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너희는 모래처럼 (11)
레나가 무리하게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며,나도 그건 곤란하다는 사실을 짧게 설명했다.
나냐우와 고양이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를 놓고 다닐 수는 없어.”
“냐옹!”
고양이도 그렇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계가 없으면 우리 둘은 아무것도
못 해. 알잖아?”
그 말을 인정하는 걸까.
“하지만.
“안 돼. 애초에 이것도 네가 세운 계획이잖아. 네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이야.”
레나도 더 이상 우기지 않았다. 최고위 간부 셋이 움직인다.
나 하나를 잡자고 여기까지 왔을 가능성은 낮다.
여기서 자기가 빠질 수 없다는 건 사실 레나가 제일 잘 알 거다.
잠시 억지를 부렸지만,역시 T&T 본부장으로서의 자각이 있겠지.
동족인 인간을 혐오하고,기괴하게 비틀린 심리로 나에게 집착했던 이 인간은 이번 생에서 약간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그럼.
- 투둑.
“이거라도 받아 가세요.”
그녀가 주는 펜던트에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레나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받는 거 아니에요?”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법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맑은 목소리다. 지금껏 보아 왔던 레나의 옛 모습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나냐우가 뭘 하고 섰냐는 듯 우리 둘을 바라봤다. 샤루니안이 변한 흰 고양이는 얼굴 털을 세웠다.
“농담이에요. 가져가요.”
가만히 멈춰 있는 내 손에 레나가 펜던트를 억지로 쥐어 줬다.
긴 줄을 감아쥔 순간,예전처럼
허공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빼곡히 떠올랐다.
서로가 이 펜던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레나는 희미한 꿈의 형태로,나는 선명한 과거로 기억한다.
악몽이 아니라기에는 꿈의 내용을 너무 자세히 알고 있다.
차가운 얼음이 몸 안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레나가 입을 열었다.
“이 증표를 본부에 보여 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 아가씨를 완벽히 지원할 거예요.”
“.고맙다.”
“꼭 다시 만나고. 그때는 다른 간부들도 소개해 줄 테니까요.”
뭔가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지만, 일단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하며 위험을 공유하는 것만 아니면 레나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도 나쁠 건 없다.
약간의 소란 뒤에 그들이 떠났다. 떠난 자리를 바라보자 레나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새 나오는 숙소들의 불빛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남아 있는 펜던트를 고쳐 쥐었다.
“판단을 시행한다.”
사망 위기를 판독한다는 메시지를 읽었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의해 스킬 숙련도가 상승한다는 메시지, 모든 종류의 〈범죄〉에 관한 특수 혜택들이 적용되는 메시지도 함께 떠올랐다.
지금 내 수준에서 크게 유의미한 혜택은 아니었다.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거절하고 창을 내렸다.
레나와 만나게 되면, 정해진 듯이 나에게 펜던트를 건네고 있다.
과거를 개변시킨 보상인 것처럼, 호감도가 누적된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신물信物이 주어진다.
펜던트가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샤루니안이 젓빛 기사의 출현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이 펜던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증표 이상의 쓸모는 조금씩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왠지 더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다.
안쪽 주머니에 신경 써서 넣은 뒤 곧장 수도로 향했다.
눈발이 획획 날렸다.
갑옷 안에 넣은 펜던트가 온기를 전해 주는 것 같았다.
해가 넘어가자 눈이 더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길 근처에서 방황하는 들짐승 몇 마리를 발견했지만 슬쩍 겁을 주자 껑껑거리며 물러났다. 곧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처럼 보였다.
뜨끈뜨끈한 모닥불을 피워 캠프를 만든 무리들도 보였다.
은신해 지나가자 내 기척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길을 걷다 보니, 사실 그런 녀석들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게 있었다.
‘여기는.
무죄의 탑주,엘란드에게 흡수한 독안毒眼이 발동하고 있었다.
절벽 한쪽.
몸을 덮은 얼음이 편하다는 둣, 태연히 솟은 날개 모양의 풀잎을 바라봤다.
히피 더스.
잎을 차가운 주정酒精에 행군 뒤, 얇게 빻은 가루에 기름과 유화제를 섞으면 무색무취의 독이 탄생한다.
기간을 두고 음식에 조금씩 섞어 먹이면 심장이 천천히 차가워지며 자연스럽게 사망.
