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⑶
“이곳에서 제국 수도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어요.”
- 다그닥! 다그닥!
레나가 내 곁에서 말을 몰았다. 그녀는 보름 동안 검술을 수련하면서도, 틈틈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계획을 짜고 있었다.
“첫 번째는 하얀 다리를 건너 길라모어를 거치는 길이죠. 멀리 돌아가죠.
하지만 안전해요. 던전도 도적도 없어요.”
= 일곱 살 겁쟁이나 선택할 길이겠군.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놈의 말은 내 의사에 따라 언제든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굳이 아이작과 레나를 연결하지는 않았다.
= 야! 너, 왜 내 말 안 전해 주냐?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든가.]
레나는 말을 이어 갔다.
“던전도 도적도 없다는 게 크게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죠. 힘은 충분하니까요.”
= 봐. 내 말이 맞잖아? 안 그래?
= 이제 좀 전하지?
나는 아이작의 의사를 공유했다.
녀석은 그 사실을 느끼고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 하얀 다리는 빛의 여신 일리엔의축성을 받았어. 그쪽이 아니면 아예 건너지를 못한다고.
“그쪽이 요?”
레나가 호기심을 보였다. 아이작이 짧게 읊조렸다.
= 인간.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여신들.
그녀들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실체를 가지고 강림한 것은 오직 마왕뿐이었으니까.
축성된 성물聖物.
성자聖者와 사제들을 통해 발현되는 기적.
신들이 실제하며,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녀들의 강림과 발현은 본 적도들은 적도 없다.
신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모두의 설계자일까? 한 꺼풀바깥의 존재일까?
조용한 관조자일지, 적극적인 조종자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얀 다리. 누가 못 건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어요. 역시 인간이건 널 수 있으니 상관없었던 걸까요?”
“마차나 짐 실은 당나귀, 애완동물들도 건녔을 거 아닌가. 아이작의 말을 믿을 수 있나?”
= 멍청아! 그건 다 ‘그쪽’이잖아.
“멍청한 짓으로 거기 갇혀 있는 주제에, 제 스승님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 젠장. 말해서 뭐 하겠나. 저런 놈한테 스트레스 받아 봐야 머리털이나 빠지지.
“말을 정확히 똑바로 하셔야죠. 대충 말하고 제대로 알아듣길 바라지 말고. 마魔에 속한 측은 건널 수 없다는 이야기인 거겠죠?”
= 봐 봐, 넌 제대로 알아듣잖아.
“아, 둘 다 그만하자고.”
“네.”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쪽으로는 못 건너요. 강 너비만3km에, 유속이 굉장하니까요.”
‘‘ ㅇ ≫
사실 말을 몰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자세히 지도를 들여다본 적은 없다. 대략적으로 슬쩍 훌어본 게 전부다.
변명을 하자면 밤낮 가르치고 배우느라 바빴고, 솔직히 말하면 레나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전부 다 맡겨놓았다.
던전 위치를 외우는 것부터 여행시뮬레이션까지 전부 다 그녀에게 일임했다.
레나가 말을 이어 갔다.
“두 번째 길은 아만을 거쳐 가는길이에요. 달리아크에 가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면 됩니다.”
“달리아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위 정보 상과 암살자들의 임시평화 지대입니다. 건물 자체는 하나인데. 아주 크지요.1= 흥.
아이작이 핀잔을 놓았다.
= 어차피 너희는 못 들어가는데?
달리아크의 회원권도 없질 않나. 근처도 못 가고 쫓겨날걸.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알려 줘야 되냐?
괜히<다가갈 수 없는 등불>달리아크라고 불리는 게 아니거든.
‘그래요?”
레나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300년 전이고, 일반인 투숙지역이 따로 생겼습니다. 이제는<꺼지지 않는 등불>달리아크죠. 광장에서 정보 경매를 벌이기도 한답니다, 스.승.님.”
레나는 아이작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듯 나만 바라보고 말했다.
= 뭐? 정보 경매? 그런 근본 없는 짓을.
“옛날 사람이라 좋으시겠네. 근본 있어서.”
= 저 싸가지 없는 년이! 기초적인술법에 맛이 가서 징징 짠 주제에 입만 살아서.
나는 아이작을 차단했다.
“그쪽 길은 좀 더 빠른가?”
레나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둣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훨씬 빠릅니다. 하지만 가는 길이 좀 더 위험해요. 물론 신경 쓸 정도는 아니고요. 들를 던전도 많아서 좋아요.”
<들를 던전>들은 대부분 아이작이 털어놓은 던전들이다.
애초에 저 길로 가는 걸 상정하고 내게 말을 건넨 것 같다.
“좋아. 아만인지 뭔지 가는 쪽으로. 가 보자고.”
