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생매장 (1)
<안 알려 줘.>
“. 뭐라고?”
처음에 말을 끌 때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정말 안 알려 준다고 말할줄이야!
“왜 안 알려 주겠다는 거지?”
<너도 물어보기만 하고 중요한 건 하나도 안 알려 주잖아? 사회성이 왜 이렇게 부족하냐?>
정신이 멍해진다.
아이작에게 사회성을 지적받았다.
사실 터무니없는 지적도 아니다.
궁금한 것 위주로 멋대로 계속해서 묻기만 하고 아이작에게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안한 감정을 한 톨도 느끼지 않았다.
녀석과 계속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닮아 버린 건 아닐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공손하게 스승님, 알려 주십시오.
제가 아둔해 아는 게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해 봐.>
린트부름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스-제-라이를 만나면
그녀가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까.
관두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드래곤이에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흥! 건방진 인간.>
아이작의 삐진 목소리는 무시했다.
“드래곤(용).이라고?”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갔다.
“네. 하늘 위의 하늘을 나는 자들, 가장 강대한 용종龍種을 고대어로 린트부름이라고 불러요.”
<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냐?>
아이작이 핀잔을 놓았다.
루비아는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좋아했거든요. 기아티아, 카-티아칸, 치조크, 헤텐세’지. 다양한 종류의 드래곤을 부르는 이름도 모두 알고 있는걸요. 날개로 넓은 하늘을 덮고 전능한 마법을 쓰는. 그 존재들은 인간을 보며 어떤 기분일까요?”
<드래곤이니 뭐니 그딴 건 어차피죄다 소설에 불과해. 400년 전에도 그딴 건 없었다. 린트부름은 무슨.
필요 없는 정보라 굳이 언급하지도 않았던 거다.>
가장 강한 드래곤의 종種이라고?
린트부름의 정체를 알았지만 더욱혼란에 빠졌다.
기스-제-라이와 린트부름이 대체무슨 관계라는 걸까.
당시에 그녀가 했던 말들을 차분히 되짚어갔다.
<찾지 못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전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라고 해라.>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다.
그 전에 했던 대화, 아니, ‘노래’를 한 줄씩 떠올린다.
<나는 네크로멘서!>
<조용한 녀석들을 일으켜서.)반복해서 회귀하는 현상을 솔직히 고백했을 때.
그녀는 미친 해골을 봤다며 무척흥겨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틀림없다.
<여기엔 용의 뼈를 찾으러 왔지!>
하지만.
비슷한 것도 못 봤다고 했던가.
그녀가 린트부름의 태양 운운하며 스스로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바는 분명하다.
최강 용종龍種의 뼈를 찾아라.
그러기 위해, 원해를 건너서 서쪽대륙까지 온 게 아니냐고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가벼운 전율이 일어났다.
퍼즐이 풀렸다.
스스로 뭔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은 상당히 각별했다.
해냈다는 뿌듯한 감각.
만만치 않은 상대를 아슬아슬하게 살해했을 때와 비슷하다.
싱거운 것들을 칼로 잔뜩 살해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기분 좋다.
앞으로도 생각과 판단을, 웬만하면 내가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부리로 나를 찔러 온다.
<야, 너 지금 이상한 생각 하지?
포즈가 어째 불안하다.>
“아이작 님도 정말 민감하시네요.
옆만 계속 바라보고 있나 봐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더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유의미한 건전부 말해 줄 테니까.>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공된, 잿빛 기사의 외형에 관해아이작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갑옷 전반에 걸쳐 반짝이던 기하학적인 회로.
기스-제-라이를 몇 번이고 내리쳐 부수던 칠흑의 대검.
잠시 고민하던 아이작이 갸웃하며 말했다.
<타이탄이 생각나긴 하는데, 사실모르겠군. 딱 맞는 갑옷 형태라니.
그렇게 작은 형태는 없을걸.>
“연합의 철인鐵人들을 말씀하시는거죠?”
<어.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부피를 키우거나 전투중량을 올리는 기체가 많은데. 갑옷 형태라는 건 이상하다고.>
아이작도 모른다면 방법은 없다.
회로 모양이라도 자세하게 그려서 설명하면 혹시 알아볼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눈여겨보지는 못했다.
