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71화 (71/458)

72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5)

“.몰아세우시네요. 묶어서 제 마음대로 끌고 갈 수도 있어요.”

레나가 나를 위협했다.

손목에서 홀러나온 건 길고 반투명한 와이어였다.

다용도 와이어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뱀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그 움직임에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며칠 전에 본 네크론 감독관을 죽인 뱀 문신이 떠오르며, 문득 긴장이 온몸의 뼈를 타고 흘렀다.

한쪽에 놓인 칼을 잡은 건, 그 탓이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무심코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눠 버렸다.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민망함을 덮기 위해 아무렇게나 길게 말을 내뱉었다.

“뭘 망설이는 거지? 길드에서 시험도 잘 끝났을 거고. 넌, 계속 올라갈 일만 남은 것 같은데.”

“하아.

긴 한숨을 쉰 뒤, 체념한 어조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험이 다 끝난 건 아니에요.”

“더 해야 할 게 있나?”

“제가 길드에서 올라가는 걸 원하신다면, 도와주실 게 있어요.”

“말해 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홀러나왔다.

“기사님을 꼭 그들에게 데려 와이^

한다고 하더군요.”

당황했다.

“나를 말인가?”

“네. 구체적으로 언급했어요. 함께 오실 건가요?”

“나는.

“그들은 알고 있었어요. 인간이 아니라는 거 말이에요.”

‘알고 있다고?’

T&T는 인간의 길드다. 녀석들이 갑자기 나를 원하는 건 이상하다.

정보 길드이니 내 정체를 아는 건 그렇다 쳐도, 정체를 알고도 나를 원한다는 건 더욱 이해가 어렵다.

내게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걸까.

“가시겠어요? 자세한 사항은 저도 몰라요.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 들은 게 아니니까요.”

“아무 설명 없이 날 데려오라는 말만 했다는 건가?”

레나가 어쩐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와 시간을 말해 줬어요. 마지막 절차라고 했고요.”

“네가 간부가 되는?”

“이 절차를 거치면, 지부장 자리정도는 ‘남아돌 거’라고 했어요.”

레나는 미래형에 미묘하게 강세를 줬다.

“남아 ‘돌 거라’고?”

“그게 불길한 점이죠. 무슨 말 을하고 싶었던 걸까요?”

44 ? 으.”

■? m ?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감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지금 저랑 같이 가는 거, 돌이킬수 없는 선택이 될지도 몰라요. 감이 안 좋아요.”

레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감이 좋다. 지금껏 그녀의 말을 따라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반면 납골당에서는 끝까지 말을 안 들어서 레나를 고생시키고, 결국 알수 없는 푸른 갑옷의 기사에게 몸에 반으로 쪼개져서 죽었다.

‘관둘까?’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나아가 보고 싶었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알고싶은 것들이 많았다.

이쯤에서 과감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도망치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네 길드 커리어는 끝장일 거다.”

촉촉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깟 길드, 별로 상관없는데.

‘상관없다고?’

내 쪽에서 상관있다.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어<시나리오 클리어>를 달성할 경우,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 알고 싶었다. 꺼리는 레나에게 억지를 썼다.

“이번에는 내 느낌대로 가 보자.”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확신은 힘들다. 악의를 갖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왜 부르는 건지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최악의 경우,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냥 죽으면 된다.

‘해쳐도 나만 해치겠지.’

길드는 시험을 치렀다. 레나를 한번 온전히 놓아주었다.

굳이 다시 불러서 해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거 알아요? 가끔 보면. 길드활동을 하고 싶은 건 제가 아니라 기사님 같아요.”

“농담이 심하군. 아, 원장이 사라졌는데.

“원장님이요?”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원장실도안 보고 곧바로 내 방부터 찾아온 모양이었다.

“ ? 으.”

一 xn ?

레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도 안 하나?”

“미심쩍은 게 있어서. 최대한 빨리 출발하죠. 동생 얼굴만 보고.

챙길 것만 금방 챙길게요.”

날이 밝았다. 마차에 올랐다. 슬라임이 마련해 둔, 우리가 계약해서 전용하는 마차였다.

