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24화
224화 뜻하지 않은 손님
서쪽에 위치한 모포시스 둘레길.
89층 지역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바로 천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이 아닌, 또 다른 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인데. 직접 보니 신기하네요.”
위를 바라본 오진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근데 점프하면 정말로 저기로 가지나?”
“중간에 보이지 않는 고체 구름에 안 부딪치게 조심…… 이런. 벌써 가 버렸네.”
내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오진하는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악!”
짤막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쯧쯧.”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성한 숲과 곧게 뻗어 있는 자갈길을 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근에 여러 기척이 느껴졌다. 점점 이쪽으로 더 많은 기척이 모여들었다.
“크르르르…….”
다칼이 몸집을 부풀리며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이내 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팬지를 닮았으나 크기가 두어 배는 크고 털은 더욱 무성했다.
그리고 이마에 구부러진 뿔 하나가 달려 있었다.
마물 중 하나인 디카테라는 테이머 기질이 타고난 대악마 바르니가 키우는 병사들이었다.
본래는 혼자서 다니는 습성을 지녔는데, 테이밍이 되며 집단형으로 바뀐 케이스였다.
89층의 미션은 모포시스를 지배하에 두는 것.
즉 그 지역에 거주하는 녀석들을 섬멸하거나 혹은 그 지역을 지배를 하고 있는 우두머리를 굴복시켜야 했다.
디카테라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드러내더니 어느덧 천여 마리를 넘어섰다.
쾅!
“아이고~ 머리야.”
뒤늦게 제자리로 돌아온 오진하가 머리를 문질러 대며 주변을 살폈다.
“뭐야. 이것들은.”
“아우우우!”
오진하가 할버드를 드는 사이에 다칼이 전광석화로 뛰쳐나갔다.
단숨에 한 마리를 낚아챈 다칼은 녀석을 잡아 흔든 뒤 무리가 있는 곳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크헝, 커허엉!”
그런데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포악하기로 유명한 디카테라들이 공격을 해 오기는커녕 몸을 수그리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거지?’
자갈길에서는 보라색 포탈이 형성되었다.
그 안에선 흑색 피부와 야수의 눈을 지닌 사내가 두꺼운 가죽 옷을 입은 채로 나타났다.
‘바르니.’
십멸 중 하나.
마침 찾으려던 참인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시간도 아끼고 좋았다.
지팡이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빛의 서의 마법 주문을 외웠다.
바르니는 다른 대악마들에 비해서 비교적 약한 편에 속했다.
그가 대악마가 될 수 있었던 건 테이밍 능력 덕분이었다.
퍼니시먼트.
빛의 대검이 녀석에게 떨어지기 직전.
탁!
바르니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
뜻밖에 상황에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떴다.
“카하앙?”
“응?”
오진하와 다칼 역시 어리둥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십멸의 주인이시여.”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십멸의 수장은 신좌로 있는 처음과 끝을 잇는 자이다.
그런데 그를 배신하고 날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다.
‘내 밑으로 들어오는 척하며 뒤통수를 치려는 것이겠지.’
설사 진심으로 내 밑에 들어오려는 생각이더라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녀석을 곁에 둘 생각은 없었다.
“그냥 죽어.”
구아아앙!
빛의 대검이 그를 향해 낙하한다.
동시에 녀석에게 속박을 가했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된 그는 그제야 본성을 드러냈다.
“이런 거지 같은! 저놈을 당장 죽여!”
그러나 그에게 명령을 받은 디카테라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뭣들하고 있는 거야! 이 새끼들아! 아, 안 돼!”
쿠하앙!
대검에 뭉개져 버린 바르니가 침묵했다.
[십멸 중에 하나인 대악마 바르니를 처치하였습니다!]
[대악마 바르니를 처치하였으므로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십멸장이 지급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수집한 십멸장이 여덟 개.
나머지 두 개만 모으면 완성이었다.
한데 새로 얻은 십멸장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디카테라들이 왜 공격을 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곧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디카테라들이 당신의 격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미완성된 십멸장 조건부 효과가 발동합니다.]
[디카테라들이 당신의 지배하에 들어옵니다.]
천여 마리가 넘는 디카테라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디카테라들이 십멸장에 귀속됩니다.]
[원할 때마다 디카테라들을 소환할 수 있게 됩니다.]
신좌의 격으로 인한 영향과 십멸장의 효과 덕분이다.
디카테라는 마물이긴 하나, 악마종에 해당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라갔다.
어쩌다 천여 마리가 넘는 부하를 얻은 셈이니 기분이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 없었다.
“방금 대체 뭔 일이래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오진하는 멀뚱멀뚱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그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달아 희소식이 전해졌다.
[모포시스 둘레길의 절반을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이 근방을 지배하고 있던 바르니를 처치하며 자연스레 지역의 절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겠네.”
“예?”
“반대편으로 가자.”
나는 위를 가리키며 곧바로 점프했다.
중간에 보이지 않는 고체 구름을 피하려고 바람을 조종해 몸을 비틀었다.
휘오오오!
