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Unearth (10)
“목적이라니?”
아이작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까마귀의 붉은 눈이 가만히 앞을 바라본다.
허공이다.
인형의 시선은 느릿한 바퀴처럼 허공을 굴러가다 멈췄다.
하얗게 지워진 원고 위에서.
나도 손에 들린 원고를 바라봤다. 아이작의 눈빛과 침묵을 배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단서가 한곳으로 기울어진다.
지혜 스탯의 상승.
원고는 애슈턴의 힘을 담고 있다. 내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
창천의 구멍이라고 하는 글자들을 보게 된 것까지도,애슈턴과 분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시간의 틈에 갇힌 대마법사라는 그의 저작물이 여기 있는 것도. 어떤 안내의 일부겠지.
돌출된 우연이 아니다.
점을 찍고,선을 그은 설계.
원고가 하얗게 변한 순간,하나의
극점을 돌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캐빈 애슈턴이 제가. 해골님을 일으키도록 계획했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렇지만. 왜?”
루비아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히 내가 품었던 질문이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아이작을 보고 물었다.
“뭐 짐작 가는 거 없나?”
〈글쎄. 섣부른 추측은 네 판단을
흐릴 뿐이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보호가 끝나 간다.〉
“벌써?”
〈벌써라니.〉
까마귀가 부리로 창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별빛들이 긴 궤적을 그렸다. 밤이었다.
〈이 여자애도 일정이 있을 거야. 이쯤 되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인간들도 슬슬 궁금해할 거고.〉
맞는 말이다.
이 정도까지 에라스트를 장악한 그녀라면 하루 일과가 빈틈없이 꽉 짜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저는 괜찮은데..
루비아가 살짝 웃었다.
기억에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닌데, 나를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미안했다.
“아니,너무 붙잡았어.”
눈길을 튕겨 내듯 손을 저었다.
루비아가 아쉬운 둣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기가 도서관에 가볍게 흩어졌다.
“따라가고 싶지만,여기서 제가 할 일을 하는 게 해골님께 도움이 되는 거겠죠?”
“.황제가 오기 전 다시 들르지.”
세 달 후.
그때까지는 넉넉할 테니까.
“저는 여기서 좋은 상황을 만들어 볼게요.”
“좋은 상황이라고?”
“음. 언제든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는 상황 같은 거요? 말씀하셨던 토너먼트라든지.”
〈그거 괜찮군. 다들 보는 앞에서 깔끔하게 처리하기 좋겠어. 말이 좀 통하는 녀석이야?〉
홀깃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이작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보고 물었다.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저자가 캐빈 애슈턴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눈앞에 책을 내밀었다.
“가져가라.”
“정말요?”
“애초에 놓고 가려고 꺼낸 거다. 네가 읽어 준다면 좋겠지.”
루비아는 길 가다 금화라도 주운 사람처럼 표정이 변했다.
“감사합니다!”
캐빈 애슈턴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했으니까.
이 정도로 책을 쌓아 놓고 보고, 바쁜 스케줄에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도서관에 들르는 그녀에겐 좋은
선물이 될 거다.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T&T나 그라스미어 영주,아니면 그곳에 있는 유베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유베의 가명과 그가 묵는 여관의 존재도 루비아에게 가르쳐 주었다.
레나가 있는 T&T나,목숨 빚을 달아 놓은 그라스미어 영주 역시 내 얘기에 움직여 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하기는 하다.
“그리고..
하나 더.
비밀 통로를 여는 법.
“아이작,이 통로는 어떻게 여는 거지?”
〈그건 왜?〉
“루비아가 여기를 써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아이작이 루비아를 흘긋 바라보고 말했다.
〈안 가르쳐 주는 게 나을걸?〉
그게 무슨 소린가?
“위기에 처하면 여기로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작은 황당한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T&T나 그라스미어 영주,유베의 도움을 받고도 여기서 도망치게 될 정도라면 이미 유령이 개입했다고 봐야겠지. 그 이상이거나.〉
〈뒤에 바싹 붙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를 거야. 그런 상황에서 통로를
아는 게 발각되면,이놈 저놈이 다 내려와서 많은 걸 물어볼 거라고.〉
한 번에 그림이 그려졌다.
어떤 방법으로 물어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미 삼촌 따위를 상대하는 일이 아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중요한 비밀이라면,고문에 버틸 자신은 없어요. 저 때문에 비밀 통로까지 위험해지는 건 싫고요.”
분명하게 의견을 말하는 루비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느릿한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손을 뻗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무슨..
