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17화
217화 죽은 자들의 세계
세포네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를 찾아왔다.
“준석 씨 덕분에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악습을 끊을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녀의 표정에는 후련함이 가득해 보였다.
오랜 숙원을 풀어냈으니 더없이 만족스러울 터.
하지만 곧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딱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요. 준석 씨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그녀가 무슨 얘기를 꺼낼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무슨 부탁을?”
“절……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내 주세요!”
“죽은 자들의 세계에는 왜…….”
“살라만드라에게 힘을 빌릴 때 약속했어요.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쪽이 원하는 것도 들어주겠다고.”
살라만드라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 있는 영체의 불꽃을 원한다고 했다.
그녀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끌어들이자고 한 것은 나였지만, 영체의 불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쇠약해진 살라만드라를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줄 물건이 아닐까?
스스로를 봉인한 이유도 영체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냥 이용만 당하지는 않겠다. 이건가.’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목표는 세포네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내는 것.
그것만 충족한다면 이외에 무슨 일을 벌이던 전혀 상관없었다.
세포네가 살라만드라의 요구로 영체의 불꽃을 찾으러 가는 것도. 하데스가 죽은 자들의 세계로 들어간 세포네를 찾아 나서는 것도 전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세포네에게도 선택권이란 것이 주어져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나는 세포네의 부탁을 받아들인 후 곧장 어둠의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을 정면으로 올리고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죽은 자들의 세계의 문이여. 나의 어둠 아래 열려라.’
구오오오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한껏 불길한 존재감을 내뿜는 포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지에 흡수된 영혼들을 소모해 만들어진 포탈이라 그런지 고통과 절규의 목소리가 환각처럼 들려왔다.
“흣!”
그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세포네는 금세 안정을 되찾고선 굳은 얼굴로 포탈 앞에 섰다.
“들어가는 순간 이곳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각오는 됐어요.”
“포탈은 며칠 동안 이곳에 유지될 테니 그 안에만 돌아오면 됩니다.”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 안에 포탈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면.”
중요한 순간에 말을 끊자, 세포네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못한다면?”
“칼로 자기 심장을 찌르세요.”
“네, 네에!?”
“그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는 본래 산 자가 머물 곳이 아니었다.
산 자가 금기를 어기고 그 세계에 출입한다고 해도 그곳에서는 산 자의 목숨을 앗아 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도 죽지 않고 되레 산 자들의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하데스는 이 여자가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무슨 수를 쓰겠지.’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시중에 나도는 평범한 단검을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쓰세요.”
내 얘기를 새겨듣는 세포네가 단검을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준석 씨는 여기에 더 머무를 건가요?”
“아뇨. 오늘 중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럼…… 이게 작별 인사가 되겠네요.”
“그렇죠.”
세포네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조용히 옆에 서 있는 오진하를 바라봤다.
“그동안 두 분 다 고마웠어요.”
포탈에 한 걸음 다가선 그녀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오면 좋겠네요.”
그러고는 금방 포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갔네요.”
“갔네.”
나와 오진하는 짤막한 대화를 나눈 후 자연스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바로 떠날 거죠?”
“더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
오진하가 마지막으로 도시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한 달은 있었더니 조금은 정이 들었나 봐요.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걸 보니까.”
“어디는 안 그랬나? 매번 아쉽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잖아.”
“제가요? 에이. 매번은 아니죠. 가끔 그랬지. 가끔.”
“너한테 가끔은 다른 뜻으로 쓰이나 보지?”
“정말로 가끔 그랬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처음에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잠시 후, 포탈 문을 타고 불의 사막으로 복귀하니 쨍쨍한 햇볕과 사막의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 * *
“후우, 여기가 맞는 것 같죠?”
“맞겠지.”
마법으로 드넓은 불의 사막을 전부 탐색해 본 결과.
삼각형 모양의 오아시스는 이곳뿐이었다.
그러나 잊힌 사막의 유산은 주변에 나뒹구는 모래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기루가 발생해야 생겨나는 특별한 구역이 있는 듯했다.
“신기루가 언제 나타난다고는 말 안 해 줬나?”
“네. 그건 따로 안 물어봐서.”
“그럼, 언제 나타날지 모른 채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 몇 주를 허비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나는 별의 정수에 스킬 감시의 눈을 발동시켜 놓고 하늘에 띄워 두었다.
이렇게 해 두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지 이곳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감시의 눈이네요.”
“신기루가 나타나면 그때 와서 확인하면 되니, 우린 이 빌어먹을 곳이나 벗어나자고.”
아무리 불의 면역력이 있다고 하지만 무더위의 느낌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 붙어.”
“예?”
“가까이 붙으라고. 걸어서 오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내가 무엇을 할지 금방 눈치챈 오진하가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우우웅-
바닥 아래 생겨난 파란 마법진이 번쩍이는 순간 눈에 보이던 배경이 달라졌다.
그리고.
[불의 사막을 무사히 횡단하였습니다.]
[88층 클리어 조건이 충족됩니다.]
[미션 기여도에 영향을 끼칩니다.]
[메인 미션 누적 기여도 순위가 변동되었습니다.]
[변동된 메인 미션 누적 기여도 순위가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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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9층]
1위) 비공개 – 88층, 259,681점
2위) 천공을 뚫은 자 – 87층, 189,400점
3위) 고귀한 섬멸자 – 90층, 157,002점
4위) 타락귀 – 86층, 138,999점
5위) 두려움이 없는 광전사 – 88층, 132,59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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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미션 누적 기여도에서 1위를 유지합니다!]
