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07화
207화 축하연 (1)
엘리자는 내가 거절할 줄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파트너, 없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은 없는데, 마침 데리고 갈 사람이 떠올라서요.”
“혹시 항상 곁에 붙어 다니던 그분이요?”
“네.”
대답을 들은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을 한다.
“그냥 나랑 가면 안 되나.”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은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들었지만 일부러 못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축하연에서 그녀와 파트너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이곳에서 헤어질 인연이었다.
물론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지만 왠지 이것이 그녀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탑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파트너는 단 한 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내 엘리자는 악수를 건네 왔다.
손을 맞잡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덕분에 저도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그녀와 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것을 직감했다.
엘리자가 물러가고, 내 곁에 알베스토가 찾아왔다.
“아쉽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라면 교황으로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 터. 신자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충분히 교황의 권위를 누리고 그 후에 층을 올라가도 늦지 않았을 것이라 봅니다.”
“예. 그랬다면 많은 수혜를 봤겠죠.”
“그런데도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거창한 이유라도 있을까 봐요?”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말하기 불편하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하지 못할 것까지야. 그저 층을 빨리 오르려는 것뿐입니다. 이젠 지긋지긋하거든요.”
“지긋지긋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별 뜻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알베스토가 다시 입을 떼려는 순간 추기경 중에 한 명이 그를 불렀다.
“크흠,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가 보세요.”
“그럼, 축하연 때 뵙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전 교황에 대한 예우를 해 주었다.
알베스토가 떠난 뒤, 잠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에게는 지긋지긋하다는 말에 별 뜻이 없다고 말했지만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겨우 몇 년간 탑을 오른 등반자처럼 보이겠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30년이 넘는 세월이 누적되어 있다.
분명히 이전과는 다르게 성장하고 있고 다른 결과물도 만들어 내고 있지만 결국에는 탑 안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 제한되고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다른 사람들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손이 떨려 온다.
마음속 한편에 넣어 두었던 나만의 자유를 다시 갈망하니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다급해할 필요 없어. 중층부를 클리어했으니 강은 건넌 셈이야. 이제 목적지까지 걷기만 하면 되는 거다.’
괜히 이제 와서 조바심을 냈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흐트러져 있던 감정을 추슬렀다.
“후우~.”
이어서 주위를 살피곤 조용히 신전을 나왔다.
내가 교단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으니 그곳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한 곳은 화이트 길드의 아지트였다.
똑똑.
문을 두들기자마자 곧바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어? 준석아.”
“꼴이 그게 뭐야? 자다 일어났어?”
유희는 내 말을 듣더니 서둘러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한번 꼬인 머리카락은 쉽게 풀어지질 않았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설마 지금 당장 층을 올라가자고 말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후~.”
“밤에 출발하자.”
“그래. 응, 어!? 잠깐. 밤에 출발하자고?”
“잊었어? 축하연 끝나면 바로 출발하자고 미리 말했었잖아.”
“아!”
“아직 잠이 덜 깼네.”
유희를 비롯한 화이트 길드원들은 이미 나처럼 55층까지 클리어한 상태였다.
물론 실제로 거의 모든 미션을 클리어해 낸 건 유희였다. 아니면 파티를 맺은 다른 길드원들이 지금 당장에 55층에 다다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안. 며칠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그거 준비하라고 온 거야?”
“아니.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뭔데?”
“축하연에 참석하려면 파트너가 필요하다던데. 같이 가자.”
“응? 파트너가 필요해?”
“어.”
아무래도 유희도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음, 뭐…… 그래.”
유희는 한쪽 뺨을 긁적이더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혹여 거절할까 싶어 살짝 긴장했건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긴장을 하지? 거절하면 말면 되는 건데.’
순간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던 나는 유희의 말에 집중했다.
“다른 거 필요한 건 없고?”
“응? 어떤 거?”
“음. 예를 들면 옷이라던가.”
“그런 거는 딱히 말이 없던데. 그냥 네가 입고 싶은 걸로 입고 와.”
유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무거나 입어도 되는 거 확실해? 괜히 아무거나 입었다가 쪽당하면 너 내 손에 죽는다?”
대뜸 주먹을 들이민다.
“정 못 믿겠으면 나한테 묻지 말고 따로 알아보던가.”
“그러고 보니 축하연, 네가 주최했잖아. 그리고…….”
유희가 가까이 귀에 대고 말을 이었다.
“회귀했으니까 이런 거 잘 알 거 아니야.”
“아니, 잘 몰라.”
“뭐?”
“애초에 축하연을 열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회귀 전에는 대전쟁이 끝난 뒤에 딱히 축하연을 열지 않았다.
워낙 경황이 없었기도 하고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뭐야. 이번이 처음이었어?”
“어. 그리고 내가 주최한 건 맞는데, 사실 지시만 내렸지 자세한 건 라일 추기경이 도맡았지.”
“그럼, 라일 추기경한테 물어봐야겠네.”
유희는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하아~ 머리도 엉망이고 옷도 맞추려면…….”