〈흐흐. 갑자기는 무슨. 헤어질 때 다 하는 짓이잖나? 당황한 척은.〉
까마귀의 빈정거림 따윈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차가운 갑옷 너머 따듯한 감촉이 느껴진다. 산 자의 온기를 훔치는 느낌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속절없이
안겨 있었다.
마음 안쪽에 가라앉아 있던 적막 같은 것이 휘저어지는 것 같았다.
- 파드득!
뻣뻣해져 당하는 나를 놓아두고, 아이작은 날아가 비밀 통로를 여는 작업을 시작했다.
“꼭 안전하게 돌아오셔야 해요. 저도 잘 하고 있을 테니까요.” 루비아는 씩씩하게 웃었다.
꿋꿋한 모습이, 촉촉하게 빛나는 눈빛이 마음 어딘가에 연달아 생긴
- 쿠구궁..!
작업이 끝난 걸까.
주위가 어두워지며,다시 바닥에 작은 틈이 생겨났다.
〈시간 더 필요해? 지금 헤어지기 싫으면 아예 데려가자고. 전에도 그랬다면서?〉
통로 옆에 선 아이작이 흘끗 나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지만,받아들일 수는 없는 얘기다.
“아니. 내려가지.”
〈인형을 내세우는 것도 괜찮지. 장막 뒤에서 지배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목표는 단지 시나리오 클리어.
내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이 인형 이상이라고 단언할 자신은 없다. 스멀거리는 죄의식을 구겨 버리고 말을 돌렸다.
“유블람 방향은 어디지?”
아이작이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상인 연합부터 챙기는 게 아니고? 그것들 만나야 될 밀무역 장소랑 유블람은 길이 살짝 다른데.〉
“아니,그 전에 유블람 근처에서
만날 상대가 있다.”
애슈턴의 책을 세 권이나 가지고 있는 존재.
에라스트 도서관에서 단서를 짚어 보다 떠올랐다.
지금껏 주로 적대하는 입장에서 만났지만,영입을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간도 마왕도 아닌 제3의 길을 찾고 있다고 했던가?
어떤 길이 자신에게 구원을 줄지 몰라 헤매고 있겠지.
어쩌면 슬라임이 찾는 선택지를 내가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오. 캐빈 애슈턴과 관련 있는 녀석이야?〉
갑작스런 아이작의 말이 생각을 끊었다.
〈뭘 놀라? 에라스트 도서관 들른 뒤에야 떠오른 거라면 뻔하지.〉
루비아도 그렇고.
아이작은 한층 더하다.
내 생각이 읽기 쉽게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는. 그의 책을 3권이나 가지고 있으니까.”
〈재밌네. 얼마나 귀여운 년인지 소개 좀 들어 보자고.〉
“일단. 성별은 없는데.”
아니,필요에 따라 어느 쪽이든지 대응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이 사실을 말하자 아이작은 무척 즐거워했다.
〈그거지! 그래서 내가 슬라임을 좋아하는 거야. 멸망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종족이라니까?〉
아깝다.
아이작의 뜻과는 전혀 별개지만, 확실히 그 말이 맞는 녀석이다.
상황을 통찰하는 힘도 뛰어나다.
물건을 자세히 감정하는 능력에다 신체의 변형은 자유 그 자체.
변화시키는 것은 제 몸 하나지만,
그의 몸에만 한정한다면 조형의 권능을 지닌 비브리오도 ‘따위’라고 부를 만한 능력이다.
제 몸 외에도,인간의 살이나 뼈 정도는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쉽게 녹일 수도 있다.
그 특성상 모든 곳에 스며들어, 최고의 척후병이 될 수 있겠지. 성품마저 모나지 않고 온유하다. 녀석만 섭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될지 쉽게 상상하기도 어렵다.
〈여기다.〉
아이작이 통로 앞에 서서 결계를 풀어냈다.
〈숨을 흘려라...〉
- 쿠르릉...
천장이 열렸다.
직경 2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내성인가?”
당장 밖에는 인간의 기척은 없다. 어둠 속에서 발을 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뿌연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무겁다. 무척 오랫동안 쌓이고 또 쌓여 온 먼지다. 오랜 성에는 이런 장소가 많지.〉
“버려진. 공간이라는 건가?”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오크통 몇 개가 썩어 있는 창고를 지나 위로 올라갔다.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열둘.
경비들이 배치된 형태로 보아•.“. 영주의 거처에서 가까운 곳이다.
“후아아암..
