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나른한 눈으로 동족을 잡아먹는 이유 (3)
“우어어.!”
관에 아예 걸터앉자, 녀석이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달려든다.
제 것이라는 걸까.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피한 뒤 방패를 발로 밟았다.
칼로 머리를 뚫었다. 힘을 줘서 그대로 반으로 쪼개 버렸다.
- 퍼걱!
녀석이 쓰고 있던 머리 보호대는 무력했다. 쪼개진 두개골을 다시 붙여 주지도 못했다. 녀석을 쪼개 버린 내 충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一 띠링!
[클리 어!]
[납골당의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F플러스]
[난이도 판정: 자학自虐]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솔로 플레이로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용사 포인트가 100% 가산됩니다.]
‘클리어.? 용사. 포인트?’
나는 용사가 아니다. 그 반대다. 용사를 죽이려는 자다. 내가 왜 이런 문구를 봐야 하는 건가. 저번의 퀘스트 운운하는 창도 그렇고.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글자들이 떠올랐다.
- 띠링!
[F플러스 랭크 클리어: 13포인트]
[난이도 가산: 26포인트]
[솔로 클리어 가산: 13포인트]
[52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띠링!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상점 이용 등급: Novice]
- 다음 등급까지: 52/256[권한이 부족합니다.]
[용사 상점을 직접 이용할 수 없습니다.]
- 등급이 올라갈수록 상점 이용권한이 풀립니다. 이 제한은 초보용사들의 포인트 낭비 방지를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동으로 최적의 특전을 구매합니다. 환경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깜빡인다.
더없이 낯선 글자들이 깜빡인다.
등급 판정. 권한. 용사 상점. 포인트.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다.
글자들은 어딘가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다. 무언가를 기본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당혹에 한참 잠겨 있을 때.
- 띠링!
[자동 산출. 포인트 사용 완료.]
[검술 재능 Lv.l을 획득했습니다!]
[<퀘스트: 수련>이 개방됩니다!]
‘뭐라고?’
재능이라니?
재능, 이라는 게 레벨처럼 습득되는 건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글자들이 계속 이어서 떴다.
<퀘스트 발생!>
[검을 1만 번 휘두르세요.]
[0/10,000]
[보상: 검술 Lv.l]
그냥, 휘두르라고?
고작 1만 번.
고작 1만 번, 칼을 휘두르면 검술레벨이 올라간다고?
제대로 된 스킬이라는 게 얻기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내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둣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한 녀석이 떨어뜨린 바스타드 소드를 주워들었다.
- 부응!
위에서 아래로, 두 손으로 칼을 잡고 휘둘렀다. 눈앞의 공간을 쪼개듯정확하게 반으로 갈랐다.
시야 한쪽에 작은 창이 떴다.
[1/10,000]
‘정말 숫자가 바뀌고 있잖아?’
이걸 당장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다. 검술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게정 말일까. 1만 번 정도 칼 휘두르는 건 몹시 간단하다.
‘빨리 처리해야겠군.’
- 획! 획!
빠르게 대충 휘둘렀다. 제대로 된 스킬을 익히게 된다는 것에 설레서마구 휘둘렀다.
빨리 숫자를 채울 생각이다.
‘음?,
하지만, 숫자가 카운트되지 않았다.
[1/10,00이에서 멈춰 있다.
‘왜 카운트가 안 되는 거지.’
잠깐 고민하다, 처음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던 자세를 취했다.
두 손으로 잡고 집중해서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 부응!
[2/10,000]
이제야 작게 숫자가 표시된다.
‘신경 써서 휘둘러야 되나.’
그래도 크게 까다로운 조건은 아니다. 일단 여기에 집중해 보자. 어느 정도까지 수련으로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는 데까지 해 볼 수밖에.
‘으음.’
왼손으로 검 자루의 끝을 잡는다.
오른손으로 가드 바로 아래 부분을 잡는다.
