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87화
187화 숙청 (2)
스릉!
검을 뽑는 소리에 사제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감히 신성한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다니!”
중립을 유지하던 라자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 무슨 연유로 검을 뽑아 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에페르 님께 선택을 받은 분이시라고 해도 교단의 율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부디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유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우측에 앉아 있는 사제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혹여 목을 베일까 고개를 쳐든 사제는 원탁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앉아.”
유희는 싸늘한 어조로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제가 꿈쩍도 하지 않자, 유희는 그의 목에 상처를 냈다.
그의 목을 따라 피가 흘렀다.
“……!?”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다들 너무 놀라 말문을 잇지 못했다.
마지못해 라자가 일어서서 경고한다.
“성녀님, 마지막입니다.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성녀, 성녀……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이름으로 불러 주면 좋겠네요. 솔직하게 말해서 부담스럽거든요.”
“혹시 그런 이유 때문에 검을 든 것이라면…….”
“어떤 미친년이 성녀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고 검을 들겠어요? 그저 저는 교회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을 잡으려는 것뿐입니다.”
“쥐새끼……?”
유희는 검을 들지 않은 손에 신성력을 끌어모아 정면으로 방출했다.
강렬한 빛이 원탁에 앉아 있는 이들을 전부 뒤덮었다.
[선택받은 자의 성복 ‘악령 표출’ 효과가 발동합니다!]
그러자 숨어 있던 악령들이 외부로 모습을 드러냈다.
홀리 퍼지.
여섯 개의 빛의 섬광이 일었다.
정확하게 악령들을 끼고 있는 대상들에게 빛점이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른 채 빛은 점차 온몸으로 번졌다.
“으, 으으! 으아아아!”
그어어어!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악령의 울부짖음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도 침묵하는 이가 있었다.
“크흐흐, 크하하하!”
그는 넋이 나간 듯이 웃더니 이내 흉측한 살기를 뿜어냈다.
동시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악의 기운이 빛을 밀어내고 있었다.
“역시 성녀는 성녀인가.”
그는 오른팔에 어둠을 둘러 거대한 괴물손을 만들어 냈다.
유희가 자세를 잡고 먼저 공격을 취하려는 순간.
스아아앙-!
다른 누군가가 검격이 날렸다.
“크어억…….”
털썩!
단숨에 그의 목이 달아난 것도 모자라 괴물손이 떨어져 나갔다.
우어어!
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악령이 날뛰고 있었다.
홀리 퍼지.
유희는 아까 전에 사용했던 기술로 악령을 제거하고 검격이 날아들었던 곳을 쳐다봤다.
이곳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검을 차고 있는 라오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라오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라오그는 유희에게 가장 공격적으로 나왔던 사내이지만. 되레 그에게는 악령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악령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성복의 효과로 전부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이 자리에 또 다른 악령 계약자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주변을 살피자, 사제들은 크게 놀란 채 당황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악령의 등장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한바탕 피바람까지 불었으니 감정을 추스리기 어려우리라.
무엇보다 동료가 악령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충격일 것이다.
‘오히려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한 거야.’
마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몇몇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저들도 악령 계약자들인 것일까?
유희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주름살이 깊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카론 추기경이 긴 침묵을 깼다.
“가장 신성시돼야 할 곳에 악령들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군. 베일, 페레, 오클리셔, 파넬, 가니라, 하일 경까지.”
그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대체 이제는 누굴 믿어야 할련지.”
“믿지 마세요.”
카론은 고개를 들어 방금 전에 들려온 목소리를 쫓았다.
그곳에는 유희가 서 있었다.
“누구든지 악령과 계약할 수 있습니다. 평생 올바르게 살던 사람도 한순간에 탐욕 때문에 돌아설 수 있죠.”
“그럼, 아무도 믿지 말고 평생 의심만 하며 살란 말인가?”
“아뇨. 남을 믿기 전에 자신을 믿으란 소리이죠. 그리고 당신께는 에페르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으음…….”
유희는 에페르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또한 신봉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페르를 언급한 이유는 성녀로서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전히 성녀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성녀의 신분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에게 새로 생긴 신분은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는 만큼 큰 메리트가 있었다.
‘나는 나인 채로 성녀가 할 법한 말과 행동을 하면 되는 거야.’
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역할놀이.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다.
유희는 더욱 뚜렷해진 눈빛으로 원탁에 앉아 있는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여전히 악령 계약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정체를 밝히려고 하지는 않으리라.
그리했다가는 제 목숨을 건사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유희는 검을 집어넣으며 사제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검을 휘두른 것,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령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악령 계약자들을 찾아내 주어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라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유희는 라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듯 그녀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고는 해맑게 미소를 짓는다.
“감사하다뇨. 그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아닙니다. 설사 악령을 마주했다고 해도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우선, 본론을 얘기하기에 앞서 주변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군요, 라오그 경.”
부름을 받은 라오그는 곧 휘하에 있는 성기사들을 호출해 안에 있는 시신들을 수거했다.
그리고 몇몇 대주교들이 나서서 피의 흔적을 없앴다.
뒷수습을 끝낸 후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솔직하게 말해서 기분은 좋지 않네요. 성녀라고 불러놓고 신분을 증명하라고 하지 않나. 내부에 악령 계약자들이 숨어들어 있질 않나. 에페르 님을 생각해서 참고 있긴 하지만 이젠 제 인내심도 바닥이 드러날 것 같네요.”
라자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걸 참아가면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묻는 겁니다.”