하품을 하는 경비들을 지나 쉽게 영주의 침실로 향했다.
내성은 이미 방문한 적이 있다.
아편 중독자들이 갇힌 던전까지 후작에게 끌려왔었지.
경비대장에게 살해당해 성벽 밖에 던져졌던 유블람 영주는,두꺼운 손목에 황금 팔찌를 착용한 채로 천천히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옆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행정관 한 명이 시립해 있었다.
= 경비대를 열 명 넘게 죽였는데
장부를 훔쳐보던 아이작이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도망을 왜 가겠어? 이런 사업은 동업자가 죽으면 내 수익이 바로 두 배가 되는 거야.〉
= 하지만. 동업자가 뭐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잖나.
〈인간이라는 동물이 원래 굉장히 게으르고 원시적이거든. 뭔지 모를
일이 생겼다고 제자리를 뜰 만큼 행동력이 있지가 않아.〉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는데,당장 내 수익이 확실하게 두 배가 됐는데 도망을 가겠어?〉
하지만 레안드로의 편지를 받아 들고는 모든 걸 버린 채 도주했던 영주다.
후작은 그만큼 압도적이고,뚜렷한 공포였다는 걸까.
〈글쎄. 대체할 건 있고?〉
레안드로가 여기 왔을 때 좌서장 메렉이라는 제 부하를 임시 영주로 앉혔다.
하지만 그것도 조사를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황제 암살에 관한 내 거짓 자백도 없는데,갑자기 유블람에 관심을 가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유블람 경비대장.
아스포데와 그 패거리를 죽인 건 안전했다.
두 번의 회귀로 확인한 사실.
어쩌면 그건 유블람 영주가 일이 커지지 않게 잘 덮은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연쇄 살인이 별 탈 없이 넘어가는 게 당시에도 기묘했는데, 영주의 탐욕에 도움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 모르겠군. 안전하게 가지.
번들거리는 눈으로 장부의 숫자를
점검하는 녀석을 지나쳤다.
어차피 황제가 오면,이런 녀석을 죽여도 다른 비슷한 인간이 자리를 메꿀 가능성이 높다.
아편 냄새에 찌든 거리를 지나서 빠르게 성문 밖으로 나왔다.
홀끗 뒤를 돌아봤다.
마모되고 곳곳에 실금이 간 회색 성벽에 밤이 기울고 있었다.
양심도 용기도 식어 버린 도시. 루비아가 죽었던 곳이다.
손을. 쓰긴 해야겠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말아 쥐고, 보육원이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비릿한 유블람과 어울리지 않게 하늘바닥은 별빛이 가득했다.
걷다 보니 공기도 청량해졌다.
곧 저편에 큰 목재소가 보였다.
곱게 잠들어 있는 인간 아이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이 층 건물.
오랜만의 방문이다.
레나 시나리오를 끝낸 영향으로 이곳까지 뭔가 바뀌었을까 했지만, 보육원은 예전과 같았다.
외관은 물론이고.
〈그런 것도 알아?〉
= 한때 3개월을 보냈으니까.
슬라임은. 그대로일까? 유일하게 촛불이 켜진 원장실. 문은 닫혀 있다.
- 끼이익.
살짝 손잡이를 잡고 열었을 때,
순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문 쪽을 바라보며 대뜸 입을 열었다.
놀라지도,완벽하게 은신해 있는 내 정체가 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단호한 어조였다.
“유령이 되라는 제의는 한참 전에 거절했을 텐데요. 방문은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유령.
소녀 공작 휘하의 비밀 집단이다.
얼굴을 지우고 차가운 가면을 쓰는 무리. 빗방울처럼 무수한 인간들 중에서도 하나같이 정상급 솜씨를 지녔다.
유령으로 생각하다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얼마나 강한 은신 능력을 갖고 있는지가 새삼 실감됐다.
물론 유령들에게 가호를 내려 준,
보티스의 대리자와 비교하면 아직 초라한 수준이겠지만.
그나마 슬라임이 유령의 제안을 거절했다니 다행이었다.
슬라임이 넘어가 은폐의 가호까지 받았다면,얼마나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을까.
적으로 만나면 녀석만큼 까다로운 상대도 찾기 힘들겠지.
회귀 초기에도 유령에게 비슷한 제안을 받았을까?
아니면 레나 시나리오를 끝낸 뒤, 푸르손 추종자들이 T&T 내부에서 입지가 좁아진 후의 일일까?
어쨌거나...
녀석을 반드시 같은 편으로 끌어 들어야 한다.
