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09화
209화 88층 (1)
꽃잎 대신 별이 피어나는 은하 세계수가 자리를 잡은 곳인 천체 허브는 탑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관리자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는 장소다.
그러나 기나긴 세월 동안 회의는 열리지 않았고, 은하 세계수 아래 만들어진 빛의 원탁에는 먼지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한데, 중층부 관리자인 레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소집회의를 열며 원탁에는 관리자들이 모여들었다.
레이를 비롯해 일반 관리자 두 명, 상층부 관리자 한 명, 총괄자 한 명이 자리했다.
네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곧 원탁의 중심에 앉아 있는 총괄자 에피오르가 관망하는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
외부로 퍼져 나온 그의 목소리에선 심연처럼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레이는 섬뜩한 느낌을 받으며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응대했다.
“예, 에피오르 님.”
“최근에 자키를 경질했다지?”
“그렇습니다.”
“그대가 이유도 없이 그런 일을 벌었을 리는 없겠지. 소집회의를 한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네. 맞습니다. 에피오르 님이라면 제가 소집한 이유를 모를 리가 없으실 테죠.”
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에피오르의 귀에 들어간다.
그러니 탑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그렇지만 직접 애기를 듣고 싶군. 그대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
에피오르의 말에 레이는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소집회의를 열었는지 설명했다.
그러자 상층부 관리자 칼반이 레이에게 한마디 했다.
“여전히 탑에 공백이 생겼다고 믿나? 그것도 등반자 한 놈 때문에?”
“그자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탑에 공백이 생겼다는 건 확신합니다.”
“어리석군.”
칼반은 자신의 의견을 확고하게 말했다.
“탑에 공백이 생길 일은 없다. 탑은 모든 것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던 존재. 그리고 정말로 문제가 생겼다면 비단 탑 내부에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테지. 분명 공백처럼 느껴지는 변화 또한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일 터. 우리는 맡은 역할에만 충실하면 될 뿐이다.”
“그럼 이대로 탑의 균형이 무너지게 내버려 두라는 말씀입니까!?”
레이가 목소리를 높이자 칼반은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그래서, 안 내버려 두면. 레이, 네놈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지?”
“탑이 정상화할 수도 있도록 힘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상화? 지금 그 얘기는 탑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말인가?”
“탑의 뜻을 거역하다니요! 그저 불안정해진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자는 것이죠!”
“그만.”
에피오르가 말하자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대들의 의견은 잘 알겠다. 이제 나머지의 의견도 들어 보도록 하지. 아케, 그리쉬. 둘의 생각은 어떠하지?”
“저, 그게…….”
이곳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일반 관리자 두 명은 위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발언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둘에게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전체의 의견을 들어 보았으니, 이제 결론을 내리지.”
모두가 에피오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탑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맡은 업무 외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이 내 결론이다.”
에피오르는 칼반의 손을 들어 주었다.
칼반과 레이, 둘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칼반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레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들에게 있어 에피오르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
레이는 어쩔 수 없이 체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곧 에피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것으로 회의는 끝마친다.”
그 말에 관리자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일어섰던 에피오르는 은하 세계수 앞에 선 채 깊은 고민에 잠겼다.
관리자들 중 최고 위치에 서 있는 그이지만, 탑에 왜 갑자기 공백이 생겨났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따로 탑에게 질문을 해도 답변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남들보다 오랫동안 관리자로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조차도. 혹은 별 볼 일이 없는 결과물일지라도. 모든 것은 탑이 의도한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역시 그러할 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탑의 공백으로 생긴 변화와 준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이한 등반자가 불러올 변화를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 *
4년 후.
79층, 물의 도시 티탄폴의 어느 여관.
살짝 취기가 오른 사내 둘이 대화가 오간다.
“야야! 인듀어 길드가 무너졌단 소식 들었어?”
“당연히 듣긴 들었지. 근데 그 말이 사실이야?”
“왜 그 전에 만났던 활쟁이 아저씨 있잖아. 80층을 공략하고 있다던.”
“알지. 이름이 고든이었나? 근데 그 아저씨가 왜?”
“그 아저씨한테 들은 얘기인데. 인듀어를 무너뜨린 게 화이트 길드래. 근데 또 다른 소문으로는 대마도사 한 명이 족쳤다는 말도 있어.”
그 애기를 들은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성을 냈다.
“에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인듀어를 어떻게 무너뜨려! 이 양반아!”
“내 말 들어 봐! 보통은 불가능하지. 근데 그, 뭐냐. 몇 년 전에 티탄폴에서 거대 고래, 빅웨일을 잡았던 사람 기억해?”
“아, 그…… 말도 안 되게 강했던 한국인?”
“그래! 그 남자가 소문의 대마도사라는 말이 돌고 있다니까? 아무도 잡지 못했던 빅웨일을 단신으로 잡았는데. 혼자서 길드 하나 못 무너뜨리겠어!?”
“그래도 상대가 인듀어 길드면 말이 다르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거대한 바위도 금이 가면 부서지는 법이야. 일단은 인듀어 길드가 무너진 건 확실하잖아? 난 그 대마도사가 인듀어를 무너뜨렸다는 데 10만 포인트 건다!”
“좋아. 난 화이트가 무너뜨렸다는데 10만을 걸겠어!”
쿵!
