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08화
208화 축하연 (2)
손을 끌어당기자 유희는 자연스레 가까이 붙었다.
머리를 숙이면 상대의 머리가 닿을 정도로 밀접했다.
나는 살며시 주위를 살피며 입을 똈다.
“춤, 춰 본 적 있어?”
“아니.”
“하긴. 너나 나나 그럴 기회가 없었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우리들에게는 춤은 사치였고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였을 뿐이다.
그것은 탑에서도 마찬가지였건만.
‘이런 날도 생기는구나.’
유희는 내 어깨만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춰야 할지 모르니 어색하게 두 손을 뻗었다 말았다 반복한다.
이러다가 춤은 춰 보지도 못하고 노래가 끝나리라.
눈치껏 남들이 추는 모습을 보며 흉내라도 내 보자는 생각에 어색하게 뻗고 있는 유희의 손을 붙잡아 내 어깨와 허리에 안착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움직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천천히 따라와.”
여전히 유희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보폭을 맞추기 위해서 천천히 움직였건만.
꾹.
“아, 미안!”
구두에 발이 찍혔다.
꾹, 꾹.
이후로도 유희는 실수를 연발했다.
그녀의 반응 속도라면 충분히 발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긴장을 많이 한 듯 보였다.
어깨와 허리에 올라가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당당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다.
하나 나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이상하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움직이니 춤에 익숙해진 유희가 더 이상 발을 밟아 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마주 본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두 눈동자와 약간 홍조가 띤 그녀의 얼굴에 낯선 느낌을 받았다.
분명하게 낯선데 나쁘지 않았다.
유희는 여유를 되찾은 듯 입을 열었다.
“준석아.”
“응.”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잊을 리가 있나.”
오랜 전의 일이건만, 여전히 어제 일처럼 뚜렷하다.
어떤 무리에게 궁지에 몰려 있던 나를 구해 주고 빵 한 조각을 나눠 준 유희의 모습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날 왜 구한 거야.”
하마터면 자신도 같이 휩쓸려 죽을 수도 있었다.
한데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땐 딱히 여력이 되지 않아 미처 묻지 못했지만 항상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희가 아무 때나 남을 위해서 나서는 녀석이 아니었다.
물론 타인을 위한 마음이 여타 사람들의 비해 크긴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면 꽤 신중해지는 타입이었다.
내 물음에 유희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땐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던 것 같아.”
대답을 듣곤 김이 팍 새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 유희가 뭐라고 답할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날 구하는 과정에 계산이 섞여 있었다면 진작에 알아챘을 테니 말이다.
어느덧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두 번째 곡에서 나랑 유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서로를 바라보며 춤을 췄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춤이란 것이 이리 즐거운 것이 몰랐는데, 추면 출수록 몸이 노래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 곡은 빨리 끝난 듯한 느낌이었다.
세 번째 곡도 흘러나왔지만 우리들은 춤을 추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그만 추자고 말했다기보다는 둘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상하리만큼 긴장을 많이 해 더는 춤을 추질 못할 것 같았다. 아마 유희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모든 곡이 끝난 이후에는 축하연의 주최자인 내가 연사로서 축사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
어차피 내 말을 길게 듣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것이기에 아주 짤막하게 끝내 버렸다.
그 뒤엔 유희와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아주 흔한 풍경의 평범한 대화였다.
아마 지구도 평화로웠다면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별 시답잖은 수다나 떨며 하루를 보내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하나둘씩 테라스를 벗어나기 시작할 즈음.
나는 다칼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곤 그를 찾아나섰다.
“여기 있었네.”
다칼은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은 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감상에 젖은 듯한 얼굴이다.
옆에 서자 다칼이 이쪽을 흘깃 쳐다봤다.
-왜 더 즐기지 않고.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즐길 만큼 즐겼어. 그러는 너는 왜 더 즐기지 않고.”
-나도 충분히 즐겼다. 여기 배가 불룩한 거 안 보이나?
배를 툭툭 두들기는 다칼.
그런 다칼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얼굴은 즐거운 표정이 아닌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캬야항.”
-고민은 무슨. 그냥 쓸데없는 상념에 잠긴 것이지.
그래도 곁에 오랜 시간을 붙어 있어서 그런지 다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복수. 그게 걱정돼?”
그 말에 다칼이 반응을 보였다.
-역시 회귀자의 눈은 못 속이겠군. 그래.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신좌에게 덤빈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지. 그저 대항만 했을 뿐. 신좌를 없앤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르켈라를 해치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상당수 이전의 힘을 되찾았다지만 과거에 힘이 온전했을 때도 신좌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야?”
-무엇을 말이지?
“하아~.”
아무래도 각인시켜 줘야겠다.
“내가 변한 만큼 너도 변했단 얘기야. 네가 말한 대로 과거의 힘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상대도 되지 못하겠지. 하지만 지금 너를 봐. 비단 과거의 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달의 여신 페르라의 힘과 내가 쥐어 준 각인 아이템들.