누적 기여도 순위에서 1위를 한 지는 이미 몇 개월이 지났다.
유희를 비롯해 화이트 길드원들이 내 파티에 합류하면서 기여도 수치가 가파르게 오른 것이 원인이었다.
거기다 88층까지 올라오는 인물도 극히 소수였다.
5위권 안에 든 자들 중에는 유일하게 고귀한 섬멸자라는 이명을 가진 등반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끝내 99층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90층부터는 마의 구간이라 불린다.
이유는 주어진 난관에 비해 대항할 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층을 오른 등반자 숫자가 부족하다 보니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이다.
능력과 자질. 운이 따른다고 해도 그 숫자에 밀려 망가지고 무너지는 일이 허다했다.
내가 회귀 전에 100층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점지 스킬로 만난 수많은 기연의 집합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단순히 집념만 있었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도중에 오르지 못하고 가로막혔을 것이다.
“어?”
순위를 살피던 나는 익숙한 네임에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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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위) 뚝배기 브레이커 81층, 115,00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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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위) 비공개 – 80층, 57,0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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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브레이커, 안수찬이 상층부에 들어섰다.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 빨리 상층부에 도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조차도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상층부에 도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전보다 빨리 층을 오를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을 초월한 가파른 성장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한데 회귀 후에 변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안수찬도 예정보다 훨씬 빨리 상층부에 도달했다.
‘이젠 함께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그런데 그와 함께 다니던 주안나의 이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 뜻은 아직 순위권에 들지 못했거나 아님 상층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그도 아님 안수찬 파티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다시 만나게 되면 알게 되리라.
[누락된 보상이 있습니다.]
[누락된 보상을 지금 당장 지급받으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추후 보상을 합산해서 받기 위해 지금의 누락된 보상을 거절했다.
“후~ 우리 다신 보지 말자.”
오진하가 사막지대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날 보며 말을 꺼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바로 89층 지역으로?”
“아니. 잠깐 카밀 제국에 들르자고.”
“카밀 제국이면 유희 씨가 계신 곳 아니에요?”
“맞아.”
에툰라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카밀 제국은 81층 지역에 있는 다크 엘프들의 주 거주지였다.
하지만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치고는 그 인구수가 35만 명에 불과하며 이는 백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있는 에펠 왕국보다도 적었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카밀 제국에는 다크 엘프뿐만 아니라 인간과 악마들이 섞여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에툰라 대륙에 살아남은 인간들과 그리고 같은 종족의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악마들이 다크 엘프와 융화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대체로 제국의 백성들은 타종족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편이었다.
거기서 유희는 카밀 제국을 통째로 집어삼킬 계획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카밀 제국을 먼저 점령해 놔야 추후 식량을 걱정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다크 엘프들이 같은 편에 선다면 다른 세력을 상대할 때 유리한 고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회귀 전에는 사용해 보지 않은 방법이지만. 인간 편에 선 악마들을 이용한다면…… 함정을 팔 수도 있을 거다.
우우웅, 우우웅!-
새로운 목적지를 정한 나는 카밀 제국을 떠올리며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 * *
강한 자는 위에 서고 약한 자는 도태되리라.
다크 엘프 사회는 힘으로 모든 것이 통용되고 종족을 초월하며 자신보다 강한 자를 따르고 존중한다.
다만 지켜져야 할 규율을 따랐을 경우에만 그것이 허용된다
카밀 제국에서는 왕이 되려면 매해 열리는 최후의 생존자 대회에서 우승해야만 했다.
대회의 참가 자격은 천 명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제국에서 문제없이 10년 이상을 지내야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을 고려하면 단시간에 외부에서 끌어온 이들을 이용해 자격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만큼 자격을 얻기도 어려운 대회에 참가하게 된 유희는.
우와아아아아아!!
“빛의 심판자!”
“빛의 심판자!”
경기장에 쏟아지는 함성과 함께 자신을 부르는 이명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 앞에는 작년의 우승자이자 현 국왕인 다크 엘프 멘델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끓어오른 분위기는 좀체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때 대회 진행자가 나서서 흥분을 가라앉히듯 양손을 뻗었다.
금세 고요해지자, 진행자는 포효하듯 소리쳤다.
“그럼!! 카밀 제국에 이어져 온 전통대로 저희들의 새로운 국왕을 영광의 전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시금 환호 소리가 울려 퍼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기장에 불청객들이 난입했다.
수십 명에 이르는 그들은 유희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멘델 님의 가신들이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가신들은 진행자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중 대표가 나서서 말했다.
“네년이 사술을 썼다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비겁한 자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 죽어라!”
유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디든 항상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놈들은 꼭 있다니까.’
귀찮지만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힘으로 자리를 올랐던 자의 가신들인 만큼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신중한 얼굴로 정면에 검 방패를 들었다.
“크어엇!!”
“으윽!”
“뭐야?”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건만, 가신들이 쓰러져 나갔다.
소란스럽던 관중의 목소리도 어느덧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대체 뭐지?’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희의 귀에 낯익은 음성이 박혔다.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이러면 되려나?”
탁!
경기장 옥상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밑으로 떨어졌다.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따각, 따각.
관중들을 압도한 그가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이내 그를 마주한 유희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