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36화 (136/458)

137화 패치워크 (17)

“이거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참 경쾌하네.”

어처구니없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의식은 생생했다.

하지만 몸이 무언가에 뒤덮인 둣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끝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정교하게 실이 묶여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기괴한 감각이 두려웠다.

몸을 바들거렸다. 투명한 실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떨었다는 것조차 착각이었다. 움직일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레나가 곁에서 의아한 얼굴로 나를바라봤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글쎄. 안 들렸니?”

‘나’는 손을 뻗었다.

- 스르록.

레나의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무의식의 충동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인간 여자에게 그런 마음 따위 품은 적 없다.

가진 건 약간의 연민과 책임감뿐.

하지만 턱을 더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없이 부드럽고 능숙했다.

분명하다.

‘내’가 하는 짓이다.

빠르게 답안을 도출했다.

1. 나는 미쳤다.

2. 무언가 에게 몸을 빼앗겼다.

며칠 사이 정신에 독이 풀어질 만한 일은 없었다. 광기에도 최소한의계기가 필요하다.

답은 두 번째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대부분의 문제가 그러하듯.

답은 한참 전에 제시되어 있었다.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

그의 몸이 <그라스미어의 불>에화르르 태워질 때, 내게 옮겨붙었다는 답안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울리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놈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놈은 첸들러에게 꿈을 꾸게 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젠장.’

그러나 의문이 하나 남는다.

대체 왜 나를?

강한 자라고 한다면 아쥬라의 탑주들도 있다. 검주들도 있다.

기스-제-라이나 별빛청여우가 속한 레드 플레이크도 있다.

만만해서라면. 내가 아니라 챔들러를 가졌어도 충분하다.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그편이 훨씬 쉬울 터.

한 번에 덮쳐 오는 연기는 실체 가없는 것처럼 빨랐다.

질주로 도망갈 생각도.

검기로 벨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내가 아니라도 잡아먹을 수 있을터인데, 어째서 나인가.

막막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몸은 그 어떤 감옥보다도 좁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챈들러도 한패인가?’

통제력을 잃은 시선 끝에 챈들러가 흐릿하게 비친다.

<알>을 태우고 난 후의 감격스러운 표정.

지금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전까진 연기였다 해도, 내가 몸을 완전히 빼앗긴 지금 가면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하아. 피부 감촉 좀 봐. 너무 부드러워. 너로 할 껄 그랬나?”

고민에 빠져 있는 순간조차, 나는레나를 능숙하게 희롱하고 있다.

“스승님.?”

레나의 얼굴이 봉승아 꽃잎처럼 붉게 물들었다.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 스르록.

레나의 쇄골로 손가락을 뻗었다.

맥박을 점검했다.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너, 나 좋아하는구나?”

레나의 새하얀 목덜미까지 한순간에 붉게 물들었다.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냐!’

- 달그락!

정신을 집중해 손가락을 회수하려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나의 변해 가는 체온과 피부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미친 듯이 뛰는 맥박이 적나라하다.

나는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만. 그만.!’

[빙의에 저항합니다!]

[정신 저항 스킬이 없습니다. 지혜수치에 따라 저항 확률과 범위가 결정됩니다.]

[<암시되는 세계의 운명>이 발동합니다. 150 이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경우<공포><절망><망각>에 빠집니다.]

[지혜가 너무 낮습니다.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떠오르는 알림 창에 절망했다.

내 지혜가 충분히 높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50 이하는 상대도 안 한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

한쪽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나는고 개를 돌려 탄식이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챈들러였다. 잔뜩 고양된 표정의 남작이 입을 열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원수를 갚았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고생했어. 네 역할이 제일 컸지.”

“아닙니다! 제가 무슨.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니다가.

- 톡톡.

‘나’는 두개골을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나 같은 존재를 만났잖아?”

내 입에서 대체 무슨 소리가 튀어나오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챈들러도 잠시 갸웃했다. 하지만적당히 추측한 걸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은공처럼 강한 분을 만난 건제 평생에 없을 운입니다!”

