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트로이카 (13)
나는 불안함을 움켜쥐는 기분으로 내사과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째서.
유령 최정예가 이런 곳에 있는가.
루비아를 영주로 즉위시킨 날.
한 번 그녀에게 죽었다.
마법을 봉쇄하는 진홍색 장갑에 뇌전이 잡히고.
냉기는 스러졌다.
휘두르는 쇠사슬에 맺힌 짙푸른
기운은 내 칼을 찢었다.
여태껏 루비아 시나리오를 막고 나를 괴롭힌 강력한 혹막이.
이제 흑막 본인에 의해 걷힌다.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긴장감이 덮쳐왔다. 나는 긴장을 털어내듯 손을 움직이며 물었다.
“단서라고?”
내성 바닥에서 솟아난 내사과장이 잿빛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내가 그동안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녀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지금,저만 쏙 빼놓고 비밀 얘기 하는 건가요? 아니겠죠?”
나는 어색하게 뒤를 돌아봤다. 분명히 자고 있던 걸 확인했는데. 은신 스킬이라도 사용한 것일까. 루비아는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내 뒤에 서 있었다.
“그게……
“직접 저한테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으신 거였나요? 그것도 좋지만 두 번 들을래요.”
루비아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표정.
당연히,내게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
‘조금,곤란하군.’
이것은 유령에 관한 이야기.
루비아를 둘러싸고 숨어 지냈던 자들에 관한 정보다.
그림자에 숨어 모든 걸 하루 종일 지켜보고 들었던 자들의 이야기.
루비아가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까봐 두려워져서,그녀를 배제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루비아,두 시간도 안 잤으면서 좀 더 자는 게……
“두 시간이면 곤란해요? 그치만, 영주는 자고 싶은 만큼만 잔다. 제가 세운 규칙인걸요?”
애초에 통하지 않는다.
여기는 그녀의 성.
태어났을 때부터 자라 온 성 안에 유령이 왜 주둔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영주님이신가?”
붉은 눈의 내사과장이 루비아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게다가.
레나도 나를 전혀 도와주지 않고
창문에 걸터앉아 피식 웃고 있다. 어쩐지 3 대 1로 밀리는 기분.
“같이 들어요. 괜찮죠?”
“그거야… 내가 괜찮지 않다고 할 거야 없지……
루비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살포시 나를 을려다본다.
우리 모두에게 파국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저런 표정을 지어도 괜찮은 걸까.
‘걱정만 하고 있을 수도 없지만.’
내사과장은 꼬았던 머리칼을 다시 풀며 음습하게 웃었다.
“애초에 영주님 덕분에 진행할 수
있던 이야기이기도 하지. 먼저…… 그녀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거다.”
익숙한 표지였다.
[세이론 1세부터 현 황제까지의
머리칼 색에 관하여.]
- 이사야 레이그란트.
아이작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루비아가 처음 가지고 내 무덤에 올라왔던 책.
사령술 원고가 끼워져 있던 책이다.
내사과장이 천천히 페이지를 펼쳤다.
“영주님이 신경 쓰인다고 하셨던 책이지. 이상한 점을 알아보겠나?”
묘하게 시험하려는 것 같은 느낌. 아이작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여기다. 한 번 뜯었다 끼워 넣은 혼적이 있어.〉
〈일부러 적셔지고,일부러 건조된 종이다. 시간에 삭은 거랑 주름이 달라. 다시 보니 더 확실하군.〉
본문으로 가서 세이론 1세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뜯고 끼워 넣은 걸 말하는 건가? 일부러 적셔지고 건조된 종이잖나. 시간에 삭은 거랑 주름이 다르고. 건국제만 바꿔 끼워졌군.”
“..
아이작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자 주변의 공기가 흔들린다.
“저는… 몇 번씩이나 보고 나서야 알았는데……! 정말로 책에 조예가 깊으신가 봐요!”
루비아는 깊게 감탄하고.
“큭큭……
레나는 뭔가 눈치챘다는 것처럼 가볍게 웃을 뿐이지만.
내사과장은 입만 쩍 벌리고 있다 겨우 말을 꺼냈다.
“영주님이 말해 준 건가?”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한 장씩 만져야 알 만한 건데……. 당신… 특별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안목이군.”
“뭐……
조금 민망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혹시 이 페이지가 바꿔 끼워진 의미도 아는 건가?”
“건국제의 머리색 페이지만 바꿔 끼워졌다면,세이론 1세는 은발이
아니었던 거고. 그러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황실이 내세우고 있는 정통성은 위조된 거겠지?”
내사과장은 감탄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지혜를 가진 언데드로군. 이럴 거면 애초에 같이 움직일걸 그랬어. 책을 펼치는 단 한 순간에 모든 걸 짚어 내다니.”
“괜히 시험하려고 해서 미안하다. 우리들 유령의 중요한 임무 하나는 방금 본 것 같은 서적 편집이야.
