가셨어요… 오늘… 검열… 때문에...
“잿빛 머리의 여자는? 눈동자가 붉은색인데.”
“모르겠어요……. 전혀 몰라요……
“영주 주위에는 누가 있지?”
“영주님… 주위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혼자…. 아침에도 혼자 나가셨어요……
“전쟁 준비는 안 하나? 수탈은?”
“아니에요… 영주님……. 그런 거 절대 안 해요... 오히려 세금도…
군역도 전부 다 줄어들었는데……
지금은 폭정을 저지르고. 고혈을 짜내서 전쟁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저렇게 잘살고 있다고?
“행정관들은…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에요……. 몇 개월 전에 갑자기 그라스미어에서 이곳으로… 첸들러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더 들었지만 의미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직접 확인해야겠군.’
시녀를 기절시키고 침대에 눕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좀비 자체는 납득할 수 있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이 가르베라를 십 년을 연구해 개발한 애벌레는, 상대를 먹어치우고 외모와 능력을 복사하는 일을 해냈다.
의식을 가지고 봉사하는 좀비가 없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이런 짓이 가능한 자라면……
이 세계에는 오직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녀는 절대로 유령과 같은 편은 아니다.
‘레드 플레이크의 네크로멘서……
암살교단은 유령의 첩보 최상위 순위에 존재한다.
무법자들.
그러나.
뿌리를 뽑으려면 감당할 수 없는 출혈이 예상되는 집단.
황실의 전 역량을 털어 넣더라도 승리 여부마저 불확실.
첩보를 지속하되.
교전 상황이 올 경우 최우선으로 회피하라는 지령이 내려진 단체다.
'크크콕… 누님..
즐겁다.
‘시아 누님…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시는 겁니까?’
마음 어딘가가 부풀어 오르는 듯 진득한 쾌감이 치민다.
상대가 아무리 레드 플레이크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어떤 신호도 남기지 않고 당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0%.
답은 하나뿐이다.
반역.
‘크크크큭……
어차피 하인즈 루엘은 황실에 대한 충성 따위에 숭고함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하얀 손.
누군가의 깔끔하게 빠진 새하얀 손에 오히려 숭고함과 목적의식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편이 을바르다.
품 안에서 움직이는 까슬까슬한 물건과.
시아와 점점 위험하게 얽혀드는 감각에 새삼 전율하며.
유령 서열 6위 하인즈 루엘은 실로 오랜만에 ‘정열’을 느꼈다.
그는 곧장 비밀 통로로 향했다.
‘여기다.’
기억하고 있는 기둥을 서둘러서 두 바퀴 걸었다.
부드럽게 기둥이 열리고,안쪽의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문을 닫고.
“계십니까〜?”
왼발. 오른발. 왼발.
흥분으로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시아 누님〜!”
즐겁게 소리쳤다.
그녀는 무슨 짓을 했을까.
뭘 생각하고 있을까.
통로의 코너를 한 번 꺾자.
안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다섯,여섯,아홉……
적인가?
하지만 인기척이 뻔히 드러난다.
고작 저런 수준으로 이곳에 침입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알 수 없는 일이다.
- 우웅.
왼손은 장검에 검기를 띄우고.
- 끼긱. 끼기긱.
오른손으로 날 빠진 단검을 들고 벽을 긁으며 걸어갔다.
불청객의 등장을 알리고 싶을 때 하는 습관이었다.
왜 맞아주지 않는 걸까?
저기서 뭘 하는 걸까?
‘전부 스무 명.’
숫자가 확정된다.
‘무언가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앉아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자세한 상황은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자세한 상황은…….
“너희들… 도대체……?”
그 안에는.
“히 •• 하하하". ..
하인즈가 터트리는 음산한 광소는 기척을 없애는 벽에 금방 흡수되어 사라진다.
“크크크… 크콕… 으하하탓...
-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하지만 웃는 쪽도,웃기는 쪽도.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결국 어떻게든 유희를 추구한다.
그 끝은 결국 피 냄새를 풍기고, 유령은 어떤 평판도 비난도 받지 않고 어둠 속에서 그런 일을 즐기기 가장 좋은 집단이었다.
황실에 충성한다는 사명보다도, 위험 없는 유희의 즐거움 때문에 유령이 된 검객들도 많았다.
모두 아는 얼굴들.
그들은,지금 하나같이.
무기를 놓고.
지독히도 지루해 보이는 작업에 손바닥이 닮도록 몰두하고 있었다.
어찌나 많이 꼬았는지.
손바닥에서 일정한 두께로 나오는 새끼줄은 가운데에 1미터가 넘게 수십 덩이가 쌓여 있었다.
“너희… 뭐 하는 거냐?”
하지만 그들은 어떤 대답도 없다.
역시 죽어 있다.
멱살을 잡아도 반응하지 않고.
“끄어……
칼로 찔러도 작은 소리나 낼 뿐.
