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시작의 끝 (3)
굳이 둘러보지 않더라도 이렇게 좁은 관 속에서 피할 곳은 없었다.
‘이런 젠장……
병사는 칼을 머리를 부술 기세로 빠르게 찔러 넣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칼에 꿰뚫렸다.
다시 해가 지는 걸까?
하늘이 밤처럼 깜깜해졌다.
처음부터 아예 움직이지 않아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지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않은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버렸다.
일단 이 칼을 빼고 나면 병사는 멀리 사라지겠지.
기척을 안 내고 움직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끝까지 그렇게 간다.
- 퍽! 콰직! 퍼격!
난폭한 철검이 두어 번 두개골을
쑤시고 다시 나갔다. 그리고 목을
부수고,척추를 부수고,연달아서
옆구리 삐를 부쉈다.
상관없다.
부서진 상태라면 죽은 척 연기를 더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일단 이 위기만 지나면…….
[체력이 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 * *
- 띠링!
[•••니다.]
[•••현재 구매력: 96.7%]
“망할 새끼가!”
- 달그락!
관에서 벌떡 일어났다.
움직이면 죽는다.
누워 있어도 죽는다.
그래,뭘 어쩌라는 거지?
방금 지른 소리 때문에 놈들이
당장 이곳으로 달려올지 모르지만,
어차피 버텨도 마찬가지.
이럴 거면 차라리 싸운다.
[전직 해제 특전 : 파멸의 숫자]
[경험치가 666%로 적용됩니다.]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분배할 수 있는 능력치가 6씩 증가합니다.]
황실 비역에 있던 루-륨을 충분히
빨아들인 덕에,특전이 해제됐다.
경험치와 스탯의 압도적 상승.
일단 기습으로 한 명만 죽인다면, 다음부터는 향상된 스탯이 있으니 훨씬 쉽겠지.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관 밖으로 필사적으로 기어 나와 숨었다.
눈여겨 둔 레이피어를 꺼내 쥐고 바위 뒤에 숨었다.
“응? 무슨 소리가 났는데?”
나를 죽인 그놈이다.
이제 바로 앞.
놈의 움직임은 이미 알고 있다.
- 팟!
나는 발을 굴러 앞으로 달려 나가 병사가 있을 곳을 향해 레이피어를 날카롭게 찔렀다. 정확히 가슴 높이를 향한 기습이었다.
“어엇!”
하지만 놈은 가볍게 몸을 틀어서 달려드는 내 칼을 피하고一
- 퍼억!
옆에서부터 주먹으로 아래턱를 강하게 쳐을렸다.
준비 자세도 없이 갑자기 휘두른 주먹에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이게 뭐야?”
- 빠각!
병사는 바로 다른 쪽 주먹을 내게 휘둘렀다. 체력 스탯이 낮아지면 뼈 내구성에 직접 영향을 받는지, 갈비뼈 두어 짝이 부서지면서 멀리 날아갔다.
[체력이 75%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기습은 실패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손에 꽉 잡은 칼은 놓지 않았다.
다가오는 병사를 등진 채,몸의 빈 공간을 활용해 뒤로 날카로운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으옷……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의 공격에 당황한 병사가 다리를 긁혔다.
그나마 칼날이 날카로워서 갑옷을 뚫고 긁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생채기 같은 상처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 빠각!
시야가 몇 번이나 빙그르 돈다.
- 털썩.
화려한 장식의 칼을 끝까지 쥐고 있는 하얀 손이 보인다.
저래 봤자 아무 소용 없을 텐데.
바닥에 쓰러진 익숙한 뼈대에는 머리통이 없었다.
- 빠각! 빠각!
두터운 검집이, 무언가를 연달아 때리고 있다.
一 쩌억!
그건 서너 번조차 견디지 못하고 곧 산산이 조각났다.
* * *
[계승…….]
[현재 구매력: 96.7%]
“"•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찌르기까지 했는데.
아니,스쳤다고 말해야 하나.
인벤토리에서 독이 묻은 무기를 찾아볼까?
닿기만 해도 즉시 사망하는.
하지만 아이작이 담은 것 중에도
그런 물건은 없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그를 탓하려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이작과 협력한 이후로 나는 사실상 혼자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역설적으로,녀석은 매번 혼자 힘으로 생각하라고 했는데.
고독이 사라지자 생각은 둔해졌다.
인벤토리에 뭔가를 집어넣는 것조차 내 스스로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총천연색 보석의 산에서… 이런 칼 몇 자루라도 넣어 둔 것이 감사할 일이겠지.
- 유도든
쌓인 보물에 흥분하던 아이작의 모습을 떠올리자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아이작이 얼마나 나를 비웃을까.
벌써 애슈턴의 책을 다섯 권이나 낭비했고, 칼도 두 자루나 사라져 버렸다.
이 흐름은 좋지 않다.
녀석이라면 어떻게 할까?
‘…설득이 답인가.’
무덤가의 이름 모를 저 병사들은.
지금의 나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소녀 공작이나 레안드로 후작보다 강하다.
프레쳐에게 부서질 때보다도 훨씬 약한 지금의 내가 절대 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답은… 대화.
저놈들을 설득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다.
인벤토리를 들여다봤다.
책은 아깝고.
어디서 또 구할지도 알 수 없다.
무기도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인벤토리에 끝없이 넘치는 건一
황금. 보석. 온갖 재화들.
아이작이 전부 다 쓸어 가겠다며 이곳에 꽉꽉 욱여넣었던 것들.
이걸 활용해야 한다.
왜 여기 있는지는 몰라도 평범한 병사들.
