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3)
그녀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나를 위한 배려다. 비슷한 말을 몇 번씩 반복하는 건 지겨우니까.
‘이제 또 놈들이 나타나겠지.’
멋대로 이야기를 뱉어 낸 뒤 혼자고민에 빠졌다. 곧 추격자 두 놈이 나타날 것이다.
맞서서 싸울 수도 있지만 지금 빨리 움직이면 먼저 동굴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음. 어쩔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싸움을 굳이 피할 건 없었다.
한 번 이겨 본 상대들이다.
게다가 그때보다 강해졌다. 다시 부딪친다면 더 여유롭게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하게, 먹혔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길에 매복해 있다가 덮치는 거다.
앉아서 숨을 고르는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 여자, 분위기가 방금 전과 살짝 다르다.
일단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단검 좀 줘 보시오.
“아, 네, 여기요!”
루비아가 나에게 순순히 단검을 건넨다.
아니, 순순히라기보다는.
이제 상당히 적극적이다.
자기가 칼날을 잡고 나에게 단검손잡이를 내민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저, 그러니까. 또 뭘 도와드려야하나요?”
“으음?”
당황했다.
‘이게 호감도의 효과라는 건가?’
루비아가 먼저 뭘 도와주겠다고 나서다니. 처음 겪는 일.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창이 떴다.
- 띠링!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l]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20]
- 루비아는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에게서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호감도가 올라가 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기본 스킬]
- 책 찾기 Lv.10- 책 읽기 Lv.10- 베이킹 Lv.4- 고대어 Lv.3- 룬어 Lv.3- 독도법 Lv.3一 예법 Lv.2-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잔여 포인트: 10]
- 배분해 주세요!
‘고대어에, 룬어까지 읽을 줄 안다고?’
다양한 스킬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레벨이. 1밖에 되지 않는 거지?’
내가 볼 수 있는 건 사령술사 레벨뿐이고, 다른 직업 레벨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타인의 상태창을 보는 건 낯선 일, 뭐가 이상해도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상태창을 감상했다.
그나저나.
‘잔여 포인트라니.’
그녀의 포인트를 내가 배분할 수 있다는 건가. 허공에서 ‘잔여 포인트’를 눌렀다. 그러자,[체력-6플러스 힘-5플러스 민첩-6플러스 지혜-12플러스]
루비아의 능력치가 떴고, 옆에 각각 플러스 표시가 떴다.
이걸 누르면 되나.
기묘한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할 수있다면, 포인트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뭐부터 해야 할까.
‘일단.
체력이 너무 낮다. 따라오기 힘들어하던 게 생각났다.
힘과 민첩도 좋다. 하지만 싸움을 시키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일단 체력을 1 올려 보았다.
- 띠링!
[체력 6 -> 7]
효과음과 함께 루비아의 체력이 1올라갔다. 루비아를 바라봤다.
혈색이 조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보고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어, 해골님을 보고 난 다음부터 갑자기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아요.
이, 이상하죠?”
- 달그락.
나는 어깨를 으쪽했다. 다른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나무 아래 피해 있어.”
“아, 네!”
루비아가 나무 아래로 갔다.
“그 나무 말고!”
황급히 소리치며 루비아를 잡았다.
그 나무는 이 근처에서 가장 크긴 하다. 하지만 잠시 후 번개를 맞는 나무다.
- 위이이이잉!
바람이 거세다. 루비아를 적당한 나무 아래 앉혔다. 긴 나무를 주워 날카롭게 다듬었다.
여유롭게 걸어가 산길에 숨었다.
몸을 진흙 속에 묻고 기다렸다.
앞으로 두 놈이 여기로 올 거다.
가만히 기다렸다.
‘너무 일찍 왔나.’
여유를 갖고 기다렸다.
“히히힘!”
말이 다가온다.
- 철퍽 철퍽!
석궁을 든 놈이 지나갔다. 망치를 등에 멘 놈이 다가왔다.