수도로 향한 지 열흘이 지났다.
나와 레나는 사흘에 한 번 꼴로던전을 클 리어하며 길을 나아갔다.
세 번째 들른 던전은<고문 미궁>
이었다.
“크어어어어!”
수십 구의 시체가 꿰매고 합쳐져만 들어진 보스가 주먹을 내리쳤다.
- 쾅!
바닥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이미 검기에 당해서 온몸이 너덜너덜한 데다가, 힘이 빠진 상태였다.
나는 옆으로 뛰어 주먹을 피한 뒤중앙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l 발동!]
하얗게 뭉쳐 있던 냉기 폭풍이 칼끝에서 강하게 뻗어 나갔다.
온몸의 마력 회로를 전부 가동한 그 공격에 밀려 거대한 좀비가 뒤로두 걸음을 물러났다.
‘질주.’
나는 곧바로 따라잡은 뒤 대검을 보스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격발의 플레어 Lv.l 발동!]
바람과 불꽃이 서로의 몸을 휘감으면서 검기 위에서 폭발했다.
[특전: 거물 사냥꾼 Lv.l 발동!]
[데미지 300%의 ‘치명타’가 발동합니다!]
작은 시체 조각들이 내장처럼 몸가운데서 쏟아져 내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클리 어!]
[고문 미궁의 보스, 부두 골렘을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난이도 판정.]
= 콕큭. 이제 아주 익숙해지셨구만?
아이작이 낮게 큭큭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섬뜩한 전갈 소굴>과<시든 개미 토굴>, <고문 미궁>을 별다른 가책 없이 클리어했다.
독 꼬리 전갈과 거대한 개미들, 기워진 시체를 처리하는 내 모습은<용사>그 자체였다.
C급 던전 셋을 클 리어하고 용사 포인트를 얻었다.
이번 클 리어로.
용사 전용 상점에서 검술 재능을까지 올렸다.
새로운<수련>퀘스트도 받았다.
하지만.
[퀘스트 발생]
[검을 6,531만 번 휘두르세요.]
[0/65,310,000]
[보상: 검술 Lv.ll]
‘.이건 못 하겠군.’
잔뜩 떠오르는 상태창들을 적당히정리하고, 보스를 내버려 둔 채 뒤로 돌아갈 때였다.
우어. 우어 어어.
소녀의 몸으로 만들어진 좀비가 내발 목을 잡았다.
<고문 미궁>의 보스까지 이르는 길에 걷어차 치워 냈던 좀비였다.
던전은<클리어>되었다.
하지만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던전의 묘한 기운이 아직도 시체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 서걱!
레나가 커팅 레이피어로 좀비의 팔을 잘랐다. 양팔을 자르고, 꿈틀대는양다리를 잘랐다.
그리고 이미 멎은 심장을 몇 번이고 칼로 찔러 날려 버렸다.
앞이 빼곡하다.
툭툭 치우며 들어갔던 좀비들이,
보스를 처리하는 사이 빼곡히 일어나서 동굴 통로를 막고 있다.
- 피릿!
레나가 칼을 휘두른다.
검 길이보다 더 넓은 반경까지 정리되는 착시가 일어난다. 빠르게 발을 움직여 넓게 베어 낸 것이다.
앞줄의 좀비들이 목이 반쯤 베여덜렁거리지만, 아예 목이 잘린 채 덤벼드는 녀석도 있었다.
“너와 상성이 좋지 않군.”
“.인정해야겠네요.”
다양한 보조 도구는 있지만, 레나의 주 무기는 길고 얇은 커팅 레이피어다.
완전히 파괴해야 멈추는 놈들을 상대하기에 적절한 무기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체 뭘 하던 장소인지, 달려드는좀비들은 대부분 소녀였다.
칼의 겨냥이 낮다.
레나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들을 죽일 때보다도 훨씬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어. 우어어어.
사방에서 이미 부서진 인간 소녀들이 꿈틀거렸다.
= 쓸어버려라. 마법 아꼈다가 뭘하려고 하지? 저년이 잔뜩 괴로워하고 있지 않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머릿속에서몇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되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뇌격! 뇌격! 훨씬 더 강하게 할수 있잖아?>
<최소한 둘 이상의 힘을 중첩해서 써 봐. 범위를 더 넓게 해야 되지 않을까?>
아이작은 나를 계속 부추겼다.
마법을 강하게 사용할 때마다.
던전은 바닥과 벽이 벗겨진 채로박살이 났다. 기물이 산산이 바스러지면서 조각이 마구 튀었다.
곳곳에 새겨지는 흔적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뭔가. 모순 되는 느낌인데.’
하지만 레나에게 길을 열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회로에 흐르는 힘을 활성화시킨다.
[냉기 폭풍 Lv.l을 사용합니다!]
