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97화
197화 빛의 서 (1)
나는 거멓게 생긴 둥근 구슬을 손으로 집었다.
[S급 성약을 획득하였습니다.]
마나를 불어넣으니 하얗게 빛이 났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간혹 악마들 틈에 타락한 천사들이 발견되는데. 그들을 잡으면 천사의 피를 얻을 수가 있다.
그 천사의 피를 가지고 만든 것이 성약.
복용할 경우 부작용 없이 빛의 내성을 높여 주기 때문에 성속성에 약한 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영약이었다.
특히나 등급이 높을수록 강한 내성을 얻을 수 있어 급에 따라 가격이 최소 두 배에서 서른 배까지 차이가 났다.
‘S급 성약이면 부르는 게 값이다. 이리 아무렇게나 방치될 물건이 아닌데.’
어찌 된 영문으로 S급 성약이 이곳에 방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방을 사용했던 전 교황이 죽었으니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복용할 생각으로 S급 성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 교황 성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아, 예. 말씀하세요.”
“집중해 주셔야 합니다. 모르실 수도 있지만 인계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으면…….”
“교황 자리에서 내려올 수도 있죠.”
“네. 그러니 듣기 싫으셔도 참고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라일이 하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 * *
교황의 인계 절차를 밟느라고 꼬박 며칠 밤을 새야만 했다.
옆에서 이를 도운 라일이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뗐다.
“이것으로 인계는 끝났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그쪽이 더 고생 많았지.”
라일은 정말로 성심성의껏 인계를 도왔다.
너무 열성적으로 해 주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받으십시오.”
“이것은……! 성약 아닙니까? 어찌 이 귀한 것을…….”
그에게 건넨 것은 C급 성약이었다.
임기 첫날 교황실에서 S급 성약을 발견한 이후 또 다른 성약을 발견했다.
설마 B급 성약 한 개와 C급 성약 한 개가 더 있을 줄이야.
그것들을 전부 내가 먹어서 효능을 본다면 그리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성약은 중복으로 효과를 볼 수 없었다.
한 번 복용을 하고 나면 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S급 성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팔거나 누구에게 건네줄 생각이었다.
결국 C급 성약은 라일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남은 B급은 오진하나 줘야겠군.’
처음에는 유희를 떠올렸지만 그 녀석은 이미 성속성에 대한 완전한 내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주로 성속성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성녀가 되어 성검까지 가지게 됐으니, 성약을 먹어 봐야 아무런 효능도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소비만 되리라.
“교황 성하, 정말로 이걸 제가 가져도 되는 겁니까?”
여전히 라일은 내가 성약을 건네주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듯했다.
“고생했으니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고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일은 연신 허리를 숙여 가며 감사인사를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곤 말을 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이제 그만 가 보십시오. 뒷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으니 들어가 보세요.”
보통은 거절하고 뒷정리를 도왔을 텐데.
그도 겨우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인지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문앞으로 다가가던 그는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뭐, 더 할말이라도 있습니까?”
“미리 물었어야 했는데. 혹시 선포식은 언제 하실 예정입니까?”
“선포식이라면 이미 전에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약식이고, 온 백성들이 교황 성하를 알 수 있도록 정식으로 선포식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선포식은 간단하게 글로 공표하시죠.”
“글로요……?”
“네. 다들 전쟁을 대비하느라 바쁘지 않습니까. 그러니 글로만 제가 교황이 되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겁니다.”
“흠. 본래는 정식으로 얼굴을 드러내 선포식을 치러야 하지만, 교황 성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쉬시고 내일 공표하도록 하세요.”
“네. 그럼 저는 이만.”
라일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나는 뒷정리는 미뤄 둔 채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후아~ 이제야 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네.”
이제 인계 절차도 제대로 끝냈으니 교황 자리에서 내려올 일도 없었다.
쿵-
나는 교황실을 나와 에페르 신전의 지하로 이동했다.
“하!”
이내 지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성기사 두 명이 내게 경례를 해 왔다.
그들은 경례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잠겨져 있는 철문을 열었다.
문을 지나자 어둡던 공간에 불빛이 들어왔다.
천장에는 성스러운 빛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온갖 예술품들이 창고의 소품처럼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곳은 신전의 보물고.
오직 교황만 출입할 수 있으며 설사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보물고에 쌓인 보물들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가 없었다.
교황이 가져갈 수 있는 보물은 단 한 개.
만일 그 이상을 챙겨 가면 강력한 저주에 걸리게 된다.
눈앞에 있는 화려한 예술품들에 시선이 가긴 했지만 내 관심사가 아니기에 금방 지나쳤다.
보물고의 크기는 위에 있는 신전보다 거대했다.
자칫 길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광활했지만 회귀 전에 이미 보물고를 샅샅이 뒤진 경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다행히 이지 때와 지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
곧 자그만 통로를 지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이르렀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바닥에 그려져 있는 그림 뿐이다.
날개를 가진 천사가 하늘에 떠 있는 마름모 형태의 책을 바라보며 떠받들고 있었다.
나는 그림의 중앙에 멈춰 서서 등가교환으로 빛을 소환했다.
