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가면 쓴 축복 ⑷
몸에는 기사단장의 미스릴 갑옷.
허리에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다고 외치는 명검들이 매달려 있다.
_ ^.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칼집들이서로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낸다.
바닥에 떨어진 수십 자루의 명검 중에서도 골라잡은 물건들.
칼만 가져가면 서운하다. 창날과 창대에서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흑창 한 자루도 등에 맨다.
유사시 몽둥이로 휘두를 수 있는 지팡이도 양손에 하나씩.
- 쿵.
지팡이로 바닥을 짚는다. 지팡이 끝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 저벅.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가는 길에 놓인 수많은 유해遺核.
부서진 뼈의 바다. 그 위에 갓 죽은 시체들이 굴러다닌다.
기스-제-라이.
그녀라면 어느 쪽을 선호할까?
오래된 시체와 갓 죽은 시체 중에.
답은 없었다.
그녀는 반으로 찢겼다.
나에게 정수가 흡수된 채, 유해의바다에 쓰러져 남아 있다. 감금하고 뼈를 뜯고 세계는 시체가 되어야 한다던 그녀는 죽었다.
하지만 내 두개골에 그녀의 파편이 이식되어 있다.
정수 흡수를 사용할 때마다 그녀에게 진 빚이 생각날 것 같았다.
계속 구덩이를 을라갔다.
경사는 가팔랐다.
그건 힘들지 않다.
이미 민첩과 힘은 60을 넘었다.
이 정도는.
경사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민은 따로 있다.
‘어디로. 가야 하지?’
- 터벅터벅.
보물을 잔뜩 손에 쥔 채, 땅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나에겐 중요한 물건이 많다.
기사단장의 보검과 갑옷.
두 마법사의 지팡이.
무엇보다, 제국 황제의 인장.
하나같이 놀라운 가치의 보물들.
그러나.
보검과 갑옷을 제외하면, 내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처분하기도 어렵겠지;
문득 떠오르는 여자가 있었다.
‘레나에게 전해 줄까?’
동굴에 들어오는 모험가들을 모두살해한 뒤, 그 물건들을 전부 레나에게 맡겼던 게 생각났다.
- 달그락.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친 짓이다.
나는 아직까지, 심정적으로 레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인간이 아편에 중독된 것처럼, 일이 막히자 곧바로 그녀를 떠올린다.
인간은 아편에 의존하며 스스로 망가지지만, 나는 그녀에게 의존하며 그녀를 망가뜨려 왔다.
황제가 암살당했다.
이런 위험한 일에 절대 그녀를 엮을 수 없다.
나 때문에 세 번이나 죽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멀리 떨어져있을 생각이다.
‘레나는 기각. 그다음은.
두 번째 선택지는,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缺을 건너 자유연합으로 가는 것이다.
자유연합에 사실을 알린다.
기스-제-라이의 죽음과 황제 암살에 대해 말한다. 혈액 샘플과 황제의 인장은 중거로 충분하다.
반못제국적인 성격을 가진, 이 암살의 배후에 있는 자유연합.
소식을 전해 준 내게 감사를 표하고 상당한 보답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야.’
나는 별 고민 없이 두 번째 선택지를 기각했다.
일단 거리가 멀다. 엄중한 국경은 어떻게 건널 것인가?
어떻게든 국경을 건너고, 이 비밀스러운 일에 연루된 자들을 만나는데 성공한다고 치자.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기스-제-라이와 자유 연합 의회사이의 거래.
나는 그 거래 내용을 안다.
의회는 영웅들이 잠든 두 묘역을 기스-제-라이에게 팔아넘겼다.
그걸 대가로 암살을 사주했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겠지.’
의회 입장에서는,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저 깊은 땅 아래에 파묻고 싶을 것이다.
해골 하나가 가서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는다?
온갖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 ‘진실’
을 전달하더라도, 그들은 나를 어둡고 깊숙한 곳에 폐기할 것이다.
가진 보물을 몽땅 빼앗는 건 덤.
‘어쩐다.’
세 번째 선택지로 잠깐 엠버 메어를 생각했지만, 기스-제-라이가 죽은 이상 엠버에 갈 이유가 없다.