- 부우옹!
대검을 매개체로 마법을 발한 채,
그대로 강하게 휘둘렀다.
강력한 기운이 대검 끝에서 터져나갔다. 좀비 십여 구가 한순간에 모조리 얼어 버렸다.
‘모두. 부서진 채 쉬게 해 주마.’
동굴 벽 곳곳에 푸른 한기가 서려있었다. 대검에 직접 타격당해 아예 뜯어져 나간 곳도 있었고, 얇은 석벽은 아예 뚫려져 반대편이 훤히 드러난 곳도 있었다.
그 파괴의 현장을 흘끗 바라봤다.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광경이다.
“마법을. 자주 쓰시네요.”
“그런가.”
아이작의 부추김에 조금 흔들리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딱히 수상한 기색은 없다.
내 몸을 흐르는 루-륨.
아이작이 알려 준 회로에 의해서 흐르는 이 은빛 마력액은, 분명히내 의지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
- 다그닥! 다그닥!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가며, 곁의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함께 던전을 돈 결과.
그녀의 스탯과 직업 레벨도 꽤 나오른 상태다.
[이름: 레나]
[호감도: 60]
[도적 Lv.16]
[검사 Lv.l0](new!)
[트릭스터 Lv.13]
[사냥꾼 Lv.3]
[어째 신 Lv.6]
[상인 Lv.5]
[체력: 39]
[힘: 39]
[민첩: 55]
[지혜: 41]
[특전]
재능 (B플러스)
전투 감각(B)
아래로 빼곡이 스킬이 펼쳐진다.
전쟁터의 최전선에 던져 놔도 혼자서 부대 하나쯤은 씹어 먹고 가볍게 돌아올 정도다.
물론, 그녀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녀를 섭외한 건, 다양한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용도다.
지금은 원래 목적이 흐려진 감이있지만, 어쨌건 그녀에게 전투원의역할은 기대한 적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겨울을 전한다.
구불구불한 산 위로 비치는 누런 햇빛이 납작하게 땅에 달라붙는다.
우리는 아만을 향해 걷고 있다.
저 산을 돌아가면 중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라는 아만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후는 볼 것 없이 제국 수도로 직행한다.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면 1차 목표는 달성이다.
그녀를 T&T 지부장으로 만든 이후의 특별한 계획은 없다.
지금처럼 던전을 돌아다니며 무분별하게 스탯과 용사 포인트를 획득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의 전장을 배회할 생각이다.
흡수할 만한 정수를 찾을 때까지.
물론 내가 흡수할 만한 강한 녀석들은 순순히 시체가 되어 전장에 드러누워 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사냥해야 한다.
난전에 끼어들어서.
영웅으로 불리는 무리들을 하나씩 시체로 만들 생각이다.
아직은 모호한 계획이다.
그렇게 한 단계씩 올라가다 보면.
20년 뒤.
옛 마스터인 서큐버스님도 간단히 지켜 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계획은 살육과 포식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쫓고 죽이고빼앗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거부감은 이미 흐릿하다.
- 휘이이잉!
천천히 산 아래를 돌아갈 때였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응?’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근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주시하고 있다는 눈빛도.
쫓기는 기분이나 살기 같은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바람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그곳이 뭔가로 막혀 있는 것처럼,
바람이.
‘미묘하군.’
그냥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후작에게 한 번 제대로 추격을 당한 경험이 있는 내게 있어서는, 이런 것조차 신경 쓰이는 요소였다.
‘집중. 탐지.’
주위를 연거푸 훌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레나.”
“네! 스승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녀도 별다른 건 느끼지 못한 것같았다.
나 역시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서있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테니.
“아만으로 가자. 정보 경매라고 했지?”
“네. 원하는 키워드를 말하면.
달리아크에 머무르는 자들이 갓 들어온 신선한 정보를 제공해 줘요.”
“역추적 가능성은?”
“낮아요. 판매자가 팔고 싶은 것만 사는 대신 보안은 장점이에요. 중개자가 개입하거든요. 하지만.
레나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말꼬리를 흐렸다.
“뭐지?”
“가격이. 깜깜해요. 구매자는 나 말고 누가 얼마를 불렀는지 모르니까요. 말만 경매죠. 바가지 쓰기 딱좋은 시스템이에요.”
“그래도 일단 가 보자.”
“.네!”
- 다그닥! 다그닥!
나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사냥감의 기분.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을 느껴서일까.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달리아크의 <정보 경매>에서 꼭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
푸른 갑옷의 검주.
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폭풍 속에 서서 이사벨의 살해를 추궁하던 인간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척추로 한기가 차올랐다.
그는 이번에 왜 나를 쫓아오지 않았을까. 나를 쫓지 않았다면, 누굴쫓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