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제국의 칼 (8)
왜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같은 갑옷만 보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덮어씌운 걸까?
왜인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메마른 인상이 계속 떠오른다.
자신이 품은 감정을 좀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근위대 훈련 장소를 알아내는 건 간단했고,곧장 찾아갔다.
자유롭게 대련 중인 그들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마법사를 데려다 놓고 마법으로 공격받는 상황에 대비한 훈련까지 하고 있었다.
레안드로는 기척을 계속 숨기고 그들을 바라봤다.
번갈아 가며 서로 부딪치는 훈련을 구경하자 금방 근위대 개개인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막았던 이사벨이라는 이름의 문지기가 단연 우수했다.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서 압도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재능에 비해 실력을 발전시키고 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동료들과의 대련에서 혼자 튀는 것 같으면 슬쩍 실력을 죽였다.
무언가가 그녀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건성은 아니지만 힘을 다 쓰는 건 결코 아니었다.
동료들과 웃으며 놀이하듯 대련하던 어머니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훈련하는 모습을 보자 레안드로는 그녀가 점점 더 신경 쓰였다.
다음 날도,그다음 날도 조용히 문지기의 훈련 모습을 지켜봤다.
나흘째 되는 날,혼자 남아 있는 그녀에게 레안드로가 말을 걸었다.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그런 느낌은 없다.
본심에도 없는 말이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아무 말이나 뱉은 것에 가까웠다.
“아,아닙니다. 그런 목적은..
“예전 근위대와는 전혀 다르군. 동료에게 실력을 숨기는 기사 따윈 없었는데. 근위대 동료들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괜한 트집이다.
레안드로의 집에 어머니의 동료인 황실 근위대가 자주 오긴 했지만,
그의 기억은 16년 전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때 레안드로는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그건. 제가 실력을 드러낸다면, 동료들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한 레안드로의 날카로운 압박에 이사벨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겠다는 듯이 당황하며 말해 버렸다.
엉겁결에 들은 솔직한 대답이다. 레안드로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터졌다.
참아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술 사이를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
동료들을 지독히 무시하는 발언을 뱉어 버린 그녀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상대해 주지.”
“예?”
이사벨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진정한 실력을 드러내 봐라. 근위대 동료들을 무시할 만큼 네가 강하다는 걸 증명해 봐.”
“절 가르쳐 주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감사. 합니다.”
이사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살짝 입술을 깨문 다음, 칼을 뽑아 휘둘렀다.
제대로 날이 서 있는 진검이었고 그럭저럭 날카롭게 휘둘러 왔지만 레안드로는 몇 번 피하다가 칼을 잡은 손목을 꺾어 제압했다.
바닥에 쓰러진 이사벨이 이마를 살짝 닦으며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시군요. 어떻게도 공격을 할 수가 없네요.”
레안드로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네..?”
“두 배는 빠르게 공격할 수 있지 않았나?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지, 장난을 치겠다고 한 적 없다.”
“하지만..
“뭐지?”
“그럼 이걸로 다시 하겠습니다.”
이사벨은 수련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목검을 들었다.
레안드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했던 거냐?”
“다시 해라.”
이사벨이 진심이 되기까지는 거의 반나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근위대 동료 하나를 대련 중 실수로 죽여 버린 적이 있었다.
끝없이 집적거리던 자였다.
배경이 좋은 남자였기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을 뻔했지만,숙소로 오라는 제안을 무시하자 자존심이 상했다며 진검 대결을 강요한 쪽이 상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단장이 이사벨을 보호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라도 실수를 더하면 끝장이다.
그녀는 길게 근위대에 붙어 있고 싶었다.
불치병을 앓는 어머니의 치료에는 끝도 없이 돈이 들었다.
절대 직업을 잃을 수는 없다.
‘절대로..
하지만 그 감정은 눈앞의 남자와 칼을 부딪치며 조금씩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 까앙!
칼날에 마지막 한 조각 달빛이 부서지며 사방이 어두워졌다.
어느새 레안드로는 칼을 빼 들고 있었다.
스무 살에 제국제일검과 겨뤄 본 남자.
푸른 사자 기사단의 단장.
명성이 과장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부딪쳐 보니 오히려 실력이 낮게 평가된 것 같았다.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해라.”
“당신의. 어머니는 저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실력이셨습니까?”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던진 질문에 레안드로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전력을 다해도 닿지 못할 실력이었다. 지금처럼 형편없는 공격이나 해 댈 거라면 감히 입에 올리지 마라.”
“그럼 당신은..
잠시 머뭇거리던 레안드로가 입을 열었다.
“열두 살 때 이미 그녀의 환영을 베었다.”
“그럼 안심하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이사벨이
칼을 고쳐 잡았다.