이렇게 끝내는 건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찜찜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언제고 다시 그놈을 보게 된다면, 회로를 자세히 기억해서 아이작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사막적응] 스킬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막을 벗어나는 데 무척 유용했다.
서부 사막과 초원의 전환은 서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까지 빼곡한 모래였다가, 해안처럼 초원인 지점이 나타났다.
사막안沙模岸이라고 부르면 좋을 듯한 경계를 건너, 수도 방향으로 가도를 따라갔다.
사막을 벗어나며 추스른 서너 필낙타까지 함께 몰고 가는 참이라, 위용은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관리는 그럭저럭 되어 있었지만, 의외로 이용하는 여행자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레나와 함께 이틀 걸렸던 가도를 이번에는 사흘 동안 느긋하게 갔다.
세 번째 석양이 지기 시작할 무렵.
저쪽 멀리 익숙한 협곡이 보였다.
- 파드득!
높이 날다가 다시 내려온 까마귀가 낙타 등에 앉으며 말했다.
<뭐 없다. 지나가라.>
“저것만 넘으면 바로 수도네요.”
루비아가 지도와 앞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제 정수리에 찬물을 부으며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긴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살짝그을린 흰 피부에 달라붙었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처음 에라스트에서 도망쳤던 때와 지금 그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그저 피부색뿐만이 아니라 여행에 꽤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간다.”
타고 가던 말과 짐을 실은 낙타를 전부 평원 쪽으로 멀리 풀어놓았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깊은 협곡을 느긋하게 걸어갔다.
저번에 마왕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빼곡하게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장소다.
물론 이번에는 아무것도 탐지되지 않았다.
작은 동물들이나 새들의 기척만이 느껴지고 있을 뿐이다.
이번 생에는 푸르손의 제단들에서 난장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던 녀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던데.
지금은 다 어디 숨어 있는 걸까?
샤루니안처럼 자유자재로 모습을 숨길 수 없는 수준의 녀석들도 많이 있을 텐데.
하긴, 레라지에의 성지처럼 결계로 숨겨진 공간도 많으니까.
한참 걷다 보니 아이작의 후예라며 공격받던 지점이 나왔다.
놈은 여기에서 나를 죽여서 자신의
‘봉인’을 풀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걸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빡침이 몰려온다.
물론 그 기억은 아이작에게 전혀없겠지.
명심하자.
이 녀석은 언제든지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는 놈이다.
오크 족장을 마주쳤던 곳을 지나, 나냐우와 만난 장소에 도착했다.
비밀 지하 통로로 간다면 더 쉬울지 모르지만 위치를 기억한다고 갈수 있는 곳은 아니다.
결계를 뚫어야 한다.
아이작에게 부탁하면 지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알려 주지도 않은 통로로 들어갔다, 나냐우에게 쓸데없는 적의를 사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정공법으로 가기로 했다.
협곡을 나와 한 시간쯤 걸어가자 드디어 수도의 끄트머리였다.
뾰족뾰족하게 높이 솟은 첨탑부터 보였다.
아래는 촘촘하게 쇠뇌 구멍이 난 성벽이, 서로 다른 높이로 미로처럼 쌓여 있었다.
단순히 이중이나 삼중이 아니다.
어디를 무너뜨려도 방어진을 돌파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쏟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개미지옥 같았다.
“저런 성을 공략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요?”
루비아가 원래 그런 걸 생각하는 인간이었던가.
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상대라면, 보급로를 끊어안에서부터 아사飯死하게 만들어봐야지. 엄청 오래 걸리겠지만. 뭐, 저런 오래된 도시라면 지하 통로도 거미줄처럼 쫙쫙 깔려 있겠지? 쉽지 않을 거야.>
알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의 말이 옳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지하 통로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성을 공략한다는 이야기에,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장면이 있었다.
“그냥 부수면 되지 않나?”
<네가 여기를?>
“아니. 내가 아니라. 검주劍主급강자라면 단신으로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텐데.”
미로에 빼곡하게 배치된 경비들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돌이나 철 따위로 레안드로 후작같은 검주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응? 개네가 성벽을 왜 부수겠냐.
부술 힘을 가진 것들은 안에 모두 받아 주니까 성벽인 거다.>
아이작의 요지는 뻔했다.
성벽을 부술 힘을 가진 녀석들은 저 안이 제집이다.