“뭐. 당장 강해서라기보다는. 가능성을 높게 샀다고 해 두지.”

챈들러와 레나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없었다. 가능성을 보고 몸을 빼앗았다는 이야기.

혹시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이 내회 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걸까?

“이제 다들 올라가자고? 밤톨이!

너도 이리 와. 정말 잘했어.”

- 달각.

밤톨이는 경계하듯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 덤석!

뒤로 물러나는 밤톨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내 의사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멋대로 움직이는 손발에 적옹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종류의 공격에 얼마나 무방비했는지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 이상의 검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몸을 빼앗겨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죽고 살아나게 된다면.

반드시.

이런 종류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큭큭. 두개골 곡선이 너무 앙증맞네.”

- 달각! 달각!

밤톨이가 내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가.’

하지만 나는 밤톨이의 꼬리를 꽉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알아봐 주는 게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상념에 잠겼던 나는 갑작스러운 위기감을 느꼈다.

레나를 희롱하는 나.

밤톨이의 꼬리를 잡은 나.

‘내’ 몸이 얼마나 오래 빼앗겨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진득이 기다리면, 언젠가 죽기야 할 거다.

하지만.

‘내’가, 레나나 밤톨이를 살해하는모습을, 생생히 의식을 가진 채로 지켜보게 된다면.

정신이 버텨 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죽음보다 몇 배는 더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다시 제대로 실감되기 시작했다.

- 달각. 달각.

시야 한쪽에 꼬리가 붙잡혀 흔들리는 밤톨이가 들어온다.

“왜 앙탈을 부리고 그래? 힘내서 들어갈 곳 찾을 필요도 없어. 저기봐 봐. 활짝 열렸잖아. 응?”

‘나’는 들어온 통로를 가리켰다. 통로는 완전히 열려 있었다. 앞도 뒤도 동일했다.

하얀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저렇게.!”

“주술사를 죽였으니까, 이제 던전이 끝난 거지, 뭐.”

“그런데 스승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밤톨이처럼 눈치를 챔 건가.

레나는 감이 좋다. 지금까지 나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연기를 뒤집어쓴 후, 말투도 행동도 달라졌다.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최면 Lv.15를 사용합니다!]

[암시 Lv.15를 사용합니다!]

“그럼. 나야 완전 괜찮지. 그렇지 않아?”

목소리 톤이 기묘하게 낮아졌다.

말투에서 주술이 섞인 운율이 느껴졌다.

“그런. 가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괜찮아. 밖에 있는 사람들도 괜찮고, 영주도괜찮다면 멋진 일이겠지. 그렇지?”

‘나’는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 딱. 딱.

규칙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사람들은 귓속에 이명이 울리는 것같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크리스티나도, 챈들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면과 암시.

그런 스킬은 흡수한 적도, 배운 적도 없다.

‘몸이 빼앗기면서. 스킬까지 심어진 건가.’

게다가 레벨도 지나치게 높다.

저항을 바라는 건 무리다.

“모두 괜찮은 것 같아요.”

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그녀마저 말 한 마디에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비참한 마음과 상관없이 ‘내’ 입은 자연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다들 괜찮지? 그럼 올라가자.”

일행을 데리고 무덤을 간단히 빠져나갔다. 긴 회랑과, 무너진 골렘들을지나갔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다들 쉬어. 영주도 한번 확인해보고. 뭐, 멀쩡할 거야.”

일행에게 짧게 말했다.

챈들러는 그제야 영주가 생각이 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하 통로를 걸어오며 챈들러는 영주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들어가기 전에는 주술사가 죽으면 영주에게 충격이 갈까 봐 무척 초조해했는데도. 암시와 최면이 제대로 발동한 것이다.

챈들러와 크리스티나가 물러갔다.

“레나.”

‘내’ 손길이 그녀의 쇄골을 거쳐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능숙하게 작은 턱을 움켜잡았다.

“.네.”

레나가 순종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흐음.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폈다. 턱을 받친 손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목은 저항 없이 좌우로 가볍게 움직였다.

“오늘은 혼자 쉴게. 괜찮지?”

