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가면 쓴 축복 (8)
“그래, 가자.”
나도 녀석의 기분을 알 수 있었고,
녀석도 내 기분을 아는 것 같았다.
작은 몸으로 덫에 묶여 죽은 새끼늑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남은 것 같다.
어차피 도망치려면 위로 계속 올라가야 했다.
- 달그락! 달그락!
- 철컥! 철컥!
산 위로 달렸다.
탐지는 계속 활성화한 채였다. 일행이 늘어나니 산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을 위험이 한층 더 신경 쓰였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 띠링!
[새끼 늑대 해골의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10 -> 11]
함께 달려 준 덕분인지 호감도가추가로 을라갔다.
세 시간? 네 시간?
얼마나 위로 달렸을까.
[.호감도가 증가합니다!]
[13 -> 14]
어느새 녀석의 호감도는 14까지 올라가 있었다.
- 달그락.
실컷 달렸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체력이 부족한 건지 녀석이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녀석을 안아 들었다.
녀석이 마치 핵핵거리듯 이를 딱딱거린다.
가슴속에 무언가 맺히는 것 같은,
혹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게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감정의 경계에 선 채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쯤인지 모르겠군.’
처음 오는 장소였다. 확실히 아래와 달라진 온도가 느껴졌다. 주변을 차분히 돌아보며 걸었다.
십 분 정도 걷자, 몇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단순한 오두막은 아니었다.
다듬은 돌로 경사진 땅에 축대를 쌓아 올렸다. 그 높이만 해도 일증.
평평하게 만든 축대 위, 단단해 보이는 이층집이 지어져 있다.
‘산장. 인가?’
숨을 만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규모로 보아, 아까 내려간 여섯 사냥꾼이 쓰는 장소 같았다.
놈들이 쓰는 장소라면 며칠은 비어있을 거다. 최소한 오늘은, 여기 숨어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트롤 사냥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아니다. 마주쳤다간 웬만한 사냥꾼들은 갈가리 찢기는 게 보통이다.
꽤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한다.
다니는 루트를 파악하고 유인한다.
단단히 뿌리를 박은 두꺼운 나무 몇 그루에 연결한 함정이 필요하다.
산 하나에 사는 개체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오늘 한 마리를 사냥했다면 피를 팔아서 며칠은 놀고먹을 거다.
- 딱딱! 딱딱!
산장으로 다가가는 나를 보고 늑대해골이 이를 부딪쳤다.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위험한가?’
- 스릉.
녀석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지키고 있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칼을 빼 들고 산장에 다가가니 늑대 해골도 별수 없다는 듯 따라왔다.
‘함정은 없고.’
탐지 스킬로 천천히, 꼼꼼하게 바닥과 주위를 살피며 걸어갔다.
예전처럼 트롤 잡는 함정이 있어도지금 내 민첩과 스킬이라면 걸리지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별다른 함정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매복하고 있는 녀석도 없는 듯했다. 어딘가에 죽은둣 누워 있는 거라면, 그 기척까지야 알아차리긴 힘들겠지만.
산장에 가까이 갈수록 묘한 냄새가 났다. 곧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피비린내 였다.
‘이것 때문인가.’
늑대가 경고를 보내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직감은 여전히, 산장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냥꾼들의 은신처라면 쓸 만한 물건이 많을 거다.
자잘한 휴대용 함정이나 무기 정도는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운 좋게 사냥 일지 같은 게 있다면 정말 트롤을 사냥했는지, 어떻게처리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사다리를 타고 돌로 쌓은 축대 위로 올라갔다.
몹시 두꺼워 보이는 문에는 강철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잠시 앞에 서서 집중했다.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장의 칼을 위로 들었다.
두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칼을사선으로 세차게 내려 그었다.
- 쌩!
- 캉!
불꽃이 튀며 쇠가 잘려 나갔다. 두 동강 난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껍고 크긴 하만, 고작 시골 산장의 자물쇠다. 황실 근위단장의 보검으로 잘리지 않을 턱이 없었다.
땅에 떨어진 조각난 자물쇠를 슬쩍 바라봤다. 알람 마법 같은 건 걸려있지 않았다.
‘하긴, 마법이 흔한 건 아니지.’
2주 전, 터무니없는 존재들을 연달아 접했다. 두 아쥬라의 마법사와,
수천 군단을 일으키는 네크로멘서.
허공을 찢고 나타난 잿빛 기사.