재산이고, 누리는 곳이다.
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내부로 포섭한다.
<저 안에 자리 잡고 싶냐? 사실, 너도 포섭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인간이 아니다.”
<흐흐흐. 그런 건 솔직히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야. 저 성벽을 유지하는 데 협조하느냐, 깨려고 하냐가 중요하지. 깨려고 한다면 제 부모나형제라도 서슴없이 쳐 죽일 거다.>
“유지하는 걸 돕는다면 해골님도,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이놈이 아니라 마왕이라도 기꺼이 손에 손을 잡겠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성문앞에 도달했다.
양쪽에 꽤나 긴 성벽이 자리하고, 성문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다.
좌우 성벽 위에는 쇠뇌 수십 대가 성문 근처를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본격적인 공성攻域이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각양각색의 끔찍한 무기가 다 튀어나올 거다.
여기서 허튼짓을 하느니 바깥쪽벽부터 차근차근 다 무너뜨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 모습이다.
우리는 길게 늘어선 줄의 끝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면서 여행자는 그다지 발견하지 못했지만, 각지에서 모인자들이 몇 군데 안 되는 성문으로 들어가기에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검문 자체도 깐깐했다.
상인도, 여행자도, 잠깐 일을 보고 나갔다 들어오는 자들도 꼼꼼하게 짐 검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성문 옆에는 피로에 쩐 표정으로, 커다란 수정구가 박힌 지팡이를 든마법사까지 보였다.
“저게 뭐지?”
<탐지 마법이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수상한 것들도 수정구 근처에 다가가면 발각되게 되지.>
- 삐익1 삐익!
수정구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자연스럽게 지나가려던 여행자에게 양쪽에서 창칼이 겨눠졌다.
마법사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스크군요.”
“아니, 내 얼굴이 왜! 왜!”
- 부욱!
경비병의 강한 손길에 여행자의
‘얼굴’이 뜯겨져 나갔다.
“에잇!”
검은색 가죽 갑옷을 걸친 경비들은 얼굴이 벗겨진 상태에서 도망치는 상대를 간단히 제압했다.
몰래 수도로 들어오려던 수배범인듯했다.
“에이. 깐깐하게 검사하겠네.”
“웬만하면 이 정도는 봐줄 텐데.
뒤쪽에 늘어선 상인들 가운데 몇이 뭔가를 슬쩍 바닥에 버렸다.
“우리. 들어갈 수 있는 거냐?”
<후후후.>
아이작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여기서 인간 경비병 몇을 죽이고 도망쳐도 된다.
굳이 좋게 생각하면.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는 서브퀘스트 ‘경비병 살해’를 추가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음.
우리가 심사대에 섰을 때였다.
아이작은 경비병들은 보지도 않고 수정과 마법사를 향해 중얼거렸다.
<무슨 힘으로 감히 누구의 기만을 막겠다는 것이냐.>
와들루스를 재울 때처럼 주문조차 외우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검은 연기가 팟, 하고 아이작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뿐.
그러자 마법사의 수정구가 한순간뿌옇게 흐려졌다.
경비들도, 피곤한 표정의 마법사도 그저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통과시켰다.
- 저벅.
우리는 몽롱한 얼굴의 경비병들을 지나, 심사대를 넘어 성문 안쪽 긴터널로 들어갔다.
“다 넘은 건가? 제법인데.”
<이런 걸로 일일이 감탄하지 마라.
피곤하다.>
그때 였다.
“와아! 신기한 까마귀잖아!”
우스꽝스러운 모피 자켓을 입은, 부스스한 빨간 머리 소년이 어느새옆에 서서 따라오고 있었다.
바깥 줄에 이런 녀석이 있었던가?
굳이 기억을 되살려 보니 우리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뒤편에 느긋하게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상적으로 검문을 받는다면 최소1시간은 걸릴 법한 간격이었는데.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탐지 스킬을 특별히 활성화한 건 아니지만, 옆을 완전히 내줄 때까지 아예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싸늘한 감각이 뼈 사이로 흘렀다.
무슨 목적으로 접근한 걸까?
어쩌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옆에 선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외모는 1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넌 누구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오른손을 활짝편 뒤 엄지 하나를 접었다.
“. 4?”
소년은 아이작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4로티 줄께! 그거 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