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벌레들의 무덤 (4)
- 차칵차칵차칵차칵!
- 쿠구우이이이이잉!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었다.
셀 수 없는 거대한 날갯소리가 어둠을 뒤덮었다. 폭력적일 정도로 강렬한 진동이 전해진다.
찰칵거리는 무수한 마찰음이 온몸의 뼈를 울린다.
몸을 바싹 움츠렸다.
고작 벌레 떼의 진동 소리에 이 정도로 긴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 잠시만. 벌레 좀 쫓아낼까?”
수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넣어 두었던 작은 판을 몇 번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허공에 반투명한 지도를 만들어 냈던 판이었다.
[페르시우스 VHA마이너111 고주파 발산 모드를 작동합니다.]
이번에는 음성이었다.
풍뎅이의 외부에서, 매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이이이잉.
날개가 넓게 펴지기 시작했다.
- 투칵.
활공할 때와는 달리, 양 날개가 90도까지 완전히 펼쳐졌다.
- 피리리리리릿.!
직각으로 펴진 날개가 기이한 음파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날개 끝에서, 가운데서, 그리고 진동하는 풍뎅이의 몸 전체에서.
들릴락 말락 하는 고주파가 넓게 퍼져 나왔다.
공기에 새로운 진동이 섞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울려오는 벌레 떼의 진동과 비슷하면서도, 그것을 상쇄시키는 소리였다.
상쇄는 공기 중의 진동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 앞에서 빠르게 다가오던 새까만 어둠이, 조금씩 멀어지며 우릴 비껴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현상에서 논리를 찾아낼 수 없다면 쉽게 감상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수녀가 친절히 설명을 들려주었다.
“나름대로 섬세한 기계들이야. 싫어하는 파장을 발사해 주면 돼. 우린 중심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슬쩍 비켜 가는 거니까.”
설명은 기적의 신비성을 훼손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 너무 많아서인지 모른다.
나는 잠시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간신히 한 단어를 뱉어 냈다.
“.마법”
황제를 호위하던 두 마법사보다,
눈앞의 이 여우 가면이 하는 행동들이 훨씬 더 마법 같아 보였다.
수녀가 피식 웃었다.
“헤에, 제대로 설명했는데? 설명이 마음에 안 든 거야?”
“마법사.
“뭐, 그러시든지. 그런데 아까 무슨얘기 했었지?”
나는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제국에서. 이런 땅을 가만히 두냐는 이야기였소. 황폐한 채로.”
“그래, 말 잘 했네. 탑에서 여길 조사한 적이 있어. 탑주급 ‘마법사’들이 전부 몰려왔지.”
“탑주급 마법사들이?”
“응. 실력자들을 추려서 왔어. 개네도 궁금하잖아? 왜 이런 일이 생기나. 기계 부유물들을 얼리고 태워서,
잠깐이나마 가운데 도착할 수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이던 수녀가, 가면 쓴 얼굴을 기웃했다.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땅이야!”
그녀는 흙바닥을 발로 찼다.
진동이 울리지는 않을 정도로 가볍게 찼지만 메마른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흙이 무릎까지 피어오르는 배경 속에서 여우 가면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런 땅 말이야. 텅텅 비어 있었다고.”
나는 입을 닫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주제다. 단호한 침묵만큼 현명한 태도는 없다.
“그리고 저 부유물들. 벌레들이 곧장 다시 생겨났어. 마법사들은 잠깐 방문하는 데 만족해야 했지. 도망쳤어. 그래도 탑주급이잖아? 다들 잘살아서 빠져나갔지.”
여우 가면의 수녀는 어깨를 으쪽하고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여기는 조사하지 않아.
기록에서도 없앴고.<탑>이 도망간 게 부끄러운 거지, 뭐.”
하지만 그들이 한심하거나 초라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수억 마리로 이루어졌다는 기계 벌레의 군체群體.
