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08화 (208/458)

209화 9:1 (4)

얼어붙은 겨울 공기를 꿰뚫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검은 후드를 썼지만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레 나였다.

아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눈에 덜띄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놓아준다더니 왜 다시 쫓아온 거지?

나의 일행까지 잡아가려고 쫓아온걸까?

하지만 지금은 레나 혼자다.

그녀가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다고 해도 내가 못 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기색은 느끼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연락을 받고 여기에 나타난 건가?

조금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지붕 위에 있던 아이작이 말했다.

- 저 여자로군.

저 여자라니?

- 사도의 피를 찾으려는 여자다.

아이작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당황해 잠시 뭘 하던 중이었는지를 잊고 있었다.

루비아를 이용해 소문을 퍼트린 건 경매 상대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갑자기 누군가 접근해 왔다면 경매상대라는 쪽이 이치에 맞다.

즉, 여기에 온 건. 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레나는 은신 중인 내 쪽이 아니라 루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를 살짝 벗자 차가운 바람에 새까만 머리칼이 흩날렸다.

“아이에게 빵을 나눠 줘 봐야 결국왕초에게 빼앗기게 되지. 이런 게 먹힌다는 걸 알아차리면 아이들은 더 추운 날에, 더 얇은 옷으로 밖에 계속 내몰리게 될 거다.”

루비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걸 생각해서 안 주는 게 아니잖아요. 주기 싫으니까 거기에 이유를 붙이는 거죠.

먹을 빵을 주기 싫고, 주머니에서 돈 한 푼 꺼내기가 아까우니까요.”

경매 상대라는 걸 짐작하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루비아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이 아이에 대해서도 사실은 잘모르시잖아요? 이름이 뭔지, 어디사는지, 정말 다 벳기는지요.”

“큭큭.

거지 소년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어어.?”

웃는 아이를 보고 루비아가 살짝당황했다.

아이는 레나 쪽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레나가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슈니, 연락 주느라 수고했어. 저마음 따듯한 아가씨에게 빵은 마저받아야지.”

“하지만 속였는데요?”

“속여 줬으니까 대가를 받아야지.

가르침을 내려 준 거잖아?”

남자아이가 루비아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루비아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피식웃으며 긴 빵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먹으렴.”

그라스미어에서 봤던 거지 아이가 생각났다.

내게 편지를 꽂아 넣고 도망쳤던 재빠른 소녀.

아만에서도 그곳처럼, 이미 정보망을 완성시킨 모양이었다.

레나의 수완과 영향력이 저번보다훨씬 늘어나 있다.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자리가 있는 아이였군요.”

“그래.”

레나는 손목에 찬 무언가를 흘끗바라보더니, 다시 내가 은신해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었군.”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은신한 나를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는데.

무얼 보고 눈치됐는지는 몰라도 계속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거지 소년이 빵을 들고 어딘가로 쪼르르 사라질 때쯤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파드득!

아이작도 내 근처 나뭇가지 위에 가볍게 앉았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우스운까마귀는 뭐지? 한패인가?”

“애완동물이다.”

- 뭐가 어째? 저 건방진 자식이!

아이작이 날갯짓을 하며 꽥꽥거리는 소리는 일단 무시했다.

“어쨌거나.

레나가 한쪽 골목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말했다.

“이렇게 할 필요 없어. 경매에선 당신들이 이길 테니까. 괜한 수고 하지 말라고 전해 주러 왔다.”

그 말을 뱉은 레나가 루비아를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가씨도 잘 있으라고.”

- 팟!

레나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굉장히 빠르게 사라졌다.

루비아는 멍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일까요? 뭔가 분하지만 친근한 감정이 드네요.”

- 친근은 무슨. 어쨌건 미끼는 잘물고 끌려왔군. 일은 다 끝났다.

나는 아직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레나가 경매 상대인 게 어색한 일은 아니다.

루-륨 자체가 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물질.

나도 T&T와, 나냐우와 엮일 때

까지는 그게 뭔지도 몰랐으니까.

