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98화 (298/458)

317화 제국의 칼 (5)

레안드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했다.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

하지만 따져 보면 분명히 미남이라고 불릴 만한 외모. 다만 얼굴을 뒤덮은 것은 분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화장이며,장신구들.

거대한 두 흉근을 은색 코르셋이 받치고 있고,그 아래는 반투명한

실크 드레스와 무척 굽 높은 금색 구두를 신었다.

레안드로는 당혹했다.

저런 불편한 복장으로 공격을 다 받아냈다는 이야기인가?

첫 번째 영역 안에 끌어당긴 뒤에 쳤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못했다.

미완성의 절기.

아니,미완이라기보다 오히려 막 개념을 구상한 단계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 세 번을 막은 상대조차 없었던 공격이다.

이길 수 있을까?

레안드로를 무겁게 짓눌렀다.

답은 명백하다.

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주위의 한참 늦은 반응이 들려왔다.

“어떻게. 각하와 칼을..

“저,저럴 수가..

“말도 안 돼..

마치 그 반응에 추임새를 넣듯이 눈앞의 상대가 말을 걸었다.

“이런 재미있는 싸움은 정말 정말 오랜만이에요. 호호호! 이름은?”

“레안드로..

“좋아요,레안드로 청년. 이름으로 보니 무척 유서 깊은 가문이 뒤에 붙을 것 같은데요?”

레안드로는 멈칫했다.

장례식 직전까지 자신들을 돌봐 주지 않은 어머니의 가문 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골방에서 책만 읽다가 죽은 아버지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당신 이름은?”

“어머,건강한 미남자께서 소녀의 이름을 물어보시네요. 오호호! 호호! 부끄러워라! 그건 비밀이에요!”

레안드로는 자칭 ‘소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생식기의 구조 외에 다른 게 성별의 구분이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물론 그걸 여기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확인시켜 준다고 해도 완강하게 거절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성별의 구분에 앞서서, 상대는 ‘소’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커다랬다.

“하지만 특별히 그대에게만 알려 드리지요..

서너 번 유혹하듯 벙긋거린 거한이 말을 이었다.

“소녀,로라라고 합니다. 호호... 이름까지 알려 줘서 부끄러우니까 엉망으로 공격해 버릴 거예요!”

로라가 칼을 고쳐 잡았다.

정석적인 공격이었다.

레안드로가 로빈에게 몇 번이고 뺨을 때리면서 해 보라고 시켰던 내려치기였다. 로빈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것보다 느렸는데,앞에서 똑바로 내리쳐 오는 공격이 사방을 모두 꽉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공간이 텅 비어 있음에도 한 치의 피할 틈도 없게 느껴졌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도 없었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받아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공격.

그의 공격을,힘을 재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 투툭.

레안드로의 안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칼을 아래로 내렸다, 탄력적으로 강하게 위로 올려쳤다.

그 순간 창백한 하얀빛과 푸른빛이

부딪치며,레안드로가 뒤로 밀려났다. 엄청난 충격에 팔뼈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단순한 칼과 칼의 부딪침 이었음에도 두 사람이 발을 디딘 연•무장 주위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조금 전의 충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칼을 부딪친 거라면, 지금은 한 번의 충격으로 공기를 진동시키는 강렬한 울림이었다.

내려치는 힘도,거꾸로 올려치는 힘도 터무니없이 강했다.

그 충격파에 스무 걸음이나 넘게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뒤로 털썩 밀리며 주저앉았다.

재정과 인맥을 위한 기사단이지만, 그래도 검술에 대한 앎이나 낭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전의 격돌에서는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어서 감탄 하지 못했지만,지금 것은 그들도 알아볼 수 있었다.

“거. 검기..!”

“아니. 그것보다. 더... 저렇게 크고 선명한..

아래에서 쳐올린 레안드로의 칼은 놀랍게도 위에서 내리친 로라의 검을 밀어냈다.

하지만 튕겨 밀린 로라의 장검은 빙글 돌아 다시 레안드로의 허리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허리를 토막 낼 칼을 레안드로는 뒤로 훌쩍 뛰어 피했다.

하지만 칼을 회수한 로라는 얼굴 전체로 활짝 웃으며 앞으로 뛰어와 다시 칼을 내리쳤고,두 번째 강한 격돌이 이어졌다.

- 파앙!

폭발음이 울리며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사방에 주저앉아 있던 자들의 머리칼이 일제히 흔들렸다.

빠르게 한 손으로 휘두른 공격을 레안드로는 두 손으로 막아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힘에서 밀려서, 연무장 바닥이 부서지며 발목까지 아래로 움푹 파고 들어갔다.

나무처럼 땅에 박힌 레안드로를 보고 로라는 굵은 손가락을 상하로 꼼지락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 정말 예뻐 죽겠네! 어찜 이렇게 대단하담?”

발에 제대로 힘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릎 꿇려질 만큼 강력한 공격 이었다.

회전도 주지 않은 순수한 힘으로 상대는 레안드로를 땅에 박아 넣고 있었다.

힘에서 밀린다.

속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걸 생각하며 레안드로는 희열을 느꼈다.

이런 걸 느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발이 깊숙이 땅에 박혀 있음도 불구하고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방 가독한 압박감이 상쾌했다.

방금 어떻게 공격해 들어왔지?

열두 번의 검격을 그가 어떻게 막았지?

내려치기가 어떻게 그렇게 강했지? 레안드로는 ‘첫 번째’ 영역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이 거한을 상대로 직경 3미터를 점유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힘의 밀도에서 밀린다.

그렇다면 영역을 좁힌다.

면面을 좁혀서,

칼날의 선線으로,

선線보다 확실한 점點으로...

