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27화
227화 마지막 전쟁 (1)
신수에게 이명이 주어진 것은 탑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명은 탑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쓰인다.
다칼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명 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남들에게 각인시키며 생을 연명해 온 탑의 방랑자였다.
그리고 마침내 방랑자의 삶에 마침표를 찍으며 더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신수에게 이명이 주어진다는 건 새로운 변화를 뜻했다.
어느덧 다칼의 몸에서 회색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감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준석은 감각을 통해 다칼의 힘이 강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신좌 한 명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야.’
감지되는 힘은 하급 신좌 수준에 불과했으나 애초에 신수가 신좌에 가까운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커허엉!”
-지금이라면 그 누구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온몸에 힘이 넘쳐흐른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더니 상처까지 치유됐네.”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 뒤늦게 다칼이 자신의 몸을 살폈다.
잠재된 힘이 개방되며 회복력의 수준도 차원이 달라진 듯했다.
일반적인 상처도 아니고 무려 신좌에게 입은 상처가 금방 나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말하긴 우습지만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갑작스럽게 큰 변화를 겪었으니 그럴 수 있어. 그래도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래. 시간이 흐르면 차차 적응이 되겠지.
“그런데 신화 스킬은 뭐야?”
준석은 내내 궁금하던 질문을 했다. 그러자 다칼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자세한 것은 직접 써 봐야 알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라고 보면 된다.
“전투에 큰 도움이 되겠어.”
-다만. 사용한 뒤에는 큰 부작용이 따를 거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면 어느 정도는 피해를 감수해야지. 다만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겠어.”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준석은 금세 자신보다 작아진 다칼을 내려다보다 이내 눈높이를 맞추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보나.
툭.
준석은 다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지나치듯이 얘기했다.
“고생했어.”
-…….
칭찬에 인색한 준석이 말하자 다칼은 손길을 거부하기는커녕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겨우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할 일을 해낸 다칼은 준석이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신좌에게 이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여정 끝에 복수의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준석도 다칼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둘은 그걸 알기에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석과 다칼은 각자 신좌를 끌어내렸다.
이제 둘에게는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진하는 짤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나도 같이 다니려면 신좌 하나는 잡아야겠는데?”
물론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에게 뒤처져 있다고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거나 축 처져 있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둘에게 방해가 되진 말자.
오진하는 그리 다짐하며 둘을 쫓아갔다.
* * *
카밀 제국의 왕이 된 유희는 준석이 말한 계획대로 악마들을 북부에 파견해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온갖 이주 혜택을 내걸자 예상한대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평소에 조그만 불만이라도 가지고 있던 악마들이 카밀 제국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이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이 퍼져 나간 소문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십멸을 벌하는 자가 최상위에 존재하는 신좌를 끌어내렸다.
숨어 있던 강자, 십멸을 벌하는 자의 소환수가 또 다른 신좌를 끌어내리다.
그를 비롯해 그의 소환수가 신좌 둘을 끌어내렸다는 소문은 외지에 있는 촌락까지 퍼져 대륙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후, 유희가 그의 일행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이주민들의 숫자가 예상한 수치보다 다섯 배는 웃돌았다.
갑자기 이주민 숫자가 늘어난 이유는 그가 북부를 노린다는 정보가 퍼져 나가면서였다.
4개월 후.
대륙 중부에 위치한 카르마 대지에는 동부와 서부를 비롯해 남부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전투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었으며, 숫자만 해도 무려 십여만에 달했다.
그리고 그 십여만의 병력을 이끄는 건 카밀 제국의 왕 유희였다.
전장에서 죽음의 천사로 불리는 그녀가 대지에 끝없이 펼쳐진 막사들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느덧 여기까지 왔네.”
“응.”
곁에 서 있던 준석이 짧게 대답하며 유희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바라봤다.
“1층에서 있었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왠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이 많은 병력들을 이끌고 있다니. 물론 실제로 이끄는 건 너지만.”
“병력을 모은 건 너야.”
“뭐. 잡일은 내가 하긴 했는데. 네 명성이 없었으면 이 정도는 못 모았을 걸?”
“저희를 빼면 섭섭합니다.”
이내 하성태를 비롯한 화이트 길드의 일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 동부와 서부는 저들이 없었다면 여전히 지역 점령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준석은 뒤로 돌아 하성태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한 반년 정도 됐죠? 오랜만입니다, 형님.”
준석은 하성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곱상하던 얼굴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새 폭삭 늙었네.”
“예에?”
“어디 흙탕물에라도 굴렀어?”
“형님, 너무합니다! 만나자마자 팩트를 꽂다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 미치겠는데.”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까지야.”
