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92화
192화 대전쟁 (4)
점점 보는 높이가 달라지더니 이내 시야의 범위 마저 변했다.
수십 개의 눈을 달고 있는 마물이어서 그런지 사방에 무엇이 있는지 보였다.
하지만 시야가 확장되며 어지럼증을 동반했다.
수십 개의 눈을 달고 있는 마물로 변신을 해 본 적이 있다면 금세 적응했겠지만 역시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비단 시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쿵! 쿵!
‘젠장!’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평생 두 개의 팔과 다리로 살아왔던 내게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란 쉽지 않다.
처음부터 걸음마를 배워야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배움을 가질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스으읏- 스으읏-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을 켈니스가 아니었다.
먹잇감을 옭아매듯 사방팔방에 거미줄을 쳐 댔다.
몸집이 큰 만큼 실젖에서 뿜어낸 거미줄의 두께도 나무토막만 했다.
심지어 거미줄에서는 독액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등가교환!
나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잠깐만. 굳이 보호막을 만들 필요 없잖아.’
순간 녀석과 똑같은 몸으로 변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당장에 보호막을 없애자.
툭! 툭!
밑으로 떨어진 독액이 그대로 몸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단시간에 다량의 독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체내에 이상이 생기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세상에 자신이 생성한 독에 죽는 거미는 없지 않는가?
투둑! 투둑!
그리고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던 거미줄 또한 대충 앞다리를 뻗자 쉽사리 끊어져 버렸다.
만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손이 거미줄에 착 달라붙어 떨쳐 내기도 어려웠으리라.
쿵! 쿵!
켈니스가 가까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거미줄과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 더 이상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육탄전을 벌일 생각으로 재빠르게 두 개의 앞다리로 공격을 해 왔다.
발끝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피하긴 어려워!’
다크월!
비스듬이 서 있는 두 개의 검은 벽이 공격을 비껴 낸다.
하지만 다시금 공격이 파고들고 있었다.
쾅! 콰앙! 콰앙!
새로 세워진 방어벽이 무수히 부서진다.
‘우선 시야부터 장악하자.’
다크포스.
사방으로 어둠이 뻗어 나간다.
켈니스는 벗어날 틈도 없이 칠흑의 공간에 갇혀 버렸다.
대마물이라고 불리는 녀석일지라도 어둠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거미종은 시각이 아닌, 촉각과 후각에 의존하기에 안심하기는 일렀다.
“키이이이이이!”
시야를 잃은 켈니스가 촉각과 후각에 의존해 공격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확실하게 시야를 잃은 공격에는 허점이 많았다. 또한 이곳은 나의 영역이기 때문에 공격을 막아 내기도 수월했다.
주위의 어둠을 이용해서 켈니스를 서서히 옥죄어 나갔다.
하지만 녀석은 거미줄을 끊어 내듯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어둠을 간단히 쳐 내 버렸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
이런 걸로 녀석을 잡아낼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리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시선을 끌 필요가 있을 뿐이었다.
다크레인. 다크퍼드.
비와 바람을 만들어 폭풍을 형성했다.
쏴아아아-
땅 위에 비가 몰아치며 수많은 진동을 만들었다.
“케게게게게!!”
그러자 켈니스는 크게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행태를 보여 주었다.
‘초석은 깔았고.’
녀석을 죽이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내가 녀석으로 변하려고 했던 이유는 몸에 지니고 있는 독 때문이었다.
세포를 파괴하며 마나를 갉아먹고 마나 회복을 방해하는 그 독 말이다.
물론 현재 가진 독은 녀석이 가진 독과 똑같기 때문에 면역체계가 형성되어 있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하지만 독의 구조를 등가교환으로 약간만 바꾼다면?
어쩌면 그것으로 녀석의 세포를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특수한 무기로 공격하는 것 이외에 어떤 공격을 퍼붓든 회복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독의 구조를 바꿔 녀석의 세포를 파괴해도 죽지 않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 아닌가.
등가교환.
나는 곧바로 독주머니 안에 있는 독의 구조를 손보기 시작했다.
구조를 변형시키는 것이 말로 들어서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 바꾸기 가장 어려운 것이 고유 성질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의 마법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고유 성질을 바꾸려고 변형을 시도한 적이나 있나 떠올려 보면 단 한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은 없었다.
‘으음…….’
그래서인지 몰라도 독의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본래 기능이 상실한다면 어렵사리 바꿔도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으으음…… 이러다 끝이 없겠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을 바꾸었다.
독의 구조를 바꾸기보다 독에 무언가를 추가하기로.
나는 이전에 저층부에서 획득했던 B급 맹독수를 꺼내 병을 깨트리고 액체만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 그 액체를 독주머니 안으로 이동시켰다.
아무리 B급 맹독수가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어도 대마물이 가진 독을 이겨 낼 수는 없다.
‘결국에는 잡아먹히겠지.’
한데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대마물의 독이 B급 맹독수를 집어삼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켈니스가 가진 독과 똑같다고 볼 수 없었다.
잡아먹혔든지 잡아먹히지 않았든지 이미 다른 독인 것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약간 속이 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끓던 속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B급 맹독수를 체내로 흡수하였습니다.]
[독에 대한 일부 내성이 생깁니다.]