이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곳인데,알고 보자 잎 하나하나가 새삼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다.
극소량만으로도 감각은 예민하게 만든 채 근육만 마비시키는 몰리나, 중요 배합 재료로 쓰이는 퀴나타, 페로브시카 잎들도 솟아 있었다.
아예 관심도 안 가졌던 폭포 근처의 황량한 절벽이었는데.
독초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 제국 중부에 있었던 것이다.
‘위치를 기억해야겠군.’
잔뿌리까지 다치지 않게,하나씩 살살 파낸 뒤 갈무리하고 다시 북쪽을 향했다.
수도에 가까워지자 생각이 점점 복잡해졌다.
비브리오 공작.
레안드로가 다른 임무로 치워져 대신 재판관으로 온다는 자.
정체를 알아야 한다.
갑자기 나타나서 황제에게 온갖 명예 작위를 받았다는 인간.
두문불출하는 노인이고, 사생활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정보길드인 T&T 마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물론,그가 레안드로 녀석보다는 훨씬 더 공명정대하고 상식적이라 루비아의 편을 들어 줄 가능성이 없다고 가정하고 싶지는 않다.
네크론 파와 진득하게 엮여 있을 확률이 더 크겠지만.
보티스의 노예인 네크론 신사회가 아닌,전혀 다른 마왕의 추종자와 선이 닿았을지도 모르고.
일단 부딪쳐 봐야 한다.
내가 직접.
- 휘이이잉!
빠르게 질주를 거듭했다.
이제 수도까지는 반나절 정도.
인간이 밀집된 곳으로 진입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싶은 스킬이 있었다. 얼지 않은 강물에 두개골을 비췄다.
‘마스커레이드.’
[가면무도회Masquerade 활성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
모습을 덧씩읍니다.]
[최근에 본 가장 인상적인 인간을 가장합니다.]
[변신: 벨’호멧 아이작]
[45% 흡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무작위 처리됩니다.] [제한 시간: 10분]
[다음 사용까지: 6시간]
당황스러운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인상적인 건 둘째 치고,레안드로 후작보다 그 녀석의 강림이 ‘최근’ 이었으니까.
후작과는 달리 누가 알아볼 리는 없는 300년 전의 얼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매우 수려한 외모입니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를 메시지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녀석 자신도 되찾지 못한 얼굴이 나에게 구현되어 있다.
이 상태로 아이작을 만나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녀석과 손을 잡을까 싶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 지나는 곳이 하필 절체절명의 뒤통수를 맞은 ‘좁은걸 협곡’이라서 그 생각이 다시 말끔히 지워졌다.
녀석 앞에 당당히 설 만큼 제대로 강해져서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루비아를 영주로 만드는 게 먼저다.
- 팟!
나는 예상대로 반나절 뒤 수도로
잠입했다.
개미지옥처럼 서로 다른 높이의 성벽이 촘촘하게 쌓여 있었지만, 그 위를 간단히 디뎌 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성벽을 넘거나 부술 힘을 가진 자들은 수도 안으로 받아 준다는 아이작의 말이 떠올랐다.
은신을 유지한 채 곧바로 레나의 가게로 향했다.
‘조용하군.’
고양이 울음소리는 없다.
아무래도 저번의 고양이 카페는, 엉망인 T&T의 재정을 단기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던 모양. 검게 칠해진 벽을 바라봤다.
아무런 안내판도 없다.
한 블록 안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눈에 안 띄는 손잡이만 달랑 하나 달린 문.
염탐이 아니라 손님으로 왔다.
적당한 거리에서 기척을 드러내자 가드들이 나를 바라본다.
“초대장은 갖고 계십니까?”
“여기.”
레나의 펜던트를 내밀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교육되어 있는 둣,가드들이 곧바로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였다.
도박장을 지나 안쪽 비밀 통로로 가는 길은 그대로였다.
- 드르륵!
가게에 근무하고 있는 종업원들 하나하나가 모두 쓸 만해 보였다.
“일단 간부들을 소집하겠습니다.” 잠시 후.
원탁으로 들어가자 안쪽에 있던 자들이 나를 둘러쌌다.
숫자는 열 명 정도.
모두가 인간은 아니었다.
묘족,우둘투둘한 피부를 후드로 뒤집어씌운 랩틸리언,검은 피부의 오크까지.
