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환영 (11)
이게 다 캐빈 애슈턴이라고?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읽은 애슈턴의 저작을 모두 합해도 여덟 권뿐.
눈앞에 있는 백 권의 책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훌어봤다.
틀림없었다.
제목 아래쪽에 캐빈 애슈턴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적혀 있다.
보여 줬던 스무 권짜리 전집이 먼저 떠올랐다.
읽기 전에는 개국 공신 가문의 저력이라고 생각했지만,스무 권은 모두 가짜.
지혜가 오르지도 않았고,특전이 생겼다는 메시지도 없었다.
백 권이나 되는 애슈턴의 책을 보니 의심부터 들었다.
이게 다 진품일까?
아니,하나라도 진품일까?
가장 얇은 책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까지 들어오기 힘든 황실의 비역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가짜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눈앞에 놓인 백 권이라는 숫자는 지독히 비현실적이다.
책을 펼치는 내 모습을 아이작과 나냐우가 가만히 바라봤다.
시간이 없다거나,앞서간 후작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이제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곳의 비현실성에 도취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 - 캐빈 애슈턴〉
- 스르록.
나는 책장을 넘겼다.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첫 문장이 걸리적거렸다.
하필 나와 아이작,나냐우 모두에 특히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온전히 죽음을 맞지 못하고 있으며,아이작과 나냐우는 죽음을 유예하고 있다.
“이 책,이상한데?”
옆에 있던 나냐우가 말을 걸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 페이지를 더 넘겼다.
그곳에 있는 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새하얀 종이뿐이었다.
- 스륵.
다음 페이지도,그다음 페이지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잉크는 한 점도 찍히지 않은 하얀 종이였다.
그렇게 다섯 페이지, 열 페이지, 스무 페이지가 텅 비어 있었다.
당황해서 옆을 돌아봤다.
“이거. 특정 시약을 뿌린다거나, 열을 가하면 내용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아니야.”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은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깨끗해.”
“마법의 흔적도 없는데?”
아이작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냥 종이다.”
“그럴 수가..
텅 빈 백지를 계속 넘겼다.
마흔 장,쉰 장이 모두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금방이었다.
하얀 페이지만 계속 넘기다 보니, 마지막 페이지 아래에 쓰인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책을 마지막 장까지 넘겨 보려는 궁금증처럼,우리는 궁극적 소멸을 향해 달려 나가야만 한다.〉
궁극적 소멸..?
죽음을 극복한다는 첫 번째 문장과 대치되는 듯하다.
어찌 됐건 마지막 문장.
사실상 두 번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었다.
一 띠링!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책을 덮은 채 굳어 있자 아이작이 금방 내 반응을 알아챘다.
“진짜구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캐빈 애슈턴의 책은 한 권을 모두 정독해야 능력치가 오른다.
하지만. 이게 진짜라고?
예전에 본 동화처럼 뒤쪽이 뜯긴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건 아예 아무 내용이 없는데.
텅 비어 있는 백지들.
처음과 끝의 두 문장.
정말 이게 완성된 형태라는 걸까?
“.일단 가자.”
나는 인벤토리에 캐빈 애슈턴의 책들을 모두 쓸어 담았다.
여기서 하나하나 전부 검증해 볼 여유는 없었다.
텅 빈 종이였지만 나름대로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기 때문에 벌써 시간이 꽤 지체됐다.
후작이 내려가고 있다.
그 녀석을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서둘러야 한다.
100권의 캐빈 애슈턴에 압도됐던 정신이 책을 덮자 되돌아왔다.
책에 아무 내용도 없어서.
금방 진품임을 감정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각해 보면,애초에 애슈턴의 책을 읽는다고 지혜가 오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 내용도 없는 텅 빈 책이라고 지혜가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애슈턴은,내가 이곳에 와서 가장 얇은 책을 찾는 상황을 예측했을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책 대부분을 인벤토리에 넣었을 무렵 인벤토리에서 무언가 뻐근한
느낌이 났다.
“그 공간도. 한계가 있나 봐?”
나냐우가 허공으로 들어가던 책을 바라보며 갸웃했다.
“확실히.”
형태는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고, 용량도 상당하지만 한계는 있다.
지금은 ‘?’이라고 표시된 인밴토리 레벨.