호흡이 멎었다.
허깨비에 가까운 속도로 내딛는 여자를 보며 레안드로는 상대방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가장 막기 어려운 사각死角으로 칼날이 휘둘러졌다. 떨어져 있던 10미터의 거리가 거의 두 걸음에 좁혀진다.
소리조차 없는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했지만,상대방은 이미 다른 사각을 노리고 있다.
발바닥 각도 하나,손에 쥔 칼을 늘어뜨린 자세 하나가 빠른 가속을 의도하고 있었다.
휘어져서 날아오는 화살과 같은 공격이 사방에서 작렬했다.
- 까가가가가강!
막고,막아도 끝이 없었다.
단순한 속도가 아니다.
한 번 한 번이 삐끗하면 곧바로 뼈와 살을 갈라 버릴 만큼 날카롭고 깔끔한 공격이다.
달빛이 없어도 쇠와 쇠가 부딪쳐 만드는 불꽃이 춤을 췄다.
불똥으로 튀는 붉은 불꽃,은은히 칼끝에 서려 있는 푸른 불꽃...
틈새와 틈새로 쇄도하는 공격은 분명한 검기를 안고 있었다.
- 까강! 까강! 까강!
이 공격이 막히면,다음 공격으로 뚫는다는 기세. 하나하나가 뼈를 끊을 만한 공격임에도,흐르는 둣 자연스러운 연공은 조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 파직!
하지만.
회피도 방어도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공격을 레안드로는 웃으며 상대하고 있었다.
마치 일곱 살 때처럼...
잃어버린 유년기를 떠올린 남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의 웃음을 띠었다.
레안드로가 달아오른 제 표정을 의식할 때쯤,파고들던 이사벨도 힘이 다해 속도가 느려졌다.
후들거리는 손목을 억지로 붙잡고 해낸 마지막 공격이 튕겨 나가자, 그녀는 공격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근거리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공격을 했음에도 상대는 그걸 전부 쉽게 받아쳤다.
졌다느니 하는 말을 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눈앞의 상대에게는,몸과 마음을 다해 부딪쳐도 되겠다는 것.
레안드로는 1년 동안 이사벨에게 칼을 가르쳤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사는 거의 없었다.
그녀에게서 종종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떳떳하지 않은 기분이 들어, 만남은 모두 밀회였다.
부담 없이 전력을 쏟아낼 수 있는 상대를 만나 이사벨의 검술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아주 잘했다.”
그의 앞에서는 긴장감 때문인지,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던 이사벨이 환하게 웃었다.
메마른 인상에 피어난 그 미소를 보자 레안드로는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뭘 잘못 먹어 체한 건가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 몇 번이고 두드려 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자꾸 그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러도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 달칵.
계속 물컵으로 목만 축였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찾아온 부단장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레안드로는 멍한 표정으로 부단장을 봤다.
그리고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욱신거린다.”
“욱신. 이요?”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갑자기 몸이 약해졌나. 집중도 안 되는군.”
개국공신 가문의 자제인 부단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언제부턴가요?”
이런 녀석에게 말해 봤자 쓸모도 없겠지만.
“누가 웃는 걸 본 다음부터..
“어라? 누군데요?”
갈색 머리를 여러 가닥으로 닿아 늘어뜨린 부단장의 눈이 빛났다.
“그냥,그런 게 있다.”
“와. 누가 단장님 마음을 그렇게 흔들었는지 너무 궁금한데요?”
“헛소리. 왜 왔지?”
“하핫..
부단장은 실없이 웃으면서 기사단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지람 넓다는 그 녀석의 눈빛이 어쩐지 불안했지만,이름도 말하지 않았는데 뭘 어쩌겠나 싶었지만.
그게 실수였다.
일주일 뒤.
- 똑똑.
이사벨이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화난 것 같기도,괴로워하는 것 같기도,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예전에 웃는 모습을 볼 때보다도 그 모습이 더 괴롭고,욱신거렸다.
레안드로는 어느 때보다 긴장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모른 척. 하시는 겁니까?”
“모른 척이라니?”
그녀가 뒤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집무실 책상 위에 놓았다.
“이런 걸 저한테 보내셨습니다. 저를. 저를. 기사가 아닌 여자로 보신 겁니까?”
무슨 소린가 싶어 책상 위의 꽃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자신의 이름이 당당하게 적혀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누가 한 짓인지 짐작은 갔지만,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당당히 고개를 저을 수도 없었다.
어째서 다른 누구보다 그녀와의 시간에 집중하는 걸까?
압도적인 재능을 가져서?
그것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레안드로는 자신을 속이고 질문을 단호히 부인할 수도 없었다.