그런데 누군가가 바람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고체 구름을 움직여 날 가두려고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고체 구름은 공중에 떠 있으나, 상층부의 등반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저걸 저렇게 자유롭게 다룬다는 건 상대가 심상치 않은 놈이라는 반증이었다.
콰앙!
나는 어둠의 창으로 구멍을 뚫어 탈출로를 확보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공간 이동을 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내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려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움직임을 멈추었다.
쿠르르릉-
주변에 천둥번개가 내리치며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우스.”
언젠가는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본래는 내가 죽여야 될 신좌는 하데스가 아니라 제우스였다.
또한 제우스와 신약을 맺은 자를 처치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계획이 어디까지 계획일 뿐이고, 인생이란 게 항상 계획대로 흐르지는 않는다.
아무튼. 간만에 얼굴을 드러낸 제우스는 날 매섭게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신기로 찌를 기세이다.
여태껏 그를 적대해 왔으니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나랑 한판 싸우러 왔나?”
내 뒷배를 봐주던 하데스도 사라졌고 탑의 개입도 없어졌으니.
굳이 신약을 맺은 계약자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그는 나랑 싸울 수 있었다.
“한층 더 건방져졌군.”
“왜? 나 정도면 건방 떨 만하지 않나.”
하데스를 무너뜨렸으니, 제우스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신기를 꺼내 들자 제우스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하데스가 가지고 있던 신기로구나.”
“뭐, 어쩌다 보니. 주인이 됐지.”
“신기는 아무나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 신기가 그댈 받아들였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
“은근 감동인데? 날 그렇게까지 인정해 주다니.”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착각일까?
처음에는 싸우러 온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 그런 건가.’
제우스와 하데스는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상태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대신 하데스를 죽여 줬으니 제우스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쉬울 것 없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기에 대화를 더 이어 나가 봐야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신좌께서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모습을 드러냈을 리는 없고.”
“네놈과의 악연을 끊으러 왔다.”
“그 소린. 담판을 짓겠다는 건가?”
“담판? 흐음…… 과거에 네놈이 한 짓을 떠올리면 지금도 화가 치밀지만. 그런 사소한 감정 따윈 버려두기로 했다.”
“하면?”
“드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 짐이 그댈 용서하러 왔네. 앞으로 나의 계약자들이 자네를 쫓는 일은 없을 거야.”
“갑자기 마음이 변심한 이유라도 있나?”
“알고 있을 터인데? 하데스와 나는 오랜 악연이었다는 것을. 그 악연을 네놈이 대신해서 마무리를 지어 줬으니. 이는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 수 있지.”
“뭐. 나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니 좋긴 하다만. 또 마음이 변해서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러자 제우스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거짓말이라도 한다. 이 뜻인가!”
“모르지. 신좌라는 놈들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경우가 많아서 당최 믿을 수가 없거든.”
“쯧. 건방진 놈. 좋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천공의 주인이 자신을 비롯해 자신의 계약자들이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습니다.]
[맹세는 먼저 적대시를 하지 않는 한 지속됩니다.]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설마 자신의 이름을 대고 맹세까지 할 줄이야.
신좌의 이름을 대고 맹세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비록 탑의 개입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맹세를 어기게 될 시 신좌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꽤 컸다.
“영광으로 알거라. 그럼 내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눈앞에서 사라지려던 제우스가 무언가가 할 말이 남은 듯 잠깐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대체 왜 신좌가 되지 않은 거지? 분명히 제안을 받았을 텐데. 그 어떤 등반자라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다. 애초에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데 말이야.”
“과연 그럴까.”
“뭣이?’
“내 눈엔 또 다른 족쇄로만 보이던데. 신좌들도 결국엔 탑에 얽매인 존재들 아닌가? 나는 탑에 얽매이고 싶은 생각이 추호에도 없거든.”
“탑에 얽매인 존재들이라…… 네놈은 우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 무엇이든 어떤 것에 얽매이기 마련. 네놈 또한 무언가에 얽매여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탑이 아닐 뿐.”
제우스는 고개를 돌리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곤 사라졌다.
“네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끝을 지켜보도록 하지.”
스하아아-
제우스가 사라지자마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뒤늦게 반대편 땅을 밟은 나는 제우스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되새기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끝을 지켜본다라…….”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한 오진하가 이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준석 씨! 어디 다친데 없습니까!?”
“다치긴 왜 다쳐.”
“아니. 방금 전에 뭔가에 빨려 들어갔다가 나오셨잖아요.”
“아. 별거 아니야.”
“별게 아니라니. 괜히 반대편으로 다시 넘어갔다가 도중에 균열에 휩쓸려 영영 안 돌아오게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오진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접어 두고 앞이나 봐.”
오진하가 내 말을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지금 눈에는 안 보이지. 곧 모습을 드러낼 거야.”
쿵, 쿵.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다칼이 조용히 앞을 나선다.
이 땅의 지배자는 르켈라와도 연관이 있는 놈이었다.
다만 지배자가 먼저 나타날지 아님 르켈라가 먼저 나타날지.
그것은 지켜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