랩틸리언이 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그 펜던트를 갖고 있는 한 우리 본부장의 분신이나 다름없습니다. 확실 하게 도와드리 겠습니 다.”
“빼앗긴 걸 수도 있지 않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본부장만 있어도 위기에 처할 일이 없는데, 누구와 같이 있는지 보고 오신 거
아닙니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나냐우와 샤루니안과 함께 있는 이상 억지로 빼앗겼다는 건 상상조차 어렵다.
분위기를 보니,예전이라면 인간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일념으로 푸르손을 추종했을 자들을 레나가 모두 섭외한 것 같았다.
‘이러니 세력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지.’
잠재력을 최대로 계발시킨 레나의 진짜 힘은 이런 공작에 있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뿌듯했다.
이제부터 레나와 만나기만 하면 이런 잘 짜인 암흑 세력이 그 즉시 든든한 아군이 되는 것이다.
“그럼,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때 였다.
- 띠링!
[〈T&T 본부장 대리〉칭호를 획득 했습니다.]
[범죄 참여 및 길드 의뢰 수주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집니다.]
[실적이 쌓일수록 다양한 의뢰를 받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레나의 펜던트를 보여 줌으로써 높은 평판을 획득했습니다.]
[길드원들의 고충을 해결할 경우 평판이 올라갑니다.]
[무리한 요구를 할 경우 평판이 떨어집니다. 당신의 행동은 레나의 평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68.94% - 68.65%.]
오랜만에 보는 평판 메시지였다. 상태창이라는 건 가끔은 여유롭게 나를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많은 경우엔 상황을 깔끔하게 투영해 준다.
내가 어떤 방향성을 인식할 때면 동화율과 함께 현재 상황을 과잉에 가깝게 알려 주곤 했다.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일단,레나의 평판을 깎는 짓은 당연히 할 생각이 없었다.
루-름을 움직이지 않아도,만에 하나 그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는 모른다.
‘마스커레이드.’
투구를 벗었다.
[우-무쿨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윤-요팔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세택’ 젝스초클의 호감도가 매우 크게 상승합니다.]
[크리콘키의 호감도가 미세하게 하락합니다.]
[에버다 케들러의 호감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대체로 랩틸리언이나 묘족에게는 통하고,오크에게는 약간 호불호가 갈리는 외모인 것 같다.
“이건 내 가면이라고 생각해라. 웬만하면 투구를 쓰고 다닐 거다.”
“알겠습니다.”
“비브리오 공작,레안드로 후작에 관해 조사해라. 안전하게,위험에 처하지 않는 한도에서 활동하는 게 제 1 원칙이다.”
틀린 선택은 아니었는지,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표정이다.
레나의 평판이 걸려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다. “일단.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비브리오 공작은,목에 문신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주고.”
“그대로 하겠습니다.”
뱀 문신.
추악공 보티스.
그를 추종하는 네크론 신사회는, 모두 목에 뱀 문신이 있다.
노예의 상징.
레이 커크부터 르노 리드바랜까지 예외 없이 동일하다.
정보가 샐 걱정이 없는 말단이면 몰라도.
리드바렌 백작처럼 고위 간부라면 원천적으로 배신을 막는 뱀 문신이 새겨 졌겠지.
그게 있다면 비브리오 공작이란 자는 볼 것도 없는 적이다.
만약 목이 깨끗하다면.
희망은 가져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은 즉석에서 나왔다.
“없습니다.”
“뭐라고.?”
후드를 벗은 랩탈리언,윤-요팔은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서류철을 쪽 내밀었다.
“다음이 수도에서 마왕 보티스의 노예 각인이 새겨진 주요 인사의 목록입니다.”
문신이 생겨난 날짜까지 빼곡하게 적힌 서류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이런 걸. 언제?”
“본부장님 특별 지시로 매달 계속 갱신 중입니다. 본부에서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첩보 중 하나지요.”
T&T 제국 수도 본부.
레나가 만들어 낸 그 저력에 나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달리아크에서 물어봤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을까?
당황과 감탄이 섞인 내 반응을 본 랩탈리언이 샛노란 눈으로만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브리오 공작을 마지막으로 본 날짜는. 사홀 전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밖으로 나오죠. 다시 확인하려면 며칠 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