혼자서 구시렁대더니 이내 있다 보자는 말과 함께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하나 살까.’
냉정하게 봤을 때 축하연에 입고 가기엔 너무 전투적인 느낌이 강했다.
‘사자.’
옷을 고르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이러고 가서 눈에 띄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저 멀리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쳐다봤다.
“열렸으려나…….”
아직 전쟁의 피해 때문에 열리지 않는 가게들도 꽤 있을 것이다.
“뭐. 찾아보면 있겠지.”
정 안 되면 시스템이 운영하는 옷가게도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것들은 죄다 센스가 구린 것들뿐이었다.
간혹 괜찮게 나온 디자인도 있지만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보다는 수량도 적고 가격도 비싼 편에 해당했다.
거리로 이동하니 다행히 두어 군데는 열려 있었다.
나는 그중 마음에 드는 가게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옷 한 벌을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간만에 성능 위주가 아닌 외형에 신경을 쓴 옷을 고르다 보니 몇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이내 거울 앞에 선 나는 앞뒤 모습을 살피며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다칼에게 물었다.
“어때?”
귀찮은 표정을 짓는 다칼이 대충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은커녕 하품만 늘어지게 했다.
“야, 좀 봐봐. 어떠냐고.”
“크흥~.”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입었던 옷이 낫다. 옷에 각이 져 있고 움직이기도 불편해 보이는 게 실용성이 떨어져 보이는군.
“축하연에 입고 갈 건데 실용성은 왜 따져? 하~ 됐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마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준석 씨! 시간 다 됐습니다!”
먼저 현관문 앞에 나가 있는 오진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나가!”
마지막으로 살짝 삐쳐 나온 머리카락을 꾹 누르곤 방을 빠져나왔다.
“오~.”
오진하도 옷차림에 꽤 신경을 썼는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중절모까지 쓴 그는 영국의 신사를 떠올리게 했다. 오진하도 내 모습을 보더니 감탄을 흘린다.
“양복, 잘 어울리시네요.”
“그래?”
나도 모르게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에 서 있는 다칼을 흘겨보며 역시 네 안목이 잘못된 것이라고 두 눈으로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나 딱히 다칼은 신경 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시죠.”
오진하가 먼저 밖을 나섰다.
간만에 셋이 같이 외출을 한다.
축하연은 왕국의 백성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대교회 앞에 있는 광장에서 치러졌다.
물론 교단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교회 뒤편에 있는 신전에는 드넓은 공간의 테라스가 존재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고풍스러운 느낌의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천장은 하얗게 발광하는 꽃잎들이 핀 줄기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내 신전 근처에 이르자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다들 은근 축하연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외모와 복장에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느껴졌다.
‘축하연을 열길 잘했어.’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에 출입했다.
축하연을 열기 위해서 조금 더 내부를 꾸민 것이 보였다.
‘역시 라일이 일 하나는 잘하는군.’
테라스에 들어서자 나랑 같이 온 오진하는 아내와 단둘의 시간을 가지겠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자리를 뜨기 전에 보여 준 그의 얼굴에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오진하는 내가 건네준 소울 일루전으로 아내를 소환할 예정이었다.
아마 오늘이 그에겐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리라.
“캬항!”
한편 다칼은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테라스에 등장했다.
어수룩하게만 보였던 하성태가 늠름해진 모습으로 에레나와 함께 출입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박자린과 카를로가 팔짱을 낀 채로 나타났다.
“오호.”
신선한 조합에 흥미로운 눈빛을 띠던 나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웅성웅성.
주변의 술렁거림이 일었다.
또각, 또각, 또각.
유독 구둣발 소리에 신경이 집중된다.
점차 발소리는 가까워지더니 곧 내 앞에 여성 한 명이 멈춰 섰다.
나는 그 여성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김유희……?”
워낙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살짝 헷갈릴 정도였지만 눈과 코, 입. 체격을 보면 유희가 확실했다.
“이젠 친구 얼굴도 못 알아보는 거야?”
“아니, 너무 다른 느낌이라.”
“왜? 혹시 반하기라도 한 거야?”
유희는 어울리지 않게 도발적인 말을 서슴없이 했다.
솔직히 아주 잠깐 가슴이 뛰기는 했다.
위로 말아 올린 머리는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냈고, 눈썹과 입술. 피부 톤에는 고혹적인 느낌이 났다
무엇보다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는 분홍색의 꽃잎 드레스는 잘 어울린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뭐야, 말이 없는 걸 보니 정말로 반했나 보네.”
“그러는 너는 얼굴이 왜 붉어졌냐.”
양쪽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살짝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도 않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니 그러지. 그냥 평소처럼 해.”
“시끄러워.”
삐친 유희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내 테라스에는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분위기 탓일까.
나도 모르게 가만히 서 있는 유희를 보며 조용히 손을 뻗었다.
“한 곡 출래?”
그 말에 계속 시선을 피하던 유희가 날 똑바로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말없이 내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