그 끄트머리를 살짝 탐지하고 나자, 오히려 제을 퇴치하며 가운데로 향했다는 아쥬라의 탑주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수녀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우리가 먼저 그곳에 가 봤어야 했는데.
레드 플레이크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뭘 어쩌실 작정이었소?”
“어쩌긴. 파내야지!”
“파낸다고?”
“텅 빈 황야인데, 감지되는 파장은‘1만 배’야. 뭐가 있으면 지하에 있을 거 아니야? 수백 미터라도 파고내려가야지, 어쩌겠어?”
“놀라지 마, 친구. 해골 친구한테 삽질하란 소리는 안 하니까.”
수녀는 실없이 킥킥거리며 웃다가말을 이었다.
“여긴 곧 자유의 땅이 될 거야. 그런 다음, 제대로 깊이 파서 조사해볼 생각이야.”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화들짝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자유의. 땅이라고?”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방해야지. 안 그래?”
“해방.?”
“압제와 특권. 계급으로부터 이 가엾은 자들을 해방시켜야지.”
수녀가 뒤를 길게 돌아봤다.
활공으로 지나쳐 왔던 산줄기가 보였다.
그 너머에 넓게 펼쳐져 있을 땅과,
서로를 욕망하고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을 인간들이 상상됐다.
“전쟁을 벌이겠다는 거요?”
“엠버와 연합이 선공한다면, 승산은 충분하지.”
“제국을 이긴 연합이. 엠버를 그대로 둘 거라고 생각하시오?”
섬나라 엠버는 10만 제곱킬로미터를 조금 넘는 도시국가다. 좌우의큰 세력에 비하자면 면적도 인구도1/10이 되지 않는다.
제국도 연합도, 단독으로 엠버를멸망시키는 게 가능하다. 서로 손을 잡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제국과 연합이 만들어 낸,
힘과 이념의 균형 사이에 그들은 제3 지대로서 살아남아 왔다.
“엠버는 균형 사이에서 산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버텨 온 거 아니오?”
“뭐, 그렇지. 자세히 아는 거 있어?”
“.없소.”
수녀는 피식 웃었다. 황이는 넓었다. 시간은 많았다. 오직 둘뿐인 밤이었다. 그녀는 조금 수다스러워지기로 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말해 볼까.
엠버로 도망가는 범법자들에 지긋지긋해진 연합이 수사관을 강제 파견한다고 협박했을 때.
엠버는 제국 도시개발국장과 공공연하게 접촉했다.
그리고 미스릴 원석을 받는 대가로 토목공학 전수 협약을 맺었다.
제국이 병기 공학까지 억지로 얻어내려 했을 때, 엠버는 연합 의회 국방위원들을 돈으로 구워삶는다.
신형 기갑 골 렘의 위력을 설명한 뒤, 3기를 제국과의 국경에 좋은 값으로 대여 배치했다.
한쪽이 엠버를 향해 칼을 빼 들면,
다른 쪽과 가깝게 움직인다. 그러나 결코 퍼 주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담당자를 돈으로 구워삶거나, 암살로 협박해서 언제나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제국. 연합. 양쪽 다 우리가 조종하는 인형으로 만들어서 살아왔지.
우리는 쏙 빠진 채로, 그들의 피나 잔뜩 흘리면서 말이야.”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의문은 더 커졌다.
“그 좋은 걸 왜 관두겠다는 거요?”
“.실이 끊어졌어.”
수녀가 말을 이었다.
“제국이 제어되지 않아. 대어 놓은 선들이 이상하게 전부 다 잘려 나가고 있어. 일단 엘튼 클레멘스는 죽였지만, 이걸로 효과가 없다면. 해가 넘어가기 전에 먼저 쳐야 해.”
“당신들도 황제의 죽음을 원하면서, 그걸 또 자유 연합에 비싸게 팔아넘긴 거요?”
“큰 건수잖아. 생색은 내야지.”