대부분의 인간은 목숨보다 돈을 귀중하게 여긴다.
병사로 고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모두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을 받기 위해서다.
이런 시골구석에 있는 무덤가에 야밤에 순찰을 도는 짓거리를 돈이 아니면 할 리가 없었다.
아이작이 나에게 넣어 줬던 보물을 보여 주며 설득하면 된다.
적당히 지껄이면서,상황을 보다 이들을 살해하면 그만이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보물을 보는 순간 눈이 멀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되겠지.
허공에서 온갖 보물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걸 보여 주면,다시 꺼내 달라고,한 조각만 더 꺼내 달라고 무릎을 꿇고 구걸할 게 분명하다.
악마가 상대라도 협조할 거다.
- 스윽.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넣었다.
비역에서 주운 번쩍이는 누런 금괴 하나를 꺼내 잡았다.
달빛을 받은 금괴에는 호사스러운 마력이 있었다.
나조차 그렇게 느낀다면 금괴를 발견한 인간들은 당장에 매혹되어 눈이 뒤집히리라.
주울 때의 회계 스킬로도 가치를 측정하지 못했을 정도였지만, 절로 발걸음을 멈출 만한 가치라는 건 누구라도 느낄 수 있겠지.
- 달그락!
싯누런 금괴를 칼 대신 손에 쥐고, 들으라는 듯 일부러 소리를 내며 무덤 바깥으로 움직였다.
一 저벅!
예상한 것처럼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칼을 쥐고 뛰쳐나가는 대신, 녀석이 다가오는 쪽으로 번쩍이는 금괴를 내던졌다.
“흐억!”
나타난 검은 그림자는 펄럭이는 책을 벨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뒷걸음쳤다.
‘됐다.’
예상대로 황금의 마력에 꼼짝없이 매혹된 것이었다.
슬쩍 고개를 뻤다.
갑자기 나타난 금괴를 보자 온갖 생각이 나는지 엉거주춤하게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은 계속 금괴에 고정된 채였다. 나는 그사이 인벤토리에서 금괴를 하나 더 빼서, 병사 앞에 빛내며 들이댔다.
금덩어리가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마법 같았다.
“어,어어……!”
병사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금괴를 다시 못 보게 된다고!”
우람한 병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듯,금괴를 절반쯤 허공에 넣었다가 빼는 동작을 반복했다.
“아… 아앗!”
병사가 탄식을 지르며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박혔다.
근처에 있던 긴 얼굴이 다가오며 말하려 했다.
“저,저게 웬 금괴야!”
이놈이고 저놈이고,금괴부터 보여 주자 아예 내 존재에 대해서는 의아 함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금괴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허공으로 금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긴 얼굴도 걸음을 멈췄다.
계획대로였다.
“뭐야……?”
“모두 한 걸음 물러나라. 아니면 이게 전부 사라지거든.”
- 저벅. 저벅. 저벅.
보지 못한 방향까지,세 군데서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인벤토리에서 보석 한 움큼을 손에 움켜쥐어 꺼냈다.
달빛 아래에서도 보석은 찬란하게 빛났고,병사들의 시선이 강렬한 열기를 뿜어냈다.
“다섯 걸음.”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병사들은 말 잘 듣는 양처럼 뒤로 정확히 다섯 걸음 물러났다.
놈들이 투구 아래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질 만큼 유순한 반응이었다.
“저거… 진짜 금이지?”
“정말 너무 멋지다……
“가짜 보석 같은데. 정말 저렇게 환하게 빛난다고? 사령술 같은 게 아니야?”
칼을 쥔 병사들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고 있었다. 투구 아래의 눈동자도 혼들리고 있을 터였다.
계획대로였지만,한 명이 사령술 운운하며 훼방을 놓으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좀 더 즉물적인 게 필요했다.
- 차라랑!
나는 인벤토리에서 찬란한 금화를 꺼내 주위에 흩뿌렸다.
수십 세이론에 달하는 금화들이 달빛을 받아 선연하게 빛났다.
보석의 가치를 모를 이들에게는 금화가 딱 적당하다.
비역에서 금화 따위는 평범하기에 별로 줍지 않아서 얼마 없다는 게 문제라면 유일한 문제였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당장이라도 금화에 복종할 것 같았다.
지금 뿌린 정도로도 차고 넘쳤다. 역시 보석보다 돈이 더 직접적으로 와닿는 듯했다.
“우오! 우오오!”
맨 처음 다가왔던 우람한 녀석이
짐승 같은 감탄을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은 벗어 던지곤 없었다.
더 선명하게 듯,아예 제 금화 줍기에
금화를 투구를 정신이
“나를 깨운 자들아,금은보화는 무한히 소환할 수 있으니 천천히 주워도 좋다.”
“너는… 대체 누구지?”
“황금의 성자 아이작이라고 한다. 오늘 나를 만난 것을 일생일대의 행운으로 알아라.”
무심코 떠오른 이름을 말했다.
뱉고 보니 너무 유명한 이름을 써먹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이작?”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병사들은 별 반응이 없다.
학교에서 역사학 시간을 수면으로 대체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아예 모를 확률은 낮을 텐데,아이작이라는 이름이 제국에서 혼한 건가 싶기도 했다.
뭔가 싸늘한 느낌이 스쳐 갔지만, 당장 궁금한 것부터 캐물었다.
이만큼 금화를 뿌렸으니 제대로 답변을 받아야 했다.
“너희에게 물어볼 게 있다. 오늘 날짜가 언제냐?”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역시 시점이었다.
대체 언제로 돌아온 거란 말인가?
가월… 20일이잖아?”
투구에 가득 금화를 채운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