둘이 내기를 하는데 그 틈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푸른빛이 서린 망치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남자는 식탁 위에 포인트 큐브를 올려놓은 채 씨익 웃었다.
“대마도사가 인듀어를 무너뜨렸다는데 1000만.”
“어이, 넌 뭐야!?”
내기에 찬물을 끼얹자 사내 둘은 남자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곧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불만이 쏙 들어갔다.
“아니면 여기 안에 든 포인트 전부 두 분에게 넘겨 드리죠.”
큐브에 진짜 1000만 포인트가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중에 한 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준다는 거, 진짜요?”
“그럼. 내가 한 말은 지킵니다.”
“사실 확인은 어떻게 하자는 거요? 알고 싶으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여기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나.”
“그래! 그래! 애초에 그럴 수 있었음 이곳에 안 남아 있지.”
그러자 남자는 걱정 말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 볼 겁니다.”
“뭐? 크하하하하! 웃기는 양반일세. 거기에 아무나 올라갈 수 있나. 젊은 양반, 주위 안 보여?”
여관에 죽치고 앉아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 전부 더 이상 층을 못 올라가서 머물러 있는 거야! 안 올라가고 싶어서 안 올라가는 게 아니고. 그런데 무슨 동네 마실 나가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에잉! 큰돈을 준다길래 기대했더니. 술맛만 떨어졌네.”
그 옆에 있는 사내가 말을 덧붙인다.
“큐브는 가져가슈. 말도 안 되는 내기에 끼어들 생각은 없으니.”
여관에 있는 모두가 남자를 비웃거나 허세가 가득한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들의 반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두 눈빛은 한없이 진중했다.
끼익-
조용히 큐브를 가지고 여관을 나온 그는 심해의 물로 뒤덮여 있는 도시의 천장을 바라봤다.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천장에는 자그만 구멍이 있었다.
구멍과 이어진 통로에는 수많은 심해어 들이 헤엄치는 중이었다.
그런데 심해어들의 크기가 대산처럼 커다랗다.
한데 저 심해어들을 뚫고 통로를 지나야만 다음 층으로 향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남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망치를 손에 쥐더니 이내 하늘높이 뛰어올랐다.
쿠우우우우웅-
순식간에 구멍을 통과해 통로에 들어선다.
이후 마주하게 된 흉측스럽게 생긴 심해어들을 보며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곳을 지났다는 거지?”
심해어 한 마리가 빠르게 접근해 온다.
그러자 남자, 아니 안수찬은 심해어의 머리를 향해 거침없이 망치를 내려쳤다.
콰아아아웅!
물속에 강력한 기폭이 발생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심해어가 흰 눈깔을 보이며 기절해 버렸다.
또한 기폭의 여파로 가까이 붙어 있던 심해어들도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심해어들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워 나간다.
안수찬은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쉬우면 재미없지!”
그는 다시 망치를 힘껏 휘둘렀다.
콰아앙! 콰아아아아웅!
그날, 통로에 있던 수많은 심해어들이 망치를 맞고 나가떨어지며 간만에 초식 물고기들은 포식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안수찬은 탑의 마지막 무대인 말라비틀어진 세계, 칼리비아로 향한다.
* * *
88층.
끝없이 펼쳐진 불의 사막지대.
“허억, 허억…….”
오진하가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앞서 걷고 있던 내 어깨를 붙잡는다.
“준석 씨, 이대로 가다간 저 죽을 것 같습니다…….”
“안 죽어.”
“……대체 언제까지 가야 됩니까? 걸은 지 벌써 30일도 넘은 것 같은데.”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앞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거의 다 왔어.”
“분명 그 얘기, 며칠 전에도 한 걸로 아는데.”
결국에는 참다못한 그가 소리를 질러 댔다.
“아니! 무슨 뛰기도 안 되고 스킬 사용도 안 되고! 그 상태서 불로 지글지글 끓는 사막을 횡단하는 거라니. 구이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아~ 이러느니 차라리 괴물을 상대하는 게 낫지.”
동감하는 바였다.
개인적으로 회귀 전에 가장 싫어했던 미션이 88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의 서브 미션은 메인 미션과 연관이 있기 마련이건만.
상층부에 있는 80~99층의 메인 미션도 불의 사막을 건너는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물론 서브 미션보다 메인 미션을 먼저 클리어하거나 아님 그보다 위에 층의 미션을 클리어하면 중간을 스킵할 수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88층을 그런 식으로 뛰어넘길 수는 없었다.
반드시 걸어서 불의 사막을 건너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후우,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오진하는 다 죽어 가는 반면.
“쿠훌, 쿠훌…….”
다칼은 내 머리 위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태양의 일부를 집어삼킨 다칼에게는 이 정도의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불의 면역력이 있어 견딜 만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은 못 가겠습니다! 안 가! 때려치워!”
결국에는 오진하가 포기를 선언해 버렸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설득을 하기 위해 말을 잇던 나는 신기루처럼 등장한 메시지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의 사막에 오랜 시간을 머물며 걸었습니다.]
[사막의 인도자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불의 도시 카락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습니다.]
[카락의 포탈 문을 획득합니다.]
“떴다!”
“예? 뭐가 떠요?”
88층을 중간에 스킵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불의 도시 카락 때문이었다.
카락의 주인 사막의 인도자의 인정을 받으려면 불의 사막을 계속해서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굳이 카락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반드시 그 도시에 들어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카락에는 하데스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
세포네가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