하지만 예전에 레벨이 오르면서 수납공간이 확장됐고,지금은 훨씬 더 커졌다.
숙련도가 늘어나면 용량도 함께 늘어나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 책을 넣자 공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가자.”
그때 였다.
- 우우우우우응!
한순간.
허공에 진한 파장이 일었다.
검은 곡선이 점점 번져 나갔다.
그건 마치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 때문에,먼 곳에서 생겨난 파문이
여기까지 지나는 모습 같았다.
“경계가 발동됐다.”
아이작이 인벤토리를 공명시키며 말했다.
“우리의 침입이나,먼저 들어간 놈의 움직임이 경계를 울린 거다.”
“왜 하필 지금이지? 한참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나?”
“여길 관리하는 것들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섰나 보지. 우린 책 좀 쓸어 담은 것밖에 없으니,먼저 간 녀석이 사고를 쳤을 거다.”
“.일단 내려가자.”
이견은 없었다.
아이작이 재워 둔 미유를 깨우자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일어났다.
눈빛이 달라진 걸로 봐서 잠든 새 최면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다행이군.”
“뭐가?”
“제 말이 최면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후작이 호의적일 리 없을 테니까. 말이 멀쩡히 돌아와 다행이야.”
나냐우가 피식 웃으며 끼었다.
“그래,까마귀 주술사님. 평범한 최면이라면 모르겠지만, 당신처럼 강한 세뇌를 계속 걸면 심층 의식이
망가질 수도 있다고.”
“크흐흐. 마물이나 인간은 숨도 안 쉬고 죽이면서,말 한 마리는 심층 의식까지 걱정하나?”
“어차피 본인 기분상의 문제야. 저울에 올릴 생각은 없어.”
둘은 일부러 농담으로 긴장을 풀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히히힘!”
후작의 흔적을 계속 따라갔다. 도서관의 거대한 석벽과 어울리지 않는 좁은 철문이 있었다.
석벽 한쪽 넓이의 1/100에도 미치지 못하는 좁은 문이었다.
- 끼기긱
문을 열자 스산한 어둠이 쏟아졌다.
시커먼 어둠 속에는 긴 끈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끈을 따라 움직였다.
〈역시 매 층마다 분리되어 있다. 획정된 공간이 경계선으로 이어져 있는 게 아니야.〉
차원 통로가 끝났을 때.
가득 쌓인 잔해들이 사방을 막고 있었다.
무언가가 부서지거나 무너져 내린 흔적이 었다.
미유가 크게 울며 앞발을 휘둘러 길을 뚫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인 잔해들은 끝도 없이 계속됐지만, 미유가 마구 걷어차고 가는 모습을 봐서 위험한 물질은 아닌 듯했다.
“3층이야.”
비석을 확인하며 말했다.
건너뛴 단계는 없다.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는 증거. 후작도,우리도 비역의 최저층을 향해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나냐우가 미유를 챙긴다며 앞으로 훌쩍 나아갔을 때였다.
까마귀가 문득 말을 걸었다.
〈그거 해 봐.〉
될?”
〈일리엔의 파리들을 막을 때처럼 부피를 실어서. 잔해를 치워 봐. 공간 전체를 밀어내는 좋은 연습이 될 거다.〉
“하지만,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기껏 넣은 책들이 전부 다 밖으로 빠져 버릴 텐데.”
〈.응용력 부족이다. 인벤토리에 겉을 씌운다고 생각하면 간단하지. 막을 씌우고 확장시켜라.〉
“그럼 네가 그때처럼 테두리를 만들어 줘.”
까마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왜? 해 달라니까?”
〈•••혼자 깨달아야 된다.〉
까마귀는 어쩐지 힘이 축 빠진 느낌이었다.
〈안과 겉만 각기 따로 인식하면 끝이다. 경계를 보존하고 확장된 ‘겉’으로 ‘밖’을 밀어내라.〉
« 〇 ”
....
〈이런 멍청한. 아니,역시 내가 신들조차 질투하는 기적의 천재인 거겠지. 한 번만 도와주마...〉
까마귀가 눈동자를 빛냈다.
〈분할,변경,접속.〉
아이작이 소유한 아공간이 서로 허공에서 다섯 개로 갈라지더니, 서로 다른 기묘한 문양으로 변해서 달라붙었다.
