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오래된 친구 (11)
‘가설?,
“이 세계가.
그는 아예 내 몸을 장악했다.
거울 앞에 서서, 몸 구석구석을 비춰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결계라는 가설 말이지.”
“결계?”
그런 생각은.
아직 해 본 적이 없었다.
“살아 있는 커다란 덫이라고 해도 좋고, 백일몽이라고 해도 돼. 내가 그런 데 빠져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쉽게 타자를 악몽에 가둘 수 있는 주술사다.
결계에 너무 천착해서 저런 상상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 철컥!
‘내’가 갑자기 투구를 벗었다.
“뭔가 있다. 분명히 느껴져. 의식하고 의식하면,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날미치게 만들었다. 무언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있어. 나는 그게 뭔지 알아내야 했지.”
나를 조롱하는 것 같던 상태창의 문구들이 떠올랐다.
‘나’는 말을 이었다.
“시선. 고삐. 그런 게 느껴졌다.
이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존재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나를 계속 사로잡았지.”
가만히 아이작의 이론을 들었다.
그가 루비아에게 할 짓이 겁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굴레.
레나를 T&T 지부장으로 만들고
죽었을 때가 떠오른다.
<1차 봉인 해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그런 반투명한 상태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나를 계속 해골병사에 머무르도록막고 있는 어떤 <굴레>가 분명히 있었다는 이야기다.
세계의 악의. 시선.
그런 걸 나도 느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계속 떨어지던 동화율.
정해진, 해골병사로서의 역할에의 동화율일까?
자신의 운명과 환경에 의문 따위가지지 않고, 짓밟히는 해골병사는 해골병사로의 모습에 충실한 것이 동화율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말하는 결계.
이 세계에 봉사하는 가장 아래의 톱니바퀴로써, 아무 의미도 없이 던전돌바닥에서 부서지는 역할을 담당하는것.
“역시 짚이는 게 있나 보지?”
- 달그락.
거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무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제대로 설명하는 이론도 세울 수 없었지. 구체적인 증거들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러던 중 그 작가를 알게 됐다.
캐빈 애슈턴을.”
신경이 곤두섰다.
애초에 대화를 시작했던 이유다.
그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 지혜가 오르며, 책 안에 기묘한 메시지를 심어 놓은 자.
캐빈 애슈턴에 대한 정보는 하나라도 놓칠 수 없었다.
“그놈은 내 수준보다 훨씬 정교한 이론을 펼치고 있었어. 구체적인 증거들도 제시하고 있었지.”
”그게 언제지? 무슨 이론인가?“
“400년 전이다. 질문은 하나씩.”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는 수도에서 발행인이 캐빈 애슈턴으로 된, 후작의 죽음이 적힌 신문을 보았다.
400년.
그 오랜 세월을 살아 있단 말인가?
아니면 개인이 아니라 단체?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애슈턴은 이 세계가 주인, 혹은 주민과 손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했어. 그리고 손님들에게는 특별한 <푸른 창>이 띄워진다고 했지.”
푸른 창.
“녀석이 창천蒼天의 구멍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보의 집합이다.”
정보의 집합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상태창이다.
너무 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여서 정신이 혼미한 속에서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네게는. 그 정보들이 보이지 않는 거냐? 푸른. 창이?”
[자동 진행.]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73.4%??????.]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반투명한 푸른 창이.
아이작은 단언했다.
“그딴 거 안 보여. 전혀. 하나도.
대체 언제부터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하지만 화를 내는 건 아니다.
이건 호기심이다.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호기심.
나는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레나는 자신의 레벨을 인식했다.
허공에 매달린 거미들을 잡고 레벨이 올랐고, 오르는 능력치에 대한 깨달음도 분명히 있었다.
서큐버스님은 어땠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분명히.
그녀는 인식하고 있었다.
인식했다 뿐일까.
인간과, 몬스터들의 ‘창’에 대해서자세히 설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서큐버스님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던 거지?
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누구지? 누구. 였지?
그녀와 보낸 3년간의 기억이 모두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동 진행.]
[동화율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 해골병사에 불과한 나를 몇 년동안이나 소중하게 돌봐 주었다.
던전 안에 있을 때에도.
다른 녀석들과 대화 따위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소통으로 충분했으니까.
좀 더 빨리 만났더라면 상처 받을 필요 없었다는 다정한 말을 하며,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까.
원래의 다정한 성품 탓일까?
하지만 던전의 다른 마물들에게도 나처럼 대했던 기억은 없다.
내 곁에서 나만을 챙기고 내게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거기서 의심이 시작된다.
.왜 나를?
내가 뭐라고?
배은망덕한 의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전혀 없다.
이유가.
<계속 같이.>
<이야기를 들려줄게.>
아무리 회상해도.