말뚝을 들어 올렸다. 망치를 멘 놈은 비탈길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놈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어떤반응을 보이는지 눈에 선했다.
석궁이 뭐야, 하는 소리와 함께 뛰어내렸다. 전부 같다.
서거! 땅에 발을 제대로 딛기도 전에 목에 칼을 박아 줬다.
이미 위치를 잡은 터. 눈을 감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을 맞은 석궁이 곡꼭대며 목을 감싸 쥐었다. 머리를 진흙에 처박고 괴로워하다 죽었다.
시체에서 석궁을 주웠다.
비탈로 걸어갔다. 언덕 아래로 떨어뜨린 망치 놈은 이번에도 한쪽 팔이 부러져 있었다.
석궁을 발사했다. 두 발을 모두 맞췄다. 어렵지 않았다.
답안을 알고 푸는 문제는 쉽다.
‘산 채로 잡아서, 천천히 심문이라도 해 봤다면 좋았을지도 몰라.’
어렵지 않게 놈들의 목숨을 끊어놓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건 무리였다.
놈들의 목숨이 확실히 붙어 있는 상태에서 제압하려면, 갈 길이 멀다.
목에서 피를 뿌리는 놈들을 빗속에 놓아두고 시체에서 원하는 것만 딱딱 빼냈다. 지갑과 장부와 신분증,
무기를 챙겼다.
다시 한 번 레벨이 5 올랐다. 여기까지는 같은 일의 반복.
‘포인트는 어디다 쓰지.
잠시 고민하다 체력에 1, 힘과 민첩을 2씩 올렸다.
[해골병사 Lv.6(62)]
[체력-30 힘-32 민첩-34 지혜-9]
라고 뜨는 창을 확인했다.
비가 거세다. 일단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번개가 친다. 옆을 돌아보자 루비아는 벌써 곁에 와 있었다.
“아. 괜찮으세요!?”
전과 같이 온몸이 젖어 있었다. 차이점은 호감도 하나.
“괜찮소.”
이번에는 가죽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지지 않았다.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은화를 던져 준다고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다.
루비아를 바라봤다. 손에, 예전처럼 작은 돌을 쥐고 있었다.
- 달그락.
머리를 혼들어 빗물을 털었다.
“동굴로 가지. 아는 곳이 있소.”
루비아는 순순히 따라왔다. 확실히 저번보다 훨씬 빠른 적응이다.
호감 도라는 게 편리하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반쯤 차 있는 수통을 그녀에게 그대로 건넸다.
굳이 물을 더 받는다고 그녀를 비 맞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물이 필요 없다.
그녀 혼자뿐이라면, 반 정도 차 있는 수통으로 충분하다.
십 분 정도 걸었다. 역시 힘들어보이길래, 그냥 안아 들었다.
“어엇.r의외로 별 저항 없이 안겼다.
루비아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태창을 체크했다. 하지만 호감도는 오르지 않았다.
‘이건 아닌가?’
수치가 오르지 않는 행동이었다.
잊어버린다. 여자의 심장 박동은 그냥 놀라서 빨라진 것 같다.
동굴의 작은 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간 뒤 돈과, 영주와, 그녀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 이야기를 나눴을 때, 띠링!
하는 소리가 울리며 호감도가 3씩올라가던 이야기들을 했다.
이번에도 놀라며 눈이 동그래지는 건 같다. 하지만 호감도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변화가 없다.
‘좀 이상한데?’
그녀의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l]
[체력-7 힘-5 민첩-6 지혜-1幻[호감도: 20]
- 루비아는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에게서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호감도가 20에서 오르지 않는다.
아까부터 고정이었다.
“고민 있으세요?”
루비아가 내게 물었다. 경계심 없는 태도다.
네 호감도가 영 오르지 않아서 고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고개를 저었다.
‘흐음.
호감도는 일단 놓아둔다.
어쨌건 지금은, 어디로 움직여야할지가 고민이었다.