“하… 하하……
가마니라도 만들려는 건지. 멍석이나 바구니라도 짤 건지. 유령들이.
아니,눈앞의 녀석들은 지능조차 제대로 부여되지 않은 좀비.
그런 노력조차 들이지 않은 것들.
멍청해졌으니 쓸모 있는 일이라도 시키는 걸까.
하인즈는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만지작거렸다.
비교하듯.
손목과,발목에 차고 있는 것들을 홀끗 바라본다.
‘이거… 쓸까?’
갈등은 오래지 않아 끝난다.
심장과 가까이 있는 것.
무언가를 가슴에 품었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면도 무기도 없이.
평생의 천직인 것처럼 새끼줄을 꼬는 유령들을 바라본다.
“끄어어……
그 몸을 적당히 뒤져 증거를 모두 수집한다.
남부에 파견된 유령은 전멸.
물론.
시아는 이 중에 없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유령’을 관둔 것 같으니 을바른 문장이다.
일을 끝내고 천천히 통로 뒤쪽으로 물러난다.
그라스미어로 갈까?
황실로?
나가자마자 곧바로 신호를?
코너를 하나 돈 순간.
“오호.”
하인즈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와이어가 코너 도는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천천히 걷는 정도의 관성이라도 그대로 목이 잘릴 만큼 날카로운 슈텐 와이어였다.
강철로 된 검을 내리쳐도 가볍게 튕기는 데다, 절삭력은 혐오스러울 정도인 슈텐 와이어는 유령 시아 으스노르가 검객으로서 ‘거미줄’을 치는 방법이었다.
- 파삭!
하인즈 루엘은 검기를 일으켜서 주위를 휘휘 저었다.
슈텐 와이어도 새하얀 검기에는
도리 없이 허무하게 끊겨 나갔지만, 싸우는 도중에도 끝없이 설치되는 와이어를 신경 쓰는 일은 끔찍한 정신력 소모였다.
“누님입니까. 기쁘군요. 저도 이제 거미줄을 칠 만한 상대라는 겁니까?”
“곱게 죽어라.”
“하하… 하하하..... 고우신 거야
누님 아닙니까?”
- 사르륵.
투명한 슈텐 실자락이 빙 둘러서 하인즈 루엘에게 조여졌다.
부유하는 공간이 악의를 가지고 그를 유린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 였다.
하인즈가 로브를 펴고 손목 아래 숨긴 스크롤을 찢었다.
- 파지지지직!
탑주급의 마법사가 만들어 줬던 전격 스크롤이 발동하며 와이어를 전부 감전시켰다.
- 파직! 파지지직!
어지간히 공을 들인 스크롤인 듯, 슈텐 와이어는 충격으로 튕겨나고 흐트러지며 치직거렸다.
와이어와 연결되어 있는 시아의 모습도 벽 근처에서 드러났다.
시아의 두꺼운 장갑이 그럭저럭 전격을 막아 내고 있었지만,완전히 감당하기는 어려운 듯 결국 손에서 와이어를 놓아 버렸다.
“쓸데없는 짓이었나.”
“하핫! 아닙니다,누님! 거미줄이 아니었다면 싸움 중에 이 스크롤을 썼을 테니까요! 그러면 한 방 먹지
않으셨을까요!”
“그딴 말투 쓰지 마라. 그 거지 새끼 생각나니까.”
“곤란합니다,누님. 공작님과 저는 말투가 전혀 다르거든요?”
“닮아간다고.”
말이 끝나는 것보다 빨리 시아는 창을 들어 찔렀다.
창날의 짙푸른 기운이 아직까지 부유하는 뇌전을 뚫고 날아왔다.
하인즈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훌쩍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창날의 푸른 기운은 아예 창끝을 떠나서 앞으로 쏘아졌고,
하인즈가 간신히 피하자 벽에 깊은 상처를 내며 터트렸다.
그사이 하인즈는 튕기듯 앞으로 다가와 칼을 그었다.
시아는 건를렛을 낀 손을 들어서 칼을 잡아내려 했으나 칼은 그녀의 건를렛에 작은 폭발만 일으킨 다음 뒤로 빠져나갔다.
시아는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나며 적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다시 슈텐 와이어를 깔았다.
하지만 하인즈는 도망갈 생각은 크게 없어 보였다.
“누님,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배신할 생각이셨습니까?”
시아가 대꾸했다.
“기회가 없었지.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생각이었다.”
“이거 참… 태생부터 반역자시면 어떻게 용서해 드립니까?”
하인즈가 그때까지 한 손으로만 휘두르던 얇은 장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갑니다.”
푸른 기운을 품은 창과 칼이 다시 연달아 부딪쳤다. 부딪칠 때마다 폭발이 터져 나갔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어쩐지 검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시아는 견뎌내지 못하고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실제로 그녀가 디디고 있던 석재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대로 버티실 거면 창이 먼저 부러질 겁니다! 아하핫… 혹시라도 저의 청혼을 받아주시면 팔 하나 자르는 정도로 용서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만!”