“알겠습니다. 오늘은 멀리 떨어져서 잘게요.”

레나는 몽롱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밤톨이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녀석은 아직 제정신이다.

암시나 최면을 걸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 저벅, 저벅.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긴 복도에 울려 퍼졌다.

- 털썩.

나는 소파 위에 앉는다. 푹신하다.

시야도 감각도 그대로다.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을 뿐이다.

커다란 소파 앞에는 거울이 있다.

‘내’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을 천천히 관조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다.

- 철컥.

‘나’는 갑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려 보고, 몸을 하나씩 더듬었다.

- 달그락.

갈비뼈 안쪽에 손을 넣어 만졌다.

너비를 확인하듯 손끝으로 비볐다.

뼈마디가 뻣뻣해지며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죽어야 한다.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자살해야 한다.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도 두고두고 후회할 일들을 ‘내’ 손으로 마구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소파 옆에 기대어 있는 대검이 보였다.

_ 달.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옴직여라. 제발.

대검을 쥐고 머리를 쪼개서 자살하겠다.

다시 시작한다면, 이 무덤 따위는 영원히 찾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 달그락.

손끝이 움직였다. 칼자루 쪽으로 살짝 뻗어 갔다. 그게 전부였다. 더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응?”

갑옷을 다 벗어던진 ‘나’는 두 손을 맞잡고 거울을 바라봤다. 수은이 뒤에 칠해진 유리 앞에서 갸웃거리는 새하얀 해골이 보인다.

“.으음?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어? 틈새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 우우우웅.!

이명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소리가 끈적거렸다. 정신을 새까닿게 덮어버릴 것 같았다.

- 우우우응.!

기괴한 이명이 끝없이 이어졌다.

곧이어 이명의 결 하나하나가 자세히 들리기 시작했다.

수천수만의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어 대는 소리였다.

거대한 까마귀가 하층 의식 속에 파고 들어왔다.

그 위에 탄 새파란 눈동자의 남자가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 아아. 좀 꺼림칙하다 했더니.

진짜 남아 있는 거냐? 말해 봐.”

‘넌 누구냐?’

= 나? 내가 너지 누구겠어. 이거 믿을 수가 없군. 환령換靈으로 정체성을 빼앗지 못하다니. 마계에서도 없던 일이다만.

‘마계.? 혹시 네놈이 말파스라도 되는 거냐?’

이곳은 말파스의 신전이다. 주술사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 으하하 하하.! 하하하하.!

그러나 까마귀에 탄 남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녀석의 귀에 달린 커다란 백금 귀걸이가, 지독한 웃음에 흔들렸다.

열 손가락에 끼운 반지부터 팔찌에, 내민 헛바닥에 뚫어 끼운 장신구까지 온몸을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녀석이었다.

“으하하하.!”

웃음은 의식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달그락거리며 거울 앞에서 마구 웃었다.

“주제넘은 소리는 하지 마라. 왕께서 너 따위에게 강림하겠느냐?”

= 주제넘은.

현실과 의식에서 목소리가 두 번씩 울렸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참이지? 마음에 안 들면 몸을 돌려내라.’

= 닥치고 있어. 가진 능력도 활용못 하는 머저리이긴 해도, 강림을준비하는 용도로는 쓸 만하거든.

온몸을 장신구로 휘감은 남자가 오만한 태도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능력 활용을 못 한다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 달그락.

내 몸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_ 풍.

맑은 소리와 함께 루-륨을 담은유리병 하나를 땄다.

‘건드리지 마!’

레나에게 반드시 건네줘야 한다.

암시에 걸린 레나는 유리병도 전부내 방에 놓고 떠나갔다.

그녀가 지부장이 되려면.

= 중요한 시점이거든? 한순간이라도 방해한다면 오늘 밤 당장 그 여자를 죽여 버릴 거야.

“검기.”

- 우우우응!

어느새 손에 든 단도 끝에서 연푸른 검기가 배어 나온다.

‘나’는 거울을 보며, 세심한 손길로 갈비뼈 안쪽에 단도를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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