그냥 이렇게 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내리친다.
- 부응!
[3/10,000]
깔끔한 일격.
그리고 다시 내려친다.
- 붕!
[4/10,000]
[1,502/10,000]
검격을 거듭할수록, 좀 더 정확한자세로 내려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마실 필요도 없고, 먹을 필요도 없다. 잘 필요도 없다.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 그냥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까지 칼을 내려치면 된다.
[2,998/10,000]
[2,999/10,000]
[3,000/10,000]
띠링!
[내려치기를 완료했습니 다. 자세를 바꿔 보십시오.]
‘어떤 자세를 하라는 거지.’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가슴 쪽에 검을 세워 두었다. 그 자세에서 오른발을 내디디며 옆으로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다시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반대편으로 검을 돌려 수평으로 휘두론다.
[3,001/10,000]
[3,002/10,000]
역시 이 방법이 옳았다. 동시에 두 번의 카운트가 올랐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니, 하루가 지났나?
이틀이 지났나?
- 띠링!
[체력이 고갈되었습니다.]
[더 움직일 경우 뼈가 부러질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1.3%]
[9,998/10,000]
남은 횟수는 두 번.
바스타드 소드를 두 번 더 휘둘렀다.
- 부응! 부응!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 뜻뚜루!
[퀘스트 클리어!]
[수련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검술 Lv.l 습득]
뭔가가 느껴졌다. 뼈 마디마디가 쑤신다는 건 이런 감각일까?
‘어차피 쑤실 건 뼈마디밖에 없으니.’
아마 맞을 거다. 생각할 힘도 없었다. 20년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뭔가를 이렇게 제대로,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뭘 해도.
어디에서도.
어떤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된<보상>따위는 받을 수가 없었으니까.
- 달그락.
처음으로 ‘지쳐’ 보는 것 같았다.
몸을 휩싸는 탈력감이라는 건 의외로 제법 달콤했다.
- 털썩.
바스타드 소드를 잡은 채, 바닥에몸을 던지듯 누워 버렸다. 일단 ‘체력’이라는 걸 정상으로 만든 뒤 다음 행동을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 띠링!
[퀘스트 발생]
[검을 3만 번 휘두르세요.]
[0/30,000]
[보상: 검술 Lv.2]
‘이거 참.’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검을 휘두르라고 강요하는 듯한 창이다. 허공에 뜬 글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20년 동안 바닥을 굴러오면서,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워낙 가망이 없었다. 20이 넘어가면서 레벨은 점점 더 올리기 어려워졌다. 30이 넘어가면서는 까마득할 정도였다.
레벨 업.
해골병사가 레벨이 올라간다고 해도, 사실 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다.
모험가들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약했다.
스킬 차이 때문이다.
레벨 업에 따른 스탯은 중요하다.
그 스탯을 강력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스킬.
하지만 인간들을 흉내 내어 칼을 휘둘러 봐야, 나아지는 건 없었다.
스킬을 습득하기는 했다.
하지만.
<되는 대로 휘두르기>
<어설프게 찌르기>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스킬들밖에 습득되지 않았다.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스킬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능하다. 스킬의 위력과 효용이 매우 낮다.
‘언제쯤이었지.’
무덤에서 일어난 지, 5년차 정도였나. 제국과 자유 연합의 인간들이 한창 서로 전쟁을 벌이던 때.
비교적 마물들이 인간의 관심을 덜 받을 수 있던 때.
산속에서 3년 동안 녹슨 칼을 잡고 열심히 휘두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되는 대로 휘두르기’의 레벨이 2에서 5로 올랐을 뿐이다.
세어 보면 1년에 하나씩 오른 셈.
느리다. 느려도 정도가 있는 건데,
내 성장 속도는 너무 느렸다.
마치 네가 감히 어딜 올라가려고해, 라고 꾸짖는 것처럼 성장 속도가 느렸다.
그 수련마저도.