우우웅!
눈을 보호막을 씌어야 할 만큼 강력한 빛이었다.
그러자 바닥의 틈새로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쿵, 쿠구구구-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바닥이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반으로 갈라진다.
뒤로 물러나자, 밑에 생긴 구멍에서는 웬 기둥이 솟아났다.
그리고 기둥 위로 은철갑을 두른 성기사 한 명이 같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아아아-
성기사의 주변으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이십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영향을 끼쳐왔다.
피부에 닿지도 않았건만, 전기에 닿은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신성력이군. 회귀 전에 느꼈던 신성력보다 더욱 강하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놈의 신성력이 강하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단숨에 끝내자.’
엘리렌스, 등가교환.
[각 마법의 속성이 대폭 강화됩니다.]
[각 속성의 내성이 일부 형성됩니다.]
[어둠 속성이 대폭 강화되며 빛 속성에 대한 대항력이 세집니다!]
다크소드.
더블캐스팅이 발동하며 순식간에 마흔 개가 넘는 검이 공중에 생겨났다.
[행운의 룰렛이 발동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룰렛에서 이 나왔습니다!]
[발동한 스킬 레벨에 이 일시적으로 적용됩니다!]
[다크소드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압축된 힘의 형태로 변화하며 절단 능력이 보다 강력해집니다.]
형태가 압축되자 어둡던 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리고 칼끝에 어둠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다.
탓, 스악!
성기사가 공중으로 도약해 빛의 검기를 쏟아 냈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다크소드를 움직여 대응에 나섰다.
촤자자자잣! 쾅! 쾅! 쾅!
상성끼리 부딪치며 쇳소리가 아닌, 폭발음이 들려왔다.
지잉, 지잉!
어느새 양옆에는 빛의 구체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동시에 발밑에선 빛기둥이 치솟는다.
성기사는 칼질만이 아니라 마법도 같이 사용했다.
다크포스! 다크월!
동시에 어둠의 공간을 만들어 어둠으로 구체들을 막아 내고 발밑에 벽을 세워 빛기둥이 치솟는 걸 막았다.
콰우우웅!
빛기둥이 벽을 부수고 무자비하게 쳐들어왔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크게 곡선을 그려 휘두른다.
괴물처럼 포효하듯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는 어둠의 검기가 매섭게 뻗어 나갔다.
서걱!
빛기둥을 반으로 갈라 내고 곧장 위를 쳐다본다.
이번에는 빛으로 된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빛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 접근해 왔다.
‘끝도 없군.’
역시 쉽지 않은 상대이다.
‘일일이 하나하나 대응했다간 시간을 오래 소모하게 될 거야.’
어떻게 해야 할까.
다가오는 공격에 대응하며 머릿속 깊숙이에 있는 심연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거대한 에너지는 거대한 근원의 힘을 끌어오는 법.’
히라이스 마도서에 적혀 있던 문구이다.
왜 이 순간에 그 문구만이 계속 아른 거릴까.
나는 그 문구를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그가 말했던 에너지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근원의 힘을 끌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뭐지?’
그 순간.
“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내부의 힘으로 근원의 힘을 끌어올 수 없다면 외부의 힘으로 근원의 힘을 끌어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부에 거대한 에너지를 끄집어내려면 그만큼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한다.
바깥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를 통제하기란 어렵다.
통제를 벗어난 마나는 대기에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방법은 있었다.
이내 눈을 뜬 순간, 체내에 있던 모든 마나를 한꺼번에 움직여 손끝으로 모았다.
모든 마나를 하나의 통로로 이동시키려고 하니 한정된 공간 때문에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크으!”
마나 통로가 강제로 넓어지자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바깥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를 통제할 수 없다면 한꺼번에 마나를 끄집어내는 방법뿐이었다.
보다 위로 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고오오오오-
“하아, 하아~.”
주위의 모든 것을 뒤덮는 구체를 보았다.
체내에 있던 모든 마나를 끄집어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크군.’
감탄하며 쳐다보는 그때.
‘뭐지……?’
마나 주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느낌이 든다.
‘설마…… 근원의 힘?’
이런 신비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근원의 힘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도 잠깐 비슷한 느낌이 든 적이 있지.’
비욘드북을 사용하고 나서 다크딥트리를 사용했을 때이다.
평소와는 달랐던 그때의 그 느낌을 떠올리며 나는 눈앞에 있는 근원의 힘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내 생각 속에 어둠을 떠올리자 마나 구체는 근원의 힘과 함께 어둠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 어둠의 구체를 성기사를 향해 날렸다.
무수한 공격이 날아들었지만 전부 구체 속으로 사라져 갔다.
구아아아앙-!
이윽고 성기사마저 집어삼킨 구체는 사라지지 않은 채 정면으로 쭉 뻗어 나갔다.
성기사가 있던 자리에는 바닥에 그려져 있던 책과 똑같이 생긴 것이 공중에 떠 있었다.
휘황찬란한 빛을 지닌 책을 보며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러나 금방 정신을 차리곤, 책 아니 빛의 서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