방향은 북동. 레나가 길을 알았다.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 덜커덕. 덜커덕.

겨울의 햇빛은 창백했다. 땅을 녹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언 땅은 굴곡이 되었고 우리는 혼들렸다.

옆을 바라봤다.

레나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무릎에 따듯한 담요를 덮은 채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

덜커덕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그 자세가 편한지 두어 시간 동안을 계속 그렇게 기대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잠들었는지 혹은 잠든 척을 하는지 더 이상 판단할 수는 없다.

짧은 시간, 그녀는 그만큼 변했다.

그녀의 3개월 동안 내 20년과 비교하기 힘든 큰 변화가 있었다. 더는 보호해 주거나 키워 주는 입장이 아니다.

문득, 무언가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레나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같은 눈빛이었다.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던졌다.

“아직 인가?”

“한참 남았어요. 그냥.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앞에 표지판이 보였다. 수도로 가는 길과,

동부 산맥으로 가는 길로 나눠졌다.

우리는 그 사이로 갔다.

인적이 드물어졌다. 새소리만 가끔 들렸다. 사람은 없었다. 산길을 지나고 황야를 지났다.

양옆에 네모난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레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네요. 이제 곧 도착이에요.”

양쪽에 돌무더기를 가득한 도로를 얼마간 지나서, 레나가 말했다.

“여기서 내려 줘요.”

마부는 마차를 한쪽에 세웠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막 어두워지는 하늘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시간 때문만은 아닌것 같았다. 이 장소에는 태양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으음.

커다란 석재 더미가 도로 양쪽으로 빼곡해 미처 보지 못했다. 도로 옆에 움푹 파인 대분지가 있다.

규모는 웬만한 콜로세움 다섯 배.

인간을 위한 장소가 아닌 느낌이다. 규모와 크기가 그러했다.

“이쪽이에요. 약속 장소.”

레나를 따라 걸었다. 아래로 가파른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은 수직으로 뚝 꺼져 내려갔지만 중간부터는 계단식이었다.

레나는 그 절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바위를 몇 번 연달아 디뎌 내려간 뒤중간 지점에서 손짓을 했다.

“내려오세요.”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나를 불러낸 무리는 무슨 짓을 할생각인 걸까. 목적과 정체가 무척 궁금해졌다.

당장이라도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장소에 대한 불안이나후회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지.”

곳곳에 돌출한 바위를 붙잡고 내려갔다. 내려가며 본 절벽 곳곳에 거대한 동공이 있었다.

‘음.

자연적인 동공은 아니었다. 끌과정으로, 먼 옛날 정성 들여 깎고 다듬은 석굴인 것 같았다.

석굴들에는 기둥과 지붕이 양각되어 있었다.

‘마치 집 같은데.’

죽은 자를 위한 무덤 같기도 했지만, 산 자가 기거해도 전혀 무리 가없을 정도로 석굴들은 크고 깊어 보였다. 어둡고 깊은 안쪽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 쿵.

중간 지점에 발을 디뎠다. 기다리던 레나가 지나가는 둣 뱉었다.

“망토는 거추장스러웠나요?”

“타 버렸다.”

“갑옷은 줄곧 입고 계시네요.”

딱히 해 줄 말은 없었다.

레나는 됐다고 하며 앞장서 갔다.

우리는 그때부터 계단식으로 깎인 절벽을 뛰어 내려갔다.

경사는 가팔랐지만 계단 하나하나가 무척 넓어 내려가기 쉬웠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바위 곳곳에 새겨진 낯선 글자들과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구경했다.

“.신전 같군.”

“그렇죠? 별로네요.”

레나는 도형들을 흘끗흘끗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신을 안 믿나?”

“알지도 못하는 기만자의 호의에기대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레나의 말을 홀려들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 거대한 분지는 볼수록 누군가를 섬기는 신전 같았다.

바위로 만들어진 커다란 조각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거대한 사자, 뱀, 곰. 대부분 쩍쩍 갈라졌고 반쯤은 무너져 있다.

