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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5화 (5/458)

5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5)

빨간 드레스라도 입고 있는 편이 어울릴 만한 젊은 여자.

로브에 가려진 풍성한 머리카락.

보드라운 갈색의 눈동자.

“망자여! 콜록, 콜록.”

한 시간 전에 들었던 기침.

비에 젖어 굴곡진 몸매가 드러나는 회색 로브.

‘다시 돌아왔다고?’

시간에 갇혀 있는 걸까.

어디 꿈속 빗길에라도 미끄러져 깊숙한 곳으로 굴러멸어진 걸까.

캄캄한 안식도 얻지 못한다는 걸까. 하지만, 그런 불안보다도 먼저 반가움을 느꼈다.

- 달그락.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간 전보다 더욱 친숙하게 보이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여자가 침을 꿀꺽 삼킨다.

입을 열었다.

“사다리는 가지고 올 필요 없소.”

“아악!”

- 펄쩍!

여자가 뒤로 놀라 주저앉는다.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속이고 싶지도 않다.

어쨌건 한 번은 놀라야 하는 일.

손바닥뼈로 흙을 짚었다.

- 철퍽.

흙물이 마구 홀로 들어와, 질척한관 바닥을 발로 디뎠다. 일은 무덤을 올라왔다. 간단한 일이다.

1?I~I?I??!

어두운 한밤. 장대 같은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다시 한 번 갈비뼈 사이사이로 비를 맞아 낸다.

빗방울은 악기 건반처럼 뼈 사이사이를 두드린다. 서로 다른 소리들이 타닥타닥 울려 퍼진다.

- 철픽.

뒤로 넘어진 사령술사 루비아를 바라봤다.

“제, 제 이름은 루비아!”

이젠 내가 그녀를 내려다본다.

“흠! 만나서 반갑습니다, 망자여!”

여자를 계속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복수 타령을 했던 것 같은데.

“그대를 내 복수의 초석으로 삼겠습니다!”

‘똑같다.’

한 시간 전과 같다. 반복이다.

- 우르르 롱!

뭐가 S급이라는 건지, 시나리오라는 게 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레이 루비아>라는 글자가 반짝이는 것까지 동일하다.

그녀의 이름이었지.

반짝이는 글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전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 띠링!

어김없이 효과음이 울렸다.

곧바로 새 글자들이 떴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l]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3]

- 루비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확인을 마치자 글자는 사라졌다.

나는 몇 번 달그락거린 뒤 천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한 시간을 못 살아남았구나.’

나는 문득, 상념에 잠겼다.

서큐버스님을 지키지 못했다.

용사에게 산산이 부서졌다.

죽고 난 뒤 20년 전으로 돌아갔다.

루비아라는 인간을 만났다. 나를 무덤에서 일으켰던 여자. 하지만 그 여자도 지키지 못했다.

해골병사 Lv.36.

20년 동안 힘을 쌓아 왔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 전 내가 보인 모습.

루비아를 지켜 주지 못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무력했다.

수풀 속에 어설프게 숨던 장면. 망치에 부서지던 장면. 눈을 가려도 보일 정도로 생생하다.

그게 현실이다.

‘나는 약하다.’

해골 병사는 몬스터 중에 가장 약하다. 마물의 서열에서도 최하위. 생존력만은 제법.

그러나 나머지는 비참할 정도다.

“해, 해, 해골이. 마, 말을.!”

루비아가 내게 말을 건다. 아까보다 더 놀란 모습이다. 보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놀란 모습.

하지만 나는 그렇게 놀랄 만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이 죽는 걸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해골에 불과하다고 토로하고 싶은 걸 참는다.

아직 나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다.

놀라는 루비아를 보며 고민했다.

‘호감도. 그걸 올리면 저런 모습을 안 보일지도 모르겠군.’

나를 조금 덜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어 줄지도 모른다.

[이번 회자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모든 사령술사와의 호감도 플러스20.

2.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

아직도 눈앞에 떠 있는 이 창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내 말을 잘 따라 준다고 해도, 여기서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한 시간 전에도.

그녀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니다.

