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가면 쓴 축복 ⑵
흡수해야 한다.
‘다음이 안 되면 그다음. 언젠가는. 살려 내려면.’
하지만.
다시 만났을 때, 그녀를 살려 낼수 있을까? 지켜 줄 수 있을까?
약속은 어렵다.
암살을 말려 볼까? 그런다고 내 말을 듣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안 듣는다는 게 확인됐지.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
그녀는 내 말을 광기로 취급했다.
루프를 믿지 않았다. 미친 해골이 좋다며 흥에 겨웠다.
호감도가 을라갔다.
믿기 어려운 이 상황을 전달하면네크로멘서는 뭐라고 대답할까?
허공을 열고 나온 의문의 기사가,
그녀를 살해한다고 하면 어떨까.
뭐가 나오는지, 내 눈으로 꼭 한번 봐야겠다며 웃겠지. 깔깔거리며 한참 즐거워할 게 분명하다.
호감도나 한 번 더 올라갈 터.
미친 해골 취급이 더 심해지겠지.
경험하지 않아도 뻔하다.
어떻게든 기스-제-라이를 말리는데 성공한다면? 아니, 황제의 행렬을 방해한다면 어떨까.
‘아니, 뭘 해도 불확실해.’
황제 살해를 시도하지 않더라도,
잿빛 기사는 정해진 시간에 그녀를 죽일지 모른다.
동굴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때, 허공을 열고 나타나 네크로멘서를 살해할지도 모른다. 그 어디라도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지금 머뭇거리면.
약간의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기스-제-라이 하나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죽음들.
정해진 기록들.
이 고정된 루프 속에서, 오직 나하나만이 변수로 기능하고 있다.
바꾸려면,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
잿빛 기사를 상대할 정도로.
그녀의 정수를 얻어야 한다.
유지를 이어받는다.
다시 되뇌었다.
‘다음이 안 되면 그다음.
언젠가는 반드시 지켜 준다.
몰염치한 핑계를 대고, 그녀를 빨아들인다.
- 우우우우응!
그녀에게서 빨아들이는 초록빛 정수는 다른 시체들의 것과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 띠링!
[에픽 등급 스킬: 정수 홉수 Lv.l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범위 (1) 로 확인되었습니다.]
[조정 프로세스 완료.]
[흡수를 허가합니다.]
_ O O O Q 0 0-1기 I一"I I I ? ?
빛이 온몸으로 서서히 흩어진다.
[전승 완료까지: 23:59:59.]
소화의 다른 이름일까? 전승이라.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남은 시간이 뜬다.
이제 상태창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건 뭘까.
잿빛 기사가 공격해 올 때 생긴 투명한 창이 신경 쓰였다.
‘으음.
아까부터 계속 가만히 떠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상태창과달리, 어떤 메시지도 없다.
기스-제-라이의 유해를 흡수하며투명한 창에 손을 가져갔다.
스윽, 하고 슬쩍 만져 보는 순간.
- 쑥!
!”
- 달그락!
나는 깜짝 놀라.
순간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창을 만지던 손가락이, 투명한 창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글자가 적혀 있어야 할 투명한 창에, 아무것도 안 뜬 것 같아 만져보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공간.
글자가 적힌 상태창과는 달랐다.
부피감을 가진 공간이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다행히 공간 안으로 쑥 들어갔던 손가락뼈는 멀쩡히 붙어 있다.
‘다시 확인해 봐야겠군.’
좀 더 조심스럽게 ‘공간’을 향해 다가갔다.
가만히 보고 있었다.
대충 윤곽이 잡혔다.
- 스윽.
천천히 손가락 끝을 공간 안으로 밀어 넣어 보았다.
‘.정말 놀랍군.’
들어간 손가락은 창 안에서 아주 작게 표시됐다.
1/10 정도의 크기로 흑 줄어든 것같았다.
물 안에 무언가를 넣었을 때, 굴절되어 보이는 게 몇 배는 부풀려진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창’의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윤곽이 더욱 더뚜렷하게 느껴졌다.
‘실체가 있다.’
손으로 천천히 늘러 보기도 했고,
살짝 잡은 채 늘여 보기도 했다.
‘공간. 마법인가?’
고블린 부락의 직스키세스 붐텅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머드캐시가 만들었다던, 금화가 끝없이 들어가는 주머니.
