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30화 (330/458)

373화 틈 (5)

- 까악!

까마귀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온갖 새소리,풀벌레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온다.

하지만 까마귀 소리만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 까악! 까악!

그늘 하나 없이 평탄한 무기력을 꾸짖는 것 같은 소리다.

어딘가 바싹 마른 기분이 되어 울음소리를 찾아갔다.

깍깍대는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혼자 앉아 있었다.

도망치듯 날아오르려는 까마귀의 다리를 빠르게 잡아챘다.

까마귀는 파드득거 리 며 날카로운 부리로 거칠게 손목을 쪼아댔다.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빼고 가만히 녀석을 바라봤다.

어떻게 봐도 평범한 새다.

- 까아악!

하지만 발버둥 치면서 큰 소리로 우는 까마귀를 바라보자,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대체 뭘까?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마귀가 좌우로 부리를 두리번거렸다.

아무 잘못 없이 잡힌 녀석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녀석을 계속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를 것 같다.

이제 힘의 차이를 철저히 느끼고, 도망도 포기한 채 잡힌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퍽!

어떤 징조도 없이 까마귀의 몸이 눈앞에서 터져 나갔다.

깃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핏물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린다.

파편이 되어 부서진 뼈와 부리도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하지만 까마귀가 죽어 간 광경을, 까마귀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자 점점 머리가 아파졌다.

짙어지는 향냄새 속에서도 정신이 또렷해진다.

- 쏴아아…….

언제부터 저렇게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었을까?

차가운 바람이 불며 꽃잎의 비가 떨어져 내린다.

머리에 쌓이고, 손 위에 쌓이는 화사한 봄이 까마귀의 피와 내장을

씻어 내렸다.

바닥을 내려다봐도 피와 깃털로 버무려진 진흙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한층 더 신경 쓰였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사실을 의식하자 하늘 저편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루비아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성으로 찾아가 보지 않은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 팟!

그 길로 곧장 루비아의 집무실을 향했다.

성문도,집무실 문도 내가 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일에 빠져 있던 루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오셨군요! 독서는 잘 되어 가고 계세요?”

멀쩡한 모습이다.

하지만.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는 거지?”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전부 알려 주셨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무슨 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어요. 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걸요.”

루비아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편안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편안히 계세요. 마음 편한 대로만 하세요.”

그래도 괜찮은 걸까.

- 달그락.

고개를 돌려 영주실을 빠짐없이 훑었다.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영주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모두,부디 편하신 대로 하세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마음속에 벌어진 균열이 조금씩 강제로 꿰매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불안해서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않고 바깥으로 나왔다.

- 팟!

레나는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예전에 초대받았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자물쇠는 걸려 있지 않았다.

살짝 두드리고 문을 여는 순간, 테이블에 차를 올리고 있던 레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계속 기다렸어요!”

“나를… 기다렸… 다고?”

무언가 이상하다.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누군가를 가만히 기다리는 성격도 아니다.

기다릴 정도라면 어떻게든 알아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가……

문고리를 놓고 뒷걸음질 쳤다.

“어디 가세요? 요즘 외롭거든요. 혼자 있게 하지 마세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잠시만……

저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아와 레나.

그녀들의 모습을 한 자들에게는 위화감을 느껴도 곤란하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칼로 쑤셔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부름을 외면하고 밖으로 나갔다.

도시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에라스트 중앙에 있는 시장으로 향했을 때였다.

없었다.

꽃 상인,야채 상인도. 우유 상인, 과일 상인,옷 상인도 없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심부름꾼인지 바빠 보이던 소년도,한쪽 구석의

주방 용품 상인도, 볕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하품이나 해대던 묘령의 점술가도 없었다.

“사라… 졌어?”

활기가 돌던 시장은 인간 대신 검은 그을음 같은 것들만 두둥실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을음을 자세히 바라봤다.

붉고 꿈틀거리는 실선이 그 위를 지나고 있었다.

- 파앗!

떠다니는 그을음을 잘라 낸 순간,

그을음이 풍선처럼 툭 터지면서 바닥에서 긴 촉수가 솟아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솟아난 우둘투둘한 촉수가 몸을 휘감았다.

옴짝달싹할 수도.