오히려 그의 영역은 사라져 버리고, 상대의 영역을 그가 날카롭게 베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가,갈라지고 있어! 역시 천재야! 으히헛,최고예요!”

변화를 알아챈 건가?

로라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칼을 고쳐 잡았다.

레안드로는 발을 빼내며 앞으로 훌쩍 찔러 들어갔다.

처음 휘두른 검보다 빠른 공격에 로라의 눈빛에 희열이 스쳤다.

자신도 발을 바닥에 찔러 넣더니 연무장을 부순 돌무더기를 강하게

차올렸다.

- 파아앗!

마치 암기처럼 날아오는 돌무더기에 빼곡하게 시야가 가려졌고, 수많은 파편이 그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예상 밖의 공격이었다.

“아악!”

파편에 맞아 주위에 있던 자들이 쓰러졌다. 푸른 사자 기사들보다 아무 보호막 없던 기녀들이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훌쩍 물러갔다.

그는 입을 좌우로 활짝 찢은 채 흥분으로 두 손을 덜덜 떨었다.

“어머나. 어머나. 이런 실력을 숨기고 계셨다니..!”

레안드로는 칼을 뾰족하게 앞으로 겨눴다. 그의 시야에 쓰러져 피를 홀리는 기녀들이 들어왔다.

타올랐던 전투의 희열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만하지.”

“왜죠?”

“주변이 휘말리는군. 다른 곳에 가서 싸우자.”

“오호호호! 멋져! 난 이렇게 나랑 가치관이 전혀 다른 분이 좋더라.”

로라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말을 이었다.

“동화 속의 기사님 같아서 갈수록 마음에 드는걸요.”

로라는 칼을 내렸다.

언제든 아무렇게나 칼을 바닥에 던져 버릴 것처럼 대충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대로 칼을 들고 있는 자세보다 지금이 훨씬 위험해 보였다.

손에 든 칼은 분명 한 자루인데, 어쩐지 두 방향에서 공격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안드로는 무심코 좌우의 적을 상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로라는 흥분한 듯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강하게 들이쉬었다.

“흐흡,하. 좋은 냄새... 이건 100%. 100%의 냄새야..

혼자 중얼거리던 로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오세요! 아니,맡아 주세요. 기사단 단장이 되어 주세요!”

“가,각하..?”

말을 이었다.

“정말 최고야. 완벽해요..

로라가 한쪽 눈을 감고 괴상한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긴 칼을 땅에 내팽개치고 있지만, 거리가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상대의 영역은 칼을 버리고 나서 늘어났다. 레안드로는 다시 훌쩍 뒤로 뛰어 담장 위에 섰다. 생사를 걸어야 할 상대.

6개월 뒤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곤란하다.

10년을 기다린 적이 있다.

“어딜 가요,돌아와요,100%!”

“.할 일이 있어서 곤란하다.”

“어머,놔주지 않겠다면?”

“.떠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긴장감 속에서 피부에 닿는 공기, 적의 자세,진한 분장 속 차갑고 얇은 금속 내음,입에 감도는 쓴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육감이 레안드로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상대의 비기秘技는 근접 상황의 일격필살이라는 것을.

다가가면 위험하다.

하지만 자리를 뜨는 것 정도라면

훨씬 쉬울 게 분명했다.

“호호호..

몸을 배배 꼬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던 로라가 말을 이었다.

“억지로 손으로 쥐면 나비가 죽어 버리겠지요? 좋아요. 놓아드리지요. 하지만 꼭 다시 돌아오실 거예요. 꽃을 찾아서!”

- 파앗!

레안드로는 흠칫 몸을 떨며 수도 뒤편으로 사라졌다.

레안드로는 숲속으로 향했다.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키 크고 울창한 수림 사이를 그는 헤집고 디디며 지나갔다.

미유는 따라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빼곡한 숲이었기에 아래쪽 평야에 풀어놓은 상태였다.

웬만한 마물은 혼자서 밟아 죽일 만큼 강했고,위기에 처해도 혼자 충분히 달아날 만큼 빠르고 똑똑해 걱정은 없었다.

- 휘이이잉!

마치 숲속에서 죽은 인간들의 흐느낌 같은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이미 1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에 왔던 그에게는 그저 친숙한 소리일 뿐이었다.

자주 오는 김에 나무를 잘라 편한 길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지만, 뜨내기 여행자들이 제대로 된 길로 알고 마물의 희생자가 될까 싶어 그대로 놓아두었다.

잡다한 마물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는 곳이다.

‘절대 들어가면 안 될 숲’이라고 생각되는 게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숲에 점점 깊이 들어가던 레안드로는 예전에는 없던 인간의 발자취를 발견했다.

‘다섯. 일곱. 열둘.’

열두 명의 자취가 숲에 새겨져 있었다.

레안드로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하늘에서 눈이 내리며 흔적을 덮고 있었지만,예민해진 그의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곳곳에 새겨진 열두 명의 자취는 모두 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눈 아래 새겨진 발자국은 분명히 사람의 크기였지만 무척 얇았고, 그 얇음이 계속 유지됐다.

몸을 가볍게 하는 법을 알고 있는 인간들이다.

‘.강하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무척 발견하기 어려웠을 자취였다.

레안드로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숲 안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지나자 얼어붙은 개울이 발견됐고,구멍을 뚫어 물을 마신 흔적이 있었다.

레안드로는 이미 머릿속에 있는 지도를 굳이 다시 꺼내 펼쳤다.

확인해야 했다.

열두 명의 흔적이 향하는 방향은 명백했다.

그건 레안드로가 복수를 결심한 덩굴 마물.

〈가르베라〉가 10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부활할 서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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