레나는 내가 사망하기 전에 루-룸여덟 병을 가지고 있었다.

나냐우는 온몸의 피를 그 은빛

액체로 바꾼 존재.

루-륨의 가치를 아는 몇 안 되는 집단이 T&T라는 뜻이다.

여기에 그들이 있는 이상, 오히려루-륨의 정보 경매 상대가 아닌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생각에 빠져 있던 중, 루비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매에서 우리가 이긴다고 한 건, 자기들은 빠지겠다는 뜻이겠네요.

참여하는 게 자기들이랑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도 안다는 거고.”

“녀석들은 왜 그걸 우리에게 다 말해주지?”

하지만 이상하기는 하다.

경매를 포기한다니.

회귀 전의 레나면 나에 대한 높은 호감도 때문에 그런 일을 할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레나의 호감도는 거의 초기화된 상태에 가깝다.

꿈에서 봤다고 이렇게 해 주는 건 확실히 이상하다.

레나는 절대로 양보해 줄 성격이 아니라는 건, 여러 생에 걸쳐 이미잘 알고 있는 바.

“함정이 아닐까? 우리가 가격을 안올리면 저 녀석들이 높게 부르고 정보를 사는 건.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 큭큭큭. 그런 동전 던지기 같은 짓을 할 인간들은 아니다. 훨씬 더확실한 게 있는데 왜? 경매소 가서 가격이나 낮추고 오거라.

“확실한 거라고?”

- 나중에 말해 주마. 가기나 해라.

고민하면서도, 일단 녀석의 강요에 따라 경매소로 향했다.

“흐음. 이번에는 판돈을 좀 높이러오셨나?”

“낮추러.”

“.낮추러, 왔다고?”

동요가 느껴진다.

레나 측에서 이미 입찰을 취소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정말로, 아이작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곤란한가?”

너무 싼 가격에는 아예 안 팔아버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지,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보상인은 의외로 순순히 승낙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오. 경매 기간은 내일까지니 언제든 의견을 바꿔도좋고.”

일단 경매에 붙인 정보는, 팔아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1세이론으로 낮춰도 되나?”

“접수됐소.”

폭리를 취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경매 형식을 취하면서도 자유롭게 가격을 다시 낮추는 것까지 가능할줄은 몰랐다.

어쩌면 돈벌이보다도 정보 공유에 관심이 있는 자들인지도.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가, 아이작과 루비아가 기다리는 숙소로 돌아갔을 때였다.

- 다녀왔냐.

“별말 없이 낮춰 주더군.”

환불받은 은괴 덩어리를 녀석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 흐흐. 그래도 속 좀 쓰릴 거다.

이제 연기는 끝났나. 잠깐 가만히 서 있어 봐라.

“가만히 서 있으라고?”

추위와 어둠 속에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아이작이 내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 사슬이여, 선명해져라.

주술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꼬리뼈 안쪽 깊숙한 곳에서 뭔가 진동이 느껴졌다. 보기도, 만지기도 어려운 위치였다.

“이게. 뭐지?”

- 큭큭. 뭐겠냐. 몰래 박아 넣은 추적 장치지.

추적 장치라고?

당황해하는 사이에 아이작이 말을 이어 갔다.

- 네가 떡하니, 이딴 걸 달아서 오길래 루-륨을 찾으려는 쪽에서 심어 놨구나 싶었지. 얼마나 정신을 놓고 다니면 이런 걸 당하냐?

몸수색을 하던 레나가 떠올랐다.

어찐지 그렇게 쉽게 보내 줄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상하다 했다.

내 입장에서야 그 셋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그럴 리는 없다.

추적 장치가 레나 하나만의 생각일리도 없다.

처음부터, 전부 연극이었던 거다.

레나가 은신한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았던 것도 추적 장치 때문이겠지.

꿈을 꿨다는 것까지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연극을 한 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이런 걸 알았으면, 최대한 빨리이야기를 해 줬어야 할 거 아니냐.”