이외에도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흠, 그대의 말을 듣고 나니 일리가 있다.
“그리고 매번 말했듯 너 혼자가 아니야. 너무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물론 결국에는 복수를 다칼이 주도하겠지만, 항상 뒤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그래. 더 이상 혼자가 아니지.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내 왔다 보니 아무래도 그것이 생각에도 영향을 끼치는 듯하군.
그 말에 공감이 됐다.
나도 다칼만큼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그 기분을 너무도 잘 알았다.
다칼은 정리할 생각이 있는 듯 다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나 또한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나 가야 할지 바깥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중층부에서 많은 변화들이 있었어. 특히 관리자가 층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문제도 그렇고, 탑의 부재는 심각한 일이다. 모두 회귀 전에는 없던 결과물이야.’
어쩌면 이 문제에 대해서 신좌들은 알고 있을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에게 묻기엔 워낙 민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대로 묻어 두는 것보다는 답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답을 구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나는 신좌들이 보내오는 메시지를 훑어보며 현재 내게 가장 호의를 보이고 있는 신좌를 찾았다.
‘아무래도 이 자에게 묻는 게 낫겠지.’
“에페르.”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최근에 내게 큰 빚을 진 에페르는 대전쟁이 끝난 직후 꾸준히 호의를 보내오고 있었다.
본래라면 신약을 맺은 하데스에게 묻는 것이 맞지만 최근에 그와의 관계가 호전되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거래하고 있을 뿐. 신뢰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애초에 묻는 질문에 답을 해 줄 가능성이 낮았다.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리 좀 만들 수 있나.”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잠깐만 기다리라 말합니다.]
한 5분쯤 흘렀을까.
갑자기 주변 환경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흑백으로 된 배경에 모래폭풍이 불더니 이내 하늘에서 인간의 형태를 띤 빛덩이가 밑으로 내려왔다.
나는 놀란 얼굴로 빛덩이를 쳐다봤다.
에펠 왕국 전체가 에페르의 영역이기 때문에 당장에 등장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당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이기에 이리 쉽게 얼굴을 볼 줄은 몰랐다.
빛덩이가 곧 윤곽을 잡아간다.
그의 얼굴은 라그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에페르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드디어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군.”
분명히 신좌와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은 압박이나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신좌가 나를 적대하지 않아서?
아니다.
‘내가 달라진 거야.’
신좌의 격과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낼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것에 기쁨을 느끼는 한편 그를 부른 이유를 되새김질했다.
“아쉽게도 오래 대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물어볼 것이 있다면 빨리 물어보도록.”
메시지를 보냈을 때와는 달리 차가운 인상과 무뚝뚝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최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기 전에 주위를 살피자, 에페르가 말을 잇는다.
“다른 신좌들은 듣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대체 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 질문에 에페르가 크게 동요했다.
선뜻 답하지 못한 채 긴 침묵이 흘렀다.
“왜 답할 수 없는 문제인가?”
내가 다시 물으니 그제야 입을 연다.
“불문율. 탑과 관련된 것을 언급하는 것은 신좌들 사이에 금기시되어 있지. 하지만 그대라면 알 권리가 있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 또한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지. 얼마 가지 않아 큰 혼돈이 초래할 것이다.”
이미 혼돈이 초래할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혹시라도 예상이 빗나갈 가능성에 대해서 염두 해 두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좌인 에페르가 쐐기를 박았다
혼돈이 초래할 것이라고.
“여태와는 다른 환경 속에 탑을 오르게 되겠지.”
에페르가 파랗게 빛나는 두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계속 말이 없자, 나는 얼굴에 손을 대며 뭐가 묻었는지 확인했다.
그때.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건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신좌를 앞에 두고 이리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다니, 생각 이상으로 격이 깊어. 육신도 한계를 넘어섰구나.”
그는 내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런 걸 듣고자 그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에페르는 이를 눈치챈 듯 딴말을 하다 말고 내가 궁금해하는 걸 말해 주었다.
“여태는 층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신경 썼을지 모르나, 앞으로는 외부의 위협도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외부의 위협이란 신좌를 뜻하는 것일 터.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가려던 에페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군.”
갑자기 그가 왜 사라지려고 하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가기 전에 그래도 마지막 말은 해 주고 가야지.”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에페르는 급한 사람처럼 그리 말을 남기곤 모래폭풍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하아~.”
끝까지 말을 다 듣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페르에게 필요한 답변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외부의 위협이라…… 지금은 다들 눈치를 보고 있는 거겠지. 탑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만약 신좌들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하면 한순간에 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것이 딱히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일이 생겨나기 전에 힘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경각심만 되살아났을 뿐이다.
그리고 비단 위협은 신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전쟁 때 위협을 막기는 했지만 여전히 관리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내 목을 노리고 있다.
‘이렇게 보니 적이 한두 명이 아니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나씩 부수고 올라가는 것.
부수고 또 부수며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 있으리라.
마음을 굳게 다진 나는 저 멀리 다음 층으로 향하는 장소를 보며 이내 세차게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