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10화
210화 88층 (2)
권한과 함께 주어진 주홍색 불을 품고 있는 육각형의 돌을 내려다봤다.
카락의 포탈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것을 모래에 심어야 했다.
스윽, 슥.
모래 속에 돌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서자 곧 불꽃이 타원을 그리며 솟구쳤다.
휘오오오-
타원형 속의 불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오진하는 멍한 표정으로 포탈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을 보니 내가 갖고 있던 돌과 똑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돌을 모래에 심어.”
“아, 예!”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나랑 똑같은 포탈 문을 소환했다.
그런데 오진하는 무엇이 그리도 걱정인지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야, 표정이 왜 그래?”
“예? 제 표정이 왜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이잖아.”
오진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속마음을 토로했다.
“준석 씨야 불의 면역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저는 저기에 들어갔다가 몸이 다 타 버리는 거 아니에요?”
“난 또 뭐라고. 안 타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전부 허상이니까.”
카락의 포탈 문은 감각을 속이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불의 사막을 오랜 시간 동안 걷는 게 첫 번째 시험이었다면 카락의 포탈 문은 두 번째 시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만일 지레 겁을 먹고 포탈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다신 카락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진하는 포탈 문 쪽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말로 허상 맞습니까?”
“잘 따라오기나 해. 괜히 겁먹고 시기 놓쳐서 못 들어오지 말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곧장 포탈 문을 지났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한 번 눈을 깜박이니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모래밖에 보이질 않던 정면 시야에는 빛에 반짝이는 붉은 강이 쭉 뻗어 있고, 그 길을 따라 수천 여 채의 건축물이 줄지어서 있었다.
바깥 테두리에는 곧게 쌓아진 성벽으로 둘러져 있다.
“크하아암~.”
마침 잠에서 깬 다칼이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워우!”
그리고 의외로 겁이 많은 오진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와아아……!”
그는 도시를 발견하자마자 감탄을 터트렸다.
그 사이에 나는 앞으로 향했다. 도시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붉은 갑주를 두르고 있는 병사들이 서 있었다.
“멈춰라!”
안으로 출입하려고 하니 병사들이 창을 내세우며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병사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다.
“네놈, 둘이 전부인가?”
“크르르르!”
-나를 빼다니. 건방진 인간이구로나.
병사가 나와 오진하만 바라보며 숫자를 세자 다칼이 그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병사가 창으로 다칼의 목을 겨누려고 했다.
콰직!
다칼은 창을 통째로 씹어 버리며 무기를 아작 내 버렸다.
놀란 병사가 기겁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자 앞에 서 있던 병사가 경계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래도 창을 겨누지 않은 걸 보면 제법 눈치는 있는 놈이다.
“당신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으면 도시 안으로는 발끝도 들일 수 없을 거야.”
“셋.”
“뭐?”
나는 다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셋이라고.”
“아……!”
병사는 그제야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이해를 한 듯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그렇군. 셋이군.”
그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는 곧 자기를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무기를 잃은 병사에게 신호를 보내 입구 안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을 불러들인다.
그들은 둘을 대신해서 입구를 지켰다.
한편 길 안내를 맡은 병사는 우리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오진하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지금 저흴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아요?”
“왕한테 데려가는 거야.”
“예……? 왕이요?”
“그래. 처음 출입한 인간들은 전부 왕을 만나야 해.”
카락에는 레이븐이란 이름의 왕이 존재한다.
보통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카락의 왕은 달랐다.
쉽게 말해 바지사장.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는 따로 있고 레이븐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왕은 한가하답니까? 도시에 출입하는 사람마다 다 만나 보게.”
“한가하기보다는 도시에 출입하는 인간이 그만큼 없다는 뜻이기도 해.”
“아.”
이곳에 찾아오는 인간들은 전부 등반자일 터인데.
상층부에 도달한 이도 별로 없을뿐더러 일정 조건을 채워야만 카락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일은 꽤 드물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 도시 내부는 사람들로 바들거렸다.
여기에 눌러앉은 등반자들도 있을 테지만 대다수는 카락에서 태어나 지내는 거주민들이었다.
그 숫자는 약 2만 명쯤.
폐쇄적인 곳치곤 인원이 많은 편이었다.
“어?”
그때 오진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하늘 위를 가리켰다.
“웬 소용돌이 하나가 다가오는데요?”
불꽃의 소용돌이가 정확하게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
“으, 으아아!”
길안내를 하던 병사가 소용돌이를 발견하곤 헐레벌떡 도망을 친다.
쿠웅!
그대로 땅에 들이박은 소용돌이로 인해 사방으로 모래가 튀었다.
정면에 보호막을 만들어 날아오는 모래들을 막았다.
“휘우~.”
충돌이 일어난 곳에는 붉은 스포츠머리에 주홍색 눈을 가진 남자가 여유로이 걸어 나왔다.
상체는 노출한 채 바지마저 붉은색인 그가 나를 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언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곳에 와 주다니, 반갑네.”
“마치 날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연히 알지! 요즘은 그쪽 모르면 시대에 뒤처졌다는 얘기 듣는다고?”
“클, 클리드 님!”
병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넌 끼지 말고 물러나 있어.”
“예!”
병사는 사색이 질린 채로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준석 씨, 저분이 누구길래 병사가 저리 반응합니까?”
나는 오진하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
“클리드, 불의 신수야. 그리고 표면상으론 사막의 인도자이지.”
“예……? 신수요? 저 인간이 다칼과 똑같은 존재란 겁니까?”
“크하아앙!”