그녀가 보인 다정한 태도는 오직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지?
내가 아는 건.
오직 그녀가 설명한 세계.
‘정말로.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 <읽지>못하는 거냐?’
? 콕. 크크. 하하하. 당연히!
그런 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캐빈 애슈턴이 쓴 책에서 읽은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이작은 어느새 통제권을 놓고 내면으로 들어가 있었다.
녀석이 큭큭거림이 남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너는 얼마나 강한 최면에 갇혀있는 거지? 대체 누가 너한테 이런강한 거짓을 주입시킨 거냐?
‘좀 닥쳐 봐라.’
아이작이 두개골에서 스멀거렸다.
육체의 통제권을 내놓았던 건.
아무래도 내 심리에 더 집중해서 읽는 것 같은 모양새다.
- .연인? 그런 게 있었나?
오지 람이 다.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서큐버스님이 나를 속였다기보다, 아이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훨씬 고르고 싶은 선택지.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 선택지를 고르고 싶었다.
‘상관없다.’
- 하아?
‘거짓이 주입됐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를 모욕하지 마라.’
서큐버스님과 함께 보냈던 3년의 시간은 거짓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느낀 소소한 행복은 가짜가 아니다. 그녀가 날 어떻게 이용했더라도 상관없었다.
- ?"하.
아이작이 비웃었다.
- 이런 멍청한 게 ‘손님’이라니-요지는, 내가 널 돕겠다는 거다.
대화 주제가 바뀐 게 반가웠다.
서큐버스님이 날 정말 속였는지, 최면을 걸었는지 따지는 건 감정적으로 너무 소모적이다.
그 고민은 나중으로 미룬다.
마음도, 생각도 좀 더 차분하게 정리된 다음으로.
나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날 도와주겠다고? 왜지?’
- 올라가려면<탈것>이 필요하지.
아이작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날 타겠다고?’
- 혼자 제국 남부를 제패한 내가, 왜 갈까마귀의 제사장이 되었는지 짐작하겠느냐?
‘마왕에게 올라타서. 저 위쪽에가 보고 싶었던 거냐.’
말파스.
강림했던 열여섯 마왕 가운데서, 오직 혼자만이 순수한 새 형태의 마왕이 었다.
올라타는 것.
위에 가 보는 것.
두 가지 모두,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 그렇다.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강림을 도우면, 그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
‘그럼 얌전히 말파스를 기다리면 될 게 아닌가?’
굳이 날 도와주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아니. 그때까지 캐빈 애슈턴이 안배해 놓은 힘을 획득해야겠다. 널나침판으로 사용해서 말이지. 그 과정에서 네놈은 상상도 못 한 힘을 가지게 될 거다.
‘안배해 놓은, 힘이라고?’
- 설명은 여기까지다. 눈뜬 장님, 들리는 귀머거리인 네 녀석을 내가 인도해 준다는 거다.
으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당장은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놈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한 것 같지도 않다.
지금 하는 말들은.
냉정히 평가해 보면 구체적인 게 단 하나도 없다.
극히 모호한 얼버무림들 뿐.
숨기고 있는 게 많아 보인다.
물론.
나로서는 실컷 이용당한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다.
캐빈 애슈턴.
그를 찾기 위해 나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얼마든지 이용해 주었으면하는 바람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녀석의 인도는 큰 도움이 될 확률이 높다.
다만.
잠시 생각하는 사이를 못 참고서 아이작이 날뛰었다.
- 야! 인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제안인지 몰라? 금빛 새벽의 주主이자 말파스의 대제사장인 내가 널먹살 잡고 키워 주겠다는 거잖아!
빨리 황송해해야 할 거 아니야?
원래 성격 나오는군.
지난 생에서부터 주술사 벨’호멧아이작은 계륵이었다.
나에게 상세한 얘기를 털어놓았긴했지만, 어떤 기괴망측한 속임수가 여기 숨어 있을지 모르고.
‘널. 어떻게 믿지?’
- 못 믿기는 왜. 혹시 성향 같은것도 ‘푸른 창’으로 뜨냐?
물론 그런 건 뜨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 스스로도 찔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하다.
나는 블러핑을 쳤다.
‘네가 너를 잘 아는군.’
- 흥. 좋아. 선불이다. 먼저 네몸에서 나가 주도록 하마! 일단 그정도면 괜찮겠지?
루비아를 가지고 협박하면 내가 곤란한 처지지만.
의외로 지금은 호의적이다.
[빙의가 해제되는 중.]
정말 되는 건가?
몸 전체에서 무언가 윙윙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스르르 칼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빙의가 해제되었습니다.]
눈앞에 아이작과 계속 이야기했던
‘푸른 창’이 떠오른다.
아이작은 볼 수 없다는 창이.
또다시 서큐버스님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 나가 줬다. 이제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