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02화
202화 관리자
메모리 룩.
“크읏!”
마법을 사용하자마자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으로 해일처럼 밀고 들어왔다.
메모리 룩의 단점은 상대의 기억에서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번 발동하면 스스로 멈출 때까지 모든 정보를 빨아들인다.
전생에서 이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정신이 버티질 못해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던 그들의 기억 속에 내가 원하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논과 레나, 둘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네놈들에게 다신 없을 기회를 주지.’
‘이자를 죽여라. 그럼 네놈들을 ○○시켜 주마.’’
기억의 일부가 훼손된 것처럼 도중에 단어가 들려오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의 말에 바논이 입을 연다.
‘저희야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만일 탑이 움직이면 녀석을 죽이기 전에 저희가 먼저 죽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탑이 움직일 일은 없을 터이니.’
이후에도 서로가 말을 이어 나가는 장면이 나왔지만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앗다.
녀석들이 기억을 훔쳐 보는 걸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런 여력이 남아 있었나? 아님 외부에 무언가가…….’
스아아아!
보여지던 장면이 검게 물들며 소용돌이쳤다.
파짓!
“……!?”
머리 위로 올렸던 손이 강제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으아아악!”
“으윽, 꺄아아아!”
둘은 머리를 움켜잡은 채로 강한 압박을 받듯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곧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안 돼에에!”
레나의 머리가 유리가 조각나듯 갈라지며 그 안에서 이질적인 빛이 뿜어져 나왔다.
폭발의 징조가 보이는 순간.
서걱!
나는 다크소드로 소환해 그녀의 목을 베어 버리곤 이어서 옆에 있는 바논의 목도 절단했다.
[십멸 중에 하나인 대악마 레나를 처치하였습니다!]
[십멸 중에 하나인 대악마 바논을 처치하였습니다!]
[등반자의 이명의 격이 크게 오릅니다!]
[대악마 레나와 대악마 바논을 처치하였으므로 특별 보상 및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두 개의 십멸장이 지급되었습니다.]
[멸악의 마검이 지급되었습니다.]
눈앞에 들어온 보상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도중에 누군가가 관여했다.’
녀석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이질적인 빛.
‘처음에는 신좌 중에 하나가 선을 넘은 줄 알았는데.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미션에 영향을 갈 정도면 관리자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그들이 조용하다는 것은 단 한 가지의 결론에 도출한다.
솔직히 아니길 바랬건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관리자.”
어떤 연유에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탑에서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존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관리자가 날 노렸다면 지금 이 상황들이 전부 이해가 돼.’
탑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온 그들.
하지만 사실 관리자도 탑의 종속된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누구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결국에는 탑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은 똑같았다.
사소한 변화라면 몰라도 이 정도 규모의 일을 저질렀다면 탑은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탑이 침묵한다는 건 매우 큰 문제였다.
탑의 감시가 사라졌다는 뜻은 곧 탑이 정해 둔 룰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대로 감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혼돈이 초래하겠지.’
신좌들이 멋대로 날뛰는 것은 물론이고 상층부에 있던 등반자들이 저층부, 중층부로 내려와 온갖 행패를 부릴 것이 분명하다.
이외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날 터.
‘그나마 안전지대이던 곳들도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거야.’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앞날도 걱정인데, 관리자가 적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더욱 피곤해졌다.
신좌들을 적으로 돌렸을 때도 이런 착잡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러나저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앞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제거하는 것.
그것이 설사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탑의 관리자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탑이 제 역할을 해 주지 못하면 내가 정상에 올랐을 때 누가 내 소원을 들어주지?’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일단은 그건 데카인을 처치한 뒤에 생각하자.’
아직 정상 근처에 다다르지도 않았건만. 미리 걱정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이내 눈앞에 문제들을 직시했다.
아직 도심에는 대악마가 두 명이나 살아 있고 그 외에 악마 군단이 날뛰는 중이었다.
군단은 라그넬을 비롯해 왕국의 병사들과 교단의 기사들이 막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대악마 둘은 유희와 다칼이 하나씩 맡고 있었다.
‘먼저 대악마부터 정리해야 돼.’
현재 상황을 보았을 때 도움이 필요한 곳은 유희가 있는 쪽이었다.
전력 면에서 여전히 유희보다 다칼이 우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유희를 도우러 가기 전에 잠시 할 일이 있었다.
방금 전에 얻은 보상에 시선을 둔다.
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십멸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두 개의 십멸장과 하나로 뭉쳤다.
[십멸장에 작은 변화가 생겨납니다.]
부적에 하얗게 물들어 있던 아홉 개의 선들 중에 두 개가 새로 검게 물들었다.
이것으로 검정색은 총 세 개.
앞으로 일곱 명만 더 상대하면 완전해진 십멸장을 얻을 수가 있었다.
정보창.
(((((((((((((((((((((((((((((((((((((((()
미완성된 십멸장 (3)
내용: 대악마들의 기운이 가득 스며들어 있다.
효과: 악마계열 피해 감소, 악마계열 지배력 강화, 십멸장의 압도하는 기운
추가 효과: 봉인
조건부 효과: 소지자의 지배하에 놓인 악마들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
조건부 효과: 십멸선에 새겨진 대악마의 기운을 소모할 경우, 소지자는 일시적으로 마나가 두 배로 증가하고 마법능력이 크게 상승한다. 적이 악마계열일 경우 증가의 폭은 더욱 커진다.