부정할 도리도 없었다.

이면의 무언가에 넋을 빼앗기고 농락당했다.

자세한 사정까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진짜라고 믿어 왔던 이 세계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속았나.’

어쩌면 당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회귀를 반복하며 정착할 곳만을

찾아 헤매 왔는지도.

이 세계가 너무나 달콤했던 탓에 깨어나자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까마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무성한 깊은 숲도,종탑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나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누군가를 끝내 떠을려 버린 탓일까.

기억 속에서 울리는 소리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결계 속에서 한 번.

비역에서 형체 없는 덩어리에게 먹혔을 때 한 번.

나를 꺼내 준 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힘으로 나가야만 했다.

- 우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날 만큼 꽉꽉 조인 촉수가 강제로 벌어졌다.

만들어진 공간에서 쌍검을 빼내어 양쪽으로 날을 댔다.

순간 밀려 나갔던 공간을 되찾으려 다시 조여 온 촉수는 자신의 힘에 스스로 잘려 나갔다. 촉수가 흠칫한 사이 안쪽에서 강하게 한 바퀴를

빙그르 춤추듯 돌았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잘게 토막 난 파편들이 시장바닥에 떨어졌다.

꿈를거리는 파편들은 돌바닥으로 다시 흡수되었다.

바닥이 검붉게 변했다.

그건 점점 범위를 넓혀 갔기에, 어디에도 발을 딛고 싶지 않았다.

건물 지붕 위로 뛰어을라 갔다.

푸르렀던 하늘마저도 꿈틀거리며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는 와중에도 손목에 있는 무언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1,915]

감옥에 갇히며 크루나를 빼앗겼던 사실까지 떠올랐다.

거대한 그을음이 옆을 지나갈 때 그에 맞춰 칼을 휘둘렀다.

그을음은 살아 있는 것처럼 뒤로 물러났지만 인벤토리에서 발출한 칼의 각도를 예측하지 못하고 길게 베여 터져 나갔다.

[416크루나를 획득했습니다!]

시장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을음 한 조각이 분수대로 향했다.

움직임을 가만히 추적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인벤토리에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가,바닥으로 뛰어내리며 그을음이 몸을 숨기는 동상을 내리쳤다.

성냥팔이 소녀의 동상이 두개골부터 으스러지며 손에 쥐고 있던 성냥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 화르륵!

부서진 바구니에서 쏟아진 돌로

조각된 성냥들이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불꽃의 형상을 한 점막이 건물과 천막,수레에 온통 달라붙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거미줄처럼 끈적거리며 뒤덮는 불꽃도 있었다.

[416크루나를 획득했습니다!]

[816크루나를 획득했습니다!]

[1,289크루나를 획득했습니다!]

바늘처럼 날카롭게 찔러 오거나, 낫처럼 휘어져 내리치는 촉수를

끝도 없이 베어 왔다.

촉수는 점점 빨라졌지만 그만큼 획득하는 크루나의 양도 올라갔다.

손목에 새겨진 숫자가 7만을 슬슬 넘어갈 때쯤 시장바닥은 모조리 부서지고, 비틀린 채 꿀렁거리는 점막들이 균열을 뒤덮고 있었다.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저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성을 높이 들어 올린 상태였다.

레나의 집으로 가 보려고 해도

길이 높이 밀려 올라,기어오를 수도 없게 막혀 있었다.

- 광!

길을 두드려 봤지만 열리는 대신 하얀 연기가 허공에서 생겨나며 진로를 막아섰다.

- 부응! 부우응!

곳곳에 나뒹굴던 수레들은 갑자기 네 쌍씩 날개가 생겨 파닥거리더니 입을 벌리고 거대한 이빨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 따악!

흉악하고 빼곡한 이빨로 가득한 수레의 입이 방금 서 있던 위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 물리면 돌도 바스러질 것 같은 녀석들이었다.

아공간을 발판으로 삼아 수레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 등 위에 칼을 박아넣었다.

[인벤토리 숙련도가 상승…….]

타격을 입지도 않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손잡이로만 쓸 생각이었다.

- 우우웅!

올라탄 수레 주위로 보이지 않는 아공간의 벽을 세웠다.

여기는 에라스트가 아니다.