덕분에 현실감각이 상당히 망가져있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며, 커다란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 끼이이이익.
두꺼운 문이 제법 기괴한 소리를내며 열렸다. 안으로 한 발 디뎠다.
산장 안은 깜깜했다.
온통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창문하나 없는 구조.
밖은 가을 햇살이 따가운 낮인데,
산장 안은 차갑고 어두웠다.
칼을 빼 든 채 안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확실히 텅 빈 것 같았다.
- 달각! 달각!
따라 들어온 늑대 해골이 으르렁거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뼈밖에 남지 않아 소리는 제대로 나지 않았다.
녀석을 바라봤다. 머리 위에 반짝이는 작은 창이 떴다.
[새끼 늑대 해골: 술사의 교감에의해, 일부 특성이 보존되었습니다.
예민한 후각을 발휘합니다.]
안내하는 듯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예민하지 않아도 냄새를 맡기는 어렵지 않았다.
비릿한 피 냄새에, 끈적거리는 알수 없는 냄새가 더해졌다.
냄새는 2층에서 났다.
주위를 더듬었다.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테이블에 등불이 있었다.
등불 옆에는 작은 통이 있다. 불길은 꺼졌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다.
- 화르륵!
등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어두웠던 방 안이 흐릿하게 밝아졌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가운데 놓인 테이블 만 하더라도,
대여섯 명이 여유롭게 대화를 즐길 수 있을 크기였다.
벽에는 주르륵 동물 머리의 박제가 매달려 있었다. 곰, 늑대, 사슴은 머리만 박제되어 있다.
안쪽을 바라봤다. 장작이 쌓인 벽난로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트롤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한 쌍의 트롤은 유리로 만든 의안義眼을 번쩍이며 서로를 노려본다.
‘저 녀석이다.’
왼쪽에 있는 녀석이 익숙했다.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이 모조리 긁어내진 채 방부액에젖은 솜이 빈 공간을 가득 채워졌지만, 두꺼운 양팔과 흉악한 모습은 여전했다. 여섯 사냥꾼과 나를 찢고 뜯어 놓은 녀석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몸 크기가더 작았다. 트롤의 생태로 보아 왼쪽이 암컷, 오른쪽이 수컷이었다.
트롤 암컷과 수컷은 평생 지속될 결합을 이룬다. 하나의 상대만을 선택해 서로를 신뢰하고 보호한다.
결합을 맺은 상대가 죽어도 연인을 바꾸지 않는다. 살해당한 경우라면,
복수에 한평생을 바친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컷 트롤이 먼저 잡혀 박제되었을 것이다.
함께 몸을 나눈 자를 위해, 원수의몸을 몇 조각으로 나누는 일은 그럭저럭 적절하다.
그 복수에, 나와 루비아까지 휘말린 건 좀 항의하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이번 시간선에서 그녀의 복수는 실패했다.
- 화르륵!
등불 하나로는 조금 어두웠다.
벽난로 불씨를 피웠다. 작은 바람이 일며 티끌이 튀었다. 방 안은 한층 더 밝아졌다.
벽에 걸린<트롤 가족>이라고 휘갈겨 쓴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가족?’
날 부쉈던 트롤 암컷을 좀 더 살펴봤다. 철사로 누덕누덕 기운 몸이 자세히 보였다. 허공에 매달린 채창에 찔린 자국인 것 같았다.
둘 모두 박제된 지 오랜 시간이지 난 듯했다. 궁금증이 일었다.
‘그럼 피 냄새는 왜 나는 거지?’
- 달각! 달각!
늑대 해골이 계단 앞에서 뼈로 된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2층으로 가자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아직 자세히 보지 못한 게 많았지만 일단 1층을 잠시 내버려 두었다.
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어슴푸레한 둥불 빛에 2층의 광경이 비춰졌다. 냄새의 근원지는 커다란 통이었다. 방부 액으로 꽉 찬 통안에는 작은 트롤이 들어 있었다.
‘새끼인가?’
주위를 더 살폈다. 1층보다 조금 좁았다. 대신 밖으로 나가는 테라스가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갔다. 피 빼는 작업은 여기서 한 것 같았다. 미처 못 담고 홀린 초록색 피가 떨어져 있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몇 시간 전에 본 광경을 떠올렸다.
새끼 트롤 한 마리에서 나온 분량의피라면, 사냥꾼들이 들고 가던 통의 크기에 딱 맞다.