슬라임을 통해 T&T의 이너 서클에 의탁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내 능력을 본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키우고 싶어 하겠지.
물론, 서클에 온 걸 환영한다며 푸르손의 각인부터 새기려 들 테고.
‘갈 곳이 없어.’
나는 이 세계에서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아무 데도 안 가면 되잖아?’
그렇다.
혼자 가만히 틀어박혀서 세상을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은자隱者가 된다.
이번 삶의 단기 목표를 정했다.
아무도 못 찾을 곳에 꽁꽁 숨어 있자.
습득한 아이템을 숨겨 놓고, 흡수한 스킬을 소화하자.
활용 방법을 연구해 보자.
기스-제-라이에게 받은 스킬을 잘 연구하면 큰 성과가 있을 거다.
에픽 등급인<정수 홉수>야 두말할 것도 없다.
<뼈의 군주>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유니크 등급 스킬.
전쟁이 벌어질 때가 되면 활동을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흡수’할 만한 죽음은 수도 없이 많으리라.
그것만 성실하게 해도, 이번 삶이큰 손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
결심을 굳혔다.
숨을 장소로 가기 전에, 먼저<메마른 지하 묘지>로 향했다.
- 쏴아 아아아.
방울방울 몸에 튀는 폭포를 지나.
- 쿠구구구궁.
철문을 밀고 동굴로 들어갔다.
‘.역시 비었군.’
동굴은 조용했다.
하루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체가 뼈로 뒤덮여 압도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평범한 E급 던전도 아니다.
그저 텅 빈 동굴. 타일 위를 터덜터덜 걸었다. 뼈다귀도 함정도 없다.
철창도 다 열려 있다.
저번 생에서, 레나와 함께 왔을 때모습 그대로.
- 철컹. 철컹.
통로에 늘어뜨려진 쇠사슬을 칼로 툭툭 쳤다. 내 물건을 찾기 위해 곳곳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굴 안에 쇠사슬 소리만 메아리칠 뿐이다.
전혀 눈에 띄는 게 없다.
루비아가 남기고 간 갑옷도, 캐빈애슈턴의 책도 없었다.
‘비밀 공간이 있나?’
깊숙이 숨겨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꼼꼼히 찾을 시간은 없다.
여기도 곧 수색 대상이 될 거다.
오래 머무르는 건 위험하다.
- 쏴아아아아.
동굴을 나와 폭포를 지났다.
물건들은 일단 포기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은신처로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 똑- 또종유석 끝에서 물방울 멸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차분하다.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어둠에 잠겼다.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 한 번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동굴을 더고요하게 느끼게 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하겠지.’
이곳은 내가 잘 아는 동굴.
직경 1미터도 되지 않는 입구가 빼곡히 수풀로 가려져 있지만, 누구보다 쉽게 여기를 찾을 수 있다.
삼 년을 살았다.
처음 일어난 묘지 근처의 동굴.
평범한 동굴은 아니다.
들어와서 처음 출구를 찾는 데만도1년이 넘게 걸린 미로. 천장의 미묘한 기울어짐, 종유석의 모양과 벽의 결은 나만 알고 있다.
루비아와 함께 지났던 통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던 걸루비아는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다.
한 번 들어오면 길을 못 찾고 죽을걸 알고, 박쥐 한 마리 들어오지 않는 죽음의 미로.
동굴 안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 즈음인가?’
처음 루비아를 데리고 왔을 때, 그녀가 쓰러졌던 장소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받쳐 줬었지.
동굴 속 작은 공터.
입구에서 두 시간 거리.
동굴 가운데라 봐도 무리는 없다.
어쩐지 루비아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멈춰 섰다.
짐을 놓았다.
- 철컥. 철컥.
미스릴 갑옷을 풀어 벗었다.
두 마법사의 지팡이와, 황제의 인장과 혈액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챙긴 칼과 창도 모두 가지런히 정리했다. 동굴 바닥에 누웠다. 멍하니 물방울이 맺힌 종유석을 바라봤다.