‘이건. 비슷한 공간 주술인가?’
- 쨍그랑.
바닥에서 칼을 한 자루 주웠다. 근위대가 쓰는 무기답게, 서늘할 정도로 잘 벼려진 멋진 보검.
칼끝부터 안으로 넣어 보았다.
- 스육!
칼 역시 1/10 정도로 줄어들며 놀람게도 안으로 쑥 들어갔다.
‘대단한 마법이군.’
이 공간을 움직일 수 있다면,
널려 있는 다른 보물들을 상당수 쓸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다 버리고 가기에는 몹시 아까운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하지만 직접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곳은 황제가 암살된 장소.
한가롭게 왕복하며, 어딘가에 이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는 식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군대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까.
‘꽤 들어갈 것 같은데?’
나는 이 기이한 공간을 다루려고잠시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근데. 언제 이런 게 생겼지?’
떠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잿빛 기사의 등 뒤.
허공에 수많은 칼날이 소환될 때.
그 칼들이 나를 꿰뚫고 지나갈 때쯤 생긴 것 같다.
스윽.
- 쑥!
손가락이나 칼을 넣었다 했다 하며, 안에서 아래위로 꼼지락거려도 보았다.
공간은 고정된 채 그대로였다.
통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음. 역시 안 되나.
윤곽을 느끼는 데는 성공했어도,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만두자.’
포기하기로 했다. 전혀 짐작이 안되는 현상. 계속 여기에 집착해서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언제 황제를 찾는 군대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허공에 떠 있는 ‘공간’ 너머.
바닥에 놓인 기스-제-라이의 유해가 비친다.
‘일단 홉수부터.’
그녀의 유해에 손을 뻗었다.
- 우우우우웅.!
一 띠링!
[두개골을 이식한 대상입니다.]
[특수 조건을 충족합니다.]
[유니크 스킬: 뼈의 군주 Lv.l을흡수합니다!]
[패시브 스킬입니다.]
[스킬 레벨 상승에 따라, 다음 효과가 단계적으로 부여됩니다.]
- 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력이 높아집니다.
- 전투 중 상대의 뼈를 강탈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강탈 범위 및 확률이 증가합니다.
- 점점 더 복잡한 구조의 뼈를 조립할 수 있게 됩니다.
-<종족: 해골>의 당신에 대한 기본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부여되는 기본 호감도: 5그 아래로 몇 개의 메시지가 추가로 더 떴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해골을 훈련시킬 수도 있고, 통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들.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군단.
‘내 부대를 만들 수 있는 건가?’
물론 기스-제-라이처럼 거대한 군단을 만들 욕심은 없다.
그렇게 행동하는 게 성격에 맞지도 않는다.
쓰러지면 나 혼자 쓰러진다. 다른 망자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은근한 기대와 놀라음이 솟는 건 사실이다.
시간을 들여 발전시키고 이모저모로 천천히 연구해 본다면, 분명 굉장히 강력하게 활용될 것 같은 능력이었다.
아직은 막연했지만.
기스-제-라이의 유해는 계속해서빛을 뿜어냈다.
반으로 갈라진 그녀에게 나오는 초록빛이, 온몸의 뼈로 끊임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집중했다.
정수 흡수를 계속했다.
- 띠링!
[뼈를 공유하는 대상입니다!]
[홉수 효율이 대폭 상승합니다!]
[홉수 스탯 제한이 50% 상승합니다.]
[스탯 제한: 75]
[민첩 1을 홉수합니다!]
[체력 1을.]
[지혜 1을 홉수합니다!]
[힘 1을.]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23:59:59.]
정수 흡수 Lv.l로 스탯은 50까지밖에 가져가지 못한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특수한 규칙이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뼈를 공유하는 대상이라는 건가.’
십여 분이 지났다. 총합 10이 넘는스탯을 뽑아내고서야, 그녀에게 더이상 빛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다시 돌아봤다.
아직.
초록빛은 수도 없이 많다.
‘서두르자.’
시간이 제법 지체됐지만, 여기 있는 건 어떻게든 다 먹어야 한다.
영주의 군대가 오더라도.
심지어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공격받아서 소멸한다고 해도.
지금 이곳을 놓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더 홉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만날 수는 없어.’
갓 죽은 수많은 시체가, 모두 나보다 강한 존재들.