원래 구르다 보면 얼굴이 삭는 법이다.
“그래서 확인은 해 봤어?”
“아, 예.”
서글픈 표정을 짓던 하성태는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이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북부에서 중부로 이동 중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십만의 병력이 동부로 가고 있습니다.”
“동부로?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네. 두 번 체크했습니다.”
“흐음.”
준석은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는 지금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북부의 지배자 악마 가일과 그 휘하에 있는 병력들을 쓸어버려야 비로소 이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나 병력 차이가 세 배에 가까웠다.
이주 정책을 벌여 이쪽의 인원을 몇 배로 늘렸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격차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준석의 표정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들은 그가 계획한대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십만에 이르는 병력이 동부에 가는 이유.
그것은 카밀 제국에 있는 전쟁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저들은 다른 지역에서 확보한 전쟁 보급품을 전부 제국에 모아 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스파이들에게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다.
카밀 제국이 지정학적인 위치상 최고의 보급 장소인 것은 맞지만, 병력을 소집하기 이전에 몰래 보급품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십만, 십만이라…… 아쉽네.”
사실 서부에 있는 미르 왕국에도 어느 정도 전쟁 보급품을 모아 놨다는 정보를 흘렸지만 아무래도 그곳에는 병력을 보내지 않은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
유희의 질문에 준석은 대답했다.
“계획대로 움직여 줬는데. 쳐야지.”
그의 말에 모두가 집중했다.
“이곳에 있는 병력은 전부 북부로 간다.”
“그럼, 동부는 어떻게 하려고? 제국에 보급품이 없다고 해도 막지 않으면 피해가 클 거야.”
“그건 내게 맡겨.”
유희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혼자서 십만을 상대하겠다고?”
“왜 혼자야. 다칼이 있잖아.”
“캬앙!”
-십만이든 백만이든 나 혼자서도 충분할 거다.
르켈라를 처치한 이후 다칼의 자신감은 끝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 준석은 다칼의 말에 피식 웃었다.
“둘이서 정말로 괜찮겠어?”
유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준석은 자신에게 다 생각이 있다며 걱정 말라고 자신했다.
“그럼, 잘 부탁한다.”
“몸조심해.”
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공간 이동을 준비했다.
그러자 오진하가 튀어나와 말한다.
“준석 씨, 저는요? 전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넌 날 따라와야지.”
준석은 오진하를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그럼 간다.”
우웅-!
카밀 제국의 왕성에 도달한 준석은 연달아 마법을 시전했다.
끝내 이른 곳은 북쪽의 황량한 땅이었다. 절벽 위에 선 그가 멀리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한 열두 시간 뒤면 도착하겠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십만 명의 적이 보였다.
‘역시 가일은 없군.’
아마 북부의 지배자는 이십만의 병력이 집결한 곳에 있을 터였다.
녀석이 가진 힘은 매우 까다로워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제압하기가 어려웠다.
하나 딱히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유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거기다가 토르의 전신이라 불리는 안수찬도 있으니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리라.
준석은 여기서 기다리며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싸움에 대비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가 마중 가자고.”
우웅-!
준석은 어마어마한 마나가 소모되는 공간 이동 마법을 3연속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쿵! 쿵! 쿵! 쿵!
십만 명의 적 앞에 이르자 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개미 떼처럼 줄지어 있는 적의 모습에 압도를 당한 오진하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러며 준석에게 말을 꺼냈다.
“정말로 저희끼리 될까요?”
“뭘 그렇게 쫄아 있어? 설마 내가 무식하게 정면으로 충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 아뇨. 당연히 생각해 두신 게 있긴 하겠지만. 저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밤새 마법을 난사해도 끝나지가 않을 것 같은데.”
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마법을 사용한다면 밤새 때릴 필요 없이 대다수의 인원을 단숨에 끝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리되면 마나가 금방 바닥이 드러날 것이다.
마나 회복이야 빠르게 하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상층부에 머무는 녀석들인 만큼, 한 놈 한 놈이 강력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그 와중에 살아남는 놈들이 있을 것이고. 그놈들이 끈덕지게 싸움을 이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본래 전쟁이란 게 직접 나서지 않고 끝내는 게 최고의 전략이라고 하지 않는가?
‘원래는 중층부에서 썼어야 하는 거지만…….’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어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인 오큘러스 거울을 꺼내 들었다.
준석은 그 거울을 이용해 적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리고 체내에 있는 마나를 거울에 불어넣는다.
순간 거울이 번쩍이며 그 앞으로 적들과 똑같이 생긴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