그 뒤로 수녀는 엠버와 연합이 공조해, 제국을 침략하게 할 계획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했다.
‘.이런 거였나.’
그동안 알고 있던 역사가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T&T 이너 서클은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는 거라고만 했는데. 이런 건 몰랐나?’
연합과 엠버가 제국을 먼저 침공하려는 계획.
알았다면, 그때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 없다.
숨기진 않았을 거다.
심지어, 섬기는 마왕 푸르손에 대한 얘기까지도 전부 나왔으니까.
‘녀석들도 몰랐어.’
연합이 먼저 제국을 치는 공작.
7인으로 이루어진 암살교단, 레드플레이크 내부의 극비 정보다.
큰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단서들이 너무 많이 주어지고 있었다.
‘전쟁.,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10년에 걸친 대전쟁.
전쟁을 막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을 막으려 한다고 해도.
황제만 저지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여우 가면의 수녀가 소속된 조직.
레드 플레이크와 엠버, 연합까지저지해야 한다.
‘어려운 얘기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났다.
여우 가면의 수녀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풍뎅이 모양의 ‘유산’.
페르시우스에 대해서도 많은 걸 들었다.
“충전식이야. 시동 꺼 놓은 상태에서 별빛을 충전해야 돼.”
“별빛이라면. 낮에 끄는 건 무슨의미가 있소? 그때는 그냥 운전하는 게 낫지 않을지.”
“태양도 별이거든, 친구.”
“태양이. 별이라고? 농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별은 밤에 나오고,
태양은 낮인데.”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수녀는 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러고 체념한 듯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 말했어. 태양 빛도 받고 별빛도 받아야 해.”
살짝 놀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으음.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한 가지질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말이오.”
나는 그동안 줄곧 궁금하던 사안을 물었다.
“그. ‘1만 배’ 말이오.”
“응, 친구. 얘기해.”
“찾게 된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거요?”
수녀가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왜? 갖고 싶어?”
“갖고 싶어?”
나는 침묵했다.
수녀가 한 글자 한 글자씩 씹어 뱉듯이 말했다.
“갖게 해 줄 수 없어.”
어둠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걸 절대로, 네가 갖게 해 줄 수없어. 유산은 레드 플레이크가 관리한다.”
- 달그락.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헤헤헤.
수녀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에이, 다른 사람이 관리해 봐이^
골칫덩이라구. 이해가 상당히 중요해. 함부로 사용하다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 우리한테 맡겨 둬.”
그 대화 뒤로.
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못했다.
잠깐 보여 준 수녀의 태도에 완전히 압도된 탓이었다.
수녀가 이런저런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풀었지만.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에게먼저 말을 걸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아무래도 참기 어려운, 직접적이고실용적인 질문이었다.
“우린 지금 어딜 가는 거요?”
여우 가면은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하아. 너무 늦게 질문하잖아!”
“.신뢰했다고 생각해 주시오.”
“당연하잖아. 엠버로 가지. 전쟁 계획까지 말해 줬는데 친구를 어디로 데려가겠어. 제국 수도라도 갈까?”
엠버행行.
물론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하고 있었기에 질문한 것이다.
“그러면 방향이. 이쪽이 아니지 않소?”
그녀는 종종 허공에 반투명한 지도를 띄웠다. 그걸 볼 때마다 의문이더 확고해졌다.
엠버로 가려면.
남쪽으로 가야 한다.
제국과 자유 연합을 연결한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賊으로 가야한다.
지협의 중간에서 배를 탄다.
북쪽으로 근해近海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섬.
그곳이 엠버메어다.
“남쪽으로 가야 할 텐데. 계속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소만.”
나는 지레짐작으로, 덧붙여 다른 것까지 물었다.
“혹시 해안선을 따라서 쭉 내려갈 생각인 거요? 그럼 너무 돌아가는 게 아닌가?”
“으응? 해안선?”
수녀가 의아한 둣 되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린 바다를 건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