일단 은신부터 풀어야겠지.
- 스윽!
아이작과 나를 그대로 드러냈다. 갑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상대의 표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피부 한 조각 한 조각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어서인지 꽤 풍요로운 표정이었다.
“아. 아니시군요. 은신이 너무 감쪽같아서 실례했습니다.”
〈호오? 한 번에 알아보는 거야?〉
아이작이 감탄의 눈으로 슬라임을 바라봤다. 까마귀의 시선을 곧바로 느꼈는지 슬라임이 말을 이었다.
“옆에는 어떤 분이십니까? 귀한 분이 오신 것 같습니다만.”
〈이거 눈썰미가 대단한 녀석인데. 아주 비범해.〉
까마귀가 만족스러운 듯 부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자길 알아봤다고 단숨에 평가가 격상하다니.
“굉장한 손님분들을 너무 갑자기 맞았군요.”
그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변화였지만, 정체를 알고 있는 처지에서는 안쪽 점액질 움직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원장 앞쪽의 의자에 앉았다.
한두 번 와 본 곳이 아니다.
익숙한 상대,익숙한 장소.
막힘없는 태도를 원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일단 소개 좀 부탁드리죠.”
물론 생각해 둔 말은 있다.
슬라임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줄까.
“그냥 당신처럼,인간들 사이에 숨어 사는 처지다. 딱히 소개랄 건 없는데.”
피식 웃는 걸까.
원장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약간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빼곡하게 꽂힌 뒤편의 책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슈턴의 책 외에. 슬쩍 봐도 괜찮은 서적이 많은걸. 오래전의 금서들도 보이고. 신기할 정도로 수준 높은 컬렉션이다.〉
그랬던가.
원장은 나를 똑바로 보고 질문을 거듭했다.
“대체 당신들의 정체는 뭡니까? 마왕의 가호를 받지 않고도 이런 수준의 은신이라니. 마법과 주술,
검술을 고도로 익힌 흔적이 모두 느껴지는군요.”
대단하다.
감정의 영역이 물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건가.
원장에 대해 한층 새롭게 알게 된 기분이었다.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냥. 당신과 꼭 함께하고 싶은 자라고 해 두지.”
〈흐흐. 아주 저돌적인데?〉
까마귀는 옆에 난간 위에 서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원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에 대해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은 조직에 발을 걸쳤습니다. 섭외는 곤란합니다.”
조직이라.
“글쎄다. 나냐우 계파에게 밀려서 망해 가는 T&T 내부 푸르손 계파를 괜찮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큰 동요는 없다.
어쨌거나 그 조직에서도 원장은 간부급이 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아직 마왕을 섬길지 결정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원장은 아직 인간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자기 대신 이곳을 돌볼 고용인도 부르지 않은 상태다.
인간을 충분히 관찰하고,고민하다 보육원을 떠나 본격적으로 마왕을 따르던 시기.
그때의 느낌이 아니다.
망설임은 아직 녹지 않았다.
원장이 물었다.
“저에 대해 뭘 아십니까?”
”변하는 게 재밌어 인간 아이들을 기르는 보육원장? 스스로는 결국 무엇으로도 변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어서,아이들을 보면서 만족감을 대신 채워 왔던 거야.”
“•"당신.”
슬라임의 표정이 굳었다.
”터무니없는 감정 능력과,웬만한 유령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테고.”
레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뒤, 원장과 싸워 본 적이 있다.
실력을 숨기고 있던 녀석.
기스-제-라이가 준 칠흑의 단검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던 상대다.
황실 근위 기사 하나도 이길 수 없었을 때,검주의 힘을 잠시나마 상쇄해 줬던 터무니없는 아티팩트.
그게 있었기에 우위를 점했다.
지금도 힘의 끝을 봤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이런데 박혀 있기에는 터무니없이 강한 존재.
브로디 발도프와도 싸워 봤지만, 푸르손 계파 중 가장 강한 녀석은 슬라임일 가능성이 높다.
“높은 수준의 서적 수집가이기도 하지. 책장에 꽂혀 있는 것만 봐도 이건 쉽게 알 만한가?”
어떤 게 절판된 금서들인지,책의 가치가 어떤지는 몰라도 아이작이 한 말이라면 틀림없을 거다.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인간의 놀라는 모습을 정말 잘 따라 하고 있잖아? 이번에는 진짜 놀랐을 텐데.〉
아이작의 말대로다.
