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72화 (172/458)

173화 매듭 (13)

- 오도독. 오도독'

눈앞에 있는 건, 어쩌면 낯선 행위는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시체를 먹고 산다.

이 경우 뼈와 살을 씹는 건 팔다리가 달린 통통한 애벌레.

수도 외곽의 사육장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봤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 달랐다.

레일리와 함께 뛰어든 사육장에서 봤던 것처럼, 길이 10cm 정도의 작은 녀석들이 아니었다.

스무 배는 커다란 한 마리가 시체를 상반신부터 꼭꼭 씹고 있었다.

뼈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의 시체인지는.

잠시나마 외면하고 싶었다.

다른 건 크기만이 아니었다.

주둥이 이빨은 훨씬 더 빼곡했고, 목 주변은 대여섯 겹의 근육으로 둘러싸여 씹는 힘을 지탱했다.

- 아드득!

벌레는 다시 한 번 입을 닫았다.

점액으로 끈적거리는 벌레의 입이 오물거렸다.

씹는 순간 밖으로 터지는 피조차 홀리기 아까워하는 듯했다.

‘검기.’

- 우우우응!

대검에 곧바로 힘을 실었다.

강철 골렘들을 부술 때보다 훨씬강렬한 기운이 검에 모였다.

몸을 튕기며 곧바로 공격해 들어가려할 때였다.

애벌레의 반들반들한 등 부위가 조금씩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꾸르륵. 꾸르르륵.!

‘폭발인가?’

일종의 자폭일지도 모른다.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뒀다.

- 꾸이이악

애벌레의 등이, 30센티 정도의

높이로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피막을 길게 당기며 부풀어 오른덩어리는 살로 만들어진 반죽처럼 아무것도 없이 밋밋했다가.

- 크흥! 흠! 흐응!

바람 빠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코가 뚫리고, 입이 뚫렸다.

코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작은 눈이 생겼다.

눈이 붉게 번들거리며 깜빡였다.

자폭 따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공격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익숙한 눈매.

내가 보러 온 바로 그 얼굴.

‘챈들. 러? 어떻게.?’

지독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새로 솟아난<얼굴>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코를 벌름거렸다. 입을 열고 닫았다.

끈적한 녹색 점액이 막 뚫린 입사이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었다.

그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오물조물 움직였다.

- 우우우응!

칼에 검기를 피워 올린 채 녀석을 겨눴다. 그때 챔들러의 모습을 한 입이 다시 열렸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배고파.

- 아그작! 아그작!

커다란 애벌레는 눈앞에서 계속시체를 씹는다.

나는 밖에서 은빛 가면을 쓴 여자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할수밖에 없었다.

“.넌 누구냐?”

그러자 만들어진 <얼굴>이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은 점점 더 또렷해졌고, 이목구비도 서서히 챔들러를 닮아 가고 있었다.

수박 같던 큰 고깃덩어리에서, 굴곡과 입체감이 생겨 가던 얼굴이 막 빚어져 가는 새빨간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오셨, 습, 니까. 은, 공.’

“키킬 키키키키 킥

내가 흠칫하자 벌레는 몸을 높이 세우며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막 챈들러의 몸을 씹어 먹고 있는, 밋밋한 주둥이 부위마저도 들썩이는것 같았다.

그건 나를 놀리기 위한 웃음이나 겁주기 위한 웃음이 아닌, 어쩔 수 없이 근원적으로 터져 나와 버린 웃음인 것 같았다.

- 투둑! 투두둑!

어느새 시체를 모두 먹어 치운

애벌레의 몸에서, 점액에 뒤덮인 팔몇 개가 추가로 튀어나왔다.

‘이게. 성체?’

수도의 애벌레 사육사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성체는 위험해서 마법사들 입회하에 훈련시킨다잖냐. 가죽을 종이 처럼 쫙 뜯는다고 하던데.>

하지만 먹어 치우며 모습을 훔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벨 자세를 잡고 기다렸다.

- 찌익!

팔 한 쌍이 길게 뻗어 왔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길이로 팔을 늘어뜨리며 나를 양쪽에서 잡아채려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른 기습.

슬쩍 몸을 숙여 피했다.

- 광!

애벌레가 화난 둣 돌기둥을 쳤다.

돌기둥이 울리며 조각이 뜯어졌다.

‘단단하긴 하군.’

애벌레가 팔 두 쌍을 길게 늘여나를 겨냥했다.

“피해도. 먹는다.

등 부위에 솟아난 챈들러의 입이 오물거렸다.

다시 한 번 애벌레가 팔을 교차해나를 잡으려고 했다.

- 팟!

내가 있던 자리를 덮치는 순간, 뒤가 아닌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칼을 등 뒤까지 180도 당긴 뒤 강하게 앞으로 내리쳤다.

- 서걱!

팽이가 돌 듯 회전하는 대검에, 좌우로 교차된 벌레의 팔 두 쌍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어. 어어어.

당황한 벌레가 커다랗게 입을 벌려서 나를 씹어 먹으려 한다.

어설프다.

자의식은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능력의 절대치에 비해한심할 정도로 조잡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앞서 고전한 은빛 가면의 여자는커녕, 챈들러보다도 한참 약하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에만 특화되어 있는 벌레인지도 모른다.

‘고작 이 정도 녀석에게 먹혔단 말인가.