처음 보는 내 말에 따라, 수풀 속에 얌전히 숨어 주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눈앞에 떠 있는 글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번 회자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모든 사령술사와의 호감도 플러스20.

2.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

알 수 없는 창.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다. 위협은 곧 닥쳐온다.

‘둔기 류 저항.’

그걸 택해야 한다.

굉장한 이야기다. 둔기 저항을 40씩이나 올린다니. 해골병사의 약점은 기본적으로 둔 기류다.

- 달그락.

몸을 내려다본다. 해골에게 화살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쏘아도 지나가고 만다.

칼도 그리 두렵지 않다. 흘릴 피도,

쏟을 내장도 없으니까.

나를 잡으려면 둔기가 제격이다.

뭉툭한 망치로 몸을 부수고, 두개골을 부수면 된다.

물론.

협조해 줄 생각은 없다.

‘2번.’

루비아를 넘어진 채 내버려 둔다.

나는 2번을 선택했다.

[사망 기념관 2번 특전.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이 적용됩니다!]

글자가 눈앞에서 연기로 변한다.

‘놀라운데.’

처음 겪는 경험이다.

- 스르록!

연기가 움직인다. 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묘하게 안전해 지는 느낌.

[둔기 류 물리 저항이 40 올랐습니다!]

이쪽이 타당하다.

나는 호감도 20의 선택지를 망설임 없이 버린다.

지켜 줄 수 없는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어떤 의미도 없다.

- 달그락.

내게 놀라, 진창에 넘어진 루비아.

못 일어나고 있는 그녀를 본다.

허리에 찬 작은 날붙이가 반짝인다. 하얀 뼈로 된 손을 내밀었다.

“단검을 주시오.”

“아.

루비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찬 단검을 얌전히 내게 내어 준다.

무방비하다면 꽤 무방비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호감도를 올린 것도 아닌데, 가진 유일한 무기를 그대로 내어 준다. 자기가 일으켜 세운 해골이라 신뢰하는 걸까.

“고맙소.”

- 덤석.

그 신뢰를 받아 든다. 작은 단검에 불과하지만 신뢰는 무겁다.

이 날붙이로 녀석들의 목숨을 끊어 놓아야 한다. 집중하자.

건네준 단검은 날카로웠다.

무덤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훨씬 좋은 무기. 해 볼 만할 거다.

“저쪽에 숨어 있으시오.”

이를 딱딱거리며 루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가 아직도 무척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젖은 입술이 떨린다.

“왜, 왜죠?”

“인간 사냥꾼들이 올 거요. 날 믿고 피해 있으시오.”

“그걸. 어, 어떻게 알아요?”

루비아가 더듬으면서도 말을 끝까지 잇는다.

“그냥.”

대충 대꾸했다. 온통 젖어 있는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나를 무덤에서 깨워 준 여자.

억지로 깨워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해골병사로서의 20년은, 마지막 3년을 제외하면 쓰고 건조하기만 했으니까.

그래도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이대로 놓고 도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삶의 첫 단추.

여기서부터 바꿔 보고 싶다.

고작 산적 두 명.

그들에게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용사들에게 서큐버스님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인과도 논리도 전혀 맞지 않지만,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내 말에 뒤늦게 반응한다.

“그, 그냥이라니.

그때 였다.

- 히히 히힝!

다시 한 번 말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푸른 종, 마일로의 울음소리가.

놈들이다.

“빨리!”

루비아에게 소리쳤다. 건너 수풀 쪽을 가리켰다.

단검을 꽉 쥐었다. 근처를 둘러보았다. 폭우에 휩쓸려 밖으로 나온 관이 있다.

‘안식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 획!

안에 든 유골을 멀리 던졌다.

빈 관 근처에 누웠다. 단검을 쥔 손은 관 아래에 숨긴다.

관에서 빠져나온 해골인 것처럼 가장한 것이다.

- 번쩍!

“히히히!”

번개가 쳤다.

산길에서 푸른 말이 나타난다. 시야는 어둡고 땅은 질척하다.

- 우르릉!

개량된 석궁을 들고 있는 녀석. 그가 내 위로 지나가길 기다린다.

