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11화
211화 88층 (3)
“무엄하도다! 어서 폐하께 인사를 올려라!”
레이븐 곁에 붙어 있는 신하 중에 한 명이 우리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나는 오진하가 고개를 숙이려고 하는 걸 제지했다. 그러자 오진하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바지사장한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지.”
사실은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안 그래도 이곳에 대해 안 좋은 감정만 가득한데, 우리들을 깔보는 듯한 행동과 말투가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입을 열었던 신하를 바라보며 말문을 뗐다.
“굳이 왜 그래야 하지?”
“뭣이!?”
“우린 불의 도시 백성이 아닌 방문자일 뿐이다. 눈앞에 있는 이가 왕이라고 해도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지.”
“오만방자하다! 방문자라 할지라도 카락에 들어왔으면 카락의 법을 따라야 하거늘. 기어코 법도를 따르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그대들을 추방하리라!”
“추방?”
신하를 향해 살기를 표출했다.
“으으으……!”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보시지.”
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철컥!
가만히 지켜보던 근위병들이 우리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입구에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와 레이븐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는 흠칫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기를 내려라!”
철컥!
무기를 겨누었던 근위병들이 뒤로 물러섰다.
딱딱하던 레이븐의 얼굴은 어느새 너그럽게 변해 있었다.
“란스의 말대로 방문자라 할지라도 법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 맞으나, 그대들은 방금 이곳에 당도했으니,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렇담 대인으로서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이 나라의 법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유예의 기간을 주도록 하겠다!”
“폐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자들은 감히 폐하 앞에서 살기를 드러냈습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간다면 저들은 폐하를 우습게 보고 무시할 것입니다!”
“폐하!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레이븐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신하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만!”
한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대들의 생각은 잘 알았다. 하지만 이미 짐이 결정을 내린 일.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내 앞에 나오라!”
레이븐이 살벌한 기세를 드러내며 말하자, 신하들 중에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기를 꺾은 그가 다시 우리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의 이름을 듣지 못했군. 이름이 무엇인가?”
계속해서 고압적인 태도로 나왔다면 정신교육 좀 시켜놓으려고 했더니만.
뒤늦게라도 태도를 바꾸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준석.”
“오진하입니다.”
“그렇구만. 짐은 현재 카락을 다스라고 있는 알레이폰스 레이븐이라고 하네.”
말을 하며 그는 이쪽으로 가까이 붙더니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목소리를 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네만. 대체 클리드 님과는 무슨 사이인 겐가.”
레이븐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이유.
그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가 클리드와 마주한 것을 지켜본 병사가 따로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게 왜 궁금하지?’
“딱히 짐이 알아서 나쁠 것도 없지 않는가. 만일 클리드 님의 가까운 지인이라면 최대한 편의를 봐줄 수도 있네.”
다만 병사는 내가 클리드의 목을 졸랐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레이븐은 클리드와 친근한 사이라고 착각하는 중이었다.
굳이 녀석과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얘기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씨익 웃으며 그 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 보니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 클리드와는 막역한 사이지. 내가 이곳에 오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올 만큼.”
“역시. 그렇구만. 잘 알겠네.”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바깥에 대기시켜 둔 신하가 안내할 것이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 보도록.”
원래는 방문자의 신상을 파악하는 것이 면담의 주목적이지만 우리들의 신상은 이름을 제외하곤 딱히 묻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븐이 말한 대로 바깥에는 신하 한 명이 대기 중이었다.
말끔한 인상을 가진 젊은 여성은 자신의 몸뚱이만 한 책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밑으로 내려간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해 왔다.
“세리느라고 해요.”
의외였다.
설마 붙어 준 사람이 이 여자일 줄은.
이 나라의 두 번째 공주 세리느.
세포네와는 배다른 자매인 그녀는 회귀 전에 내가 이곳에 들렀을 때 잠깐 함께했던 동료이기도 했다.
한데. 레이븐이 자신의 딸을 붙여 줬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였다.
하긴 이 나라의 실세인 클리드와 가까운 지인이라고 말해 놨으니, 클리드의 눈치를 보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이내 고개를 든 세리느가 말했다.
“폐하께서 여러분들을 불편함 없이 모시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제게 직접 말씀해 주세요.”
세리느는 우리들이 머물 곳을 안내하겠다며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 * *
“와아~ 미쳤다.”
오진하는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고 한 것이 거짓말은 아닌 듯 커다란 저택을 내주었다.
심지어 저택을 관리하는 직원들도 따로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네!”
오진하의 즉답에 세리느는 미소로 화답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봤다.
저택이 어떤지 대답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괜찮군.”
솔직하게 카락에서 이 정도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려면 상당한 포인트를 까먹어야 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정말로 필요한 건 뭐든 줍니까!?”
오진하는 흥분한 얼굴로 세리느에게 다가섰다.
“꺅!”
그러자 놀란 세리느가 책으로 그의 얼굴을 쳐 버렸다.
“어머! 괜찮으세요!?”
뒤늦게 때린 것을 인지한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오진하에게 다가갔다.
“아. 괜찮습니다…… 어, 응? 자기야.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고……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무래도 방금 전의 행동으로 인해 아내에게 큰 오해를 산 듯했다.
한편 세리느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오진하를 보며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친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육신을 잃고 영혼만 남은 아내와 대화하는 겁니다.”
“아…….”
“그보다, 물이랑 음식을 좀 줬으면 좋겠는데.”
내내 더위가 가득한 사막지대를 걷느라고 배는 훌쭉해지고 입 안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세리느가 서둘러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내에게 한소리를 듣고 온 오진하가 말했다.