조건부 스킬 습득: 봉인
(((((((((((((((((((((((((((((((((((((((()
봉인되어 있던 조건부 효과들이 해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효과에 십멸장의 압도하는 기운이 추가되어 있었다.
회귀 전에도 십멸장은 얻었었지만 지금의 효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봉인되어 있긴 하지만 추가 효과와 조건부 스킬 습득 또한 이지 난이도에서 습득한 십멸장에선 볼 수 없는 옵션이었다.
‘아무튼, 십멸장을 완성하게 되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겠지.’
다시 십멸장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내 멸악의 검을 쳐다봤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칼날과 도중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두 개의 하얀색 뼈가 뿔처럼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 홈에는 팔각형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는 채로 빛을 머금었다.
후웅, 후웅-
‘그립감도 좋고 무게도 가볍다. 무엇보다…… 그저 쥐고 있기만 했을 뿐인데 힘이 넘쳐 나.’
정보창.
(((((((((((((((((((((((((((((((((((((((()
(귀속) 멸악의 마검 (봉인)
효과: 정신피폐, 정신착란, 힘x2, 마나x1.5
조건부 효과: 악한 자들을 일정한 수 이상으로 베어 내면 멸악의 마검이 ‘해방’ 상태로 변해 잠재된 힘을 방출한다.
영구 습득: 힘+100, 마나+100
(((((((((((((((((((((((((((((((((((((((()
왜 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넘쳐 났는지 알 수 있었다.
‘미쳤군…… 힘과 마나가 100씩 오른 것도 모자라 효과에 곱하기 부여까지.’
이 정도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무기이다.
다만 효과에는 정신피폐와 정신착란도 같이 쓰여져 있었다.
강한 힘이 주어지는 대신 패널티가 작용했다.
그러나 정신피폐나 정신착란도 결국 정신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일.
만일 정신력이 높다면 마검에 주어진 패널티도 무시해 버릴 수 있으리라.
‘검인 게 살짝 아쉽네.’
물론 검과 지팡이를 같이 사용해도 나쁘지 않은 구도였다.
마도사라고 해서 무조건 지팡이만 사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내 마검과 지팡이를 손에 쥐고서, 유희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극대화한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유독 서쪽에 강렬한 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 하늘 높이 빛줄기 몇 개가 치솟았다.
이어서 공중으로 유희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기 있군.’
쾅!
나는 유희를 발견하자마자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 * *
미러룸에서 중층부의 일을 관시하던 자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저런 병신들!”
자리에서 일어선 자키는 화를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다시 침착한 태도로 돌아와 스크린 속의 상황을 지켜본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참았던 분노가 또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던 자키는 스크린 속에 보이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준석……!”
그를 죽이기 위해 대악마를 넷이나 보냈건만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악마 두 놈이 쉽사리 제압당하고 나머지 두 놈도 그의 동료들에게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악마급이면 상층부의 등반자도 쩔쩔매는 존재이다.
한데 중층부 등반자 따위가 그런 놈들을 압도했다.
자키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황을 지켜봤지만 끝끝내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저런 머저리 같은 것들! 중층부 등반자 하나 처리 못 해!?”
그때. 자키의 상급자 레이가 미러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키.”
“레, 레이 님!”
놀란 자키가 다급히 그를 맞이했다.
“자신만만해하기에 기회를 주었건만. 일만 크게 벌려놓고 수습은커녕 층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군.”
레이는 그를 벌레를 쳐다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쯧. 무능하긴.”
스윽.
레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것을 본 자키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레이 님!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질없는 짓을. 핑계라도 댈 셈이면 됐다. 애초에 네놈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
“핑계가 아닙니다! 제발 제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들어 본 뒤에 개소리라 생각되시면 그때 절 어떻게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조용히 자키를 내려다보던 레이는 입을 뗐다.
“……좋다. 그간 함께한 여정도 있으니 마지막 유언이 뭔지 들어 보지.”
“감사합니다, 레이 님!”
꿀꺽.
“이제 곧 라에프가 들이닥칠 겁니다.”
“라엘을 말하는 것인가……?”
“예!”
라엘 혹은 라에프라 불리는 그는 타락한 대천사이자 대악마이며 십멸장 사이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자 레이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자키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다섯의 대악마를 중층부에 끌어들였다. 그런데 이젠 라엘까지……. 자키, 탑에 공백이 생겨났다고 하여 이 세상이 전부 너의 것이 된 것 같은가?”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뒷감당을 하기엔 너무 크게 일을 벌렸군.”
“그, 그래도 이 모든 원흉이 된 저자를 처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되기만 한다면! 탑이 다시 이전처럼 되돌아올 겁니다!”
“그거야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지.”
곧 레이의 등 뒤로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 쪽으로 몸을 돌린 레이는 자키를 힐끗 쳐다본다.
“이미 엎질러진 물. 어디 한번 지켜보지. 만일 이번에도 실패를 하게 된다면 그땐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기억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레이 님!”
자키는 레이가 균열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뒤늦게 머리를 쳐든 그는 이를 빠득 갈앗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 담긴 준석을 죽일듯이 째려보았다.
“전부 저놈 때문에……!”
하지만 곧 그는 스크린 속에 나타난 라에프를 보며 광기가 서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에프는 상층부의 랭커도 이기지 못하는 압도적 강자!
아무리 준석이 예상을 초월하는 이레귤러라고 해도 라에프를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이제 곧 네놈의 목이 날아가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보겠구나.”
크흐흐, 크히힛!
곧 미러룸에는 자키의 웃음소리가 널리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