- 철퍽.

석궁을 쥔 녀석이 방금 말에서 뛰어 내렸다.

- 철퍽.

- 철퍽.

질척한 땅을 걸어온다. 이제 두 번째라 익숙하다. 놈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있다.

날렵한 걸음걸이.

자세 역시 흐트러지지 않는다. 축젖은 가죽 갑옷은 장애가 되지 못한다. 고작 저 한 놈조차 죽이지 못하고 부서졌다.

녀석이 석궁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겨냥한다. 첫 번째 수색을 다시 시작한다.

- 사각.

녀석은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걷는다. 이번 수색은 비교적 엉성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수색하는 모습을‘보여 주는’ 용도이므로.

함정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함정을 팔 때야말로 가장조심해야 할 때.

놈은 수색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생각에 너무 얽매여 있다.

가녀린 한 명의 여자를 사냥하러왔다. 그 여자가, 혹은 그 여자의 알수 없는 일행이.

어둠이 깔린 수풀에서 매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약자를 사냥할 때는 생각이 게을러진다. 생각이 게을러지는 만큼 발밑은 취약해진다.

나는 그 발밑에서 기다리고 있다.

- 사록.

- 사르특.

갈비뼈 사이로 무덤가의 무성한 수풀이 흔들린다. 질척한 진흙이 등뼈를 파고 들어온다.

녀석이 나를 지나쳤다.

지금이다!

번개가 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 달그락!

곧바로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음?”

- 서거!

슬쩍 돌아보는 놈. 맥박이 뛰는 그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u끄, 끄, 주, 주겨.!”

비명이 제법 감미롭다.

- 파각!

루비아가 건네준 단검이 놈의 목에 제대로 박혔다.

단검을 잡고 비틀었다.

깊숙이 박은 단검을 통해 놈의 박동이 느껴진다.

“끼, 끄이.!”

녀석이 끅끅거린다. 손을 앞으로 휘저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단검을 쨌다.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 푸슈슛!

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구쳤다.

내 두개골과 턱뼈가 온통 녀석 의피로 물들었다. 축축했다.

다시 반걸음 앞으로 갔다. 뺀 단검으로 녀석의 입을 깊이 찔렀다.

- 좌르르.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석궁을 쥐고 있던 녀석이 나동그라졌다.

“뀌, 뀌이이, 끄에에.!”

- 부응!

석궁을 공격한 대가는 호되게 치러야 했다. 석궁의 동료가 뒤에서 거대한 전투망치를 내려쳤다.

- 광!

[둔 기류로 타격 당했습니다. 특전이발동합니다! 둔기류 저항: 4이]

얻어맞은 머리에 극심한 울림이 느껴졌다. 머리가 옆으로 젖혀졌다.

나는 구르며 땅에 내팽겨졌다. 몇 번이고 진흙을 구른 것이다.

- 달그락.

하지만 다시 일어나야 한다. 고통을 참으며 다시 일어났다. 두개골을 붙잡고 뼈를 맞췄다.

- 우두둑!

- 번쩍!

번개가 쳤다. 망치를 휘두른 놈의 얼굴이 보였다.

서 있는 나를 마주한 놈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믿을 수없다는 표정이었다.

- 우르르릉! 광!

번개가 지나가고 천둥이 울렸다.

“아. 안. 부서져.?”

망치를 휘두른 놈이 혼자 흘린 듯중얼거렸다. 망치에 얻어맞은 머리가 계속 욱신거렸다.

통중이 가시지 않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지럼중이 약간 가셨다.

- 번쩍!

“읍, 으, 히, 헉!”

석궁을 쥔 놈이 입에서 피거품을 홀렸다. 놈의 입에 단검을 찌르고마구 흔들었다.

고통이 적지 않을 것이다. 녀석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은 이번에는 웃지 못했다.

대신 신음을 뱉었다.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나쁘지 않았다.

- 우르릉!

“아주 좆 됐네.”

내 앞에 다른 놈이 선다. 망치다.

놈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쓰러진 석궁을 슬쩍 보곤 입가를할았다. 놈이 커다란 제 무기를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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