한순간의 버벅거림 없이 인간의
‘흠칫하는’ 모습을 따라한 걸 보면, 슬라임의 인간 흉내는 대단한 경지 라고 봐야 했다.
“마왕들은 세력 간의 알력 다툼 때문에 무너질 거다. 대륙을 한 번 휩쓸고,인간들에게 다시 무너지게 되지. 한 번 휩쓸려 나간 인간들은 물론이고. 모두가 두 번씩 거듭 고통 받게 되겠지. 당신이 원하는 세상이 그건가? 고정되지도 못할, 한 번의 거대한 학살극? 이족들은 예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냥당하며 살아가겠지.”
사실이다.
게다가 마왕들이 강림하기 전부터
분열하고 있다는 건 이미 몇 번씩 겪었다.
패망 또한 이미 확정된 미래.
나를 차분히 관찰하는 원장에게,
남부에서 연합을 결성해서 황실에 맞설 생각이라는 뜻을 전했다.
전쟁의 방지와 마왕 강림의 저지.
원장은 터무니없는 무력과 달리 살육을 싫어한다.
명분이 있어도 마찬가지.
전쟁을 싫어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브로디 발도프와의 대화를 회상했다.
[라임은 전쟁 초기에 이탈했었지. 전쟁이라는 걸 실제로 보니 견디기 어렵다면서 도망쳤다. 아에자르가 내게 수색을 부탁했지만. 결국 못 찾았지.]
인간을 충분히 관찰해 본 결과, 아무래도 멸망시켜야겠다고 결심한 녀석치고는 마음이 많이 약하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키려는 제국 황실을 싫어하고,연합을 만들어서 맞서는 것에 찬성하겠지.
그런 논리였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말을 끝맺었다.
“마왕도,인간도 아닌 제3의 길. 같이 걸어가지 않겠나?”
〈큭. 큭큭..•>
아이작은 부리를 옆으로 돌린 채 킥킥거리며 웃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까마귀를 외면하며 원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붉은 눈과 녹색 눈이 서로 번갈아 번뜩였다.
서로 다른 한 쌍의 눈동자야말로
숨길 수 없는 그의 윤곽이었다. 원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중히 거절합니다.”
신중하지만,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으음.”
마음속으로 이미 원장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차가운 거절은 꽤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어째서지?”
마음을 감추려 애썼지만,질문이 초조하게 떨리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원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갑작스레 저에 대해 조사했다고 하시면서. 제가 듣고 싶은 말들만 쏙쏙 늘어놓고 계십니다. 친우에게 들었다면 놀랄 말들은 아닙니다만, 처음 보는 이가 그 상대이니 무척 당황스럽고 경계심이 드는군요.”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눈앞의 원장은 레나나 루비아처럼 호감도가 이어지지도 않고,기스-제-라이처럼 특전으로 감정 보정을 얻을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호감도,기억도 철저히 일방적.
지금까지 원장과 만났던 상황은 대부분 그가 나를 관찰하고 판단을 꿰맞추는 쪽에 가까웠다.
일방적으로 관찰당하고 평가받는 상황이다. 원장이 부담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
원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마왕들의 힘을 압니다. 인간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요. 마왕들이 말씀대로 분열에 처한 건 맞습니다만,일단 강림하면 인간을 밀어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결정적 마왕 패퇴의 요인은 용사지만,갑자기 어디에서 튀어 나왔는지 모를 용사들이 마왕을 다 쓸어버린다고 말하면 상대가 뭐라 할 것인가? 그것까지 슬라임에게 납득시킬 자신은 없었다.
미친 취급이나 당하겠지.
설사 믿어 준다 할지라도,아직은 원장에게 모든 걸 말해 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옆의 까마귀를 흘끗 바라봤다.
녀석은 한 치의 긴장감 없이 킥킥 웃을 뿐이었다.
‘거절이 라는데..
〈네가 끝없이 회귀한다면,심지어 나조차도 네가 꼭 섭외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매달려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상대들이지. 자신의 위치를 좀 더 자각하도록 해.〉
〈여유를 가져. 어차피 낚싯바늘에 미끼는 넘치게 꿰어져 있으니까. 낚시꾼이 거칠게 휘저어도 안 물기 어렵다고.〉
“하지만..
슬라임이 말을 이었다.
“역시 호기심은 가는군요. 아무리 저에 대해 조사했다 해도,제3의 길이라는 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말입니다.”
〈봐,금방 속내를 털어놓잖아?〉
“그런 힘을 가지고 어째서 고작 에라스트의 영주 후보 하나를 밀어 주시는 건지도. 궁금하고요.”