강자를 찾아, 황야의 낯선 이에게까지 가르침을 청하던 챈들러의 모습이 떠오른다.

터무니없는 계약을 꼭 지키겠다며 우기던 모습.

‘.친절한 녀석이었다.’

벌레의 등에 달린 챈들러를 베낀얼굴을 홀끗 봤다.

똑같지만, 조금도 그와 같지 않다.

한층 괴로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결빙.’

지저분한 꼴을 더 보기 싫었다.

냉기를 두른 칼을 휘둘렀다. 아예반조각으로 갈라진 벌레가 안쪽에서부터 얼어 갔다.

‘질주.!’

앞으로 더 빠르게 달렸다.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이 시체가 되어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집사?”

챈들러 가문의 2대를 이어 섬기던 집사는 통로 한쪽 기둥에 등을 기댄채 죽어 있었다.

단정한 복장의 집사는 목이 반쯤잘려 너덜거렸고, 가슴 한쪽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인 긴 자국까지 나있었다.

나름의 반격을 시도하려 했는지, 기둥 곁에 검신이 가늘고 긴 검은색스틸레토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칼끝은 아무것도 찌르지 못하고 떨어진 듯 깨끗했다.

손을 모으고 바닥에 눕힌 뒤 다시 복도를 달려갔을 때였다.

선 채로 죽은 시체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몸에 창 여럿이 꽂혀 있다.

부릅뜬 눈에 영주를 지키지 못한 한이 담겨 있었다.

‘크리스티나.

그녀의 두 눈을 막 감기려 할 때였다.

- 피이익!

앞쪽의 커다란 기둥 뒤에서, 어딘가 눈에 익은 대검이 빠른 속도로 빙빙돌아가며 내던져졌다.

대검이 만드는 공격 궤도를 슬쩍피하는 순간이었다.

- 좌르륵!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사슬이, 목을 칭칭감고 뒤로 획 잡아당겼다.

- 광!

피하는 방향으로 확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갔다.

바닥에 몇 번을 부딪힌 뒤에야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 철컹!

대검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며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좌우의 기둥에서 사슬을 나눠 잡은 두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4둘 9

이번에도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남자였다.

둘 모두 검은 가면을 썼다.

은빛 가면의 여자처럼 한쪽만 살짝가리는 게 아니라, 전체를 모두 덮는 가면이었다.

“제법 빠른데?”

“저기 있는 여자애 유품이잖아. 너아니면 이제 받을 사람이 없어. 다른 친구들은 다 뒈졌거든.”

놈들은 한 손으로는 쇠사슬을 컨트롤하는 긴 두 개의 막대를 나눠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긴 창을 들고 있었다.

‘투창인가.’

크리스티나를 살해한 건 눈앞의 두인간인 듯했다.

‘지금까지. 아홉.’

사방 곳곳에서<가면:)들이 나타났다.

누구도 처음 나를 가로막았던 은빛가면의 여자만큼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숫자와 기습에는 당할 수 없었다. 몸 곳곳이 얼고 지져지고 부러졌다.

헤일리의 시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나타난 놈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숨어있는 기척을 읽을 수 없었다.

- 화르르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그라스미어의 불’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해뿜어졌다.

간신히 피했다. 질주의 유효 시간이 거의 다 떨어지고 있었다.

[잔여 시간: 1:13.]

‘망할.

답도 없었다. 처음 상대했던 은빛가면 여자처럼 강한 녀석은 없었지만, 하나하나가 결코 한 번에 제껴 낼수 있는 상대들은 아니었다.

한 번에 제끼기는커녕, 수도에서 후작의 시체를 다시 한 번 흡수하지 않았다면 이미 다섯 번은 죽었을 터였다.

놈들 하나하나의 수준은 무척 높았다.

전투 중심의 푸른 사자 기사단에서도 손꼽히는 순위라고 자부했던 레일리나, 명색이 근위기사단장인 이사벨보다 고작 반수 정도 떨어졌다.

그런 것들이 최소한 두셋, 아니면서넛이 뭉쳐 덤벼드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창문을 부수고 나가려고 해도, 놈들의 봉쇄는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여기까지 내몰릴 줄이야.’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하로 내려갔다. 다행히 이 장소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좁아지는 계단에서 일대일로 상대한 덕분에, 둘을 치명적인 부상에 빠뜨릴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섯이 남았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가까이 따라온 검은 가면이 폭주하며 쇠사슬에 매달린 거대한 추를 휘둘렀다.

- 광!

매끈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말파스의 조각상이 산산히 부서졌다.

울리는 소리가 던전 안쪽을 진동시킬정도였다.

부서진 골렘의 잔해를 지나 계속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잠깐!”

바깥에서 놈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은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물러가자고?”

“.이번 작전은 적 전력 측정이 완전히 틀렸어. 변수가 너무 많다.

상황을 보고하고, 그분의 지시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미친 소리 하지 마. 희생자가 셋이나 나왔다는 걸 알면. 우릴 산채로 포를 떠 버리실 텐데. 제발 우리선에서 해결하자고. 응?”

‘차라리 함정이라고 착각한다면.

혹은 함정을 그대로 남겨 뒀더라면.

광화 연기가 뿜어지는 함정.

그게 있었다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일뿐이다.

슬슬 진입하려는 놈들을 향해 통로에 계속 냉기 폭풍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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