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00화
200화 라그넬 (2)
[고대 신성병기 라그넬을 기동시킵니다.]
콰드드!
라그넬이 광채를 번뜩이며 고개를 숙여 나를 응시한다.
[고대 신성병기 라그넬이 당신의 자격을 가늠합니다.]
기사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끄떡없는 라그넬은 아무에게나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
에페르교의 교황만이 라그넬을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하나 라그넬을 깨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과연 주인을 잘 인식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라그넬에 대해서도 회귀 전에 우연히 어느 교황의 일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만일 나를 주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통제되지 않은 병기를 깨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칼, 어둠.”
“캬하응?”
-우리 편을 소환한 거 아니었나?
“그렇기 한데. 만일을 대비하는 거지.”
스르륵-
어둠이 튀어나와 내 주변을 감쌌다.
곧장 지배력을 끌어 올려 라그넬을 언제든지 속박할 수 있도록 대기 상태로 있었다.
쿠궁, 쿵!
이내 라그넬이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워어!”
오진하가 라그넬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선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했지만 금방 라그넬이 보인 행동을 보곤 다시 공격을 멈추었다.
콰앙!
라그넬은 기사가 주인에게 충성심을 드러내듯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고대 신성병기 라그넬이 당신을 주인으로 인식합니다.]
[고대 신성병기 라그넬에 대한 통제권을 얻습니다.]
‘일지에 적힌 대로다.’
라그넬이 교황이 된 내게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라그넬, 일어서.”
스윽-
내 말을 듣자마자 라그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콰득, 콰드드!
오랜만에 기동이 되는 것이어서 그런지 온몸에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육중한 덩치에 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여전히 병기로서 쓸 만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구구구구구-
그때 신전 입구를 지키고 있떤 성기사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라그넬이 그 소란을 피웠으니 당연히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적이다!”
스릉!
누군가의 외침에 성기사들은 모두 검을 꺼내 들었다.
이어서 라그넬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교황 성하! 물러나십시오!”
라그넬과 가까이 붙어 있는 내게 경고를 해 오기까지 한다.
나는 손을 들어 검을 거두라고 지시를 내렸다.
성기사들은 내 지시를 듣고 잠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교황의 명령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씩 검을 거두었다.
이내 책임자가 다가와 말했다.
“교황 성하, 검을 거두라고 하여 거두었으나 이리 무방비하게 있으면 위험합니다!”
“그쪽 이름이 뭡니까?”
“길리건입니다.”
“길리건 경, 저것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예? 그게 무슨…….”
이들은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인식했다면 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칼날조차 겨누지 못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세요.”
그제야 길리건은 눈앞에 있는 존재를 들여다보았다.
“……에페르 님의 석상!?”
에페르를 본떠 만든 석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길리건은 너무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정말 에페르 님의 석상이다!”
“어떻게 에페르 님의 석상이……!”
뒤늦게 다른 기사들도 거인의 정체를 깨닫곤 크게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혹시 라그넬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길리건은 라그넬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내 말에 반응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배움이 부족하여 무엇을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그넬이 작동한 건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극소수를 제외하곤 알 리가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고대 신성병기 라그넬입니다.”
“라그넬…….”
“에페르 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니 관리에 유념해 주십시오.”
정확하게는 에페르의 분신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에페르의 얼굴을 따왔으니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교단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는 방금 전의 말이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길리건은 라그넬을 마치 자신이 넘보지 못할 고고한 존재로 인식하듯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이는 다른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눈앞에는 메시지가 아른거렸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당신의 행보에 큰 흥미로움을 가집니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라그넬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합니다.]
…….
…….
이후에도 계속해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기대라…….’
나는 길리건에게 애기했다.
“길리건 경.”
“하!”
“지금부로 라그넬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십시오. 만일 손을 대려는 자가 있다면 포박을 해 감옥에 가두거나 그러지 못하게 됐다면 망설임 없이 베어 버리세요.”
“교황 성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길리건은 다시 인원 배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 있던 오진하가 다가와 말했다.
“설마 이렇게 큰 게 움직일 줄은 몰랐네요.”
오진하는 여전히 라그넬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만큼 라그넬에게 압도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구슬이 필요한지는 알겠는데. 하나를 움직일 거면 굳이 여러 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구슬 하나에다가 신성력을 최대한 보관토록 하는 게 좋을 듯싶은데.”
“내가 언제 하나라고 했어.”
“예? 저런 게 또 있어요?”
“있지. 문제는…… 다 파괴됐다는 거지만.”
나는 신전의 어느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석상의 팔과 다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저기에 라그넬이 7기나 묻혀 있어.”
“저곳에 7기나 묻혀 있다고요……? 그냥 예술성이 가미된 평범한 벽인 줄 알았는데.”
“아무튼. 저것들을 꺼내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구슬이 필요해.”
“근데 구슬을 여러 개 만든다치고. 저기에 있는 것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라그넬처럼 멀쩡한 게 아닐 텐데. 어떻게 고쳐 쓰려고요?”
“방법이 있지.”
평범한 방법으로는 파괴된 라그넬들을 수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들만 충족된다면 충분히 고쳐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조건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멀쩡히 움직이는 라그넬이 있을 것.
나머지 하나는 라그넬의 잠재된 힘을 개방시켜 줄 강한 매개체가 있을 것.
