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9)
- 달그락!
‘대체 어떻게 된 거였지?’
의문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왜죽었던 걸까. 모든 게 순조롭게 잘되어 가고 있었다.
던전 공략, 모험자 사냥, 그리고 경비병들에 대한 복수.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하는 쾌속 진행을 하고 있었다.
의외의 조력자도 나타났다.
<그라스미어의 불>이라는 놀라운 아이템도 손에 넣었다.
1/20로 희석했어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던 그 액체. 원액의 위력은 상상을 한참 초월했다.
‘대단했지.’
죽었을 때의 상황을 회상했다.
레나를 기절시켰다. 안전한 곳에 강제로 놓아두었다.
노인이 준 가루를 몸과 갑옷에 잔뜩 뿌렸다.
‘불을 막아 준다는 가루.’
던전의 최심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경비병들을 확인했다. 불을 난사했다. 경비들도, 거대한 거미 보스도 새하얀 재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나는 왜 죽은 거지?
‘노인의 말대로 했는데.’
안전거리와 가루의 사용, 모두 철저히 지켰다.
나 역시 뜨거움을 느낀다.
감각이 덜하긴 해도, 위험할 정도의 온도는 당연히 느낀다.
하지만 가루를 몸에 뿌리자, 전혀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어.’
안심하고 계속 불을 난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에서다.
뭔가 잘못되는 걸 느꼈다면, 액체를 그만 뿌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계속 불을 난사했고.
불은 새하얗게 폭발하며, 모든 걸 하얀 재로 만들어 버렸다.
나까지도.
문제는 결국 하나.
“노인이 뒤통수를 친 건가?”
그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불>은 진짜였다.
세상에 그런 불길이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새하얗게 폭발하며 공기에 반응해가는 불길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71?ㅌ 7]■ㅘ?>.,
노인이 뿌리라고 한 가루.
몸에도, 갑옷에도 잔뜩 뿌렸지만,방염 효과 따위는 전혀 기대할 수없었다.
사실, 그런 불길 앞에서 방염이 가능한 물질이 있을까?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왜 노인을 믿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노인의 <연기>에 속은 건가? 제부인 을 팔아먹은 그 연기에.
<불>이 가진 아우라가 너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p분노가 슬쩍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뭐 하러노인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 가루의 진짜 효과는 뭘까?
멱살을 잡고 제대로 물어볼 생각이다. 사실 그 불이 없었다면, 놈들을죽이는 것조차 어렵긴 했을 거다.
어쨌건 불은 진짜였다. 다시 만나서, 그걸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양초처럼 녹아내리던 내 갑옷이 머릿속에 스치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레나는 잘 살아남았을까.’
심층부에서 폭발한 불길은 보스 존을 가득 메웠다. 그도 모자라 바깥통로로 폭발적으로 번져 나갔다.
그녀는 석벽 안쪽에 숨겨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안쪽에서 열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았을까.
나와는 다른 시간선에 있는 그녀를 상상한다.
모든 게 다 바짝 구워져 버린 보스존에서, 아이템이라도 좀 챙긴다면 좋을 텐데.
은화가 녹아 버렸다고 해도, 은괴銀魂 형태로 가져가면 되겠지, 뭐.
- 덜컥.
회상을 슬슬 정리한다.
나는 고개를 움직였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본다.
고요한 동굴이다.
이번에도, 무덤이 아니다.
모포 위에 잠든 레나를 바라봤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루비아는 영영 없어진 건가.’
그때.
一 띠링!
익숙한 소리가 울린다.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 ]
[해골병사 Lv.l(88)]
[체력-34 힘-42 민첩-41 지혜-13]
[잔여 포인트: 14]
이제 이것도 익숙하다.
죽을 때마다 모든 포인트와 스킬,특전이 보존되어 다시 살아난다.
그 사실에 더 이상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확 쌓인 잔여 포인트를 보자, 죽고다시 살아나는 것도 의외로 할 만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 던전으로 들어갈 때는,
레벨 1 상태. 거미 몇 마리를 죽이고 레벨이 금방금방 올랐다.
거기 더해서 D랭크 던전 보스와 흉악한 경비들 열 명을 죽이자, 레벨이 한 번에 대폭 오른 것이다.
‘.또 할까?’