지나가던 회색 곰에게 앞발로 한대 맞고 끝났다.
퍽! 하고 뼈다귀가 다 흩어졌다.
달그락거리며 몸을 모으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내 삶에 어디 하나 고생 아닌 게있기는 했냐만.
그때는 한층 더 참혹했다.
무엇보다 비참했던 것은.
곰 앞에서는.
3년 동안 죽어라 녹슨 칼을 휘두르면서, 힘들게 익힌 스킬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었다.
<되는 대로 휘두르기>
그 아무 쓸모없는 스킬조차도.
지독히 느리게 익혔던 것이다.
구차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검술>스킬 레벨이 올라가는 속도는 몹시 기이할 정도다.
- 붕!
[89,999/90,00이[90,000/90,000]
- 띠링!
[퀘스트 클리어!]
[보상: 검술 Lv.3 습득]
[한 번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검술을 수련했습니다.]
[추가 보상: 힘 플러스2]
- 달그락.
‘또 한 번 해냈군.’
추가 보상에 눈길이 간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고 보너스를 준다.
나는 자거나 먹을 필요도 없다.
체력이 고갈될 것 같으면 검을 아주 천천히 휘두르면 된다.
그 정도는 ‘쉬는’ 걸로 카운트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 털썩.
<퀘스트: 수련>을 마치고, 나는 쓰러지둣 앉았다.
검술 Lv.3.
이 스킬을 익히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모든 시간과 집념을 검술 수련에 집중했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니까.
허공 한쪽에 뜬 숫자.
[89,999/90,000] 같은 숫자들.
이 숫자가 바뀌려면, 한 번 내려칠 때 정확히 자세를 잡고 힘을 다해내리쳐야 했다.
집중을 다해 내리쳐야 했다.
뼈에 과부하가 걸릴 때마다 빠짐없이 쉬어 줘야 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하루에 4천 번은 넉넉하게 내려칠 수 있었다. 절대로 까다로운 조건은 아니었다.
‘아니지.’
그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곤란하다.
내가 굴러왔던 20년을 생각한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쉬운 조건이라고 해야 한다.
- 쌩!
나는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예전과는 달라진 게 한 번에 느껴졌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부터 다르다.
휘두르는 자세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되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기분.
1만 번을 휘두르자 Lv.l 검술을 습득했다.
3만 번을 휘두르자 Lv.2검술을.
9만 번을 휘두르자 Lv.3 검술에더해, 힘 플러스2가 주어졌다.
과거에는 몇 년을 연습해 봐야 이런 스킬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었다면 진작 강해졌을 거다.
- 달그락.
예전에는.
아무리 해도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지금은 그냥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게 숫자로 표시가 된다.
어디까지 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인간들은 설마 다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걸까?
이렇게 편리하게?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인간을 하나 잡아서, 심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쌩!
[269,999/270,000]
[270,000/270,000]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 검술 Lv.4 습득]
[성실하게 검술을 수련했습니다.]
[추가 보상: 민첩 플러스3]
인간을 하나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석벽 안쪽에서, 고립된 상태에서 하는 수련은 너무 달콤했다.
하나하나 올라가는 숫자에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한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을 잡아 와서 말을 섞는 것보다는, 일단 수련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을 잡으러 가지 않는다고 해도, 할 일이 하나 있기는 하다.
두 시간 뒤.
잠시 흘 안에 있던 해골들을 바라본다. 다들 새 얼굴이다.
원래 이<홀>을 점거하고 있던 녀석들은 다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일종의 징벌.
가장 안쪽에 숨어 있던 놈들을, 인간을 마주하는 던전 입구에 던져 놓았다. 대신 입구에서 가까이 있던 녀석들을 몇몇 추렸다. 기관 장치안쪽에 데려왔다.
고생하던 문지기 녀석부터였다. 녀석이 납골당의 ‘핵’에 누워 있게 해서, 레벨을 올려 주었다.
그러자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