어쩐지 아이작과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공간에 탄성을 가진 껍질을 뒤집어씌웠다. 한동안 붙어 있게 해 주지. 이제 네 의지라는 중심에 훨씬 쉽게 반응할 거다. 아공간을 넓게 확장해 봐라.〉
“담지 않는다는 개념은
〈껍질을 씌웠으니 필요 없다고.〉 확장.
공간이 뒤틀리며 막이 이리저리 펼 쳐졌다.
균일함은 없다.
질서도,규칙도,조화도 없다.
이 찌그러진 부피를,반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심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동굴 안을
가득 메운 잔해를 하나도 빠짐없이 위로,옆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잔해는 동굴과 ‘부피’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갇혀 춤을 췄다.
“.이제 어쩌지?”
〈더 밀어 봐라.〉
“동굴이 부서지면?”
〈절대 안 부서져.〉
아이작을 믿고 더 크게 밀어냈다.
잔해가 동굴 벽과 ‘부피’ 사이에 끼이며 으스러졌다.
새까만 나무 덩굴 같은 것이지만 제법 단단했는데, 형태를 잃고서 동굴 벽에 비벼지고 휘말려 우수수 곳곳으로 떨어졌다.
으스러지는 잔해 사이로,잔해에 이미 깔려 으스러진 뭔가가 보였다. 점액이 되어 버린 물컹한 덩어리.
어딘가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황실의. 사육장?’
하지만 이미 모조리 점액이 되어
버린 상태라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어때,기분 좋지?〉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까마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손가락 사이에서 비벼 으깨는 기분에 희미하게 도취되어 있을 때였다.
“뒤에서 둘이 뭐 하고 있어? 빨리 여기 좀 와 봐!”
나냐우의 외침이 들렸다.
흥분으로 물든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자 투명한 플라스크에 담긴 인간들이 보였다.
“살아. 있어?”
액체 속에 부유하는 그들 모두에게 맥박이 느껴졌다.
우리의 도착을 확인한 나냐우가 낫으로 투명 플라스크를 겨눴다.
“뭐 하는..!”
- 파앙!
하지만 강철 갑옷 따위는 종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내는 낫날은, 극히 얇아 보이는 투명한 플라스크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나냐우는 다시 빠르게 플라스크에 낫 끝을 겨눴다.
- 철컥.
검주를 물러나게 만드는 은빛의 마탄魔彈이 장착되는 소리였다.
“대체..
- 파앙!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탄환에 맞은 플라스크가 약한 소리를 내며 조금 흔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엄청난데.〉
자세히 보면 표면에 얇은 실 같은 자국은 난 것 같았지만,깨려면 도대체 탄환을 얼마나 쏴야 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뭘 한 거야?”
나냐우가 어깨를 으쪽했다.
“액체의 진동수를 측정했어.”
“.그래서?”
“어떻게 이런 색깔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안에 루-륨이 섞인 건 확실해.”
〈과연 제 피를 전부 루-륨으로 바꾼 녀석답군. 조합된 액체에서 진동수를 찾아내다니.〉
“단순한 저온 보존액이 아니야. 가수 분해와 조절 기작 관여가 내부 주입되며 이루어지고 있어.”
아이작과 대화하는 듯한 나냐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육체들은 뭘까? 인간들의 몸 곳곳에 꽂힌 촉수가 신경 쓰였다.
마왕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사냥한 사도의 부스러기가 떠오른다.
- 파드득!
아이작은 이미 플라스크로 날아가 액체에 잠긴 인간 한 명 한 명을 전방위로 살펴보고 있었다.
〈흐음. 역시...〉
아이작이 말을 줄였다.
“뭔가 알 것 같나?”
까마귀는 나에게 대답하는 대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주 완벽한 육체들이다. 아니, 완벽한 개체들이야. 재능도 특성도,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쳐..
나냐우가 피식 웃으며 까마귀를 바라봤다.
“벨’호멧 아이작,입맛 다시는 척하지 마라.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 않나?”
느낌이라니까. 고르는 맛이 있겠어.”
“너희들,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을 때였다.
나냐우와 까마귀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플라스크,반 이상이.. 〈이것들 대부분이...〉
마지막 말은 똑같이 겹쳐졌다.
“아는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