계속 드는 유혹이다.
몇 번만 반복한다면 금세 스탯이어마어마하게 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회귀 시점이 달라져 버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위험 부담이 크다. 회귀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내기 전까지 그런 짓은 무리다.
일단,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스탯창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레나에게 시선이 갔다.
‘레나는 나보다 네 배는 빠르게 스탯이 올랐었지.’
레나의 상태창을 띄워 보았다.
- 띠링!
[이름: 레나]
[도적 Lv.5]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11]
- 레나는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처음으로 돌아왔군.’
레나는 처음 그대로다. 그녀의 스탯은 누적되지 않는다. 나의 회귀와 별개로 간다.
호감도도 마찬가지.
조금 아쉽고, 씁쓸하다. 내 쪽에서는 그녀에 대해 많은 걸 경험했다.
함께 수많은 인간들을 죽였고, 산길을 걷고 던전을 탐험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눴고 장난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를 본다.
몸도, 마음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로 되돌아가서.
- 띠링!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눈앞에 다른 메시지가 떠오른다.
[사망 기념관]
[계승된 이후 여섯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1. 네크로멘서의 연인2. 불조심 강조 주간(New!)
새하얀 불에 녹아 죽으셨습니다.
무섭죠? 마음속에 <불조심>이라고 적어 넣으세요.
화염 저항력이 25 상승합니다. 단,마법으로 만들어진 화염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 이 특전을 선택할 경우, 1시간동안 B랭크 이하의 화염 데미지를입지 않습니다.
‘2번을 선택해야 되나? 어차피 사령술사를 만날 일도 없으니.
그 순간.
- 띠링!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응급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 특전이 선택됩니다.
‘.그랬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아예 다른 특전을 선택하는 게 불가능하다.
나를 향한 사령술사들의 호감도가잔뜩 올라간다는 이 웃기는 특전.
특전을 강제로 장착한 채, 뼈를 달싹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레나를 바라봤다. 잠꼬대도 없이 조용히 잔다.
이번에는 내가 조용히 있어서 그런지, 잠을 설치지 않고 깊은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다.
그녀가 한창 자는 동안 던전에 있는 책을 읽었다.
캐빈 애슈턴의 책 두 권을 읽자 다시 지혜가 2 올랐다.
‘역시 되는군.’
[이름 : ]
[해골병사 Lv.l(88)]
[체력-34 힘-42 민첩-41 지혜-15]
[잔여 포인트 : 14]
체력에 7, 힘에 3, 민첩에 4를 배분해 보았다.
[체력-41 힘-45 민첩-45 지혜-15]
‘이 정도면 괜찮겠지.’
스탯만 놓고 보면 어디서 그리 꿀리지 않을 거다.
인간들도 비슷하다.
레벨은 20, 30이 넘으면 잘 오르지 않는다.
이 정도 능력치는, 인간 중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정도일 거다.
괜히 좀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죽은 서큐버스님과 루비아, 레나를 생각하자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단순한 능력치는 을라갔지만 나는 조심성도 부족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혜를 올려야 했나? 뭐, 캐빈 애슈턴이라는 녀석의 책을 좀 더 찾아서 읽으면 좀 나을지도.’
그때 였다.
“끄으응. 잘 잤다.
레나가 서서히 깨어났다. 푹 잔 듯하다.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 그녀를 무척 경계하던 게떠올라 괜히 우스워졌다. 살짝 탄식을 뱉으며 품을 뒤지려 한다. 나는 그 전에 레나를 보고 말했다.
“난 널 믿어.”
“.네?”
밑도 끝도 없이 엉뚱한 말이었다.
레나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녀를 배려하지 않고, 그냥 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널 그냥 믿는다고. 난 네 편이야.
하고 싶은 걸 해.”
설명이 귀찮은 건지 어떤지, 내 심리를 나도 잘 모르겠다.
회귀한다고 말해 봐야 믿지 않을건 당연하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멋대로 말해 버리고 있다.
나는 이 여자를 알고 있다.
유혹해서 데려온 남자들의 목을 어떻게 긋는지 기억한다.
던전에 멍청하게 박혀 있던 날 위해서, 산에 빼곡하게 함정을 깔아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거미굴 앞에서 함정을 치는 모습을내 눈으로 생생하게 보기도 했다.