멀쩡히 움직이는 라그넬이야 방금 전에 얻은 상태이고. 라그넬의 잠재된 힘을 끌어 올려 줄 매개체는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다만 그 매개체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녀석의 허락이 필요했다.
“오진하.”
“예.”
거래 큐브로 포인트를 지급하며 말했다.
“이건 구슬 제작에 보태 써. 혹시 모자란 게 있으면 따로 말하고. 그리고 최대한 빨리 부탁 좀 하지.”
“뭐. 손이 닿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그럼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어.”
“준석 씨는요?”
“잠시 들를 데가 있어.”
나는 오진하를 먼저 보내 놓고선 다칼과 함께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 * *
“안 돼.”
단호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자세히 들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냐.”
식탁 반대편에 앉아 있는 유희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성검은 누군가한테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아마 주자마자 바로 나한테로 돌아올 걸?”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검은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만일 선택받지 못한 이가 무기를 들면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무기에 욕심을 냈던 자는 큰 화를 입을 수 있었다.
“성검을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런데도 성검을 빌려 달라고? 아무리 너라고 해도 크게 다칠 수 있어.”
“그것도 알고 있지.”
“근데도 빌려 달라고?”
“어. 내가 사용하는 게 아니거든.”
“무슨 소리야?’
“고대 신성병기 라그넬.”
나는 유희에게 라그넬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다른 라그넬을 부활시키기 위해 성검이 필요하다?”
“어.”
“그런데 라그넬이 성검을 드는 게 가능해?”
“말했다시피 라그넬은 신좌 에페르를 본떠 만든 병기야. 솔직하게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가능할 거야.”
나도 일지로 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태껏 보인 결과에 의하면 일지에 적힌 내용은 꽤 신뢰성이 높았다.
“그런데 아까 전에 말했지. 다른 라그넬을 부활시키려면 성검의 힘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그럼, 반드시 성검의 힘을 소모하게 될 텐데. 그러면 지금 유지하고 있는 성역은 곧바로 사라져 버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앞으로 성역을 유지하면서 성검의 힘은 바닥이 날 거야. 이후 힘이 회복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고.”
“성역은 계속 유지해.”
당장에 다른 라그넬들을 부활시켜 봐야 구슬이란 에너지원이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오진하가 구슬을 충분히 만들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려고?”
“네 말대로 성역의 유지가 안 되는 순간 성검의 힘도 바닥이 나겠지. 근데 바닥난 힘을 금방 채우는 방법이 있어.”
“그런 방법이 있다고?’
유희는 두 눈을 번쩍 뜬 채 귀를 기울였다.
“성검이 탄생한 이유는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야. 그리고 그 악을 처단하는 순간 성검은 더욱 강해지지.”
“그 얘기는 악마들을 처단하면 바닥난 힘도 회복될 수 있다는 거야?”
“그래. 죽인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힘이 회복되는 속도가 빠를 거야.”
“으음. 그렇게만 된다면…….”
“성역도 최대한 유지할 수 있고 다른 라그넬도 무사히 부활시킬 수 있지.”
유희는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도와줄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필요한 건 시간뿐인가.’
* * *
대악마가 넷이나 등장했다는 소문은 왕성 내부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큰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거리 곳곳의 분위기가 크게 침체되어 갔다.
그래서인지 이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조차 보기가 어려워졌다.
시끌벅적해야 할 광장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쩌저저적-
그동안 왕성을 보호하던 성역은 어느덧 부서지기 직전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앞으로 버텨 봐야 30분인가.’
교황실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나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임시로 교황 수행원으로 있는 라일이었다.
“교황 성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의 그 이상을 해 주었다.
‘추기경급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고 최대한 도와줬지.’
오죽했으면 그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심하게 졌다. 마치 오진하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쯤하면 됐어.’
“라일 추기경은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 보세요.”
“네?”
“제 수행원 역할은 그만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동안 신전의 지하로 대피해 계십시오.”
“그게 무슨…….”
“숨어 있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라일 추기경은 체력을 비축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나면 나와서 후처리를 좀 해 주십시오.”
라일은 크게 반발했다.
“아닙니다! 저도 교황 성하와 함께 나서서 싸우겠습니다! 성하께서 싸우시는데 어찌 감히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일 추기경이 못 싸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전쟁만큼 중요한 것이 후처리입니다. 만일 후처리를 할 사람이 없다면 전쟁의 여파에서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전 라일 추기경이 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곁에서 지켜본 그는 싸움보다는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황의 명을 어길 생각입니까?”
계급을 들먹이자 그제야 라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말을 따랐다.
교황실을 나가는 그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만 모두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럼 나도 슬슬 나가 볼까.”
“크하아암~.”
어깨 위에서 조용히 잠을 자던 다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내 다칼은 창문 밖을 내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한바탕 날뛸 수 있겠군.
은근히 전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얌전히 있느라 몸이 근질근질했나 보군.’
곧 나는 다칼과 함께 신전의 입구로 이동했다. 입구에는 유희가 대기하는 중이었다.
“준비는 됐어?’
“어.”
비장한 얼굴을 한 유희가 곧 입구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성검을 머리 위로 뻗어 올렸다.
우웅! 우웅!
성검은 점점 강렬한 빛을 내뿜더니 이내 커다란 빛줄기를 하늘로 쏘아 보냈다.
콰가가가강!
빛줄기에 닿은 성역이 사라지고.
크오어어어어-!
사방에서 악마들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