- 투툭.
원장이 책상에 놓인 실을 주웠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떠서 늘렸다.
한순간에 육각형이 만들어졌다. 육각형은 각 변의 크기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한번 그녀를 봐 주지 않겠나? 평가는 천천히 해 줘. 돕고 싶은지 어떤지.”
뚜렷한 근거는 없었지만,원장과 루비아는 분명히 잘 맞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 좋습니다. 어차피 제가 관심을 갖게 하셨으니까요.”
“부탁 하나 더 하지.”
“또 말씀입니까?”
원장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 ᄋ ,,
ᄑ....
하려고 했지만,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에서 계속 요구만 거듭한다면 아무리 박애주의자인 라임이라도 감정이 꼬일지 모른다.
“뭘 원하시죠?”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혹시. 근처에서 인간에게 고통 받는 녀석들을 알고 있나?”
살짝 찌푸려졌던 원장의 표정이 펴졌다.
나는 놓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들도 구해서 규합할 생각이라. 아,혈석을 착취당하는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은 알고 있다. 일단은
그들부터 구할 거야.”
아이작은 난간을 꽉 움켜잡고는 아예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주 노력을 하는군. 애쓴다.〉
원장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단순히 표정이 활짝 펴진 걸 넘어 호의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좋군요.”
자기를 설득하려는 의도를 원장이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도를 알면서도 흔쾌하게 받아 줄 정도로,이 일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항상 신경 쓰였지만. 저 스스로 보티스를 추종하는 것들과 척을 질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네크론 신사회다.
말하는 투로 봐서 다른 세 곳도 놈들이 관리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계획한대로 진행하다 보면 그들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
“이쪽은 얼마든지 상관없으니까 맡겨 달라고.”
“상당한 각오가 되신 것 같군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슬라임은 눈에 띄게 반색하면서 정보를 내줬다.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 외에도 큰 지도에 세 군데가 더 표시되어 있었는데,당장 가기에는 어차피 너무 멀었다.
〈국경 쪽에서 일 처리하고 와서 가 보면 좋을 곳 하나. 나머지는 천천히 가도 돼. 일단은 폼만 잡아. 진지하게 궁금한 것도 아니잖아?〉
지도를 슬쩍 품에 넣었다. 캐빈 애슈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일만
처리하면 얼마든 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원장 녀석...〉
보육원을 나오며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뭐지?”
〈묘하단 말이야. 세월이 느껴져.〉
“세월이라고?”
〈아주 오래된 것들을 볼 때 드는 느낌이란 게 있거든.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
“믿지 말라는 건가?”
〈아니,그 반대지. 오히려 드물게 믿을 수 있는 녀석이겠지만. 뭐, 신경 쓰지 마라. 호기심은 이쪽을 끌려가게 만드니까.〉
〈일단 하나씩 집중하자고. 길은
알고 있지?〉
“물론.”
예전에는 지도를 보며 걸었지만 이제 익숙한 길이다.
고블린 부락이 가까워진다.
옷을 찢고 함정을 파 놓던 인간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어딘가에서 성실히 삶에 매달려 있을지 모른다.
계속 걸어갔다.
머리가 갈리고 심장이 쪼개진 채, 차곡차곡 쌓인 고블린 시체 더미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아주 유감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참담한 낭비로군. 고블린이 얼마나 훌륭한 노예인데. 고작 혈석 채취 따위로 살해하다니.〉
네크론 일당을 모두 처리한 뒤, 광화된 붐텅의 문제까지 모두 다시 해결해 줬다.
증인 따위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고블린에게도 정체를 안 밝혔으니
네크론의 보복 따위는 불가능하다.
추적하려 해도 원장조차 유령으로 착각할 정도의 은신 스킬이 있다.
물론,이 정도의 도축장에 그만큼 신경 쓰지도 않겠지만.
직스키세스 붐텅은 감격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된다면 들어 주십시오.”
물론 저 뒤에 나오는 말이 뭔지는 알고 있다.
“고블린 마법사,머드캐시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아니 그걸 어떻게..
붐텅은 큰 눈을 번쩍 뜨며 소스라 칠 정도로 놀랐다.
“혹시 동부산맥에서 취이이익,휙, 취익! 소리를 내고 다니면 만날 수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 그건 이미 해 봤는데 안 되더군.”
홉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은 작은 입을 쩍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진 뒤,진지하게 눈빛이 변한 붐텅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두 번째 이야기를 들으셔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