“하아~ 안 그래도 물, 음식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상층부에서는 물과 음식이 귀해서 따로 구하는 것도 어렵고 값도 매우 비싼 편이었다.
물론 이에 대비해 비교적 음식이 넉넉한 중층부에서 최대한 챙기고 올라왔지만 그 마저도 이젠 바닥이 난 실정이었다.
대략 한 달분 정도 남았을까.
‘부족하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쉬웠으면 진작에 그리했으리라.
상층부에서는 중층부, 저층부에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는 길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편이다.
곧 세리느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가지고 왔다.
만찬에 가까운 밥상을 보며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카락에도 음식이 많은 편은 아니지.’
“그아앙~.”
-간만에 포식하겠군.
다칼은 행복한 얼굴로 폭식을 취했다.
오진하도 마찬가지로 배 속에 거지가 든 것처럼 쉴 새 없이 마구 먹어댔다.
두 녀석이 전부 먹어 버리기 전에 나도 서둘러야겠다.
* * *
“후아~.”
몇 달 만에 제대로 배를 채운 나는 한껏 만족스러움을 드러낸 채 부드러운 털로 만들어진 소파에 몸을 눕혔다.
‘편안하다.’
이대로 쭉 누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금세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나는 눕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불의 사막지대인 88층은 각 난이도에 있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통합 층이었다.
그것은 층의 일부인 불의 도시 카락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만일 제우스와 신약을 맺은 등반자가 먼저 이곳에 와 있다면 내가 세포네를 하데스에게 데려가기도 전에 그녀를 잃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러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회귀 전보다 이곳에 온 시기를 빨리 앞당겼기 때문이다.
예정대로라면 제우스가 보낸 등반자는 지금쯤 한참 아래층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층을 오르며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해서 발생한 만큼 이번에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밖에 나갈 채비를 하자, 다른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오진하가 고개만 들어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고대 던전.”
“예? 던전이요?”
“그래. 그러니까 너도 준비해.”
“으하아~ 조금은 쉬나 했더니.”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오진하는 금방 준비를 끝내고 따라나섰다.
워낙 저택이 넓어 다른 방에서 휴식 중이던 세리느가 뒤늦게 우리가 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곤 다급히 뛰어왔다.
“어디에 가시려고요?”
“볼일이 좀 있거든요.”
“저도 갈게요!”
따라나서려는 그녀를 곧바로 막아섰다.
“아뇨. 세리느 씨는 이만 돌아가십시오.”
“예……? 아니. 이곳에 처음 와서 지리도 잘 모르실 텐데. 제가 도우면 훨씬 더…….”
“괜찮습니다.”
괜히 세리느를 데려가면 방해만 된다.
특히 세리느와 세포네는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둘이 마주쳐 봐야 분란만 일으킬 뿐이다.
혹여나 그 불똥이 내게로 튈 수도 있었다.
같이 가길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느가 끝까지 따라나서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자꾸 따라오려고 하면 우리를 감시할 목적을 가졌다고 판단하겠습니다.”
아마 레이븐에게 우릴 감시하라는 지시도 받았을 터다. 정곡을 찔렀는지 세리느의 얼굴이 순간 찡그러졌다.
“감시라뇨. 전 감시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을 도우려는 것뿐이에요.”
“안 따라오는 게 돕는 겁니다.”
“후~ 알겠어요.”
결국 그녀는 내 의견을 따라 다시 왕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혹시 몰래 따라붙는 놈이 없는지 살폈지만 그러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곧 바깥을 나오니 따스한 땡볕이 내리쬈다.
카락에는 수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살인적인 무더위 때문에 지상은 한적했다.
그러나 따로 굴을 파 둔 지하 통로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뒤를 따라오던 오진하가 궁금해서 질문을 해 온다.
“근데 던전에는 왜 가는 거예요? 숨겨진 히든 피스를 얻으러? 근데 전에 듣기로는 이곳에 어떤 여자를 찾는다 하지 않았어요?”
“마침 그 여자가 던전에 있거든.”
“아~ 그래서…… 근데 유희 씨를 내버려 두고 딴 여자한테 한눈을 팔아도 되는 겁니까?”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한눈을 팔다니. 그리고 유희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런 사이가 아니라뇨. 딱 봐도 연인 같은데.”
“연인은 무슨. 친구끼리. 그리고 그 여자한테 개인적인 흑심이 있어서 찾는 거 절대 아니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만일 그랬다가는 하데스와 적대로 돌아서 버린다.
그럼 그의 힘을 이용하는 것도 더 이상은 불가능해지고, 데카인을 상대하는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그 여자에게 흑심을 가질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게 아님 그 여자는 왜 찾는 겁니까?”
“신좌와 한 약속이 있거든.”
“예……? 신좌랑요?”
“그래.”
오진하는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별일 아닌 줄 알았더니, 갑자기 스케일이 확 커져 버리네.”
그는 어떤 약속이냐고 물어볼 법도 하건만 더 이상 질문을 해 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설명하기 귀찮던 참이구만,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
이후 얼마나 걸었을까?
지하 통로 중간에 경고 간판이 붙어 있는 샛길로 들어섰다. 곧 어두컴컴한 내리막을 내려가자 드넓은 공간이 나온다.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니 어둡던 주변이 점차 밝아졌다.
환해진 풍경 속에는 웬 흉포하게 생긴 괴물이 입을 벌린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오진하가 그것을 보고 놀라 무기를 가슴 위로 쳐올렸다.
“그럴 필요 없어.”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아!”
흉포하게 생긴 거대한 괴물은 단순히 암석으로 만들어진 동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괴물의 벌어져 있는 입이야 말로 내가 찾는 고대 던전의 입구 포스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