저번에는 거칠고 험한 길을 택했다. 인간을 피하기 위해 높고 가파른 산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에는 트롤이 있었다.
‘결국 인간도 못 피했고.’
투창을 든 여섯 명의 인간 남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 외에 또다른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인간을 피한다고 높은 산길로 가느니, 그냥 다른 도시에 묵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짐말도 구하고, 루비아는 도시의 여관에서 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녀에겐 그쪽이 훨씬 편하겠지.
루비아가 말을 다시 걸었다.
“심각한 분위기네요.
지나가듯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트롤에 대해 알고 있소?”
“네! 그게 고민이셨구나.”
“글세. 아는 대로 얘기해 보시오.”
“트롤은. 짝을 구하면 평생을 함께한대요.”
혹시 내가 모르는 트롤을 상대하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알고 있을까, 해서 물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짝을 구하면 평생을 함께하는데, 그게 어쨌다고?
심드렁하게 받았다.
“그런가.”
루비아는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주로 동굴에서 함께 지내지만.
짝이 살해당하면 미쳐 버린대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공격한다고 들었어요.”
으음, 짝 잃은 트롤이었나.
산길에 놓여 있던 덫을 해체 했던 게 떠올랐다.
덫을 그대로 놓아뒀다면 트롤이 걸려들었을까? 몸 전체가 철사로 된 그물에 감겨, 공중에 매달리게 되는 덫이었다.
가만히 놓아둔다면 트롤 문제는 해결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덫이 작동한다고 해도, 결국 사냥꾼들이 문제다.
트롤에게 금세 찢어지긴 했지만,
여섯 명의 사냥꾼 역시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닐 거다.
고민에 잠겨 동굴을 걸었다. 이번에는 루비아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온다.
‘호감도를 올린 효과인가?’
조금 귀찮았지만 입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길을 서둘러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호감도를 올린 건 나다. 책임감 있게 얘기를 들어 줄 필요가 있다.
“새로 등극한 황제 있잖아요.”
“얘기하시오.”
누군지는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의 황제다.
해골로서 살아왔던 20년의 대부분을 그 황제와 함께했다.
물론, 함께 했다는 건 같은 시대에 있었다는 것 정도다.
인간의 황제가 나를 알 리가 없다.
나는 그의 병사도 아니었으니까. 이름이 떠을라서 추임새를 넣었다.
“클레멘스 2세 말인가?”
“네, 맞아요. 엘튼 클레멘스. 첫 칙령이 뭔지 아세요?”
“모르겠소.”
그의 첫 칙령 따위는 모른다.
멍청한 공화주의자들을 모두 공격하라! 아쥬라의 건방진 마법사들을 학살해라!
뭐, 이런 건 아니었을 거다.
아마 별거 아닐 거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서.
“모르시는구나!”
루비아의 입에서 감탄이 터진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유쾌해 보인다.
생각하면 나는 화폐에 대해서도,
인간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도 이모저모로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다.
드디어 모르는 걸 알려 주는 게 기쁜 모양이다.
활짝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숫자 외의 다른 이름으로 달을 칭하는 행위를 공문서에서 일체 배제한다.>래요. 행정 효율이 떨어진다나.”
클레멘스 2세는 그 효율을 올려 징집을 한다. 군수품을 모은다. 그리고 9년에 걸친 전쟁을 벌인다. 효율이라는 건 재미있는 단어다.
“음. 세이론의 달과 승천의 달까지 말인가?”
10월은 건국제인 세이론이 태어난달. 11월은 그가 죽은 달이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10월은 세이론의 달.
11월은 승천의 달이라 불린다.
“그런가 봐요.”
과감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세이론을 건드리는 황제라.
“제국은 그를 신성시하지 않나?”
사람들은 세이론 1세의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렇기는 해요. 재미있는 건, 초대황제는 혐신嫌神론자에 가까웠다는 것이에요. 그 남자는 모든 종류의 숭배를 경멸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