- 똑- 똑피곤했다. 줄곧 긴장 상태였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의식을 희미하게 풀어 보려고 했다.
생각이 멍하니 표류한다.
궁금증이 끝없이 떠오른다.
‘왜. 나만 안 죽었을까?’
허공을 열고 나타난 잿빛 기사.
그는 칼질 한 번에 듀라한들을 젖은 종이처럼 찢어 놓았다.
황제의 행렬을 오시하던 기스-제-
라이마저 간단히 찢겨졌다.
다른 해골들은 이미 마기에 짓눌려 부서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만 멀쩡했다.
공격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칠흑의 마검을 휘둘렀는데도, 그가휘두른 칼은 그대로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 버렸다.
이유는 짐작도 안 된다. 그 어디에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올 질문이다.
대신 다른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대체 누굴까?’
기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주가 몹시 특이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방식의 세공이었다. 진회색색감도 몹시 낯설었다.
제국의 기사들은커녕, 멀리서 본 마계의 대공들도 그런 갑옷은 입지 않았다.
진회색 갑주 전반에 걸쳐, 기묘한회로가 살아 있는 것처럼 번쩍였다.
‘황제가 죽은 뒤 바로 나타났어.’
황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대체 목적이 뭘까?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예 암살을 저지하지는 않은 걸까.
‘음.
지금 여기서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강해지는 것. 더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조사를 해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해지는 것.
궁금한 거야 끝없이 많다.
허공에 떠 있던 텅 빈 공간의 정체는 뭔지,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황제는 살해당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폐하 만세를 외친 건지.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계속 삶을 반복하고 있는 거지?’
그게 가장 궁금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잠시 보류했다.
아쥬라의 마법사를 둘이나 꺾은 기스-제-라이.
그녀마저, 회귀를 반복한다고 하자 완전히 미친 해골 취급을 했다.
어딜 가서 물어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일단 루프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거기에 맞춰서계획을 짤 수밖에 없다.
‘후.’
질문들을 대충 머리 한곳으로 밀어 넣어 정리했다.
생각을 치워 내자 감정이 올라왔다.
루비아와의 추억이 얽혀 있던 장소라 그런지, 가만히 있자 포근하면서도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든다.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감상에 젖어 있을 때.
- 띠링!
[투창 Lv.l.]
[추적 Lv.l.]
[창술 Lv.l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아.’
슬슬 시간이 되었다. 가엾은 수색대원 셋을 죽이고 흡수한 능력들의 소화가 완료되었다.
_ ? ? ? ?.
一I ?기? .
그들을 찔렀던 칠흑 단검은 아직 도내 손안에 있다.
날은 흑탄처럼 검다. 짧은 검신에 불길한 문양과 글자가 떠다닌다.
‘스치기만 해도 죽었지.’
날에 살갗이 스쳤을 때, 떠다니던글자가 베인 상처로 스며들었다.
글자는 혈관을 찢었다.
피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베인 남자는, 채 두 번을 구르지못하고 숨이 끊겼다.
‘무시무시한 칼이야.’
가져온 그 어떤 명검보다도 훨씬 귀중한 무기일 확률이 높다.
칼날을 내려다봤다.
검은 날 위에, 글자 하나가 빠진 자국이 그대로다.
‘보충은 안 되나.’
남은 글자 수를 살폈다.
다섯 번 정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웬만한 위기가 아니라면, 이 단검은 꺼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창술 Lv.l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허공에 뜬 메시지를 바라본다.
창槍은 낯설다.
거리를 두는 무기.
목숨을 취할 날을 긴 막대 끝에 단다. 접근하기 전에 적을 찌른다. 창이라는 무기의 본성.
자신은 공격받지 않는다. 안전하게타자를 찌른다. 창에 담긴 의지다.
해골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경계나 공포를, 우리는함부로 박탈당해 버렸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죽음이고, 짓밟히고 부서지기 위해 존재한다. 사용하는 무기는 직검과 도끼 정도.
아무도 우리의 거리와 간격, 안전따위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
우리 자신조차도 그렇다.
가져온 창 하나를 잡았다.
- 싁!
허공에 찔러 보았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