아래에서 본 <트롤 가족>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방부액 냄새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테라스로 통하는 2층 문을 열어놓았다. 열린 문으로 건조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산장이 조금 밝아졌다.
조금 맑아졌다.
문을 열기 전에는 알지 못했는데,
방부액 통에 담긴 새끼 트롤에게 서약한 초록색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사냥당한 건가?’
초록색 불빛.
죽은 지 48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들이 휘파람을 불던 까닭은 아무래도 이 녀석을 사냥하는 데 성공해서인 것 같다.
굳기 전에 피만 빼 놓고, 가치가 덜한 시체는 방부 액에 담궈 놓은 채산 장에 버려두고 내려갔다.
- 철퍽.
새끼 트롤을 통에서 건졌다. 젖은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 내장과 눈, 뇌는 빼지 않은 상태였다. 칼자국은 나 있지 않았다.
어줍잖은 동정은 보내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었다. 이젠 익숙한 메시지가 뜬다.
[흡수하시겠습니까? Y/N]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빛은 곧 몸을 타고 들어와다리에 스며들었다. 끝이었다. 빛은 금방 꺼져 버렸다.
[산악 적응 Lv.l을 흡수했습니다!]
산을 편안하게 느껍니다.
산악 지형에서 전투력이 1.5% 올라갑니다.
산악 지형에서 이동력이 3% 올라갑니다.
[흡수하신 능력은 소화를 마친 후적용됩니다.]
[소화까지 23:59:59?".]
아무 빛도 내지 않는 트롤을 잠시 내려다봤다. 새끼 트롤이라고 해도성인 남성 정도는 순식간에 찢을 것처럼 건장하다.
하지만 근위대 기사들을 홉수했던것과 달리 힘이나 민첩은 오르지 않는다. 희미한 초록빛은 산악 적응만 흡수한 뒤 사라져 버렸다.
내 능력치는 이미, 녀석보다 한참위에 있기 때문일 거다.
‘일으킬 수는 없는 건가.’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일으킨다.”
반응은 없었다.
잠시 더 집중해 보았다. 늑대를 일으켰던 감각을 다시 사용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신 허공에 작은 메시지가 떴다.
[통제력이 부족합니다.]
[필요 통제력: 35]
[보유 통제력: 0/10]
통제력이 한참 부족했다.
새끼 트롤이 이 정도라면, 날 죽였던 암컷 트롤은 적어도 100 정도가필요할 것 같았다.
트롤 해골을 포함해, 수천의 군단을 부리던 기스-제-라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거지?’
새삼 그녀의 권능이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2층을 좀 더 살피자 침대 곁에 놓인 작은 책 한 권이 보였다.
보란 듯이 ‘놓인’ 책에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활짝 열린 문으로 따가운 가을 햇볕이 들어온다. 햇볕이 제목 아래의 글쓴이를 비췄다.
<캐빈 애슈턴>
‘.이것도 그자가?’
기묘하게도, 캐빈 애슈턴이란 자의 책이 조금씩 눈앞에 던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산장에 끌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마법사 아니었나?’
마법사가 왜 트롤에 대한 책을 썼는지, 그렇다고 쳐도 이 책이 어떻게 여기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홀린 듯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는 몹시 엉뚱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트롤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트롤을 사냥하려는 당신은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 쌍 중 약한 쪽을 살해하면, 나머지 하나를 살해하는 일은 몹시 쉬워진다. 트롤은 복수를 차갑게 식혀먹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은 분명 트롤을 살해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행간을 읽다 보면 줄곧 읽는 자를 비난하고 매도하고 있다.
그 모순을 내심 우습게 여겼지만,
집중하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주어질 보상이 있으니까.
지혜가 올라갔다는 메시지를 기대하며 책을 덮으려 할 때였다.
손으로 쓴 것 같은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뜻을 다 읽어 낼 수는 없었다.
<@# $%들과 & § 할 것>
일부만 알아볼 수 있는 글자였다.
나에게 이런 글자는 하나밖에 없다.
‘.동방어?’
글씨는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적힌 글자 자체는 몹시 수려했다.
다만 글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스스로가 조금씩 비틀리고 일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어지러웠다. 손으로 내밀었다. 테이블을 짚었다.
[83.94%]
내 동방어 레벨은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읽어 낼 수 없던 글자들이,
갑자기 의미를 전해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