- 멍청한 놈, 알려 줬으면 네놈이 티를 안 냈겠냐? 여기저기서 온갖표를 다 내서 망했을 게 뻔하지.

아이작이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도움을 청하듯 슬쩍 루비아를 바라봤지만.

“음. 해골님은 훌륭하지만, 사실겉으로 알기는 쉬운 분이에요. 뭔가 티가 잘 나거든요.”

확인 사살만 당했을 뿐이었다.

아이작에게 듣는 것보다도 이쪽이 훨씬 더 아프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 어. 당연하지.

- 이제 저 녀석들은 주적 장치를 쫓아올 거야. 우리가 다 찾아 놓은 사도의 피를 마지막 순간에 차지할생각이겠지.

“이제 어쩌지?”

아이작은 루비아를 부리로 가리키며 말했다.

- 네가 뻘짓 하고 있을 동안, 이미이 아이를 시켜 말 몇 필을 샀다.

도시를 나간 뒤. 그중 한 마리에 장치를 붙일 거다. 나중에 초원에서 풀 뜯는 야생마를 보면서 분통깨나터지겠지. 흐흐흐.

아이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 킥킥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 몸에 붙은 추적 장치를 보는 순간, 이미 계획을 다 짜 놓은 놈의 역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을 동안, 주위의 인물들은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댔던 것이다.

그날 밤이었다.

아이작은 떠나기 전 동네 한 바퀴쭉 돌아보겠다고 밤마실을 나갔고, 루비아는 숙소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탐지 능력을 켜 놓은 상태로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잡혔다.

- 스숙.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뭔가가 흔들리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듯했다.

누구지?

긴장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정말 검주? 황실의 유령일까?

하지만 살기는 아니다.

그저 시선이었다.

몸을 훌어보던 예리한 시선.

그러나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척이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곧장 밖으로 나가 추적했다.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지붕 위와 골목 틈새를 가리지 않고 재빠르게 도망가고 있었다.

- 팟!

상대는 2미터가 넘는 벽을 손 한 번 짚고 간단히 뛰어넘으며 빠르게 도망갔다.

몇 걸음 만에 가파른 담을 훌쩍훌쩍걸어 새처럼 멀어졌다.

하지만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질주.’

[질주 Lv.7을 발동합니다!]

- 쾅!

돌바닥이 패일 정도로 발을 디디며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날 염탐하던 녀석을 몰아세우는 데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담 높이가 오 미터가 넘는 막다른 골목에 상대를 몰아세웠다.

“도망갈 곳은 없다.”

가까이 다가가자 곧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왜 나를 보고 있었던 거지?”

루-룸을 추적하기 위한 위치 확인이면, 굳이 창밖에서 몰래 바라보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다.

추적 장치를 달아 놓고 있다.

그걸로 충분할 텐데.

“흥.”

레나는 복면을 쓴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 위로 연갈색 피부가 드러난다. 저번 생에서 접한 그녀의 눈빛과 조금씩 겹쳐지는 것 같았다.

“왜 나를.

친근한 마음에, 무심코 한 걸음앞으로 더 다가갔을 때였다.

- 철컥!

소매에서 갈고리가 솟구쳤다.

까닿고 긴 쇠줄이 달린 갈고리가 높은 담 위 지붕에 단단히 걸렸다.

- 좌르르록!

순식간에 수 미터에 달하는 사슬이 당겨지며 그녀의 몸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곡예에 가까운 몸놀림이다.

사슬을 잘라 낼 타이밍도 아예 없던건 아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창백한 달 아래 선 그녀가 나를 다시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곧 지붕과 지붕을 뛰어서 멀리 사라졌다.

무슨 의도였을까.

그나마 황실의 유령 따위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이작이 검주가 어쩌니 했던 말에 실제로 신경 썼던 자신이 우스웠다.

숙소로 돌아갔다.

곤히 잠든 루비아의 곁을 지키면서 새벽을 맞았을 때였다.

- 똑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