-탐욕에 눈이 멀어 신좌의 개가 된 녀석과 똑같은 취급을 하면 곤란하다.
다칼은 녀석과 같이 취급하지 말라며 발끈했다.
둘이 아는 사이인 것도 처음 알았지만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보다.
“나한테 말하지 말고 쟤한테 직접 말해.”
-귀찮으니 그대가 대신 전해 줘라.
“별 시답잖은 변명은.”
그렇게 셋이 떠들고 있으니 클리드는 자신을 무시한 것이 기분 나빴는지 몸에 불꽃을 두르고 위협을 해 왔다.
내가 나서려고 하자 먼저 다칼이 뛰쳐나갔다.
스르륵!
폭풍처럼 덮쳐 오던 불꽃이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오호.”
클리드가 이를 보곤 흥미로운 눈빛을 띤다.
“역시 너도 같이 있구나, 다프.”
“다프?”
다칼을 쳐다보니 녀석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멋대로 불러 대던 호칭이지.
“다프, 오랜만의 재회인데. 인사도 좀 하지? 괜히 서운해지려고 하네.”
그러나 다칼은 대화를 하는 대신 공격을 하려고 들었다.
“거기까지만 해.”
하지만 더 이상 날뛰게 둘 수는 없었다.
여기에 온 이유는 클리드를 잡기 위해서가 아닌 세포네에게 볼일이 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굳이 녀석과 충돌해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다칼이 멈춰 서자, 클리드는 조소를 띠며 말을 잇는다.
“인간 밑에 들어가 따가리 짓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직접 보니 안쓰럽네, 우리 친구.”
“캬하아아아!”
-저 새끼를 아주 조져 놓아야겠다! 준석, 말리지 마라!
나는 뛰쳐나가려는 다칼의 뒷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다크바운드.
“크억!”
어둠의 손이 클리드의 목을 조였다.
그가 저항을 해 보지만 별로 소용없었다.
“네놈 목적이 우리와 싸우는 건가? 그럼 받아 주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이쯤하지. 뒷배를 믿고 촐랑대는 꼴은 더 보기가 싫거든.”
“켁켁켁!”
압박을 풀자 한참을 기침해 댔다.
그러고는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본다.
“눈깔 안 풀어?”
잠깐만 손짓하자, 그제야 그는 꼬리를 내렸다.
이곳에서 그는 압도하는 강자일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었다.
“……대체 목적이 뭐지?”
이제야 본론을 꺼내든다.
“딱히 말해 줄 생각은 없는데.”
삽시간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불만이 큰 것 같았지만 마음대로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
“더 물어볼 말은? 없어?”
“…….”
“그럼 이만 비키지그래? 바쁜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
끝내 대답이 없자,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
클리드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잠깐 눈만 마주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를 지나치며 뒤에 떨어져 있던 병사에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안내 안 하고.”
“아, 예!”
병사는 아까와는 달리 존댓말을 사용하며 이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리고 내내 말이 없던 클리드는 우리와 조금 떨어지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지금 물러간다고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특히 다프, 너. 주인 뒤에 숨어서 언제까지고, 제 몸을 보전할 수 있는지 지켜보지.”
“크르르!”
다칼이 뒤로 돌며 이빨을 드러냈지만 어느새 클리드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주인 뒤에 숨어 있는 게 누군지 모르겠군. 그리고 나와 준석은 동등한 위치에 선 동행자! 주인에게 끌려다니는 네놈 따위와는 다르다!
다칼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나한테 말하지 말고 직접 당사자한테 말하라니까?”
-아쉽지만 이미 상대가 사라졌다.
“그게 뭔 상관이야. 텔레파시를 이용하면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잖아.”
-…….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다칼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병사를 따라갔다.
오진하는 나란히 옆에서 걸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저렇게 그냥 보내 줘도 괜찮은 거예요? 신수라면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나중에 골치 아파지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괜찮아. 내가 놈의 목을 노리지 않는 이상 나서려고 하지 않을 거야.”
신수가 죽지 않는 존재라 할지라도 부상을 입는 것은 똑같았다.
그 얘긴 딱 죽지 않을 정도로 해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다만 변수는 신수 뒤에 있는 신좌이지.’
그자가 무슨 변덕에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일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이젠 탑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자신의 영역에서 마음껏 활개를 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도 쉽사리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뒤에는 하데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다른 곳이었다면 하데스가 날 도우려고 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에는 그의 여인 세포네가 있었다.
“다 왔습니다.”
어느덧 왕궁에 다다랐다.
내부로 들어서니 수백여 명이 넘는 왕실근위병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내 봉황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붉은 무늬가 새겨진 문 앞에 이르렀다.
병사는 자신의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 발걸음을 멈추고 한발 물러서서 두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철컹!
문을 열자 양옆으로 주홍색 갑주를 입은 근위병들이 쭉 나란히 서 있었다.
저 멀리, 왕좌에 앉아 있는 레이븐이 보이지만, 곧 내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왕좌의 좌측 좌석이 비어 있었다.
‘역시 여기엔 없구나.’
우측 좌석은 왕비가 앉는 곳이고, 좌측 좌석은 왕자나 공주가 앉는 곳이었다.
한데 내가 좌측 좌석을 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나라의 공주를 보기 위해서이다.
단순히 공주에 대한 환상이 있다기보다는, 하데스가 그토록 사랑에 빠져 있는 이가 바로 이 나라의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 세포네는 불의 도시 지하에 있는 고대 던전에 가 있을 터.
그러나 그곳에 그녀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녀의 아버지인 레이븐과의 면담부터 끝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