라자가 라오그를 힐끗 쳐다봤다.
라오그는 일부러 시선을 회피한다.
라자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본론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저희가 성녀님을 부른 이유는 교단에서 직접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암살을 당하시고, 밖에서는 악마들이 더욱 들끓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치안까지 불안정해져 있죠. 백성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협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성녀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왜 제 눈에는 다르게 보이죠?”
“예?”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모두가 모여 논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일부만 모였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리고 라자 님은 주교라고 하셨죠? 보통은 직급이 높은 사람이 대화를 이끌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곳에 대주교와 추기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자 님이 모든 대화를 주도하셨죠. 신분을 속인 게 아니라면 일종의 배후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라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성녀라고 해서 예를 취해 줬더니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기만을 당한 기억은 있어도 딱히 예의를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째려봤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드르륵!
라오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카를로가 앞을 막아섰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
“카를로 씨. 전 괜찮아요.”
유희가 카를로를 뒤로 물렸다.
“갑자기 무슨 볼 일이죠? 설마 아직도 제가 성녀가 아니라고 의심되나요?”
두 눈을 마주친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뜬금 무릎을 꿇었다.
쿵!
바닥을 찧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라오그 경!”
그의 행동에 당황한 사제들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오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늦긴 했지만. 아까 전에 제가 저질렀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유희는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대체 왜?’
그녀의 머릿속으론 라오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남자야. 당최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가 절묘한 타이밍에 나선 덕분에 라자에게 물을 먹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라오그라고 했나요? 이만 일어나세요.”
라오그는 용서를 해 주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하아~ 그대가 했던 일은 용서할 테니 이만 일어나요.”
그제야 머리를 쳐든 라오그는 반만 무릎을 꿇고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에페르 성단의 부기사단장 라오그라고 합니다!”
그의 행동을 보곤 어느새 라자는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라오그 경,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그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며 자신에게 소리 친 라자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을 했을 뿐이지.”
라오그가 주위를 돌아본다.
“에페르 님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로 뜻을 모았던 것인데. 아무래도 내가 진흙탕에 들어와 있었던 것 같군.”
“뭣이!?”
“라오그 경! 할 말 안 할 말 구분하지 못하나!?”
“구분? 구분은 그대들이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악령 계약자들이 여섯이나 나왔다. 어쩌면 여기에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여기에 더 남아 있으라고? 차라리 죽으러 들어가라고 하지 그래?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라자 주교.”
“…….”
“교황의 수행원이 대주교를 휘어잡은 것도 모자라, 추기경까지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모두 저 여자의 말을 따라. 예전부터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라오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툭.
원탁 위에는 웬 표식줄이 놓여졌다.
“그걸……!”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난 이쯤에서 빠지겠다.”
그는 표식줄을 두고 유희에게 돌아와 예의있게 말했다.
“성녀님, 이만 가시지요.”
처음에 차디찬 반응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를 말이죠?”
“정식으로 교단 사람들을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은 라자가 주최한 비공식 모임일 뿐이다.
원래 성녀를 자기들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자리였지만 갑작스레 벌어진 해프닝으로 인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그와의 첫만남은 그다지 좋다고 볼 수 없지만 유희는 이곳에 남아있는 것보단 같이 나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결국 유희는 라오그를 따라나섰다.
“라오그 경! 지금 가면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그것은 성녀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라자가 마지막 경고를 해 왔다.
하지만 둘은 그녀의 말을 귓등도 듣지 않은 채 방을 벗어났다.
“안 돼에!”
쾅!
라자가 짜증스럽게 원탁을 두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러자 카론이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그동안 자네에게 목줄을 붙잡혀 따라 주었네만.”
카론마저 원탁 위에 표식줄을 내려놓자, 라자가 눈에 불을 키고 노려봤다.
“예하께서 떠나면 예하의 죄가 전부 세상에 까발려질 것입니다.”
“상관없네.”
“정말로 상관없으십니까?”
“죄가 까발려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 뭔지 아나? 에페르 님께 천벌을 받는 것이야. 한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령 계약자들과 함께 뜻을 모았다는 것이 부끄럽군. 이런 마음을 가지고 더는 이곳에 있을 수는 없어.”
그러며 카론이 방을 박차고 나갔다.
방 안은 싸늘하리 만큼 고요했다.
이윽고.
스아아아-
라자의 등에서 거대한 악령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 또한 악령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 하나가 라자에게 질문했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성녀의 힘이 온전하지 않아 저희는 발각되지 않았지만. 언제 우리들을 색출해낼지도 모르는 일이죠.”
이를 갈던 라자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어쩌긴. 포섭하는데 실패했으니 죽여야지. 계획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여자야.”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쥐새끼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준비해야지.”
곧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 * *
바깥에서 들려온 환호성 소리에 깊은 잠을 자던 나는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체 뭔데 이리 시끄러워.”
창문 밖을 내다보자 기나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녀라는 단어가 유독 귀에 들어왔다.
“누군지 알려진 건가.”
유희가 바쁠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생 좀 하시라고.”
이내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어젯일들을 떠올렸다
아주 잠시지만, 신좌와 맞붙어서인지 어제 일이 오늘 일처럼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었다.
“아. 맞다!”
새카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곧장 아공간을 열었다.
내가 꺼내든 것은 히라이스의 마도서.
어젯밤, 대폭 마나량이 늘며 드디어 마도서를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길래 이리도 조건이 까다로운 것일까?
나는 그 궁금함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책장을 펼쳤다.