황실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는 책,위협이 될 만한 책은 페이지를 교체하지. 아예 수거해서 비역에 보관하기도 하고……
내사과장은 [세이론 1세부터 현 황제까지의 머리칼 색에 관하여.] 라는 책 역시 있는 줄도 몰랐다고 고백했다.
책의 선정과 교체 페이지의 작업은 모두 내사과장의 윗선에서 이뤄지고 있었으며,그마저도 모두 전해지지 않는 선대先代의 업적이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그리고,나는.”
책 한 권이 품에서 꺼내진다.
“이런 책을 발견한다.”
〈에라스트의 축성 구간 검증〉
“이 성의 축성에 관한 책이면……
루비아가 말했다.
“우리 도서관에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걸요. 본 적 없는 책인데……
루비아가 에라스트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최소한 한 번은 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건 이 세계선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겠지.
내사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 말이 맞다. 하지만 레드 플레이크의 도움까지 받아서 정말 힘들게 구한 책이지……. 황실 비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굉장히 숨겨진 서적이었어.”
그녀가 천천히 페이지를 펼쳤다.
“세이론이나 황실과 아무 관련이 없을 법한 이 책이,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그런 ‘교체된’ 페이지가 가장 많더군.”
지질조사 부분이 지나고.
본격적 건축에 들어가는 페이지가
넘어간다.
[내성 입구에서 180미터 떨어진 곳은…….1
“여기서부터 페이지가 교체된다.”
그녀는 세월이 흐름이 느껴지는 바싹 마른 종이를 한 장씩 만지며 설명한다.
“내성을 감싸는 성벽의 축조에서는 군데군데, 특히 내성 4층과 3층을 잇는 부분의 건조에서는 페이지가 모조리 바뀌어 있어.”
[격자형 조방으로 지어진…….]
[전면을 틀어막으며 돌을 두껍게 쌓아을려,각도 차이에 따른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여기서 중복되는 구간의 길이는••….]
“정말이네요.”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끝까지 보여 준 내사과장이 입을 열었다.
“바뀌어 있는 페이지가 가리키는 장소는,바로 우리 유령들이 숨어 있던 곳이야.”
그때 였다.
루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어질 때부터 유령이 있을 곳을 마련했다는 이야기인가요?”
“합리적인 추론이지. 에라스트가 황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장소고, 유령이 여기 거주하는 것은 그것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런 공사를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겠지요? 성이 지어진 세이론 2세 때 이미 있었을 거예요.”
레나가 말을 보랬다.
천 년도 전부터 이 모든 게 이미
예비된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불현듯 묘한 현기증에 휩싸였다.
“맞아. 그런데,이 책은 유령들도 몰랐던 장소를 하나 더 가리키고 있더군. 같이 가보겠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사과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따라가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극히 익숙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
나보다,레나보다.
심지어 루비아보다도.
에라스트를 훨씬 잘 아는 인간이 바로 이 여자다.
유령들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이면서 에라스트의 모든 것을 조사했다.
보고가 취합되는 첫 번째 대상은 당연히 내사과장.
평생을 에라스트에서 살다 죽은 시종장조차 그녀만큼 에라스트를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어쩌면,그래서일까.
그녀는 루비아에게 약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조금 공경하는 태도마저 보였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녀를 신뢰하기 힘들었다.
본인의 손으로 부하들을 모조리 죽인 존재.
몹시 유능하지만.
‘한 번 더 배신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나.’
옆에 두기는 너무 위협적이다.
내사과장이 근처에 을 때는 더욱 신경 써서 루비아를 보호했다.
무척 긴장한 상태로.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눈치첸 레나의 설득에 의해 지금은 조금 경계를 풀고 있다.
‘저 여자가 루비아를 공격할 일은 없다고 했나……
루비아의 삶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무언가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조그마한 가책을.
“이쪽으로……
내사과장은 에라스트의 n자 모양 성벽을 따라서 걷는다.
예전에 레나가 감탄한 적 있던, 내성 어디서도 도시가 한눈에 모두 내려다보이는 기능적인 성벽.
4층에서 3층으로 돌아 내려가던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레나가 짧게 속삭였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기둥.
그 기둥 아래를 내사과장이 천천히 두 바퀴 둘러 걸었을 때.
- 入르
뱀이 입을 뻐끔거리듯 부드럽게 기둥이 열렸다.
기관장치를 가동하면 들리곤 하는 굉음은 조금도 없다.
바람소리마저 나지 않는 고요함에
잠시 멍해져 있을 정도였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r
안쪽의 텅 빈 공간에 경악한다.
그동안 에라스트에 수없이 왔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장소.
“레나는 알고 계셨나요?”
루비아의 질문에 따라오던 레나가 살짝 머뭇거리며 답했다.
“네,영주님. 하지만 구태여 미리 말하지는 않았죠. 기분 나쁘실 것 같아서.”
“제 기분이요?”