마지막에 창을 받아냈던 열 번은 발을 디딘 바닥이 점점 깊어지며 패여 가는 상태였다.
하인즈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중검술重劍術……
- 달그락.
시아는 바닥에 창을 버렸다.
“설마… 항복하시는 겁니까!”
하인즈의 외침에 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왜 내가 창을 쓰는지 아냐?”
"항상 창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창 말고 다른 것도 쓰십니까?”
“너 네랑……
그녀가 작은 레이피어를 뽑았다.
짙푸른 기운은 보이지 않았지만, 통로의 야광주에 칼끝이 반짝였다.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서다,거지 새끼들아.”
다음 순간 시아는 하인즈가 아예 볼 수도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검기조차 발휘하지 않고 속도에 모든 걸 투자한 것 같았다.
하인즈는 아예 눈을 감고 집중해 피했지만 어깨가 찔렸다.
밑으로 다가오는 느낌에 아래로 칼을 휘둘렀지만 이미 레이피어가 허벅지를 찌르고 빠진 뒤였다.
분명이 창에 검기를 쓸 때는 그와
같은 속도였는데,지금은 어처구니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못 버틴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조금씩 찔리다 출혈로 인해 금세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예측하자.
도박이었다.
그는 타이밍을 계산했다.
정면을 노리고 온 힘을 실어 칼을 휘둘렀다.
부딪치기만 한다면.
레이피어 정도는 부술 수 있겠지.
- 과강!
‘성공이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결과는 황당한 것이었다.
시아의 레이피어는 부러지지도, 튕겨지지도 않고. 그의 칼을 타고 위로 흘러을라 오른쪽 어깨 동맥을 찌르고 빠졌다.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크혹……
한 손으로 억지로 눌렀지만 피는 멎지 않는다.
“누… 누님……
시아는 뭐 어쩌라는 듯이 쓰러진 그를 바라봤다.
하인즈는 나머지 한 손을 어깨에 갖다 대는 대신,품에 손을 넣었다.
반년 전에 주문한 그것.
애초에 그녀에게 이걸 건네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레이피어 칼끝이 그 손을 따라서 경계하듯 움직였다.
하지만 하인즈의 품에서 나온 건
촘촘하게 그물이 엮인 고급스러운 검은 망사 장갑이었다.
마법 같은 건 감지되지 않았다.
일부러 피 묻지 않은 손으로 장갑을 건네 든 하인즈가 속삭였다.
“누님은 손이 제일 예쁘신 데… 건틀렛 끼지 말고 이거… 끼시죠. 이걸 낀 모습… 죽기 전에 한 번만 보여 주세요.”
“무슨 개소리야?”
“새… 생일 선물입니다.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건 알고 계시는 건가요… 크큭……
의식은 희미해지고.
장갑을 든 손은 떨린다.
자신의 더러운 피가 묻는다면… 받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줬으면 좋겠는데.
“…빨리 죽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실혈사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인즈는 피는 빠져나가지만 흥은 오히려 돋워졌다.
시아 으스노르의 이런 비밀들.
그것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먼저 알아내는 대가로 사망한다.
이 정도면, 꽤 얽혀들지 않았나.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더 찔러 줘도 좋을 텐데.
궁극의 희망이라면.
그 아름다운 손으로 내가 장갑을 끼고,자신의 목을 죽여 준다면… 눈물을 흘릴 기쁘겠지만.
이 정도로도.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가 발밑으로 흐른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진다.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은.
선물한 졸라서 정도로
시아의
자신을 곁에 두고 언제나 시아를 견제하도록 시켰다.
유령 내부의 감찰.
하지만,그녀를 만나자마자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좋아… 합니다……
너무 늦은 고백이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을 가지기에 유령으로서 그녀도,자신도 너무 더럽혀졌는지 모른다.
‘기사단에나 들어갈 것을……
- 푸슛.
“뭐라는 거야.”
시아는 괴로워하는 하인즈의 동맥 두 군데를 더 베어냈다.
장갑 운운하며 더듬거리던 녀석은 몇 초가 지나자 온몸의 피가 빠져 죽어 버렸다.
“으음.”
그녀는 장갑을 다시 내려다봤다.
“예쁘긴 한데……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물 재질이 고급스럽고 세공도
제대로 된 최상품이다.
장인이 만들어 낸 명품.
“버릴 이유는 없지.”
장갑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녀는 하얀 손으로 장갑을 끼고 몇 번 손등을 쓰다듬었다.
손의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진다.
“홈… 기분 괜찮네.”
하지만.
뒷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다.
이제.
평탄한 건 여기까지다.
남부로 파견한 서열 6위 유령의
실종.
황실이 모를 리가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애벌레 따위로 모방할 수도 없다.
“슬슬 계약을 이행해 달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