‘좋아. 성공했어.’
끝인 줄 알았던 메시지가 더 이어졌다.
[체내의 독과 B급 맹독수가 융화되었습니다.]
[새로운 맹독이 탄생합니다!]
[일정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시크릿 포이즌 스킬을 습득합니다.]
[시크릿 포이즌(Lv1)을 배웠습니다.]
‘어…….’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멍을 때리던 것도 잠시. 새로 만들어 낸 독이 정말로 켈니스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에에에에!!”
그 순간 켈니스가 입을 벌려 강력한 파동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구!
파동은 다크포스를 파훼할 뿐만 아니라 다크레인과 다크퍼드도 걷어 내 버렸다.
‘시전하고 있던 모든 마법을 없앴어.’
저런 능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써도 진작에 썼어야지 이제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시크릿 포이즌.
마법을 시전하자 독주머니에 있던 독액이 입 안에 침처럼 모이고 있었다.
최대한 모으고 모아.
“퉤!”
밖으로 배출했다.
파랗게 생긴 액체덩어리가 켈니스에게 날아들었다.
다크월. 화벽.
녀석이 벗어나지 못하게 사방에 벽을 세우고 그 안에 불꽃을 태웠다.
“크에에에에!”
궁지에 몰린 켈니스가 하늘로 뛰어올랐다.
다크핸드.
등가교환.
공중에 커다란 손이 생겨 켈니스를 밑으로 떨구었다.
마침 시크릿 포이즌이 궤적을 그리며 목표물에 당도한다.
치이이익-
무력화된 켈니스의 몸에 독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끼에에에!! 끼이이! 끼이익!!”
갑자기 켈니스가 자기 머리를 긁으며 몸을 뒹굴었다. 곧 다리에는 파랗게 물든 점들이 생겨났다.
‘됐어! 효과가 있다!’
하지만 다시 회복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더 많은 독이 필요해.’
방금 뱉은 독으로는 켈니스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시크릿 포이즌.
“퉤! 퉤! 퉤!”
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서 독을 뱉고 또 뱉었다.
“끼에에엑!”
쾅! 쿠아앙!
점점 켈니스의 행동이 과격해지고 있었다.
제대로 효과가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켈니스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크릿 포이즌을 사용할 때마다 마나가 굵직하게 빠져나갔다.
어느덧 가지고 있는 마나의 절반이 소모되었다.
그러나 공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멈추는 순간 여태 소모한 마나가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
“키에에에엑-!”
쿵!
살기 위해 발악을 하던 켈니스는 결국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어어어…….”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하지만 이미 온몸에는 파란 점들로 가득 찼다.
형태 변화.
나는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녀석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듯 나지막이 말했다.
“염옥.”
시뻘건 불꽃 철창이 존재하는 정사각형 큐브가 켈니스를 감싸더니 이내 부피를 줄여가며 녀석을 압박했다.
“끼이이…….”
콰득! 콰득!!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켈니스는 하나하나씩 부서져 갔다.
“끼에에……!”
끝끝내 큐브에 짓눌려 소멸을 맞이한다.
“후아~.”
마무리를 짓자마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켈니스가 다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위대한 업적을 세웁니다!]
[등반자들 중 최초로 대적자의 창도 없이 대마물을 처치하였습니다!]
[업적에 대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대적자의 귀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붉은 악어 눈동자가 박힌 구슬 형태의 귀걸이가 손에 쥐어졌다.
[상대하기 어려운 대마물 켈니스를 처치한 소식이 모든 악마들에게 전해집니다.]
[악마들이 당신의 존재를 두려워합니다.]
[악마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자라는 칭호가 주어집니다!]
뜻하게 않게 칭호까지 얻어 냈다.
처음 보는 아이템과 칭호를 받았기에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아직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처음과 끝을 잇는 자가 당신에게 관심을 드러냅니다.]
지금쯤 처음과 끝을 잇는 자는 내게 강한 적개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매개체를 강제로 끊어 버렸으니 이미 세워 둔 계획 또한 틀어져 버릴 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를 비웃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었다.’
이제 왕성 곳곳에 소환되어 있는 마물들을 정리하고 나면 끝이었다.
물론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교단 내에 악령 계약자들을 전부 처단하고 왕성에 소환된 대마물과 마물들을 처리하는데 끝이라면 대전쟁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격화되기 전에 더 준비를 해야 해.’
“꺄아아아!”
“아아악! 살려 줘!”
저 멀리 도움이 필요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발을 떼려는 그 순간.
콰르르릉!
하늘에 있는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짙은 먹구름에서 천둥의 빛이 연속적으로 번쩍인다.
콰가강!!
이내 저 멀리서 어마 무시한 번개들이 내려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나는 자세히 상황을 보기 위해 타엘의 날개로 하늘을 날아올랐다.
콰가가가가!! 차아아앙-!
또다시 내리친 번개는 왕성을 보호하고 있던 결계를 깨부수었다.
그리고 동서남북 방향으로 붉은 기둥이 치솟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분명 처음과 끝을 잇는 자의 매개체는 제거됐을 텐데.
[에펠 왕국을 보호하던 결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에펠 왕국에 악마 군단이 침습하기 시작합니다!]
뒤늦게 벌어져야 할 사태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