누군가가 조작한 세계.

얇고 붉은 실선들이 꿈틀거리는 허공을 향해 선언했다.

“너희가 나를 어디로 데려온 건지는

모르지만

[인벤토리 (Lv.???)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이 안은 내 공간이다.”

보이지 않는 사방0方의 벽면을 그대로 좁힌다.

- 과드득!

등에 칼이 꽂힌 채로도 킥킥대며 잘 날던 수레가 휘두르던 촉수와 아작아작 정돈되는 소리를 내며

소멸됐다.

내 몸은 자연스럽게 빠져나왔고, 땅을 디딘 발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6,411크루나를 획득했습니다!]

- 과득!

[5,291크루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8,101 크루나를…….]

[3,410크루나를…….]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겹친 곳에는 반투명한 상태창만 남았다.

[인벤토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 - Lv.?? 플러스1]

정확한 숫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더 편안해졌다.

네 개의 벽으로만 움직이는 공격 방식을 조금 변환해서,구 형태를 만들어 보았다.

이어진 네 개의 공간이 구부정히 허공을 물어뜯자 검은 균열들이 점점 벌어진다.

환상 속에서 환상을 만들어 내자, 조금씩 실체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모순이 느껴졌다.

검붉은 하늘로 솟은 촉수 셋이 나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부수고 싶었다.

- 파앗!

만들어 낸 구球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려 할 때였다.

- 꾸끋

거대한 촉수 세 개가 뒤로 물러나 꿀렁꿀렁 꼬여 움직이더니 루비아의 모습이 되어 말했다.

“아아,제게 왜 그러시는 건가요? 그런 짓은 무서운걸요.”

- 추르르륵!

뒤쪽에서 부서진 수레 파편들이 뭉쳐서 레나가 만들어졌다.

“뭐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거죠?

……r

“뭐,자기가 자기 꿈을 부수는데 어쩔 수야 없지요. 저희야,촉매만 제공했을 뿐이니까.”

촉수로 얽힌 루비아가 어깨를 움츠 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수레 파편으로 만들어진 레나가 분한 듯 입을 쭉 내밀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찍 발견한 분은 드물거든요. 이번 스테이지는 최고 성적으로 통과!”

“너는… 레나가… 아니……

그녀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당연한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어떤가요? 그게 뭐라고 따져야 하나요? 마음 편한 것만이 중요하지요!”

- 부응!

레나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칼은 더디게만 움직였고,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아공간으로 루비아와 레나를 짓눌러 으깨 버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행복합니다! 감옥이면 어떤가요?”

“이딴 게… 감옥이라고?”

상대의 정체는 분명하다.

나는 처음부터 속고 있었다.

어느새 전갈이 그려진 모자를 걸친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대 분장이라도 했는지 볼에는 색이 다른 연지를 찍은 채였다.

“그렇습니다. 여기 갇힌 여러분은 마계 공통의 위협. 마왕들의 특별 사주를 받은 범죄자들! 그러니까 가장 만족하는 환상을 덮어씌워야 하지요.”

“미친 소리… 여기서는 나 말고 다른 죄수들도 이런걸 경험하고

있다는 말인가?”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악’이라는 게 굳이 처벌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인과응보 따위가 왜 존재해야 하지요? 누군가 격리할 필요성이 있다면,가장 편한 ‘격리’는 그 위험인자가 평생 원하는 꿈속에 살게 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줄줄이 늘어놓는 녀석을 가만히 노려봤다.

레나도.

루비아도.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허점이 보인다고 정말 찌를 수 있을까?

내 환상으로 뒤덮였지만.

이곳은 저 녀석의 고유세계다.

“처벌을 받고 악이 교화됩니까? 격리할 필요성이 줄어드나요? 평생 환상 속에서 자신의 ‘악’을 마음껏 범하게 하면 되는 게 아닌가요? 우후! 우후훗!”

이런 세계를 만들어 내다니.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진 걸까.

해리解離의 영주.

처음부터 옆에서 지켜보며 나를 농락했던 전갈은 어쩌면 녀석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어쨌건 환상이 싫어서 뛰쳐나온 분이니… 뛰쳐나온 분들끼리 죽고 죽이는 다음 스테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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