여긴 우리 구역이라며 씩 웃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가 옷을 어떤 식으로 마구 벗어던지는지, 욕조에 받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는지 기억한다.
어떤 농담을 하고 어떤 장난을 치길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날 모른다.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건, 난 그녀를 믿는다.
과거의 그녀라도 지금의 그녀라도마찬가지다.
- 짤그랑.
“돈은 여기에 다 모아 놨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팔 만한 아이템이 있으면 알아서 처분해라.”
“그걸로 뭘 마련할까요?”
“얘기했지 않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마음에 드는 옷이라도 사든지.”
레나는 눈만 깜빡인다. 영 이해가안 된다는 눈빛이다. 한 손은 아직 품에 들어가 있다.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무섭. 잖아요.”
이미 들은 대사다. 비슷한 상황이니만큼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네가 자는 동안, 내가 성격이 확변해 버리기라도 했나 보지.”
슬쩍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이게 농담인 걸 알려면 이전 생의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건 나에게만 농담이 된다.
“으으.?”
머리 아픈 둣, 이해 안 되는 것 같은 표정이 귀여웠다.
“그냥 갑자기 믿는 거예요? 아무이유도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던전 안에 오래 박혀 있었더니 외로워졌다거나, 뭐 설명할 방법은 많지 않나?”
“하, 하핫. 다른 해골도 많지 않아요?”
나는 어깨를 으족했다.
“유감스럽게도 말이 안 통해서.”
“대화가 중요하신 거군요.
“방식이 어떻든, 대화는 중요하지.”
내가 레나와 나눴던 대화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아무튼 감사하네요. 절 믿어 주신다니.”
눈과 입가에 웃음이 살짝 걸린다.
그 웃음은 처음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아이템 처분은 자신 있어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레나가 펜던트를 꺼내려 할 때, 나는 같은 이야기를 했다.
호감도 상한선이 다시 한 번 오르는 걸 경험하면서 나는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꼈다.
‘속이는 거지.’
이건 레나를 속이는 일이다.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할까? 그렇다면 믿어 줄까?
회귀를 중거할 수 있는 뚜렷한 무언가가 있기 전까지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레나는 아이템을 정리하며 사홀 동안 던전과 도시를 왕복했다.
“입어 보실래요?”
사흘째 되는 날, 그녀가 망토를 사왔다. 예전의 진흥색 망토였다.
“자, 가만히 계세요.
그녀가 내 뒤로 다가왔다.
- 철컥. 철컥.
갑옷이 풀어진다.
나는 군말 없이 몸을 맡겼다.
어떻게 망토를 장착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가 편하게 입히도록 몸을 움직였다.
“멋지네요. 여기 좀 더 머물러 있을까요?”
“아니.”
여기 머물러 있어 봤자 좋은 일은 없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던전 친화도가 올라가면서 이상한일을 겪는 데다가, 푸른 갑옷의 기사가 쳐들어온다.
내가 능력치를 좀 올리긴 했지만 그 녀석의 강함은 차원이 다르다.
문득 그 녀석이 생각나서 레나에게 물었다.
“혹시.
“네, 말씀하세요.”
“이런 문양에 대해서 알아?”
나는 푸른 갑옷에 새겨져 있던 문양을, 인간들의 수첩에 쓱쪽 그리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완성된 그림을 레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바라봤다.
“이거, 푸른 사자 기사단인데요?”
“푸른 사자 기사단?”
“네. 무력으로는 수위를 다투는 제국 기사단이에요.”
기사들의 강함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였나? 전장에서도 한 번도 못 본 압도적인 느낌이었는데.
나는 고민하며 레나에게 물었다.
“뭉툭한 검집으로, 갑옷을 두부 베둣 자를 수 있나? 그것도 아주 천천히 휘둘러서 말이야?”
레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검이 아니라 검집으로 갑옷을 가른다고요? 그런 건 불가능하죠.”
“만약 내가 그런 자를 봤다면? 청회색 머리칼에, 눈처럼 새하얀 검집을 휘두르더군.”
레나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차력쇼나 서커스에 휘말리신 게 아닐까요?”
“아니면.
“아니면?”
“운이 좋으신 거죠. 눈앞에서 제국4검주劍主 중 하나를 보고 살아남으신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