“왜. 가만히 계시죠?”
- 덜컥!
소식이라도 듣고 왔는지 부단장이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해입니다. 제가, 제가 두 분이 서로 좋아하시는 줄 알고 보냈습니다! 근위대 쪽도 다 조사해 보니까 소문이..
황당하다는 제 단장의 얼굴과, 달아 오른 근위대원의 얼굴을 보며 부단장이 말을 이었다.
“꼭 이어 드리고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 었나요? 그럼 제 잘못입니다!”
“향후 1년간 부단장의 체력 훈련 일정은 내가 직접 짜지.”
“저,튼튼한데요..
“아니면 1년간 1:1 대련에서 나랑 고정 상대를 하든지.”
“앞의 걸로..
“.추태를 보였네요. 죄송합니다.”
이사벨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레안드로는 부단장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어이가 없어서 그냥 멍하니 이사벨이 나간 문만 보고
있었다.
“단장님,제가 볼 때는 저분이 별로. 튕기는 것도 아닌데요?”
“부단장.”
“네?”
“그 정도로 사는 게 귀찮은가?”
3년이 지났다.
부단장의 체력 훈련 일정은 3년째 그가 짜고 있었다.
대련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연습용 목검이 부단장의 어깨를 때렸다.
“끄어어억..!”
어깨 옆의 반질반질한 대머리가 햇빛을 반사했다.
“다시.”
레안드로에게 페널티를 잔뜩 주고 했던 대련에서도 진 탓에,소중한 머리를 모두 밀린 부단장은 필사의 각오로 다시 덤벼들었다.
하지만 곧 정강이를 호되게 얻어맞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참이나 깽깽 거렸다.
한쪽은 진검. 한쪽은 목검에다 눈을 가리고 귀까지 헝겊으로 막고 있음에도 여유로웠다.
“어째 매일같이. 하루가 다르게 감각이 날카로워지십니다.”
“내일부터는 상위 14기사를 다시 전부 불러라.”
“전부. 말씀이십니까? 이미 전부 이기시지 않았습니까?”
“이 상태로 다시 해 보는 거지.” 레안드로는 가린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휴.”
부단장이 정말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런데. 제가 예전에 권한 그 증표 말입니다. 두 분만의 비밀 증표요.”
“.방금 1개월 늘었다.”
부단장은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하하핫. 이제 9년 3개월인가요? 저도 포기했습니다.”
“아무튼 잘 준 것 같습니다. 요즘 분위기가 좀 이상해서요.”
“그런가.”
“네,아시다시피 전쟁 반대파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서..
“우리는 제국이 휘두르는 칼이다. 정치는 생각하지 마라.”
“아,그야 그렇지만..
그런 건 로랑스 공작이나 알아서 할 일이다.
전쟁 반대파의 암살.
그 중심에 공작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전혀 말리지 않았다.
한 마디도 얹지 않았다.
얼마 전,정치감각 따위는 심지어 자신보다도 없는 이사벨이 새로운 근위단장이 된 데는 로랑스 공작의 힘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사실 만들어 준 거지.’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
자칭 ‘소녀’는 뭘 부탁하지 않아도 모든 사정을 미리 알았고,편의를 돌봐 주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무심코 공작의 편의를 봐주었는지도 몰랐다.
로랑스 공작이 쥐어 준 대상조의
칼날이었기에,굳이 그에게는 대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악인은 많고,처벌할 죄는 넘쳐 났으니까.
하지만 자신도 그 ‘악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걸까.
소녀 공작과 그 무리를.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눈감아 둔 죄가 이렇게 지독했다니.
‘비브리오 명예 공작이,마왕의. 대리자라고?’
- 철퍽.
혼자 폐하수도를 조사한 후작은, 칼에 묻은 보라색 액체를 털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마물들. 증거는 충분했다.
대상조로서, 수사를 시작하기에 차고 넘칠 정도로.
소녀 공작과 붙어 다니는 수상한 늙은이.
수사를 시작하자 곧바로 사방에서 전에 없던 압력이 쏟아졌다.
황실,아쥬라의 탑,심지어 신전... 귀족 사회의 핵심에서.
공작이 직접 말리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막아 주고 있지 않다.’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레안드로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편한 ‘정의’를 추구해 온 건지 새삼 깨달았다.
그가 실현해 왔던 건 어둠 속에서 진짜 힘을 가진 자들이 부추기던 정의에 불과했다.
그들의 이익과 합치되는 정의. 그들이 절대 ‘불편하지’ 않은 것만 골라낸 정의.
제국의 대상조는 수사를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가 보직을 받은 이래,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제대로 된 수사가 될지도 모른다.
제국의 칼이 천천히 제 심장을 겨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