주위에 손만 뻗으면 뭐가 오르든 일단 룰렛이 돌아간다는 것.
그런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다.
기스-제-라이의 정수를 흡수하고나자 상황이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
머리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지혜가 올라간 덕분일지도, 혹은 거리낄 게 없어져서인지도 모른다.
‘모조리 빨아들이자.’
나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했던 자들은.
먼저 두 마법사.
이 세계에서, 고작 백 명도 되지않는다는 아쥬라의 마법사.
그들의 정수를 흡수한다면, 내가마법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마법사들은, 형체도 없이 핏자국으로만 남아 있다.
혹시나 해서 다가갔다. 하지만.
‘없군.’
주의 깊게 한차례 살폈다. 남아 있는 핏자국에 초록빛은 없다.
흡수는 불가능하다.
유해가 남아 있다 해도, 흡수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만약 가능하다면, 마법의 비의를 한 조각이라도 흡수한다면.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게 됐을 텐데.
‘음.
그들의 핏자국에서 눈을 뗐다.
대신 조금 멸어진 곳으로 날아간 ,마법사들의 지팡이를 바라봤다. 정수 홉수는 못 했어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이거라도 챙겨야겠군.’
고위 마법사의 스태프.
가치가 없을 리 없다.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읽은 책이 기억난다.
마법사의 스태프.
아케인 을 응축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보통 나무로 안 된다.
묘목 때부터 특별히 거듭거듭 축성된 ^무.
특별한 지역에서 자라는 종種을 쓴다. 원소의 힘을 모아 주는 오망 성을 그린다.
자라는 동안.
끊임없이 마력이 부여된다.
그렇게 자란 묘목은, 나무라고 부르기 어려운 특별한 물질.
강도剛度부터 예사롭지 않다.
전설의 명검 정도는 되어야 베어볼 만하다.
그를 중명하듯.
스태프는 마법 폭발에서도 살아남아서 형체를 보존하고 있다.
두 자루의 스태프를 바라봤다.
- 스으으으,하나는 끝에 푸르스름한 냉기가 맺혀 있다.
북쪽 끝의 냉기를 수백 차례 압축한 듯한, 서늘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스태프. 흰 수염의 마법사가 쓰던 물건이다.
‘에레포르라고 했나?’
다른 하나는.
에레포르의 지팡이와 달리, 이곳저곳이 구불구불한 스태프였다.
끝에는 커다란 삼각의 화염석이 박혔다.
전설의 피닉스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멋들어진 스태프다.
‘한눈에 봐도. 보물.’
정 사용 방법을 모르겠다면, 곤봉으로 써도 훌륭할 것 같았다. 냉기와 열기가 은은히 감도는 곤봉.
‘가볍기까지 하군.’
마법사의 지팡이를 전부 챙겼다.
- 붕! 부응!
나는 스태프를 들고 허공에 이리저리 몇 번 휘둘렀다.
‘기분 괜찮은데.’
내가 마법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들었다. 군대가 몰려와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에게는 그냥 엄청 단단한 나무 지팡이에 불과하겠지만.
다행히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만지면 폭발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스태프를 양손에 들고 근위기사단장에게 다가갔다.
빛.
기스-제-라이 다음으로 강렬한 빛이 그녀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초반에 듀라한들에게 합공을 당해 사망한 단장.
투구는 이미 벗겨져 있었다.
긴 금발이 검은 마검에 잘려 주변에 흩뿌려져 있었다.
마검에 베인 그녀의 목은, 시체에서 몇 걸음 곁에 떨어져 있었다.
잘린 수급의 표정은 딱딱하다.
경악이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비바람을, 혹은 사막의 모래폭풍을 거쳐 가는 것처럼 살짝 찡그린 채로 날카롭게 굳어 있다.
수십 년에 걸쳐 굳어 온 표정.
삶을 모두, 저런 표정을 짓고 보냈을 것 같은 여자였다.
그녀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혹은 대해야 했던 방식을 알 것 같았다.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일단 갑옷.’
그녀에게 다가간 건, 일단 갑옷을 챙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 투툭!
흉갑, 완갑, 각반까지.
미스릴 갑옷의 한 부분 한 부분을목 없는 몸에서 전부 벗겨 냈다.
‘아름답군.’
처음에 봤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잡던 갑옷이었다. 투구까지 갖춘 풀 플레이트 세트는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