계단이나 석굴, 절벽 자체도 마찬가지다. 지축이 마구 뒤틀려, 찌그러지고 기울어지고 폭발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래전, 아주 커다란 지진이 있었던 장소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사자, 뱀, 곰 조각들이 아련하게 눈에 익었다. 어떤 돌에는 커다란 트럼펫이 조각되어 있다.

‘저건.’

레나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슬라임에게 받고, 내가 그냥 줘 버린 흑색 비취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것 역시 트럼펫 모양. 크기는 달라도 모양은 비슷했다.

‘연관이 있는 건가?’

생각을 끝맺지 못하고, 분지 가운데에 섰다. 거기엔 거대한 돌로 된 커다란 단이 있었다.

절벽에 빼곡한 석굴들에 일제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늦지 않게 왔어요.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어요.”

“이건 무슨 단일까.

“제물을 공양하는 제단이군요.”

거대한 단을 바라봤다.

가로세로가 15미터는 훌쩍 넘고,

높이가 5미터는 될 것 같은 계단식제단이 었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치러지지 않은 둣, 혹은 아주 옛날에 치러진 듯핏자국도 시체도 없었다.

거대한 계단 한 칸마다, 별자리가 움직인 성흔星疫들과 기하학적인 무늬들만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건 이상하게 멀쩡하네.”

다른 조각과, 절벽들과 달리 제단만은 손상되지 않은 채 반듯했다.

재질도 다른 것 같다.

“불길하기 짝이 없네요, 정말.”

우리는 그 제단에 가서 섰다.

그때, 달이 떴다.

흠택 젖은 만월滿月이 대분지의하늘, 그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원형 경기장 곳곳에 있는 무너진 조각들이 촉촉한 달빛을 받았다. 일제히 조각들에 생명이 부여되어, 마치 오물오물 움직이는 듯했다.

- 달그락.

나는 깨달았다.

조각들은 너무 조악한 데다 너무작았고, 실체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몰랐다. 달빛을 받은 조각들을 보자 그제야 느낌이 왔다.

여기는 마왕의 제단.

단정왕端正王 푸르손.

그의 신전이다.

신장 30미터의 검은 곰, 아인슈타인을 타고 다니며 사자의 머리를 하고 트럼펫을 불어 대는 마왕.

스물여섯 군단을 한 손으로 지휘하는 전격電擊의 마왕. 이 장소의 부서진 조각들뿐만 아니다. 그의 상징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슬라임이 준 목걸이의 트럼펫.

그리고 그의 서랍 속에서 흘끗 봤던 사자 머리를 한 인간. 모두 푸르손을 상징하는 물체였다.

게다가.

‘마왕의 상징이라면.

조각들의 정체를 깨닫자 연달아 이해되는 게 있었다.

네크론 감독관의 목에 그려져 있던 문신. 비밀을 누설하려 하는 그 남자를 목 졸라 죽이고, 혼을 잡아 삼킨 뱀.

그 뱀 역시, 다른 마왕을 뜻한다.

‘보티스.’

지옥의 육십 군단을 지휘하는 자.

날카로운 뿔, 긴 어금니를 가진 눈먼 마왕.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보면 고통을줄 생각에, 긴 혀를 내밀고 빼곡히 가시가 박힌 온몸을 뒤틀며 즐거워하는 추악공醜惡公 보티스.

네크론 감독관의 목에 그려져 있던 문신은 그의 모습을 조악하게 재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네크론은 보티스,T&T는 푸르손의 영향 하에 있다는 건가.

머리가 복잡했다.

‘마왕들이. 이미 인간계에 손을 뻗은 거라면.’

마왕 강림은 10년 후에 일어날 일.

하지만.

세력을 전개해 놓는 것 정도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이 대분지.

상징이 새겨진 조각들과 제단은 한눈에 봐도 매우 오래된 것들.

마왕들에 대한 신앙은.

예전부터 곳곳에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알 방법이 없었을 따름이다.

첫 번째 삶의 20년.

그 시간은, 엉뚱하고 초라한 장소들에서 달그락거리고 부서지기를 끝없이 반복했을 뿐이니까.

비참했고, 그 비참함에서 헤어날 수 없던 20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 터벅터벅.

달빛이 비치는,주변의 수많은 석굴에서 하나둘씩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