“여기가… 유령들이 에라스트를 감시하던 장소니까요. 내성을 감싸고,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말이에요. 불쾌하실 테니,먼저 조사할 만큼 조사하고 말씀드리기로……
“그렇구나.”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레나 씨는 상냥하네요.”
앞에 선 두 여자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본다.
“하지만 괜찮아요. 감시자들은 이제 다 죽거나,우리 편이잖아요?”
내사과장이 작게 움찔거린다.
그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경악하고 있었다.
‘여긴 대체.’
이전 세계선에서 탐지를 가동하고 지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숨겨져 있었나.’
“이곳,설마… 보티스의 힘으로 은폐된 건가?”
“보티스까지 알고 있었어?”
앞서가던 안내자가 다시 놀라서 흠칫거렸다.
유령은 마왕의 축복을 받은 가면 하나하나로 개인을 은폐한다.
하지만 공간 전체를 은페한다는 위력은 내가 생각한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놀라긴 했는데,사실 보티스가 황실과 결탁한 건 최근이야.”
“그렇다면?”
“이곳은 애초에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의 은폐 마법이 작동 중이었어. 비역에서 지침을 내린 녀석도 그걸 알고 주둔시킨 거야.”
“누가 한 거지?”
“그건 몰라. 어떤 단서도 없거든. 그 어떤 탑주도 천 년이 지속되는 마법을 걸 수는 없을 텐데… 혹시 전설 속의 용족이라도 되나?”
기스-제-라이가 눈을 빛낼 만한 단어가 농담으로 튀어나온다.
시아는 회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뿐거렸다.
하지만 묘하게도,무거운 갑옷을 입고 쿵쿵 소리를 내며 아무렇게나 걸어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유령들의 시체와 피를 정리했는지 내부는 밝고 깨끗하다.
하지만 이렇게 환한 불빛 한 점도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시아 으스노르의 빠른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가,멈췄다.
‘여기인가.’
목적지인 것은 처음부터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불규칙하게 배열된 거대 석판들과 그 앞의 복잡하게 생긴 기계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부 페이지가 갈아 끼워져 있던 부분이 바로… 여기야.”
무엇보다도.
“수녀님이 성을 좀 뜯어도 되냐고 물은 게 이거였군요?”
석판들은 통로의 내벽을 들어내야 보이는 곳에 있었다.
“맞아. 여기 있는 기계들도 모두
레드 플레이크에게 지원받았고.”
이미 한바탕 한 걸까.
앞에 놓인 기계들에 회색 가루가 잔뜩 묻어 있다.
“처음에는 석판을 봐도 아무것도 모르겠더군. 그냥 빗살무늬 같기도 했고……. 하지만 레드 플레이크에 전해지는 퍼즐의 규칙을 따라 돌을 맞춰 보니까……
내사과장은 앞에 놓인 기계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석판 앞쪽 바닥을 느릿하게 어떤 규칙에 따라 밟았다.
- 스륵.
불규칙하게 배열된 거대 석판들은 바깥쪽 기둥이 열릴 때처럼 소리도 없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뒤와 양옆이 벽으로 전부 막혀 있었지만,자유롭게 움직일 만큼 넓게 터버린 것 같았다.
- 사박. 사박…….
어떤 리듬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계속되는 움직임.
“여기서는 이렇게 움직인 다음…
이렇게 하면……
열 걸음.
”역시 직접 하니 머리가 아파…….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모양의 퍼즐 풀이거든……
스무 걸음.
“… O 으 ”
- D •
서른두 번째 걸음.
혼잣말도 멈출 즈음.
- 타앙. 팅. 타앙.
작게 울리는 소리가 통로 안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됐다.”
- 티잉. 타앙. 팅. 팅. 투웅……. 그때부터 내사과장은 울려 퍼지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백스무 번째 걸음.
- 구구궁…….
한쪽 벽면이 비스듬히 트이면서
새벽달이 비쳐들고 있었다.
달빛은 뒤틀어진 입방체를 형성한 석판을 더듬었다.
의미를 갖지 못하던 빗살무늬들이 하얀 달빛이 닿은 순간 짤막하게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아직 떠오르지 않은 태양이 석판 위에 먼저 떠올랐다.
달이,산맥이,강이, 도시가,탑이, 사막이 그려졌다.
낡은 빗살무늬 위에 숨겨져 있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원과 평야.
골짜기와 폭포.
빙하와 설원을 그리고.
석판들이 한 면에 그려지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체를 형성한 이유가 드러났다.
‘지하……?’
남부의 도시 아래를 잇는 거대한 통로들이 보인다.
이미 가 본 던전들이.
들어 보지도 못한 커다란 공동이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었다.
중첩된 거미줄 같은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제국의 비밀 지도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면 레이더에서 ‘유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더군. 처음엔
잡히지도 않던 게 말이야. 굉장한 발견이지? 수녀도 신기해하더군. 여기 반짝이는 것들이 바로……
어딘가 뿌듯한 듯한 내사과장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지도를 보고 있는 내 앞에서.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달빛보다 푸른 상태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